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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3:13-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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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3장 13절-30절: 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 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뢰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또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가나안인 시몬이며 또 가룟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러라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예수의 친속들이 듣고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저가 바알세불을 지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예수께서 저희를 불러다가 비유로 말씀하시되 사단이 어찌 사단을 쫓아낼 수 있느냐 또 만일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고 만일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 없고 만일 사단이 자기를 거스려 일어나 분쟁하면 설 수 없고 이에 망하느니라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늑탈치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무릇 훼방하는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 하시니 이는 저희가 말하기를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 함이러라.
이방종교는 하나님의 성품을 입히는 교훈이 아니다. 귀신적이고 마귀적이고 옛사람 부패성적이고, 구하고 공들이고 하는 게 전부 세상에 속했다. 그런데 이런 세상에 속한 것을 교회에서 구하고 있다면 이는 하나님의 성품을 입는 구원이 없는 것이라고 보는 거다.
예를 들면 선생이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실력 있게 공부를 안 가르쳐 주면 학생들의 실력은 없다. 실력화 돼 나가지를 않는다. 이러면 ‘학생이 아니다’가 아니라 학생이란다면 공부실력이 입혀져 나가야 하는 게 원칙인데 그 원칙에서 벗어난 것이다. 원칙을 벗어나는 건 아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건 예수님을 따라간다는 건데, 왜 예수님을 좇는 것이냐? 좋기 때문에 따른다. 나에게 영원히 좋음이 들어있기 때문에 따른다. 그런데 예수를 믿으면서 주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하나님 말씀의 깨달음이 없다면 학생임에도 공부를 못하는 사람과 같다.
예수를 믿으면서 성경을 안 본다면 다른데 가서 예수 믿는다고 하는 권을 못 쓴다. 이런 사람이 이단자들과 붙으면 이단자들은 성경을 잘 아는데 어떻게 이기느냐? 모르니 못 이긴다.
이단자들은 우리보다 성경을 더 잘 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이상 알아야 할 것은 성경구절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은밀한 뜻을 알아야 한다. 은밀한 뜻 이건 사람의 심령을 꿰뚫는다. 그러려면 실력을 가져야 되겠는데 예수를 그만큼 오래 믿고, 교회를 그만큼 오래 다녔고, 말씀을 그만큼 배웠다면 그만한 실력은 나와야 하는 것은 당연한 거다. 이건 당연한 건데 이렇게 안 돼 있으면 이건 비정상이다. 자기 속에 다른 뭔가가 가득 들어있으니 안 들어가는 거다.
예수님은 귀신을 내어 쫓으신다. 귀신은 사람의 성격과 성질을 타고 역사를 한다. 연이 바람을 잘 타듯이. 이 귀신이 사람 속에 들어갈 때는 결합이 아닌 연합이다. 결합은 뜨거운 물과 찬 물은 질이 같으므로 섞으면 하나가 되는 것과 같다. 그러나 기름과 물은 결합이 안 된다. 기름과 물은 한 병 속에 같이 들어있으면 하나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것을 접시에 부을 때는 따로 된다. 이건 연합이다. 이 연합은 너와 내가 있으면서도 사상결합은 아니다. 소원 목적은 제각각이면서 어떤 일을 위해서 이 일을 같이 하자는 건 연합이다.
일반적으로 보면 사람마다 개개인으로 있을 때는 다 각치성이다. 그 다음에 각각 각치성으로 있는데 너 절반 물리고 나 절반 물리고 해서 뜻이 맞는 부분만 같이 하면 여기는 합치다. 그런데 예수님은 성도들이 예수님 쪽으로 단일을 원하신다. 이게 아니면 아닌 거다. 하나님의 것을 내가 갖는 것, 그리고 ‘진리가 좋사오니’ 하는 이건 의사단일성이다.
인간 아담과 하와가 대표적으로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로, 대표라고 할 때는 현재적 자기도 거기 들어있는 거다. 사실 인간이 예수를 믿은 후에라도 진리본질을 모르는 상태에서 믿어졌다면 여전히 선악과는 따먹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선악과를 따먹는 것을 아담이 미리 보여준 것이다. 나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아담을 역사적으로 들고 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말하면 아담이 따먹는 그곳에 내가 있는 것이다. 현재 내가 따먹고 있는 것을 알게 하려고 아담을 들고 와서 ‘너 이래도 모르겠느냐’ 하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대표적으로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로 모든 인간은 성격 성질상 귀신에게 사단 마귀에게 쉽게 노출이 돼 있다. 그래서 귀신이 돼지에게 들어가듯이 하나님의 허락 하에 귀신들이 인간 속에서 움직인다. 그러니까 무당 점쟁이는 돈을 탐하는데 거기에 얼마든지 들락날락 할 수 있는 허용성으로 되어 있다. 좋아서 허용이 아니라 예수 믿는 나를 깨닫게 해 주기 위해서 그런 것도 내 눈에 보겠금 허용이 되어 있는 것이다.
교훈적 교육적으로 보면 자기가 무엇을 받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정신이 그렇게 따라 들어간다. 그래서 그 전에 이웃사람을 보니까 워낙 가정에 우환이 많이 일어나니까 늘 점쟁이에게 가서 점치고 그랬다. 그러니까 점쟁이가 가만 내버려 두느냐? 여자가 인물이 번드르 하니까 그만 자기 후계를 삼았다. 그래서 점쟁이가 됐다. 그걸 잘 봐야 한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으면서도 진리본질을 모르면 그냥 속고 이용물이 된다. 예수 믿는 것에는 그렇게 되면 안 된다. 인간 자기를 만든 창조의 목적이 있는데 왜 이용물로 당하느냐? 이용물로 당하면 자기 노력 시간 젊음 투자성은 해놓고도 없다. 이렇게 되면 ‘이제 너 얻어맞을 준비하라. 네 속에 배우고 갈고 닦은 게 뭐냐?’ 그게 없다면 이제 맞는 거다.
이방세상은 돈을 탐하여 무당 점쟁이에게 가서 점을 친다. 이들은 사람 목숨보다 돈을 더 귀하게 여긴다. 예수님은 땅의 소원 목적적인 마음과 정신을 천국의 것으로, 천국의 사람으로, 하늘의 것으로 바꾸는 것이다. 표현이 천국의 사람이지 땅의 사람과 천국의 사람은 실력적 질적 차원적으로 다른 거다. 이렇게 해서 자기를 움직이면 움직일 적마다 예수냄새가 나오게 된다.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도록 자기의 언행심사가 그렇게 나오는 거다.
예수님의 신실한 종들은 신령천국의 본질의 사람으로 속성적 성품적으로 인도하고 오직 그 일에만 수종드는 거다. 이게 예수님의 신실한 종들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면으로 수종들고 연구한다.
온 세상 사람들이 전부 세상 밑으로 다 들어가 있으니 이건 노예다. 죄 밑으로 다 들어가 있다. 그걸 끄집어내서 주님 쪽으로 자유로 질적으로 차원적으로 존귀 영광자로 만드는 일을 하는 것이 주님의 신실한 종들이다. 그게 없다면 주님의 일꾼이 아니다.
이방세상과 성경을 가지고 껍데기 운동을 하는 외식으로 흐르는 교회는 하나님의 성품을 입는 구원은 전혀 모른다.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을 입는 것을 모르면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하는 고로 성격적으로나 성질적으로나 귀신들린 짓을 하게 된다. 자기 자랑 또는 불평불만, 자기 자학을 하게 된다.
배에 구멍을 내거나 귓밥에 코에 구멍을 뚫어서 철사 줄을 꿰고, 온 몸에 문신을 하는 거, 눈썹을 잡아 뽑고 털을 다 뽑고, 구멍 나고 떨어진 옷을 입는 거, 또 뼈 깎기를 하는 이런 사람에게는 사람의 인격이란 남의 말처럼 들린다.
우리교회에서 ‘하나님의 성품과 인격 인격’ 하는데 세상으로 들어있으면 그 사람에게는 이게 남의 말처럼 들린다. 자기의 인격과 직결이 돼 있는 자기에게 하는 말인데 그 말이 남의 말처럼 들린다.
멍청한 사람은 자기 고향도 모르고 부모도 모르고 자기의 생일도 모르는데, 이건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듯이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인간 자기의 출생의 창조의 목적을 모른다면 이건 정상적으로 믿는 사람이 아니다. 예수를 믿는다면 그걸 알아야 한다. 자기를 인간으로 만들어 놓은 인간창조의 목적, 그리고 나그네 생활의 존재목적을 알아야 한다. 예수를 믿어도 세상적으로 사는 자는 이걸 모른다. 아무리 학박사라도 이걸 모른다. 그런데 성경은 정확하게 알려준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자기가 인간으로 태어난 창조의 목적을 모른다면 고작 해봐야 ‘예수 믿어 구원’ 그것밖에 모른다. 나그네 생활의 존재목적, 고향에 가기까지의 그 사이에 내가 어떻게 살아야할지 이게 성경에 있는데 그걸 모른다. 그러니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이게 뭐냐?
우리교회에서는 이걸 철두철미하게 다루는 거다. 다른 교회처럼 그런 사고방식으로 믿으려면 그리로 가라. 우리교회 이름을 ‘궁극’이라고 하는 걸 괜히 붙인 게 아니다.
‘궁극교회’는 세계적으로 하나밖에 없다. 창세 이후로 마지막 그날까지 하나밖에 없는 교훈을 하는 곳이다. 그러나 ‘사랑의 교회’는 굉장히 많다. 또 ‘평안교회’도 있고 ‘행복한 교회’도 있고, 어디 가다 보니까 ‘벌떼교회’가 있더라. 참 간판을 어째 그렇게 지었는지? 물론 벌들은 한 마리가 붙으면 주렁주렁 늘어지도록 떼로 매달리는 걸 연상을 하고 지었겠지만 그걸 부정적으로 생각을 하면 ‘저 교회에 가면 벌에 쏘이듯이 쏘이겠구나’ 그런 생각도 든다. 그러니 오늘날 교회라는 게 어딘지 모르게 근엄성이라든지 인격의 존엄성이라든지 그런 건 별로 못 느끼겠고 장난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성경에 ‘그림자 같이 다니나이다’ 하는 말의 의미는 사람이 하나님의 본질대로의 실상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허상을 따라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림자 같구나.’ 그림자는 실상은 아니다. 사람이라면 눈으로 보이는 것을 잡고 살려고 하지 사람을 따라다니는 그림자를 잡고 살려는 자가 없듯이 예수 믿는 것도 실상적 자기를 잡고 살아라.
예수님은 실상이다. 하나님도 실상이다. 그러나 자기 몸 육신 껍데기는 실상이 아닌 현상이다. 그런데 이런 것을 목적으로 하고 살게 되면 그림자 같이 다니다가 하나님의 진노의 형벌로 그 일생을 마치고 말게 된다. 하나님의 성품으로 되지 않은 자신의 인격의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은 그렇게 살다가 가게 된다. 참 허망한 삶이다.
16절-19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자만 열둘을 세웠다. 왜냐? 복음을 빨리 확장시킬 목적으로? 아니면 그들이 유식하게 보여져서? 아니면 아주 고분고분 순진하게 말을 잘 듣게 생겨서? 아니면 별명을 만들어 주고 싶어서? 아니면 계시적 등용 인물들이므로? 왜 이렇게 묻느냐 하면 오늘날 교인들이 앞의 네 가지로 생각들을 많이 하기 때문에 이렇게 묻는 것이다.
이들은 계시적 등용 인물들이다. 누구를 보라는 계시적 등용 인물이냐? 이들에 비추어 우리 자신을 보라고.
그런데 왜 제자들에게 별명을 붙여 주었을까? 이방세상 사람들은 외모가 잘났거나 그 사람의 활동이나 성격 성질을 보고 별명을 붙이는데 예수님은 왜 별명을 붙여 주었을까? 그것은 그 이름처럼 이룰구원으로 자기를 고치라고 별명을 주신 것이다.
예를 들어서 ‘반석이라고 하라’ 하신 것은 우리의 이룰구원으로 보면 반대적으로 어디 위에 짓지 말라? 모래 위에 짓지 말라는 뜻으로 반석이라고 하신 것이다. ‘반석 위에 집을 지어라.’ 모래 위에 집을 짓지 말라. 반석 위에 즉, 절대 정확하고 영원한 그 위에 네 신앙믿음을, 아는 것을, 성품을, 노력봉사를 세워라.
그런데 베드로는 실수가 상당히 많다. 성질이 급하고 덜렁대고 장담 잘하고 정신없는 소리 잘하고. 우리는 이런 베드로를 가만 보면서 ‘베드로가 내 모습을 비춰주는구나’ 하고 깨달아야 한다. 야고보와 요한에게는 보아너게 즉, 우뢰 아들. 하늘의 위엄을 가지라는 뜻이 아닌가? 또는 하나님의 무서움을 알려라.
그런데 본문에 보면 가룟유다에게는 예수님을 팔아먹기 전에 ‘예수를 판 자라’ 했는데, 이 기록자가 그 때 당시 이렇게 기록을 한 것을 가룟유다에게 보여줬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 가룟유다에게 되게 얻어맞았을 것 같다. ‘아무렴 내가 예수를 팔아먹겠느냐? 왜 미리 그렇게 단정을 하느냐’ 할 것이다.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판 것은 이 기록을 한 후 3년 뒤에 될 일이니까 가룟유다 본인 자신도 모르는 일이니 그 말이다.
물론 마가복음이 예수님의 부활 승천 후 A.D. 67년으로 70년 사이에 기록된 것으로 본다면 가룟유다가 3년 전에 예수님을 판 사건을 알고 그 내용을 기록을 했기 때문에 ‘판 자러라’ 이렇게 기록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이 기록은 성령님의 기록영감의 감화로 기록이 된 것이기 때문에 ‘팔 자러라’가 아니라 ‘판 자러라’ 하고 과거적으로 들어간 것이다.
이렇게 하신 것은 현재적으로 사람보다 돈을 좋아하는 정신을 버리지 못하면 지금 현재적으로 예수님을 세상에게 팔고 있다는 뜻이다. 예수 믿는 사람이 예수이름을 가지고 세상 것과 바꿔먹고 있다는 그 말이다. 예수이름을 가지고 세상의 것을 소원 목적하고 있다는 뜻이고, 예수이름을 가지고 세상을 선택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게 가룟유다이다.
이렇게 기록하신 것을 은밀계시적으로 보면 현재 우리의 신앙이라고 하는 그 신앙의 향방이나 질이 드러나는 건데, 이걸 모르는 교인들이나 모르는 목사들은 가룟유다를 무조건 지옥에 간 자로 몰아붙인다. 이렇게 보는 사람은, 목사는 내 입장에서 볼 때는 성경을 볼 줄 모르는 자로 본다. 왜? 이 기록을 통해 본인 자신을 본다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겠느냐?
그런데 예수님께서 당시에 가룟유다를 알고 불렀을까, 모르고 불렀을까? 알고 부르셨다. 모르고 불렀다면 예수님은 무지무능자가 된다. 만일 알고 불렀다면 당신이 십자가에 못박히는 일에 가룟유다를 이용해 먹으려고 한 건지, 아니면 가룟유다를 깨닫게 해주고 온전자로 만들어 주시려고 부른 건지?
오늘날 우리는 가룟유다를 닮은 데는 없느냐? 닮은 데가 있다면 나쁘게 말하면 예수님이 그런 우리를 이용해 먹으려고 부른 거냐? 우리가 가룟유다를 닮은 마음을 고치지 못한다면 너는 타의 구원에 이용물로 들어가는 거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서 당신과 함께 있게 하시는 것은 고치고 영능의 실력자를 만들어 주려는 것이니 오늘날 자기가 이 진리를 분명히 따른다면 영능의 실력자가 되는 거다.
제자들에게 전도도 하게 했고, 제자들에게 귀신을 쫓는 권세도 주신 것은 예수 당신을 위함이냐, 아니면 제자들을 위함이냐? 제자들을 위함이다. 나를 위함이다. 신령천국에서 영원히 함께 있고 싶어서.
우리가 여기서 흔히들 하는 말로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팔고 지옥에 갔다고 주장을 하게 되면 예수님 자신부터가 문제가 된다. 이렇게 되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의 뜻도 없어지고, 성경이 성령님의 감화 감동으로 기록된 것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도 무효가 된다. 한 이치가 틀리면 다 틀려진다. 진리는 그렇다. 이치는 그렇다. 집 짓는데 한 쪽이 잘못되면 다 무너지듯이.
20절-30절: 예수님의 소문이 온 갈릴리 사방에 다 퍼졌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을 고쳐주었고, 시몬의 장모의 열병도 고쳐주었고, 문둥병자 중풍병자 등 각종 병자를 고쳐주셨다는 이런 소문들이 온 유대로 다 퍼졌다. 이렇게 되니 사람들이 몰려와서 예수님께서 식사를 할 겨를도 없다.
예수님께서 식사할 겨를도 없이 바쁜 이것을 보고 예수님의 친속들이 예수님이 미쳤다고 하며 예수님을 붙잡으러 왔다. 왜? 밥 때가 지나도 계속 일을 하니까 미쳤다고 본 거다.
예수님께서 분별없이 일을 하는 분이신가? 배가 고파 허리가 휘어지고 눈알이 들어가고 기운이 빠지고 있는데도 꾹 참고 어쩔 수 없이 일을 하는 것인가? 예수님께서 육신이 편할 목적이라면 만능의 능력으로 한 번에 모아놓고 일을 처리하면 된다. 예를 들어서 몇 명이던 수많은 사람에게 한꺼번에 햇빛을 비춰줄 수도 있고 비를 맞게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왜 식사할 겨를이 없다고 표현을 할까? 그것은 예수님의 구원사역은 ‘영원한 생명이냐, 영원한 사망이냐’를 분초찰나 순간을 다투는 일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사람을 수술하는데 수술하는 사람이 배가 고프다고 수술하다 말고 밥을 먹으러 갈 수 있느냐? 이런 구원의 이치를 모르는 자들은 예수님을 미쳤다고 하거나 또는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한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율법에 능통한 자들이다. 이들의 눈앞에서 예수님께서 병자나 귀신들렸던 자를 고쳐주심으로 온전한 자가 됐는데 고쳐주는 장면을 그들의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도 예수님을 훼방하고 헐뜯는다.
‘안식일 날 하지 말고 다른 날 하라.’ 그러면 자기들은 다른 날 고쳐줬느냐? 그들은 다른 날이고 안식일이고 간에 고쳐주지 못했다. 다시 말하면 외식자들에게는 성령님의 역사가 없는 거다.
지금도 예수 믿는 기독교회 안에 외식교회가 수도 없이 많다. ‘세상 마지막 때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신 것은 말세에는 외식교회가 수도 없이 많다는 말이다. 믿음 없는 교인, 믿음 없는 교회가 많다는 그 말이다. 믿음 없는 설교가 많다는 그 말이다. 믿음이 뭐냐? 하나님의 본질을 외치는 교회가 없다 그 말이다. 전부 세상 껍데기, ‘세상에서 잘 되라’ 그런 식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양심 속에서 선악의 판단이 났는데도 성령 훼방 죄를 짓는다. 사람이 악하면 그렇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을 대상으로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영원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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