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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1:18-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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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류공석 목사 |
참고 :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
예슈아, 임마누엘의 이름
2010년 12월 4일 텔아비브 욥바교회
본문: 마태복음 1:18-25
지난주에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통해 성령으로 잉태되어 오심에 대해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마태복음인데 본문은 요셉의 순종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지난주 누가복음에서 우리는 자신의 이해와 논리와 상식과 경험을 뛰어넘는 아름다운 순종을 드린 마리아를 통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게 되었음을 보았습니다. 마찬가지로 그의 정혼자였던 요셉 역시 그러한 아름다운 순종을 드립니다. 18절을 보면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당시 유대인의 관습은 남녀가 대략 16-18세 정도에 약혼을 하고 약 일 년 정도의 기간을 갖습니다. 그러고 나서 잠자리를 같이 함으로써 정식 혼인이 성립이 됩니다. 그러니까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이라는 표현은 정식으로 부부관계를 맺기 전 기간인 약혼 후 기간에 그런 일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요셉은 어떠한 반응을 보입니까? 당시 관습에 따르면 약혼한 경우는 아직 정식으로 부부관계를 맺은 것은 아니지만 정혼자의 아내, 남편으로 인정되었습니다. 19절 시작에 ‘그의 남편 요셉은’이라고 표현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아직 정식 부부관계를 맺어 혼인을 완성한 것은 아니지만 약혼 자체만으로도 남편이요 아내라는 법적 효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신의 약혼자가 아닌 다른 이의 아이를 가질 경우는 파혼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남편에 대한 정절을 배반한 간음죄이기 때문에 율법에 따라 돌로 쳐 죽여야 했습니다. 이것이 당시의 당연한 기준이었고 구약성경 말씀에 따른 합법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그리 하지 않았습니다. 1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자신의 약혼녀 마리아가 임신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이를 드러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즉 비밀로 하면서 다른 이유로 파혼을 하려 했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고 표현한 이 부분입니다.
의롭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짜딕(צדיק)인데, ‘의로운, 의로운 사람’을 뜻합니다. 이 말은 어떠한 사람에게 쓰이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연구하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고 더불어서 사람에 대한 사랑과 배려가 있는 사람입니다. 즉 의로움을 무엇이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둘을 겸비한 것이 바로 의로움이고, 그런 사람이 바로 의로운 사람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고 있다 해도 사람에 대한 사랑과 섬김과 배려가 없다면 그 사람은 의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외식하는 사람일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책망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줄줄 꿰고 있는데 정작 사람에 대한 이해나 배려, 사랑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의가 아니라 의를 가장한 위선이고 외식일 뿐입니다.
히브리어로 구제, 자선을 쩨데카라고 한다고 했는데, 이 말은 의로움을 뜻하는 쩨덱과 같은 어근입니다. 원 뜻은 의, 공의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구제, 자선이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이유는 가난한 이웃을 돌아보고 그들을 돕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명하신 의라는 것입니다. 가난하고 소외되고 고통당하는 이웃을 돕는 것이 바로 공의, 쩨데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을 통해 ‘티쿤 하올람’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티쿤 하올람’은 히브리어로 세상을 고친다는 뜻인데, 불평등하고 불의하고 탐욕으로 가득 찬 세상을 고치는 일에 우리가 동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통해? 쩨데카, 구제와 자선을 통해 말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이웃 사랑에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더 적극적으로 이러한 일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강도 만나 죽어가는 이들을 돕고 살리는 이웃이 되라는 것입니다. 유대교의 쩨데카와 티쿤 하올람보다 더 적극적인 이웃 사랑을 명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어려운 이들을 구제하고 돕는 일에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하는 있는 수단 난민들을 돕기 위한 성탄 사랑나누기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쩨데카, 의입니다. 세상을 고치는 티쿤 하올람에 동참하는 일이고, 이 땅의 강도만난 이들을 돕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행위입니다. 이 일에 모두 적극적으로 동참하십시오.
요셉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요셉이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연구하며 순종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이고, 동시에 사람에 대한 깊은 이해와 배려가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연구하였기 때문에 약혼 기간 중에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졌을 경우 어찌 해야 하는지를 너무나 잘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마리아의 임신사실을 공개하고 율법에 따라 처벌해야 합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리 하지 않았습니다.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했습니다. 왭니까? 그에게는 사람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배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마리아를 사랑했고, 마리아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마리아가 어떻게 자라났는지, 그리고 마리아가 어떠한 성품을 가졌고 어떻게 행동을 처신하여 왔는지도 잘 알았습니다. 적어도 그가 아는 마리아는 약혼자를 버리고 다른 남자와 잠자리를 같이 할 여자가 아니었습니다.
만일 요셉에게 사람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배려가 없었다면 이렇게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배반감과 분노에 사로잡혀 이 사실을 공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마리아를 사랑하기도 했었고, 또한 그를 의로운 사람이라 부를 만큼 사람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배려가 있었기에, 이 사실을 알고도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 끊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런 의로움이 그에게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니까 천사가 그에게 마리아에게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된 것이며, 그 아이가 장차 자기 백성을 구원하게 될 메시아라는 사실을 알려줄 수 있었던 것이고, 요셉은 천사가 알려준 수태고지를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지요. 요셉에게 이러한 의로움이 없었다면 이러한 일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천사가 알려줄 수도 없을뿐더러 알려주었더라도 믿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의 이야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왜 이들 부부를 택하셨는지가 이해가 됩니다. 이스라엘과 온 세상을 구원하실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시기에 잘 준비된 부부를 택하신 것이지요. 처녀의 몸으로 임신을 한다? 자신의 약혼녀가 성령으로 잉태를 했다? 이 것은 자신들의 이해와 논리와 상식과 경험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하나님을 믿기에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믿기에 순종할 수 있고, 사람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배려가 있었기에 받아들일 수 있었던 요셉과 마리아, 이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택하신 것이지요.
자신의 이해와 논리와 상식과 경험을 뛰어넘는 아름다운 순종을 드린 이 두 사람은 메시아가 태어날 수 있는 최고의 조건이었습니다. 참 아름다운 부부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성령으로 잉태하고 키울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음 놓고 자신의 아들을 맡기실 수 있는 아름다운 부부입니다.
여러분들도 이런 부부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요셉과 마리아처럼 자신의 이해와 논리와 상식과 경험을 뛰어넘는 아름다운 순종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더불어 남편분들은 요셉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연구하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며 더불어 사람에 대한 깊은 이해와 배려와 섬김과 사랑이 있는 의로운 사람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부부가 된다면 하나님께서 크신 일들을 여러분들을 통해 하시지 않을까요? 또한 얼마나 많은 은혜를 부어 주실까요? 그 자체로도 아름다운데 하나님께서 얼마나 많은 은혜를 부어주시겠습니까?
하나님은요,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십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천지를 창조하실 때 매번 붙는 말이 있는데, 바로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웠고 그것이 좋으셨다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이어지는 말이 ‘하나님이 축복하여 이르시되’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고 좋은 그것에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십니다. 여러분들의 가정이 그런 복과 은혜를 받으시길 축복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부부,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고 좋았더라 할 수 있는 자녀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가정에 하나님께서 많은 은혜와 복으로 주시되 하늘의 신령한 복과 땅의 복으로 주시고, 더욱 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아름다운 믿음의 복을 더해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요셉에게 그의 약혼녀인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되었음을 알려준 천사는 이어서 매우 중요한 사실을 그에게 알려줍니다. 21절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천사가 장차 태어날 아이의 이름을 알려주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주신 메시아의 이름입니다. 당시 일반적인 관습에 따르면 아이의 이름을 태어나기 전에 지어주지 않았습니다. 출산한 다음에 이름을 지었는데, 남자아이의 경우는 태어난 지 팔 일만에 행하는 할례의식 때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의 경우는 아직 태어나기 전에 이름을 주어졌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에게서 주어진 이름입니다.
이 이름은 창세전부터 주어진 이름입니다. 유대교 창세기 미드라쉬에 보면 창조 전에 하나님께서 일곱 가지를 만드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메시아의 이름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세상에 보내시기 전에 먼저 메시아의 이름을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장면입니다. 당시 유대 관습에서는 아이가 출생한 후에 이름을 지어주는데, 이 땅에 오시는 메시아의 이름은 하나님께서 태어나기 전에 주십니다. 이미 창세전에 만드신 메시아의 이름입니다. 그 이름이 바로 예수, 정확하게는 예슈아입니다.
이 이름에는 놀라운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름에는 뜻이 있습니다.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인격과 삶 전체와 관련이 있는 것이 이름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되라는 의미로 이름을 짓습니다. 예전에 있었던 개똥이라는 이름도 사실은 몇 대째 아들이 하나밖에 없는 집안에서 오래 살라고 지어준 이름이라고 합니다. 이름을 점잖지 않게 지어서 사람들이 많이 부르면서 놀리고 해야 오래 산다고 생각했답니다.
암튼 이름은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천사는 아이의 이름을 예수라 하면서 그 이름 뜻을 알려줍니다.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이것이 아이의 이름 예수라는 이름에 담긴 뜻입니다.
예수, 정확한 발음은 예슈아(ישוע)입니다. 예슈아는 그 뜻이 ‘구원’입니다. 원래의 형태는 예호슈아(יהושוע)입니다. 모세의 후계자였던 여호수아가 바로 이 이름입니다. 정확한 발음은 예호슈아인데, 이 이름은 야훼(יהוה)와 호쉬아(הושיע) 두 단어의 결합입니다. 호쉬아는 '구원, 구원하다'란 뜻으로 예호슈아는 '야훼께서 구원하신다', 혹은 '야훼는 구원이시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예호슈아의 축약형인 예슈아라는 이름으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그 이름 뜻은 예호슈아와 마찬가지로 '야훼께서 구원하신다', 혹은 '야훼는 구원이시다'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예슈아라고 부르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슈아가 아닌 예슈(ישו)로 읽고 있는데, 이는 예슈아라는 이름에 '야훼께서 구원하신다', '야훼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나라의 경우는 히브리어가 모국어가 아니기 때문에 이것이 문제가 안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예수, 일본은 예스, 중국은 야소, 영어로는 Jesus로 부릅니다. 물론 예수님의 정확한 이름을 부를 필요는 있지만 이것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경우는 히브리어가 모국어이기 때문에 다릅니다. 예수님을 예슈아라고 부를 경우는 무엇을 인정하는 것이 됩니까? 예수님이 구원자, 즉 메시아이심을 인정하는 호칭이 됩니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유대교에서는 예수님의 이름을 예슈아가 아닌 예슈로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예슈아의 마지막 글자를 떼어내어서 부르는 것인데, 하나님의 구원의 뜻을 갖고 있는 이름의 마지막 글자를 떼어내고 부름으로서 그들의 주장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는 구원자, 메시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여기서 더 나아가 그들이 부르는 예슈라는 이름에 아주 사악한 의도를 가지고 뜻을 붙였습니다. 히브리어 단어는 한 글자 한 글자를 가지고 문장을 만들 수도 있고, 반대로 여러 단어를 축약해서 하나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을 타낙(תנ"ך)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구약 성경이 세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즉 토라(תורה), 네비임(נביאים), 케투빔(כתובים)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 세 단어의 앞 글자를 따서 만든 이름입니다. 이 경우는 여러 단어를 축약해서 하나로 만든 경우고, 반대로 원래의 단어나 이름을 가지고 한 글자 한 글자에 뜻을 붙여 문장을 만들거나 의미를 부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슈라는 이름이 그런 경우입니다.
무엇이라 의미를 붙였는가 하면, 히브리어로 예슈를 쓰면 ישו인데, 이 철자 하나 하나에 다음과 같은 단어를 붙였습니다. ימח שמו וזיכרו(Yimach sh'mo vezikhro)
영어로 하면 "May his name and memory be blotted out"입니다. '그의 이름과 기억이 완전히 소멸되기를 원한다는 뜻입니다. 얼마나 악한 의도를 가지고 이름 뜻을 붙였는지 모릅니다. 야훼, 아도나이의 구원이라는 거룩한 이름을 이렇게 악한 의도를 가지고 더럽혀 놓았습니다.
물론 지금의 유대인들이 예슈라는 이름을 붙인 이런 뜻을 다 알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모르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종교적인 유대인이나 관습적인 유대인들의 경우는 이 이름의 의미를 알고 저주를 합니다. 날마다 기도하면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의 이름을 저주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 살면서 유대인들이 부르는 예슈라는 이름의 뜻을 알면 듣기가 거북합니다. 믿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예의를 갖추어 예슈아라고 부르면 좋을텐데 그렇질 않습니다.
그런데 메시아닉 유대인 중에 요셉 박토르라는 분이 예슈라는 이름의 뜻을 재해석했습니다. 뭐라고 했냐 하면, יתגדל שמו ומלכותו(Yitgadal sh'mo umalkhuto), 영어로는 'May his name and kingdom be magnified!' 즉 '그의 이름과 나라가 더욱 크게 되기를!'이란 뜻으로 재해석을 했습니다.
우리가 유대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할 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저주의 뜻을 부여한 예슈가 아니라 구원의 이름인 예슈아로 부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을 믿는 메시아닉 유대인들은 예슈아로 부릅니다. 더 많은 유대인들이 그분을 예슈아로 부를 수 있도록 우리가 기도해야 하고 힘써야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우리 역시 예수님의 이름을 예슈아라고 불러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우리가 부르는 예수라는 발음과 유대인들이 부르는 예슈가 비슷한 것도 거슬리고, 우리의 구원자의 이름을 정확하게 불러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특히 영어의 경우는 영어가 성경의 모든 이름과 지명을 망쳐놓았지만 예수님의 이름은 더욱 그러합니다. Jesus 아닙니까? 유대인들도 영어로 이렇게 부르는 것은 전혀 상관하지 않습니다. 예수아와 Jesus는 발음에 있어 너무 다르기 때문입니다.
물론 신약성경이 헬라어로 쓰여졌고, 그것이 라틴어로 번역되고 후에 영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그렇게 된 것이지만 예수님에 대해서는 올바르게 불러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미국이나 영어권에 살고 있는 메시아닉 유대인들을 보면 예수님의 이름에 대해서는 Jesus 대신에 꼭 Yeshua를 씁니다.
예슈아 하마쉬악ㅎ(Yeshua haMashiach), 이것이 히브리어로 부를 수 있는 그분의 이름입니다. 우리가 부른다면 예슈아 메시아, 예슈아 그리스도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앞서 예슈아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이름인 아도나이(야훼)와 구원을 뜻하는 호쉬아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다고 했는데, 이것이 매우 중요한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모릅니다. 우리성경에는 여호와, 공동번역에는 야훼로 쓰여 있지만 정확한 발음은 아닙니다. 학자들이 연구한 결과 그래도 가장 유력한 것이 야웨입니다. 현대 히브리어로 하면 야붸입니다. 그러나 이 역시 정확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이름의 정확한 발음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후 이스라엘 사람들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어 주님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아도나이로 부르게 되면서 점차 정확한 발음을 잊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지금 출간되는 히브리어 성경에는 모음이 붙여있으나 이것은 흔히 마소라 학파라고 불리는 유대인 학자들에 의해서 주후 8세기경에 붙여진 것으로 히브리어는 원래 자음으로만 되어 있기 때문에 예전 성경 사본, 사해 사본 같은 오래된 사본들을 보면 모음부호 없이 자음으로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 네 글자, 보통 신성 사문자라고 부르는 그 이름의 정확한 발음은 알 수 없습니다. 그냥 유대인들처럼 아도나이로 부르던가 아니면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고 여겨집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슈아라고 부를 때는 누구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됩니까? 아도나이,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예슈아라는 이름 안에 하나님의 이름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슈아를 부를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슈아라는 이름과 하나님의 이름은 같습니다. 예슈아의 이름에 하나님의 구원이 담겨 있고,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과 권세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누구든지 예슈아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습니다. 로마서 10:13을 봅시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무엇이라 선포합니까?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이렇게 선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구원은 오직 아도나이, 야웨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 구원의 이름이 예슈아에 담겨 있고, 예슈아께서 친히 구원의 하나님이시기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 곧 예슈아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습니다. 할렐루야!
사도행전 4:12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고 선포하는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다른 예슈아(ישועה), 구원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의 이름 곧 예슈아(ישוע)의 이름만을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구원의 이름으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슈아의 이름을 부를 때 우리는 구원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슈아의 이름을 부를 때 구원으로 응답해주십니다. 우리가 왜 예슈아께 나아가 죄를 고해야 합니까? 왜 예슈아께서 나를 위해 이 땅에 오셨으며 나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음을 믿어야 합니까? 왜 예슈아의 이름으로 기도를 합니까?
예슈아, 그분께서 바로 구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야웨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이름, 구원의 하나님의 이름, 예슈아의 이름을 그 아들에게 주셨고 성령으로 잉태되어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 구원의 이름, 예슈아, 우리 주님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우리가 예슈아의 이름을 부를 때 들으시면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구원의 하나님의 이름 예슈아, 그 이름과 같은 뜻이 바로 임마누엘입니다. 22-23절을 봅시다.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여기서 말하는 선지자가 구체적으로 누구입니까? 이사야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은 이사야 7:14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는 말씀이 이사야서에 예언되어 있습니다.
예언대로 처녀 마리아를 통해 잉태되었습니다. 임마누엘이라는 말은 메시아의 이름으로 예슈아라는 이름과 같습니다. 임마누엘, 역시 히브리어이며 두 단어가 합쳐진 이름입니다. 임마누(עמנו)와 엘(אל)입니다. '임마누'는 '함께'라는 뜻을 가진 '임'(עם)이라는 단어에 주격 어미 '누'(נו)가 붙은 형태입니다. 그래서 그 뜻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영어로는 'God with us'의 뜻을 갖고 있는 단어가 바로 임마누엘입니다.
앞서 하나님의 이름의 정확한 발음은 알 수 없다고 했는데, 하나님의 이름의 의미는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 네 글자는 히브리어의 be동사와 관련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3:14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시는데, 히브리어로 보면 이렇습니다. אהיה אשר אהיה, 이것을 영어로는 'I am who I am'으로 번역을 했는데, 뜻은 나인 것은 나다, 나는 나다의 의미입니다. 번역이 쉽질 않습니다. 이것을 우리 성경에서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라고 번역했는데, 그 뜻을 잘 살린 번역입니다.
אהיה라는 단어가 두 번 사용되었는데, 이는 'I am'의 의미도 되고 'I was'나 'I will be'의 의미도 됩니다. 현대 히브리어와 달리 구약 히브리어는 시제가 다릅니다. 과거 현재 미래 시제가 아니라 완료, 현재 분사, 미완료만 있습니다. 그래서 그 의미가 다릅니다. 즉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가르쳐주신 이름은 '나는 어제도 있었고 지금도 있고 앞으로도 영원히 있는 자'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즉 영원부터 영원까지 be, 존재하시는 하나님,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란 의미가 바로 여호와, 야훼, 아도나이, 주님이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이름이 담겨 있는 단어가 אהיה עמך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라는 뜻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란 뜻이지요. 우리말이나 영어로는 그런 의미지만 히브리어로는 느낌이 다릅니다. 모세에게 알려주셨던 하나님의 이름이 그대로 들어가 있습니다. 이것은 약속입니다. 즉 אהיה עמך라는 말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시는 말의 의미입니다.
구약 성경에 이 말이 많이 나오는데 하나님에게서 이 말을 듣는 사람들은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אהיה אשר אהיה, 모세에게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신 하나님을 기억했습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그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신 말씀이 바로 אהיה עמך라는 말입니다. 단순히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실꺼야 하는 믿음이 아니라 영원부터 영원까지 살아계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나와 함께 하신다는 분명한 확신입니다.
그 אהיה עמך라는 말을 달리 바꾼 것이 바로 임마누엘입니다. 그 의미는 역시 אהיה עמך라는 말와 같이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이고, 그 범위가 '너', 사람의 입장에서는 '나'인데, 이것이 '우리'로 확장이 된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너와 함께 할 것이다란 의미로 אהיה עמך라고 하셨다면 이제는 모든 사람들, 예슈아를 구주로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אהיה עמך, 영원히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이 바로 임마누엘의 이름입니다. 예슈아라는 이름에 야웨 하나님의 이름이 담겨져 있는 것처럼 메시아의 별칭에 해당하는 이름인 임마누엘 역시 그러한 뜻을 갖고 있습니다.
예슈아, 우리 주님께서는 אהיה עמך의 하나님,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이 바로 예슈아이십니다. 예슈아라는 이름에는 אהיה עמך, 내가 너와 영원히 함께 할 것이야, 임마누엘, 내가 너희와 영원히 함께 할 것이야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슈아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의 사랑과 더불어 그 영원하시며 신실하신 약속을 기억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약속을 기억하고 굳게 믿어야 합니다.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근거는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슈아를 통해 구원을 약속하신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예슈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 구원받아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됩니다.
이 말씀을 읽을 때는 하나님의 약속을 마음에 새기면서 읽으세요. 얼마나 큰 사랑과 약속이 담겨져 있는지 모릅니다. 특히 '이처럼'을 강조하세요. '이처럼' 무엇입니까? '독생자를 주실만큼'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의 본체이신데, 즉 하나님 자신과 같은 독생자를 주실만큼, 이처럼 나를 사랑하십니다. 세상은 나입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내가 세상입니다. 그래서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분명한 사랑과 구원의 약속을 예슈아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기억하시고 구원의 확신 가운데 거하시길 축복합니다.
또한 예슈아께서는 이 땅에 계시는 동안에도 אהיה עמך, 임마누엘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3:1입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세상에 있는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끝까지 사랑하시는 사랑, 이것이 예슈아 우리 주님의 사랑입니다. 즉 אהיה עמך, 임마누엘의 사랑이십니다.
또한 마태복음 28:20에서는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18절부터 읽습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슈아께서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하셨던 마지막 명령이며 약속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너희와 함께' 파워포인트에서 히브리어로 크게 되어 있는 것을 보면 אהיה עמכם입니다. 즉 אהיה עמך, 임마누엘의 약속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힘듭니까? 외롭습니까? 나 혼자만 주의 일을 하고 주의 길을 가는 것 같습니까?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대한 믿음이 흔들립니까? 구원의 확신이 약해집니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믿음이 흔들립니까?
이 약속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약속은 나의 환경이나 감정이나 상태에 있지 않습니다. 물론 내가 처해 있는 환경에 따라 흔들릴 수 있고, 나의 감정과 영적 상태에 따라 흔들릴 수 있으나 하나님의 약속은 나의 환경이나 감정이나 영적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목하고 붙잡아야 할 것은 나의 환경이나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며, 말씀이 육신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이신 예슈아, 우리 주님이십니다.
힘들 때 예슈아의 이름을 부르십시오.
외로울 때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신 예슈아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지치고 시험에 들고 낙망이 될 때 세상 끝날 까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그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구원의 확신이 흔들리고 죽음이 두렵습니까? 영생에 대한 약속을 하셨고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며 우리가 죽어 세상을 떠날 때 우리의 영혼을 두 팔로 품어주실 예슈아를 바라보십시오.
믿음이 흔들릴 때, 영적인 침체에 빠졌을 때에도 אהיה עמך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 임마누엘의 이름 예슈아를 바라보시고 그분을 붙잡으십시오.
그분은 당신을 사랑하시며 영원부터 영원까지 당신과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슈아의 이름을 부르는 우리 모두에게 אהיה עמך, 임마누엘의 은혜와 축복이 넘치도록 임하기를 우리의 구원자, 메시아이신 예슈아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류공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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