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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서 나가서 뿌릴 새.

마가복음 궁극이............... 조회 수 659 추천 수 0 2015.08.30 17:0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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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막4:1-9 
설교자 : 김경형 목사 
참고 : 궁극교회 주일예배 

4장 1절-9절: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시니 큰 무리가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 바다에 떠 앉으시고 온 무리는 바다 곁 육지에 있더라 이에 예수께서 여러 가지를 비유로 가르치시니 그 가르치시는 중에 저희에게 이르시되 들으라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쌔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치 못하였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와 육십 배와 백 배가 되었느니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농부가 왜 씨를 뿌리느냐? 열매, 소득을 많이 얻기 위해서 뿌린다. 사람들이 생업의 모든 분야에서 일하는 것을 보면 전부는 씨를 뿌리는구나. 소득을 얻기 위해서 전부는 씨를 뿌리는구나. 그런 이치를 볼 수가 있다.


학교 선생님들도 학생들에게 씨를 뿌리는 거다. 여러 명이 받고 나가서 사회적으로 또 씨를 뿌리게 된다. 많이 받아야 또 그만큼 사회적으로 개인적으로 다각적인 면으로 소득이 있다. 모든 사람은 씨를 뿌린다.


씨도 씨 나름이라서 죄악의 씨를 뿌리면 어떻게 되느냐? 재앙으로 멸망을 받는다. 우리 모두는 자기 사는 것이 씨를 뿌리고 또는 뿌림을 받는 거다. 이거 생각을 깊이 할 줄 알아야 한다.


창세 이후 세상 모든 인류 인간은 사는 동안에 자기의 많은 소득을 위해 유형 무형의 씨를 많이 뿌리고, 또 많은 씨 뿌림을 받는다. 그런데 여기서 영원히 가는 참 소득이 있고, 임시적인 소득이 있음을 알고 살아야 할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은 그 면에 대해 모른다. 이방 종교인들도 모른다. 성경, 교회, 기독교 외에 다른 그 어떤 종교라도 영원히 가는 참 소득성을 모른다.


알고 모르는 여기에는 큰 차이가 있다. 궁극적인 면을 미리 갖다놓고 보면 엄청난 소득의 격차가 생긴다. 그래서 우리가 교훈 면에서, 특히 교회의 교훈 면에서 심각하게 구별하고 분별하는 거다. 그냥 ‘교회 다닌다. 친구 따라 부모 따라 그냥 교회 다닌다’가 아니라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불문하고 그 소득은 각 개인의 노력 하에 달린 것이다. 자기의 노력에 따라 영원히 죽고, 영원히 살고 하는 그 소득이 들어있다. 목사님들도 그 면에 대해 깊이 생각을 해야 한다. 안 그러면 큰일 난다.


참 소득에는 자기의 구원목적이 들어있고, 구원목적이라 함은 하나님의 속 성품을 닮는 것을 말한다. 속 성품이란 하나님의 지혜지식성을 닮고, 선 사랑 거룩 진실성인 하나님의 도덕성을 닮는 것. 즉, 그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것. 또 하나님의 의와 주권성을 자기가 갖는 것. 이렇게 사람이 인격화 되고 실상화 되고 사상화 되는 것.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것을 갖는다. 혹은 닮는다. 혹은 하나님의 것으로 성장한다. 예수 믿는 것에는 이게 들어있다. 예수 믿는 자기 속에 하나님의 것이 얼마나 빨리 성장하느냐 늦게 성장하느냐, 아니면 성장을 안 하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을 닮는 것이다.


일반사람들은 이걸 못 본다. 그냥 ‘먹고 마시고 잘 사는구나’ 이렇게 보는 거지만 ‘하나님 앞에 그 사람이 잘 사는구나, 못 사는구나’ 하는 것은 자기 노력에 의해서 하나님의 실상적인 속 성품이 입어지는데 따라서 되어지는 것이며, 이것이 자기 평생에 삶의 길이 된다. 자기가 사는 것이 되는 거다.


인간이 사는 게 밥 먹고 똥 싸는 것으로 기준을 삼는 게 아니다. 온 세상이 아무리 그런 기준을 가지고 산다고 해봐야 먹고 마시다가 결국은 진노의 심판으로 쓰레기로 무더기로 들어가게 된다. 왜 그러냐? 하나님의 인간창조의 목적이 그게 아니기 때문이다.


신명기 28장을 우리가 읽었지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한 번 해 봐라. 살아봐라. 만들어져 봐라. 그러면 들어가도 나가도 복을 받는다’ 하는 게 뭐냐?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지 들어가도 나가도 사람이 넘어짐이 없는 자가 된다는 것이다. 물질소득은 구태여 말할 필요가 없다. 사람 소득이 엄청나게 성장되는 거다.


그런데 세계적인 면으로 말씀이 선포되는 걸 보면 믿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속성을 자기의 인격화 시키는 사람이 극히 드물구나. 그래서 이 말씀을 해 놓은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 믿는 거 바로만 깨닫고 바로만 믿는다면 경주 해 볼 만하다.


세상 안 믿는 사람들은 세계 최고의 직장이나 죽을 때까지 노후대책 보장을 생각하지만 아니다. 이게 뭔가가 자기 속에서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하나님의 성품을 입으며 살아봐야 되겠다’ 하는 마음이 있다면 이건 성령님의 감화 감동이다. 하나님의 신의 감화 감동이다.


그런데 세상이 워낙 아름답게 보이고 크게 보이니까 어떻게 조물조물해서 먹고 마시며 자기도 그렇게 살아보려고 한다. 그러면 그렇게 한다고 해서 자기 뜻대로 되느냐? 세상에서 큰 포부를 가지고 세상을 가지려고 한다고 해서 그게 다 안겨지더냐? 그렇지 않다.


일을 하는데 있어서 바로 소득적인 면으로 들어가면 자기가 물질적인 소득을 가질 수가 있듯이 참 소득에는 자기의 구원목적인 하나님으로 닮아가는 것이 들어있다. 이게 참 소득이다. 힘 것 노력 것 해도 소득이 없는 곳에서 노력을 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우리가 신체적으로 보면 자기 몸이 어느 한 쪽이 고장이 나면 아무리 잘 먹고 영양가가 있는 것을 먹어도 소용이 없다. 그러나 몸이 튼튼하고 건강하면 좀 못 살고 좀 못 먹어도 먹는 족족 영양가로 들어간다.


예수 믿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존재목적을 생각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 참 소득이 나오는 면으로 예수를 믿어라. 이게 자기 평생의 복이다. 임시적인 소득은 생활의 방편임을 알아야 한다. 이건 부업이다.


그런데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임시적인 소득을 원 소득으로 생각을 하니 살기가 힘들다. 이건 사고가 비뚤어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생명과 따먹고 에덴동산 안에서 자기가 소득을 얻으면 얼마나 편할까? 그런데 생명과는 안 따먹고 선악과 따먹은 불순종을 가지고 에덴동산 밖에서 사니 하나님의 보호가 어디 있느냐? 에덴동산 밖은 하나님께서 마귀에게 맡겨 놨다. 이게 무슨 말이냐? 자기 사상과 정신 소원 목적이 세상으로 나가 있다면 그 관할은 마귀에게 맡겨진 것이다.


오늘 본문은 ‘인간아, 네 마음 밭에 너를 지으신 창조의 목적에 맞게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의 씨앗을 심어서 영적인 소득을 1백 배로 많이 만들어 오너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인간 너를 지은 하나님께서 너보고 그렇게 말씀을 하시는 거다.


사람이 먹지 못할 것을 먹으면 몸에 병이 든다. ‘네가 왜 못 먹을 것을 먹느냐? 그러니 병이 왔다’ 하는 것이다. 너에게 병이라는 것으로 하나님의 책임추궁인 줄 알아라. 음식을 먹는 것도 그렇지만 정신적인 면에서도 ‘무엇을 주식으로 하고 먹느냐’에 따라서 책임추궁이 들어오는 거다. 생명과 말씀을 바로 먹으면 하나님께서 자기를 지은 목적대로 살고픈 마음이 생기고, 또 자기 몸을 그렇게 이용 사용 활용해 나가게 된다. 몸은 사용성이라.


사람이 예수 믿고 교회 다녀도, 열심 충성봉사로 목숨을 던졌어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진리이치의 생명의 말씀을 받은 것도 없고 알지도 못하고 살았다면 그 사람은 평생을 목숨 바쳐서 예수를 믿어도 아무 소득이 없는 인생이다. 교회에 아무리 오래 다니고, 열심 충성봉사를 하고, 집사고 권사고 장로고 목회를 했다고 해도 아무 소득이 없이 예수 믿는 자가 부지기수다.

물론 교회 인도자들은 그걸 가르치고 알게 해야 하고, 교인들은 자기가 어느 교회에 가도 속지를 말아야 하는데 그만 하나님 앞에서의 소득이 있는 인생을 알지를 못해서 소득이 없이 믿는 자가 많다.


사람의 마음바탕에 말씀의 씨를 뿌릴 때는 소득을 바라보고 뿌리는 거다. 일반이치도 마찬가지다. 일반이치의 법칙을 보고서도 예수 믿는 소득을 모르는 멍청한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되겠느냐? 그러니 교회를 우습게보고 다니는 거다.


‘들으라’ 하시는 것은 이제는 귀담아 듣고 잘 깨닫고 이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하나님의 성품으로 온전히 영능의 실력화로 영적 소득을 많이 올리라는 말씀이다.


목사님들은 정말 옳은 진리이치의 말씀을 성도들이 귀담아 듣게 해야 하고, 교인들은 자기 마음 밭에 말씀을 많이 받았으면 세상에서 자기의 생업을 위해 사는 그곳에서도 얼마든지 영적 소득을 많이 얻을 수 있다. 내가 볼 때는 그게 더 재미있을 것 같다. 다른 말로 하면 자기 일터가 자기를 키울 수 있는 전도처라. 자기가 목사는 아니라도 자기 직장에서 모든 동료들이 ‘아무개씨, 옳은 말씀을 좀 들려주십시오’ 한다면 그 얼마나 신나는 일이냐?


일반사람들 가운데 살면 다른 사람의 본이 돼야 하고, 믿음의 사람들 가운데 살면 그 신앙심이 돋보여야 한다. 그 사람을 보본을 삼아 다른 사람들이 따라오는 그게 머리 되는 사람이다. 그 장소에서 머리 되는 사람이다.


이게 다 어디서 나오는 거냐? 깨닫는 데서 나오는 거다. 이런 자는 자기가 자기를 치리하고 다른 사람도 치리할 수가 있는 거다. 자기 치리도 못하는데 어떻게 남을 치리하겠느냐? 자기가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고 있는데 누가 자기 소리를 듣겠느냐? 하나님께서 못 듣게 만드신다.


이 세상은 인생 자기를 바로 만드는 훈련장이다. 이 세상에 살면서 예수님을 헛 믿으면 절대로 안 된다. 구원이 없이 헛 믿으면 절대로 안 된다. 인생 헛 살면 절대로 안 된다. 영적 깨달음이 없는 예수는 믿지 말라.


4절: 뿌리는 자가 나가서 씨를 뿌렸는데 더러는 어디에 떨어졌느냐? 길가에 떨어졌다. 길가의 밭을 보면 농부가 씨를 뿌리다가 바람이 불면 길 쪽으로 씨가 떨어지기도 한다.


여기서 먼저 우리가 알아두어야 할 것은 길이란 인생이 출생해서 죽음의 고개를 넘는 순간까지의 삶의 노정을 말한다. 모든 인간은 사느라고 길을 가고 있다. 사느라고 왔다 갔다 하는 그게 삶의 방편이다. 집에서 출발해서 직장에 가서 해가 지면 일을 마치고 집으로 왔다가 다음날 다시 직장으로 출발을 하는 그게 인생 사는 노정이다.


인간이 육신의 눈으로 볼 때는 그렇게 보이는데, 왔다 갔다 하는 그것을 신앙 사상적으로 죽 늘어뜨려 보면 출생에서 죽음의 고개까지 연속으로 씨를 부리며 가는 거다.


예수를 믿어도 선악과를 따먹는 사람이 많은데, 자기 눈으로 보는 시각적 시감성에 목적을 갖는 것이 선악과를 따먹는 것이다. 눈으로 보이는 것은 물질의 것이고 세상에 있는 것이다. 자기가 사는 목적을 거기에 두고 ‘내가 저걸 이뤄야 되겠다’ 하며 그 목적을 위해서 예수이름을 당겨다 그걸 도와달라는 이게 선악과다.


세상의 일터는 이리 저리 바뀌는 건데 자기에게 주어진 환경에 빨리 적응을 하면 하루 세끼 밥 먹는 거는 아무 것도 아니다. 우리는 어느 장소에서 어떤 일을 하던, 또 환경이 뒤바껴서 딴 일을 하더라도 자기에게 주어진 현실에서 영적 수입을 보고 가야 한다.


눈에 보이는 것을 목적하고 예수이름을 등용시킨다면 이건 선악과를 따먹는 목적이다. 우리는 삶의 생업을 예수님을 잘 믿기 위해서 하는 거다.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이루기 위해서 하는 거다.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생업을 하는 거다.


생업이라고 하는 것은 그 방편을 통해서 상대와 대화를 할 수 있는 매개물이다. 일을 하다가 친해지고 대화를 하다가 친해지고, 또 같이 예수를 믿으면서 하나님의 성품으로 만들어지는 고차원적인 사람으로 같이 가는 거다. 그 얼마나 재미가 있겠느냐?


돈 벌 목적으로 돈에 신경을 쓰다보면 이 돈 때문에 서로 의가 상하고 원수가 되고 격하면 죽이게도 된다. 선악과 따먹은 사상을 가지면 자기 속에서 많은 죄악이 나타날 수 있는 상태가 된다. 쉽게 말하면 구정물 속에 여러 가지 벌레가 이는 것과 같다.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 모든 인생은 죽는 순간까지 세상의 것, 눈에 보이는 것, 물질의 것을 붙잡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살아가는 삶의 노정이다. 지금도 그렇게 가고 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이후 계속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그 약속을 믿고 나갔고, 죽음의 순간까지 한 평생 그렇게 살아온 삶의 노정이었다. 인생 삶의 길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부로 잡고 살았다. 이렇게 살아온 삶의 노정에서 그 좋은 마음 밭에 말씀의 씨가 떨어졌다.


이런 아브라함에게 바닷가의 모래 같고 하늘의 수많은 별과 같이 많은 후손들이 약속이 되었고,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아브라함을 통해 많은 사람이 복을 받게 되었다. 사람 복 말이다.


‘길’ 그럴 때에 우리 모두는 길을 가는 인생인데, 그 마음 밭이 길가에 떨어진 것처럼 돼 있는 사람이 있고, 좋은 밭처럼 돼 있는 마음 밭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길가에 떨어진 씨처럼 되어 있는 마음은 말씀을 들었어도 말씀이 주격이 아니고 여전히 마음 가운데 세상과 세상 것이 주격이 되어 있는 마음이다. 이해타산이 물질이고 소원이 재산이고 세상자랑이다.


아브라함과 롯을 대조해서 보면 롯은 말씀을 받았으나 그 마음 가운데는 세상물질로 들어가 있다. 그러니 그의 마음에 떨어진 말씀은 길가에 떨어진 것처럼 굴러다니고 있다. 롯과 그 식구들이 그랬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하는 복된 말을 귀 밖으로 들었다.


‘더러는 길가에 떨어졌으니.’ 사람들이 밟고 다녀서 딱딱해진 길가에 씨가 떨어졌으니 심겨지지가 않았고, 또 씨가 노출이 되어 있으니 새들이 와서 홀딱 주워 먹었다. 그러니 씨가 참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만일 흙이 좋은 밭에 떨어졌다면 백 배의 결실을 볼 텐데 그 말이다.


믿음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사람이 들었더라면 백 배 천 배 만 배의 결실이 나올 텐데 들어도 귀 밖으로 듣고, 마음은 많은 사람이 밟아서 딱딱해져 있으니 말씀이 그 마음에 심겨지지 않고 돌아다니고 있다. 한 쪽으로 치워져 있다. 그런 마음상태를 말하는 거다.


씨를 가만 보면 콩 하나가 떨어지면 몇 개가 나느냐? 콩 하나가 떨어지면 백 개가 뭐냐? 엄청난 거다. 콩이 주렁주렁 열려있으면 보기만 해도 어떻게 복스럽게 보이는지? 백이라 하면 엄청나게 많은 걸 말하는 거다. 하나 심은 게 백 개가 열린다면 심을만한 거다. 그런데 밭이 좋지 못하면 콩을 하나 심어도 콩이 많이 열리지도 않고, 열린 것도 시들시들 해서 보기가 그렇다. 예수 믿는 사람도 그런 형태가 있겠다.


조는 씨가 엄청나게 작다. 그 하나가 떨어져서 나면 열매가 몇 개가 되느냐? 엄청나다. 정말 이 맛에 씨를 심는구나. 목사님들도 그런 생각을 좀 가져라.


예수님께서 오실 때 자기가 뿌린 말씀을 받은 사람이 아브라함처럼 하늘의 별과 같이 많기도 하지만 그 수준이 하늘처럼 고상한 자들이 되어있다면 얼마나 좋으냐? 바닷가의 모래는 물이 못 들어오게 하는 경계선 역할이다. 이렇게 된다면 정말 예수 믿을 만한 것이다.


잘못 씨를 뿌리면 망해도 그렇게 망할 수가 없는 거지만 옳은 생명의 씨앗을 바로만 심어놓으면 이거는 흥해도 그렇게 흥할 수가 없는 거다. 이건 세계 제일의 부자다. 그러니까 그게 자기 나라가 되는 거다. 예수 믿는 건 그게 들어있는 거다. 그냥 믿는 게 아니다. 그냥 듣는 게 아니다.


그리고 옳은 진리이치를 들으면 진리이치의 사람이 돼야지 늘 옳은 것을 들으면서도 자기 마음속에 세상성이 가득 들어있다면 들으나 마나다. 그럴 바에야 아예 딴 데 가서 부자 되는 것이나 듣는 게 낫지 옳은 것을 듣는 가치가 없지 않느냐? 씨가 아깝지 않느냐? 이런 면에서 보면 구약의 선지자들의 노력을 헛되게 만드는 거다. 선지자들의 노력은 그게 피 뿌림인데 그 피 뿌림을 헛되게 만들면 자기에게 재앙이 들어간다. 저주가 들어간다.


대학교에 가서 전문적으로 배울 때는 그 길로 나가려는 건데 배워놓고서는 배운 것을 가르치지도 않고 그 길로도 가지 않는다면 그 돈을 어디에 버린 거냐? 그걸 생각을 할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신앙도 생각을 할 줄 알아야 한다.


사람이 뭘 배웠으면 그걸 가르치고 제자로 만들고 자꾸 키워나가는 게 사회다. 그런데 배운 거 써먹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면 그 뭐하는 인생이냐? 자기가 힘이 좋으냐? 좋은 그 힘을 건설에 써야 한다.


교회의 교훈이 사람에게 아무 유익이 없는 교훈이라면 이거는 마귀 짓이다. 영적 면이나 일상생활에 아무 쓰임 안 되니 쓸모가 없다. 그래서 그런 자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독사의 자식들아’ 하시는 거다.


이런 말을 할 적마다 개인적인 욕심이 늘 있는데, 우리 교인들이 진리의 역군이 돼서 세계적으로 각 나라에 하나씩만 심는다고 해도 모자랄 것 같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 둥 마는 둥 하고 있다가 슬슬 죽고 사라지고 하면 예수 믿는 의미도 없는 거고 세상 사는 의미도 없는 거다. 그거 어디 쓰겠느냐?


인생으로 태어났다면 ‘하나님 앞에 내가 이 땅에 살다 갑니다’ 하는 인간창조의 목적을 남겨야 할 것이 아니냐? 모든 만물이 뿌리로 남기고, 씨로 남기고 하는데 인생 나는 뭘 남기고 가느냐 그 말이다.


남의 자식이고 내 자식이고 간에 정말 말씀의 노선에서 진리이치대로 삶이 들어가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일꾼이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 하나님의 일꾼이 되는 것을 네가 마다하지 말아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네가 거역치 말아라. 거역하게 되면 네 존재목적은 없어진다.


나는 남의 집 자식이나 내 집 자식이나 똑같이 취급을 한다. 교훈에서 말씀이 깨달아지고 그 말씀대로 바로 살면 하나님이 올리실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안 믿는 사람처럼 취급을 해 버린다. 그러니 백 배의 결실을 생각을 하라. 옳은 진리이치 생명이치를 받고 삶이 바로 돼 있다면 결실이 되는 거다. 안 되는 것을 하나님께서 약속한 게 아니다.


5절, 6절: 얕은 돌밭에 떨어진 씨는 뿌리를 깊이 내릴 수가 없어서 해가 돋으니 햇볕에 타서 죽었다. 자기 밭의 돌을 골라내고 씨를 뿌린 후에 물을 주었더라면 그 씨가 안 죽고 백 배의 결실을 얻었을 텐데 그만 죽어버렸다


7절: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는 자라서 잎이 났지만 가시가 자라서 곡식의 기운을 막아버렸다. 잎이 가시에 이리 저리 찔리니 갈갈이 찢어진다. 이것 역시 백 배의 결실이 없이 죽었다. ‘가시나무를 쳐 없앴다면’ 하는 마음이 든다.


8절: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와 육십 배와 백 배가 되었느니라.’ 결실을 하되 몇 배의 결실이 더 좋으냐?


이제 네 가지 밭 중에 어느 밭이 가치가 있다고 보는 거냐? 하나님도 백 배의 결실된 땅을 가치가 있다고 보시느냐? 좋은 밭도 30배 60배 100배라는 여기서 결실에도 차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9절: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으라.’ 소리로만 듣는 귀가 있고, 소리 속의 뜻을 알아듣는 귀가 있다.


어떤 뜻을 말하는 게 거짓 종이고, 어떤 주장을 하는 것이 이단이냐? 어떤 뜻으로 말하는 것이 마귀의 말이고, 어떤 뜻으로 말하는 것이 진리이치를 뒤집는 말이 되겠느냐?


씨도 씨 나름이라서 자기에게 소득 되고 안 되고 하는 씨가 있고, 또한 생명이 없는 씨도 있고 씨가 안 좋아서 나다 마는 씨도 있는데, 본문은 좋은 씨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씀이다. 천국복음의 씨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씀이다.


그런데 또 한 문제는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천차만별이라는 점이다. 예수 믿는 자기가 오늘날까지 며칠, 아니면 몇 년, 아니면 몇 십 년을 믿어왔는데 자기 속에 깨달음을 두고 생각을 해 볼 때에 ‘내가 무슨 밭이었나’ 하는 것을 생각을 해 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밭을 보여주는 거다.


비유적으로 자기의 마음은 밭이다. 오늘 이후로 자기 마음 밭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생각을 못한다면 이는 어떤 사람이라고 말해야 할까? 학교에서도 공부시간에 선생님의 말을 안 듣고 장난이나 하고 있고, 선생님이 교실에서 나가면 뛰어다니고, 다른 애들 못살게 굴고, 돈이나 뜯고 하면 선생님 입장에서 그런 아이를 어떻게 볼까? 희망이 있다고 볼까? 인생으로서 그 미래가 참 비참한 거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보신다. 당신은 성령의 눈이요, 당신께서 사람을 만드셨고 마음을 만들어 넣어 주셨으니 이 성령의 눈으로 우리를 감찰하신다. 그러니 자기 마음 밭을 생각을 해 봐라. (계속)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을 대상으로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영원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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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62 역대상 다윗이 받은 복 대상14:1-12  김창인 목사  2015-08-29 928
12461 역대상 하나님께 문제를 물어보자 대상14:10-11  이성희 목사  2015-08-29 873
12460 역대상 하나님께 물어보고 합시다 대상14:8~17  최일환 목사  2015-08-29 618
12459 역대상 하나님께 묻고 행하라 대상14:8-17  김영헌 목사  2015-08-29 674
12458 역대상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하여 대상14:8-17  이수영 목사  2015-08-29 378
12457 역대상 하나님께 묻는 자 대상14:8~17  김광일 목사  2015-08-29 709
12456 역대상 하나님께 묻는 기도 대상14:8-17  박찬길 목사  2015-08-29 761
12455 역대상 다윗이 받은 복 대상14:1-12  이희대 목사  2015-08-29 597
12454 역대상 깨달음의 신비를 깨닫게 하소서 대상14:1-2  강문호 목사  2015-08-29 552
12453 역대상 명령하신 대로 대상14:8-17  윤현택 목사  2015-08-29 336
12452 역대상 우리 승리 합시다 대상14: 8-17  박현진 목사  2015-08-29 341
12451 역대상 먼저 하나님께 물어보고 하십니까 대상14:8-17  김충현 목사  2015-08-29 345
12450 룻기 하나님의 능력 룻2:10-23  강승호 목사  2015-08-28 453
12449 시편 환경과 신앙 시1:1  한태완 목사  2015-08-27 759
12448 디모데후 비교의식을 버리고 감사하라 딤후2:20-21  한태완 목사  2015-08-27 1051
12447 에배소서 하나님의 우주적 진리 엡6:10-20  강승호 목사  2015-08-26 379
12446 디도서 부족함을 채워주는 자 딛3:1-11  최장환 목사  2015-08-25 1030
12445 시편 고통이 희망의 증거 시43:1-5  최장환 목사  2015-08-25 458
12444 마가복음 네 가지 밭의 비유. 막4:1-9  김경형 목사  2015-08-25 1075
12443 마가복음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시니. 막4:1  김경형 목사  2015-08-25 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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