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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를 뛰어넘는 순종

누가복음 류공석 목사............... 조회 수 1006 추천 수 0 2015.08.14 16:3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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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눅1:26-38 
설교자 : 류공석 목사 
참고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이해를 뛰어넘는 순종
2010년 11월 27일 텔아비브 욥바교회
본문: 누가복음 1:26-38

   이번 주부터 대림절이 시작된다. 대림절은 다른 말로는 강림절, 대강절이라도 부른다. 예전에는 대강절이라고 많이 불렀는데, 어감이 그래서인지 대림절이란 말을 더 쓴다. 대림절은 말 그대로 주님의 강림, 성탄을 기다리는 절기이다.

  요즘 보면 성탄절의 날짜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12월 25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로 이스라엘에서도 보면 동방교회나 아르메니안교회를 보면 1월 초에 지킨다. 로마 카톨릭과 우리 개신교는 12월 25일에 지키고 동방교회는 1월 6일, 아르메니아교회는 1월 18일을 성탄절로 지킨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실제 예수님의 탄생일은 이때가 아니라 다른 때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탄생일을 12월 25일로 잡은 것은 이교도들에게서 유래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것들을 안상홍 증인회같은 이단들이 교회를 공격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초대교회시대 때는 예수님의 생일에 대해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초대교회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시라는 사실이었다. 그날이 언제냐는 문제보다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성육신하신 예수님 자체를 그 주안점을 삼았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예수님의 생일이 언제인가 하는 것이 그리 중요한가? 그 날이 12월 25일인지 1월 6일인지 아니면 다른 날인지 하는 것이 그리 중요한가? 그것 때문에 성탄의 기쁨과 감사가 달라지는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날짜가 아니라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감사와 그로 인한 기쁨이다.

  부활절도 마찬가지다. 어떤 이들은 부활절을 영어로 ‘The resurrection’이라고 하지 않고 ‘Easter’라고 하는 것을 문제 삼는다. 이교도들의 태양신 숭배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역사적인 자료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 이름을 바꿔야한다고 말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 보다 중요한 것은 부활의 역사적 사건과 그 의미이다. 이름에 대한 논쟁으로 인해 그 본질이 흐트러져서는 안 된다.

  본질은 이름이나 날짜가 아니라 그 의미이다. 그 의미를 잃어버린 이름논쟁이나 날짜 논쟁은 무의미하다. 나는 성탄절이 12월 25일인 것이 오히려 의미가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유대교의 절기인 하누카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하누카는 요한복음 10장에 수전절로 번역된 그 절기이다.

  이 하누카는 유대 달력상으로 보면 키슬레브월 כ"ה이다. 키슬레브월은 11월에서 12월에 걸쳐있다. כ"ה는 25일이다. 즉 12월 25일이다. 성탄절과 같다. 다만 유대력은 음력이라서 매년 바뀐다. 만일 성탄절을 제대로 지키자고 한다면 나는 유대력에 따라 하누카 때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부활절과 성령강림절이 그렇지 않은가? 부활절은 유월절이 끝나고 다음 날인데, 음력에 따라 매년 달라지며 대개 유대교의 유월절과 비슷하다.

  그리고 그 의미에 있어서 성탄절은 하누카와 비슷하다. 먼저 하누카에 대해 간략하게 보자. 우리가 아는 것처럼 이스라엘의 역사는 남유다가 바벨론에 멸망당한 후에 페르시아시대를 거쳐 알렌산더에 의해 세워진 헬레니즘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알렉산더 사후에 그의 제국은 세 개로 나누어지게 되는데, 그 가운데서 이스라엘과 관련된 두 왕조가 바로 셀류쿠스 왕조와 프톨레미 왕조이다.

  처음에는 이집트에 기반을 둔 프톨레미 왕조가 이스라엘 지역을 통치했으나 후에는 시리아에 기반을 둔 셀류쿠스 왕조가 다스리게 된다. 하누카의 역사적인 배경은 주전 2세기 셀류쿠스 왕조이다. 이때는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치세 때였다. 에피파네스는 유대인들을 헬라화하는 정책을 시행했는데, 이 정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헬라화된 유대인들(헬라파 유대인)과 유대교의 전통을 지키려는 보수적인 유대인들(민족주의 유대인)간의 대립과 갈등이 일어나는데, 이로 인해서 야기된 사건이 바로 성전을 더럽힌 사건이다.

  에피파네스가 민족주의 유대인들에게 최후의 조치에 해당하는 칙령들을 내린다. 그는 자신의 헬라화 정책을 거부하며 저항하는 유대인들의 비타협적인 태도가 그들의 종교에 있다고 판단을 한 것이다. 그래서 자기 아버지가 유대인들에게 주었던 특혜들을 폐지하고 사실상 유대교 관습을 금하는 칙령을 공포하게 된다.

  구약 외경 중에 하나인 마카비 1서 1:41부터와 2서 6장에 따르면 에피파네스는 유대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칙령들을 내렸다. 정기적인 희생제사는 물론이고 안식일과 전통적인 절기를 지키는 것도 금지했고, 율법의 사본들을 파기하라고 명령했고, 어린이들의 할례를 금지했고, 이런 것들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지키지 않으면 사형에 처해졌다. 이교 제단들이 유대 땅 곳곳에 세워졌고, 그 제단들에서 부정한 짐승들이 제물로 바쳐졌다. 유대인들은 돼지고기를 먹도록 강요당했고, 먹지 않으면 사형에 처했다고 한다.

  결국 이러한 정책이 그 끝을 보게 되는데, 바로 주전 167년 12월에 제우스 신의 제사가 예루살렘 성전에 도입되게 된 것이다. 제우스를 위한 제단과 신상이 성전 안에 세워졌고, 그 제단 위에서 돼지고기가 제물로 바쳐졌다. 이것이 바로 다니엘서 11:31에서 말하고 있는 "멸망하게 하는 가증한 것 "이었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이러한 조치들을 통해 유대인들을 굴복시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것은 잘못된 판단이었다. 곧바로 온 유대는 무장 봉기로 들끓게 된다. 그중 가장 주도적인 것이 바로 유다 마카비 전쟁이다.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유다 마카비는 예루살렘에 개선하여 더렵혀진 성전의 정화작업을 착수하게 된다. 제우스 제의에 씌였던 기구들은 모두 철거되었고, 더렵혀진 제단도 부수어 버렸고, 그 자리에 새로운 제단이 세워졌다.

  성전이 모독된 날로부터 꼭 3년이 되는 주전 164년 12월, 정확하게는 유대력으로 12월에 해당하는 키슬레브 월 כ"ה 일(25일)에 큰 기쁨의 축제 가운데 성전은 다시 봉헌되었습니다. 그 절기가 바로 하누카다. 하누카는 성전을 재봉헌 했다는 의미의 ‘봉헌’의 의미로 하누카를 봉헌절이라고도 하고, 성전을 깨끗하게 하여 재봉헌했다는 의미로 우리 성경에서는 ‘수전절’이라고 번역을 했다.

  하누카 때는 가지가 아홉 개인 촛대를 쓴다. 가지가 일곱 개인 촛대는 메노라라고 하고, 하누카 때 쓰는 아홉 개의 촛대는 하누키야라고 부른다. 왜 아홉 개일까? 그 이유는 전쟁이 끝나고 성전을 다시 깨끗하게 해야 하는데, 전쟁 중이고 이미 에피타네스에 의해 성전 제사가 중지 되었기에 메노라를 밝힐 기름이 없었다. 메노라는 깨끗한 올리브유를 쓰는데, 이 기름이 하루치밖에 없었단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하루치 분량의 기름이 팔일 동안 탄 것이다. 그래서 하누카 때는 아홉 개의 가지가 있는 촛대를 쓰고 그것을 하누키야라고 부르고 팔일동안 이 절기를 지킨다.

  여기서 왜 촛대의 가지 수가 여덟이 아니고 아홉이냐고 질문할 수 있는데, 이는 하루치의 기름으로 팔일 동안 성전을 밝혔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하누키야는 중심이 되는 촛대가 있다. 제일 먼저 불을 붙이는데, 대개 가운데 있고 다른 촛대들보다 길다. 이 중심에 있는 긴 촛대를 샴마쉬라고 부르는데, 종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 촛대에 첫날 불을 붙이고 다음날부터는 이 샴마쉬에서 불을 붙여 하루에 하나씩 불을 옮긴다. 그래서 마지막 날에는 모든 촛대가 불을 밝히게 된다. 이렇게 불을 밝히기 때문에 하누카를 빛의 절기, 광명절이라고도 부른다.

  여기서 우리는 성탄절의 의미가 하누카와 얼마나 비슷한지를 알 수 있다. 하누카는 성전이 성전이 아니었던 시기를 회복한 절기였다.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이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씀하신다.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계시는 그곳이 바로 성전이다. 예수님으로 인해 베들레헴 마굿간은 성전이었다. 우리 역시 흠이 많은 죄인이나 예수님을 모시고 있기에 우리는 성전이다.

  하누카 때 쓰는 촛대인 하누키야의 중심되는 촛대가 종을 뜻하는 샴마쉬라고 했는데, 예수 그리스도, 메시아는 고난받는 종이다. 이사야서에 예언되어 있다. 그리고 그 중심되는 촛대를 통해 빛이 확산이 되는데, 이는 세상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사람들에게 빛이 비추어지는 것과 같다.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를 밝히는 것이다. 그래서 성탄절 역시 빛의 절기, 광명절이다.

  어떤가? 유대력으로 따져도 같고, 그 의미도 같다. 이스라엘에서 오랫동안 공부를 하신 학자 중에 한 분은 성탄절이 12월 1일쯤 된다고 주장하는데, 이때는 바로 유대력 하누카에 해당한다. 상당히 설득력 있는 주장이다.

  내가 지금 성탄절의 날짜를 바꿔야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의미라는 것이다. 우리가 이스라엘에 살고 있으니까 하누카와 성탄절의 의미를 비교해서 설명한 것이다.

  성탄절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대림절이 오늘부터 시작하는데, 이 기간 동안 성탄의 의미에 대해 함께 나누려 한다. 성탄은 그 자체가 기적이다. 마치 하누카가 기적인 것처럼 말이다. 유대인들의 힘으로 나라를 회복한 것 자체가 기적이고, 하루치 기름으로 팔일 동안 성전을 밝혔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다. 그러나 성탄은 그러한 기적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기적이 일어났다. 그것이 무엇인가? 동정녀 탄생이다. 처녀 마리아를 통해 성령으로 예수님이 잉태되어 태어나셨다는 사실이다.

  34절에 보면 마리아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하게 될 것이라는 천사 가브리엘의 말, 즉 수태고지를 듣고 반문을 한다.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마리아는 행실이 바르지 못한 여자가 아니었다. 남자를 알지 못하는, 아직 경험이 없는 말 그대로 동정녀, 처녀였다. 그런 처녀가 남자가 아닌 성령으로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다는 사실은 기적 중에 기적이다. 그것도 하나님의 아들을 말이다.

  이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못 믿겠다는 반응을 보인다. 어찌 보면 믿지 못하는 것이 정상이고 상식이고 경험적으로 옳다. 어떻게 처녀가 남자와의 관계없이 임신해서 아들을 낳을 수 있겠는가? 쉽게 말하면 처녀생식, 즉 정자와의 결합 없이 난자만으로의 분열로 출산을 했다는 것인데, 이것은 과학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것은 예수를 신성시해서 그렇게 꾸며낸 이야기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아는가? 처녀생식이 과학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처녀생식은 그동안 과학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으로 간주되었는데, 최근 배아복제로 줄기세포를 만드는 과정에서 처녀생식의 과정이 생긴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는 몇 해 전에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황우석 교수의 줄기세포연구 진위와 관련된 조사에서 밝혀진 사실이다. 그때 서울대 조사팀이 황우석 교수의 줄기세포연구 진위에 관련하여 발표를 한 바 있는데, 배아복제로 줄기세포를 만드는 과정에서 처녀생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처녀생식이 과학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이 밝혀진 셈이다.

  생각해보라. 처녀생식이 과학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했으나 이제는 과학적으로 가능함이 밝혀졌다. 피조물인 사람의 능력으로도 처녀생식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인데, 창조주 하나님께서 왜 이것을 못하시겠는가? 창조주 하나님이 사람보다 못한가? 만일 그렇다고 주장하면 그것이 비상식이고 비논리적이고 비과학적이다. 말씀으로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인류 구원을 위해 당신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기 위해 처녀탄생이라는 방법을 택하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상식적이고 과학적인 것이다.

  예수께서 처녀 마리아의 몸을 통해 성령으로 잉태되어 태어나셨음을 믿는가? 이것을 믿는 것은 비상식이요 비과학이요 비논리가 아니다. 믿는 것이 상식이고 과학이고 논리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시는데, 죄인인 남자와의 결합을 통해 오실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그냥 사람이고 죄인일 뿐이다. 죄인이 죄인을 구원할 수 없다. 오직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만이 죄인을 구원하실 수 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택하신 방법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처녀인 몸에서 잉태하게 하여 태어나는 방법이었다. 그것이 바로 동정녀 탄생이다. 이것은 억지같은 교리가 아니다. 무슨 탄생설화나 신화가 아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류 구원을 위해 택하신 상식적인 방법이며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이다.

  우리에게는 기적이지만 하나님께는 상식이다. 우리에게는 믿지 못할 일이지만 하나님에게는 실제의 사건이다. 하나님을 믿는가? 그렇다면 그분의 상식적인 역사를 믿으라. 당신의 그 작은 머리로 이해하는 상식에 머물지 말고 그 이해를 뛰어넘고, 상식을 뛰어넘고, 논리를 뛰어넘고, 경험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역사를 믿으라. 이 믿음이 당신을 구원의 길로 이끄는 것이다.

  오늘 본문 앞에 보면 또 하나의 수태고지 이야기가 있다. 누구의 이야기인가? 세례 요한의 수태고지 이야기이다. 26절에 보면 ‘여섯째 달에’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천사 가브리엘이 여섯달 전에 늙은 제사장 사가랴에게 나타나 아들을 낳게 될 것임을 알려줌을 뜻하는 것이다. 그 아들은 세례 요한으로 메시아의 길을 예비할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때 사가랴는 자신도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기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말을 한다. 천사 가브리엘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의 싸인이자 징계가 주어지는 데, 그것은 세례 요한이 태어날 때까지 말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나서 이어지는 또 하나의 수태고지 이야기가 바로 본문이다. 천사 가브리엘이 이번에는 갈릴리 나사렛에 사는 처녀 마리아에게 처녀의 몸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린다. 이에 대해 마리아는 자신이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임을 말하지만 그는 천사 가브리엘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여기서 생각해보라. 누가 더 받아들이기 어려웠을까? 나이가 늙을 때까지 자식이 없었던 늙은 제사장 사가랴일까 처녀 마리아일까? 제사장 사가랴와 그의 아내는 나이가 늙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자식이 없었다는 말은 생리적으로 보면 임신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그의 아내가 이미 폐경기에 들어선지 오래고, 자녀를 낳았다면 모를까 낳지도 못한 상태이기 때문에 더욱 불가능한 것이다. 늙은 제사장 사가랴가 천사 가브리엘의 말을 믿지 못한 것은 한편으로는 당연하다. 상식적이고 논리적이고 과학적이다. 그래서 그는 그 말을 믿지 못했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마리아는 어떠했는가? 그냥 보면 마리아가 임신하는 것이 더 쉽다. 젊으니까. 그러나 문제는 그녀가 요셉과 약혼을 한 상태라는 것이었다. 유대 풍습에 따르면 결혼의 서약은 약혼식에서 행해졌다. 신부가 신랑과 정식으로 육체적 결합을 이루는 결혼 전까지 대개 1년 정도의 약혼 기간을 두는 것이 관습이었다. 이 약혼 기간에 마리아가 임신을 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그것도 약혼자 요셉에게서 아닌 성령으로 말이다.

  이 사실을 사람들이 믿어줄까? 약혼자 요셉이 믿어줄까? 가족이 믿어줄까? 사람들이 믿어줄까? 우리는 요셉이 마리아를 받아준 사실에 대해 성경을 통해 알고 있지만 그때 마리아에게 있어서는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게다가 당시 유대 풍습에 따르면 처녀가 임신할 경우 그녀는 돌로 쳐 죽여야 했다(신 22:23-24). 처녀의 몸으로 약혼한 상태에서 약혼자가 아닌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그 여자는 파혼 당할 뿐만 아니라 목숨까지도 잃게 된다. 이것이 천사 가브리엘의 수태고지를 듣고 있던 마리아에 처한 상황이었다.

  자, 누가 더 수태고지를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을까? 당연히 마리아다. 늙은 제사장 사가랴는 비록 자신과 아내가 가임기가 지난 상태지만 천사 가브리엘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만했다. 비록 상식에서 벗어나고 논리에 어긋나지만 임신을 했다고 해서 이혼당하거나 목숨을 잃을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좋은 일이었다. 평생 얼마나 자녀를 갖기를 원했겠는가?

  그러나 마리아는 달랐다. 처녀의 몸이고 약혼한 상태였다.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파혼당하고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일이었다. 상식에 어긋나고 논리에도 맞지 않지만 무엇보다 생존이 걸린 문제였다. 마리아에게는 너무나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실제로는 어떠했는가? 누가 수태고지를 받아들였는가? 사가랴가 아닌 마리아였다. 사가랴는 자신의 상식과 논리와 경험에 맞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해서 받아들이지 못했고, 반면 마리아는 자신의 상식과 논리와 경험에 맞지 않을뿐더러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는 일이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기에 받아들일 수 있었다.

  마리아 역시 처음에는 내가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냐고 반문하지만 천사 가브리엘이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었지만 아들을 배었는데, 이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된 것이라고 하면서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고 말하자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여기서 차이는 믿음이다. 사가랴는 제사장이라는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을 믿지 못했고, 마리아는 어리고 성경에 대해 잘 알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을 믿었다. 그 믿음의 차이가 이러한 순종의 차이로 나타난 것이다.

  믿음은 순종이다. 믿음의 증거는 순종이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는 증거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직분에서? 신앙연수에서? 말씀을 많이 아는데서?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순종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순종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믿는 증거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의 뜻임을 앎에도 받아들이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다? 그것은 불순종의 차원이 아니라 불신앙의 문제이다. 입으로는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믿지 않는 것이다.

  사무엘상 15:22-23을 보자.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선지자 사무엘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불순종하기를 밥 먹듯이 하는 사울왕에게 한 말이다. 이는 곧 하나님의 진노의 말씀이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번제인가? 숫양의 기름인가? 요즘 말로 하면 예배이며 헌금이다. 이것을 무시하거나 거절하시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순종이 없는 예배,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임이 없는 헌금은 싫으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신 말씀이 거역하는 것, 즉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거역하는 것은 점을 치는 죄와 같고,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완고하게 하여 받아들이지 않고 거역하는 것은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다고 선포하신다.

  마음이 완고하다? 무슨 뜻인가? 고집부리는 것, 마음을 닫는 것, 거절하는 것인가? 여기서 쓰인 단어가 아벤(아웬, און)이라는 단어다. 이 단어의 원뜻은 ‘의도적으로 무엇으로부터 구별해낸다’는 뜻이다. 즉 내 앞에 하나님의 뜻, 말씀이 있고 동시에 내가 원하는 것, 내 상황, 내 상식, 내 논리, 내 경험이 있다는 것이다. 그 둘 중에서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뜻은 밀어내고 내가 원하는 것, 내 상황에 맞고 내 상식에 맞고 내 논리에 맞고 내 경험에 맞는 것들을 의도적으로 구별해내어 택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마음이 완고하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내 상황, 내 상식, 내 경험을 놓고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밀쳐내고 내 상황, 내 상식, 내 논리, 내 경험을 따르는 것이 완고함이다. 하나님의 뜻과 내 이익, 내 계산, 내게 유익이 되고 이롭다고 생각하는 것을 놓고 하나님의 뜻은 적당히 무시하고 내 이익, 내 계산, 내게 유익되는 것을 따르는 것이 완고함이다. 우리가 너무나 쉽게 하는 이 일들이 바로 완고함이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얼마나 많이 이러는가? 하나님의 말씀, 모르는 것 아니다. 잘 모를 수는 있으나 아주 모르는 것은 아니다. 지금 나에게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 모르는 것 아니다. 다는 몰라도 아주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어떤가? 하나님의 말씀을 택하는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가?

  그렇지 않단 말이다. 자꾸만 하나님의 말씀을 밀쳐낸다. 하나님의 뜻을 외면한다. 내 상황으로 밀쳐내고 내 상식으로 외면하고 내 경험으로 거절하고 내 유익으로 타협한다. 이것이 바로 완고함이다. 이 완고함이 하나님 앞에서는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다는 것이다.

  꼭 우상 앞에서 절을 해야만 우상숭배의 죄가 아니란 말이다. 바로 이런 완고함이 우상숭배와 똑같은 죄라는 것이다. 무서운 일이다. 바로 이러한 죄를 우리가 너무나 쉽게 행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 시간 우리에게 회개의 영이 임하기를 소원한다. 자신의 완고함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순결한 영이 임하기를 소원한다. 그래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이러한 완고함을 가지고 어찌 믿는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새롭게 결단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과 내 유익 사이에서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말씀을 밀어내면서 내 유익을 택하지 말자.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의 뜻과 내 상황, 내 상식, 내 논리, 내 경험 사이에서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고 거절하거나 타협하고 합리화하지 말자.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과 뜻 앞에서 완고한 마음을 갖지 말자.

  우리가 의도적으로 해야 할 구별은 내 유익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가 의도적으로 취해야할 선택은 내 상황, 내 상식, 내 논리, 내 경험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말씀이다. 정말 그렇게 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축복한다.

  교회에서도 상식이 통해야 한다. 어떨 때? 어떤 일들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재정운용에서, 투명성에 있어서, 그리고 윤리적인 면에서 상식이 통해야 한다. 그러나 교회는 상식을 뛰어넘을 수 있어야 한다. 어떨 때?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자 할 때는 상식을 뛰어넘어야 한다.

  이것이 되어야 하는데 이것이 거꾸로 되니까 문제 아닌가? 상식이 통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상식을 무시하고, 반대로 상식을 뛰어넘어야할 상황에서는 인간적인 상식과 계산으로 인해 하나님의 뜻을 막고 있는 것 아닌가? 봉은사 땅 밟기 하고 동영상 찍어 올리는 것은 상식이 아니다. 불상 목 자르는 것은 상식이 아니다. 그런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 일, 사람을 살리는 일, 사람을 구하고 돕고 사랑하는 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는 상식을 뛰어넘고 상황을 뛰어넘을 수 있어야 한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윤리적인 면에서, 일을 해나가는 과정에서는 상식이 통해야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있어서는 상식을 뛰어넘어야 한다. 상식이 통하는 교회, 상식이 통하는 그리스도인, 그러면서 상식을 뛰어넘는 교회,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순종의 결단과 선택을 통해 하나님의 평안이 임하는 것이다. 28절에서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이렇게 인사를 한다.
  “그에게 들어가 이르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여기서 천사 가브리엘이 인사한 말이 ‘평안할지어다’이다. 이는 히브리어로 하면 ‘שלום לך’이다. ‘당신에게 평화를’이란 뜻이다. 지금까지도 유대인들이 일반적으로 쓰는 인사말이다. 그런데 이 샬롬이 진정으로 마리아에게 임한 때는 언제인가? 38절이다.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순종을 통해 진정한 샬롬이 임한 것이다. 순종 없이 어찌 샬롬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구별하고 하나님의 뜻을 밀어내고 어찌 평안이 임할 수 있겠는가? 만약 그럼에도 평안하다면 그건 매우 심각한 상태이다. 그런 사람은 없으리라 믿는다. 내 경우에는 불순종하고 평안한 적은 없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밀어내고 취사선택하면서 샬롬을 누렸던 적은 없었다. 그러나 순종했을 때 나는 진정한 샬롬을 누릴 수 있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리라 믿는다.

  나의 이해와 상식을 뛰어넘는 순종을 하나님께 드리자. 나의 논리와 경험을 뛰어넘는 순종을 하나님께 드리자. 그럴 때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강, 하나님의 샬롬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신다. 이 은혜와 축복을 누릴 수 있기를 축원한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이해와 상식을 뛰어넘는 순종을 드린 마리아를 통해 이루어졌다.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하여 인류를 구원하는 이 엄청난 사건은 자신의 상황과 논리와 경험을 뛰어넘는 순종을 드린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 이루어졌다. 하나님께서는 마리아처럼 자신의 이해와 상식을 뛰어넘는 순종, 상황과 논리와 경험을 뛰어넘는 사람들을 통해 일하신다.

  노아가 그랬고, 아브라함이 그랬고, 다윗이 그랬고, 선지자들이 그랬고, 사도 바울이 그러했고,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 칼빈, 요한 웨슬레가 그러했고, 기도의 사람 조지 뮐러, 무디,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 등 수많은 신앙의 위인들이 그러했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도 이러한 사람들이 있고 이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일하신다.

  그리고 그 대열에 나와 여러분들이 합류할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 역시 정말 멋진 순종을 하나님께 드려 하나님의 샬롬을 누릴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할 수 있는 복된 인생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류공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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