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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4: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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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4장 1절-9절: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시니 큰 무리가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 바다에 떠 앉으시고 온 무리는 바다 곁 육지에 있더라 이에 예수께서 여러 가지를 비유로 가르치시니 그 가르치시는 중에 저희에게 이르시되 들으라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쌔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치 못하였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와 육십 배와 백 배가 되었느니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물은 세상정신을 비유한다. 사람이 물속에 빠지면 죽듯이 자기의 마음 정신이 예수님을 안 믿는 세상 사람들의 소원 목적이 들어가면 그 사람의 신앙은 죽은 것이다.
돈, 먹는 거, 집 등 눈에 보이는 것 전부는 임시성에 속하는 것이다. 영원한 것이 아니다. 또 이런 것들은 불에 타는 것이고, 썩는 것이고, 변질되고 변동되는 것이고, 바람 불면 넘어지고 날아가고 깨지는 것이다.
앞으로 백 년 후에는 오늘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 여기에 앉아있을 사람은 없다. 육신은 임시성적인 존재라. 그러나 우리 속의 영 혹은 영혼은 영원한 존재다. 이 영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자라고 살 수 있는 거다. 이게 속사람이다.
육신은 밥 즉, 물질을 먹어야 기운이 솟고, 그 다음에 자기 정신은 세상학문을 먹어야 아는 힘이 솟는 거다. 그런데 기독교는 더 깊이 들어가서 영혼 혹은 영이 사람의 주격인데, 이것 때문에 육신을 입혀놓은 것이다. 이 속사람은 세상정신을 먹으면 살아나가지를 못한다. 속사람이 자라기 위해서는 신령한 하나님의 생명 있는 말씀을 먹어야 한다. 하나님의 진리이치를 먹어야 된다. 먹으면 그 영이 자기 이성을 붙잡고, 그 다음에 자기 몸을 움직여 들어간다. 쉽게 비유를 들자면 차 기름통에 휘발유가 있고, 엔진에서 휘발유에 불이 튀기면 시동이 거리고, 시동이 걸리면 바퀴가 굴러서 차체가 움직이게 되는 것과 같다.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너는 영과 육으로 결합된 자다’ 라고 하신다.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다. 하나님이 아니면, 성경이 아니면 이걸 알 길이 없다. 아무리 공들이고 산에서 도통을 한다고 해도 그 면에 대해 알 길이 없다. 하늘로부터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셔야만 알 수 있다. 이게 성경이고 기독교 교훈이다.
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고로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신으로 기록이 된 거지 여성동아나 남성동아를 만들듯이 그렇게 만든 게 아니다. 성경은 특수다.
그러면 이 성경을 보는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다 특수한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거냐? 아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성경을 해석한다는 것이 예수 믿기 전의 사고방식의 지식을 가지고 ‘예수 잘 믿어 세상에서 부자로 살아라’ 하는 이건 성경을 안 봐도 말할 수 있다. 무식한 사람도 ‘너 돈 많이 벌고 부자로 살아라’ 그 말을 할 수 있다. 누가 그 말을 못하겠느냐? 그런데 참 사람, 하나님을 닮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신의 역사다.
목사님들이 성경의 이치 밝혀줄 때 성령님께서 같이 역사를 한다. 그런데 목사님들이 세상을 자랑하고 가르친다면 성경에도 있듯이 그건 마귀의 장난일 뿐이다. 그러니까 마귀에게 붙잡힌 목사도 있다 그 말이다.
교회에서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많이 깨달아지면 인간이 훤하게 보인다. 인간의 마음속에 어떤 정신이 들었다는 걸 입으로 통해서 말이 나오면 알 수 있다. 그 사람의 입에서 세상냄새를 풀풀 풍기면 그 사람의 미래는 볼 게 없다. 선지자가 예언을 할 때 그 사람의 그런 면을 보고 축복을 말할 수도 있고 재앙을 말할 수도 있는 거다. 성경에서 이걸 가르쳐 주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배우고 깨닫고 자기 인생의 삶의 소원 목적을 바로 알아야 한다.
자기 가정도 교회도 이치는 똑같다. 이치는 어디든지 다 해당이 된다. 자기 가정의 부모형제들이 자식들이 ‘돈 돈’ 하고 돌아가면 그 가정은 깨진다. ‘돈 돈, 부자 부자’ 하고 들어가면 그 가정은 깨지는 거다. 이렇게 되면 그 다음에는 집에 재산이 조금 있으면 서로 많이 가지려고 형제들끼리 다투게 된다.
우리 입장에서는 물질에 욕심을 내면 안 된다. 물질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거다. 그러니까 부모가 형제들에게 재산을 물려줄 때 ‘왜 이렇게 적게 주나’ 하는 형제가 있으면 ‘그럼 너 다 가져라’ 하라. 그러면 그 재산 다 가져가서 얼마나 가지고 있겠느냐? 그 다음엔 시험이 오게 돼 있다. 하나님의 재앙이 오게 돼 있다.
하나님께서 천지 우주만물을 인간 자기에게 복으로도 쓸 수도 있고 재앙으로도 쓸 수도 있다. 순종자에게는 복으로 쓰는 거지만 불순종자에게는, 교만한 자에게는 재앙으로 써버린다. 원리가 그렇게 돼 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 사람이 바로 서야 한다.
본문의 무리들이 모인 바닷가는 세상의 축소판이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세상이 훤히 보인다. 점쟁이 속도 다 보인다. 무리들이 모인 그 바닷가는 세상의 축소판인데, 모인 무리들이 자라난 곳이 다 다르듯이 생각도 다 다르다. 소원도 목적도 취미도 남녀노소 빈부귀천 다 다르다. 한 집의 형제들도 그 마음 정신 취미가 다 다르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그런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실 때 어느 기준으로 말씀을 하실 것이냐? 모인 무리가 많으니까 남자를 기준으로 하고 말씀을 하실까, 여자를 기준으로 하고 말씀을 하실까, 청년을 기준으로 말씀을 하실까? 아니면 부자를 기준으로? 아니면 가난한 사람을 기준으로? 아니면 세상 도덕을 기준으로? 아니면 봉사를 기준으로? 아니면 세상 성공을 기준으로? 예수님께서 누구의 기준에 맞춰서 가르칠 것이냐? 늙은이 젊은이 아이들 다 다른데 누구 기준에 맞춰서 가르칠 것이냐?
그 바닷가 모래 위가 세계 인류의 축소판이다. 그러니까 어느 나라 기준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것이냐? 세상기준은 없다. 모인 그 무리들은 믿고서 하늘로 올라갈 것이니 하늘의 정신, 하늘의 마음, 하늘의 소원 목적, 하늘의 취미, 하늘의 것으로 넣는다.
예수님께서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못 올라간다’ 했는데 그러면 이는 어른 기준이냐, 아이 기준이냐? 아이 기준이다. 그러면 어린아이들은 다 천국에 가느냐? 어린아이들이 예수님의 그 말귀를 알아들을까?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이 말씀은 눈에 보이는 것을 가지고 보이지 않는 것을 생각하게 하는 것인데, ‘나는 어른이다’ 하는 건 다 컸다는 그 말이다. 어른이라도 ‘나는 아직 아이입니다’ 하면 ‘키가 더 큰다’가 아니라 ‘어린아이가 자라듯이 아는 것이 더 자라야 합니다’ 하는 뜻이다.
지금 이 자리에 십년 전에, 오년 전에, 일년 전에, 하루, 전에, 지난주에, 오늘 나왔다 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아는 그 자람성이 처음 예수 믿으면서부터 옳은 진리이치를 바로 깨달았으면 엄청나게 자랐을 텐데, 실력이 그렇게 클 텐데 예수 믿으면서 맨날 세상 부자 되기 위해서 예수를 믿었다면 그 사람은 어른이라도 하나도 자라지 못한 것이다. 깨닫고 아는 면에서 자라지 못한 것이다.
사실 이건 어린아이와 같다 라기 보다, 어린아이는 자라는 것인데 수십 년을 믿어도 자란 게 없으면 이건 뭐냐? 어린아이가 아니라 난쟁이다. 난쟁이가 정상이냐, 비정상이냐? 비정상이다. 나이는 먹었어도, 교회는 오래 다녔어도 깨닫고 아는 면에서 이치적으로 자란 것이 없으니 그 머리가 어디에 속한 것이냐? 그러니까 수 년 수십 년을 믿어도 사람이 참 어리석다.
그러니 그 모양이 일상생활에도 나타나고, 사회생활에도 나타나고, 인인관계 면에서도 나타나게 된다. 사건을 하나 처리하는데도 어리석음이 나타나고, 물질을 갖고 있어도 유용하게 쓸 줄 모르니 어리석음 나타나고.
물질은, 돈은 사람을 위해 쓰는 거다. 그런데 사람이 그 면에 이해타산을 따질 줄 모르면 그만큼 미련한 것이다. 이런 사람은 그 돈 때문에 사람을 잃는다. 그러면 사람도 날아가고 돈도 날아가게 된다. 이게 어리석은 사람이다.
일반적으로도 영리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물질보다 사람이 우선으로 들어간다. 하물며 예수 믿는 사람은 더 그런 것이다. 사람의 차원을 깨닫게 해서 올린다. 이러면 총명하고 영리하고 지혜롭게 된다. 꼬리가 아닌 머리가 된다.
2절: 예수님께서 왜 여러 가지 비유로 가르치실까? 비유 속에 하나님의 뜻이 들어있다. 창조주 하나님은 눈에 안 보이지만 하나님은 실상이시다. 현재 자기가 육신을 가지고 있지만 이건 임시성적이요 현상적인 거다. 이 자기 속에 하나님을 닮은 참 자기 실상이 있다. 믿는 사람마다 그게 있는 거다.
보통 보면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은 허상을 보고, 껍데기를 보고, 가진 것을 보고 사람을 논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논하지 않고 그 사람의 양심이 ‘진리를 따르느냐, 세상지식을 따르느냐’ 하는 그 양심을 보고 역사해 들어간다. 그럼에도 믿는 사람이 껍데기만 붙잡고 가치판단을 하는 것은 실상이 없는 자요 허상적인 사람이다. 사람이라 할 때 몸보다 더 중요한 게 그 사람의 정신 혹은 마음이다.
자기를 만든 창조주 하나님은 실상적인 존재다. 그러나 우리 인간 육신의 눈에는 보이지를 않는다. 왜? 영이시기 때문에. 눈에 보인다면 그게 무슨 하나님이냐? 따라서 영이신 그 하나님의 뜻은 더욱 알기가 어렵다. 성령님의 도움이 없이는 안 된다.
인간창조의 목적인 구원 즉, 하나님의 온전으로 성품화 되는 이걸 구원이라 하는 건데 예수 믿으면 이것이 바로 들어가야 한다. 쉽게 말하면 예수 믿으면 예수를 닮아야 한다. 그 선생 밑에서 배웠으면 그 선생을 닮는 게 이치다.
하나님께서는 이 구원을 깨달아 알게 해 주시려고 여러 가지 물질과 사건과 환경과 시간과 존재와 존재들의 활동과 그 생김새의 모양과 형태와 현상들을 총 동원시켜서 즉, 세상 물질계와 신령계의 영물들을 천군천사들을 총 동원시켜서 이것들을 비유로 써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해 주신다. 그러니 현재 우리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우리에게는 깨닫게 해주는 비유로 작용하는 거다. 깨달을 게 천지라. 전부는 깨달을 거라.
손으로 만지고 활동하고 눈으로 보는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비유인데 이 세상에 살면서도 한 이치도 못 깨닫고 그 일생이 죽어서야 말이 되느냐? 산다는 게 전부는 깨달음으로 들어가 있는 건데 한 이치도 못 깨닫고 간다면 이건 결국 똥오줌 싼 것밖에 없는 거다. 그렇게 살면서 잘 살아봐야 먹으면 뒤로 빠지는 거 먹고 산 것밖에 없고, 잘 입어봐야 화장터에 들어가면 다 타질 걸 입고 산 것밖에 없는 거다.
화장터에서나 결혼식장에서 어리석은 자들을 속여먹기 참 쉽다. 죽은 사람 눕혀놓고 ‘마지막인데 최고의 수의를 입고 가게 해야 하지 않겠느냐’ 한다. 불타질 것에 돈 들이지 말라. 나 죽을 때는 평상시 입던 옷을 깨끗하게 세탁해서 입혀서 불속에 넣으면 된다. 불타질 것에 돈 들이지 말라. 정말 어리석다.
여자들 시집갈 때 입는 모기장 같은 옷 그게 얼마냐? 우리는 평소 입는 옷 입고 장가갔어도 아기만 잘 나오더라. 그런 쪽으로 자꾸 마음이 가는 건 그게 다 물질성인데 물질성 쪽으로 인생의 향락 소원 목적을 자꾸 가지면 사람이 못써져 버린다.
앞으로 처녀총각들 결혼할 때 총각 입장에서 아내 될 사람에게 아무 것도 가지고 오지 말고 덕망을 잘 쌓은 그 정신 몸을 가지고 오라고 하라. 또 여자 입장에서 남편감보고 ‘아파트 사놨느냐’ 그거 묻지 말고 ‘얼마나 부지런하고 예수 잘 믿느냐’ 그걸 봐라. 그러면 아파트 몇 채도 들어있다. 게을러터지고 돈만 좋아하면 아파트가 있은들 뭐하느냐? 다 날아가게 된다. 그래도 아파트 한 채는 있어야 하느냐? ‘그래도’가 병이다. ‘그래도’ 라는 병이 있다.
사람에게는 육체의 미모성, 심모의 미모성, 영모의 미모성이 있는데, 우리는 영모의 미모성이다. 영모의 미모성을 잘 닦아놓으면 하나님 보시기에 ‘이걸 줄까 저거 줄까, 이 사람 줄까 저 사람 줄까’ 하신다. 그런데 사람이 자기의 마음을 닦을 줄을 모른다.
본문의 바닷가에서 예수님 앞에 모인 무리들은 창세 이후 마지막까지의 세상 축소판이요, 또 모든 교회들의 축소판이니 그 무리 속에는 현재 자기의 마음도 거기에 들어있는 거다. 빠진 사람은 하나도 없다. 인간이란 인간은 창세 이후 다 거기에 들어있다.
인공위성을 타고서 하늘로 올라가면 땅에 있는 사람이 개미처럼 작게 보인다. 더 올라가면 땅에 있는 사람이 아예 안 보인다. 그러면 안 보인다고 해서 땅에 사람이 없는 거냐? 없는 게 아니다.
거기서 계속 더 올라가서 보면 땅에 사람은 안 보이고 지구 덩어리만 보인다. ‘미국이다. 러시아다’ 하는 땅 모양만 보인다. 그리고 지구는 돌고 있다. 그러면 그 속에 자기가 없는 거냐? 있는 거다. 사람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있는 거다.
역시 본문 성경의 바닷가는 세상 사람들의 축소판인데 이 무리 속에 자기도 들어있는 거다. ‘무리’라고 하는 그 사람들 속에 자기의 소원 목적도 들어있다. 자기라고 빠져 있느냐? 아니다. 어린아이라고 빠져 있느냐? 아니다. 다 들어있다. 그걸 보는 눈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무리’라는 뜻은 하나님의 의사단일이 아닌 제각각의 성격과 성질과 취미와 소원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어느 한 사람만을 꼭 집어서 말할 수는 없다.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 밭을 네 가지 밭으로 축소시켜서 비유를 하는 거다. 그래서 여기 네 가지 밭의 비유에 자기의 마음 밭도 들어있는 거다. 자기의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밭이다.
인간의 기준이 되시는 예수님은 인간들의 마음 밭을 모르심이 없이 잘 아는 창조주 하나님이시요,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말씀이다. 인간 자기가 자기의 마음 밭을 깨닫지 못하고 산다면 자기의 존재가치는 없는 거다.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은 자기 마음 밭이 돌짝 밭인지, 가시 밭인지, 길처럼 딱딱한 밭인지, 좋은 밭인지 전혀 모른다. 하지만 그 네 가지 밭 중에 자기 마음 밭이 들어있는 거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말씀의 쟁기로 자기 마음 밭을 결실이 나올 수 있게 좋은 땅으로 갈아엎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 보기에 ‘아이고, 저 사람 마음 좋다. 착하다’ 할지라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따먹고 영이 죽고 타락되고 저주 받은 마음이니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신령한 마음으로 갈아 넣어야 한다. 그래야 사람이 정신이 깨끗하고 소원도 깨끗하고, 지혜지식도 세상에서 없는 지혜지식이요 판단이 되는 거다. 이렇게 되면 자녀교육도 바로 돼 들어가고 부부사랑도 바로 들어간다. 안 그러면 세상바람을 따라 사는 뿌리 없는 인간이 된다. 이 사건에서 마음이 이렇게 흔들리고, 저 사건에서 저렇게 흔들리게 된다. 그래서는 안 된다. 사람이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을 대상으로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영원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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