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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시59:1-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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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참고 : | 실시간 온라인 새벽기도(1622) 2015.5.26 |
승리를 현실로 만드십시오
(시편 59편 1-17절)
< 삶의
목적을 잃지 마십시오 >
며칠 전, 대한항공 회항 사건의 피해자 여승무원이 뉴욕 법원에 대한항공을 상대로 300억 피해보상
소송을 냈고 남자 승무원은 500억 원 소송을 낸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큰 기대를 하고 내겠지만 소송 과정에서 상처만 커지고 승소 가능성은
로또에 맞을 가능성보다 사실상 더 없어 보입니다. 미국 사법제도에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가 있다고 해서 미국 법정과 판사와 배심원이 그런
케이스들을 쉽게 받아줄까요?
징벌적 손해배상이 성립되려면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의도성, 반사회성, 경제적인 피해 등이 명백해야
합니다. 즉 한 회사가 남의 기술을 의도적으로 훔치거나 모방해서 누군가에게 손해를 끼쳤으면 그 손해보다 훨씬 큰 배상을 하게 해서 저작권을
지켜주려는 것이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의 취지입니다. 그 회항 사건은 회사나 오너의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사건도 아니고 미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한
반사회적인 사건도 아니고 경제적인 피해산출도 애매해서 그 소송이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피해보상 문제가 나오면 어떤
사람은 공공연하게 말합니다. “관용을 베풀면 자기만 손해다. 자기 권리는 자기가 찾아야 한다.” 물론 자기 권리는 찾아야 하지만 그것도 너무
지나치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잃습니다. 그런 지나침을 옆에서 누군가가 부추길 때도 많습니다. 특히 가해자가 돈이 있는 기업이나 사람이면 그
부추김은 심해집니다.
오래 전에 형수님이 잠실의 롯데백화점 통로를 걷다가 통로 위의 큰 샹들리에가 형수님 머리 위로 떨어져서
형수님이 머리에 피를 흘린 채 쓰러진 후 병원에서 몇 바늘을 꿰맸습니다. 유명한 백화점에서 그런 큰 피해를 입었으니 순식간에 갑의 위치가
되었습니다. 백화점 직원들은 형님 집까지 찾아와서 죄송하다고 머리를 숙였습니다.
다음 날 한 지인과 만나면서 우연히 그 얘기를
했는데 그 지인은 고소하겠다고 하고 언론에 알리겠다고 하면서 돈 많은 백화점을 뜯어 한 몫 잡으라는 투로 말했습니다. 그 치사한 충고를 듣고
가까이 하면 안 될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불의한 모습입니까? 그렇게 뜯어낸 돈은 결국 불행의 씨앗이 될
것입니다.
그 날 저녁에 형님 내외분에게 말했습니다. “형님! 형수님! 살다 보면 그런 일도 많이 일어납니다. 가해자가
대기업이라도 병원비 이상은 안 받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다른 쪽으로 형님 가정을 지켜주시고 더욱 보상해주실 것입니다.”
결국 형님 부부는 병원비의 실비만 받고 그 사건을 끝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할 것입니다. “왜 어리석게 남 좋은 일만
하느냐?” 사람들 보기에는 어리석게 보이고 손해처럼 보이겠지만 하나님은 신비한 계산방식으로 미래에 더욱 넘치는 보상을 해주실 것입니다. 정당하고
적절한 보상은 받되 너무 지나치면 안 됩니다. 지나친 이기주의는 남에게 폭력이 됩니다.
사람들은 넘어지려는 담은 더 넘어뜨리고
흔들리는 울타리는 더 흔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피해자도 될 수 있지만 가해자도 될 수 있습니다. 너무 아등바등 살지 말고
남의 몫을 부당하게 빼앗아 자기 배를 챙기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행한 대로 갚아주시는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입니다.
지금 사람들의 마음속 풍경이 많이 일그러졌습니다. 상대 입장에서 생각하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과 서로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사라지고 자기중심주의가 심화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갈등과 다툼은 커지고 있습니다. 그런 현실 속에서 갑질의 피해자 편에 서주는
것은 필요하지만 그것이 또 다른 형태의 갑질이 되면 안 됩니다.
요새 ‘조배죽의 구호’를 내세워 갑질을 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조배죽’이란 “조직을 배신하면 죽는다.”는 말의 약자입니다. 물론 사람은 자기 조직을 위할 줄 알고 위계질서도 힘써 존중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갑질이 용납되면 안 됩니다. ‘조배죽’이란 말은 ‘사배죽’이란 말로 바뀌어야 합니다. ‘사배죽’이란 “사람을 배신하면 죽는다.”는 말의
약자입니다. 기본적으로 사람을 존중해야 합니다.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존중하고 아랫사람은 윗사람의 지시를 잘 따라주어야 합니다. 힘이나 여론이
정의가 되면 안 됩니다. 정의가 힘과 여론이 되게 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불의한 일은 남의 몫을 빼앗아 자기 배를 채우려는
일입니다. 사장이나 사원이나 자기 배만 채우려고 하면 안 됩니다. 500억은 몇 천 명의 승무원들이 1년을 수고해도 얻기 쉽지 않은 이윤입니다.
결국 그 승무원의 회항 손해배상 소송은 이길 확률도 희박하지만 이겨도 수많은 직장의 전 동료들에게 큰 상처를 남기게 됩니다. 그 배상금은 수많은
동료들의 피땀이 어리고 서린 돈이기 때문입니다. 남의 몫도 생각하며 적절하게 자기 몫을 취해야 본인도 떳떳하고 하나님이 그 마음을 기뻐하시고
그의 앞날에 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재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은 교회에 헌금을 많이 하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많이 나누라는 말입니다. 교회에 힘써 헌금하는 이유도 교회가 그것을 잘 쓰고 잘 나눈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손을 펴면
오히려 더 얻고 손을 움켜쥐면 오히려 더 잃습니다. 너무 움켜쥐려고 하면 인생의 짐이 무거워집니다. 반면에 손을 펴면 신령한 은혜가 그 심령과
삶에 임하게 됩니다. 필요하다면 손해도 감수하십시오. 더 나아가 왜 적극적으로 나누십시오. 하나님이 그 삶을 반드시 기억해주실
것입니다.
1996년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을 때 사랑하는 세 딸을 한꺼번에 잃은 변호사가 있었습니다. 첫째 딸은
시각장애인이었습니다. 그때 동생들은 장애인 언니 손을 잡고 즐겁게 조잘대며 삼풍백화점에 갔다가 함께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그 아버지는 세 딸의
보상금으로 받은 돈과 사재까지 더 보태서 맹인학교에 기부했습니다. 딸의 핏값으로 얻은 돈으로 먹는데 쓴다면 마치 딸의 피를 먹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결국 그 보상금은 소중한 곳에 쓰고 자신은 변호사 일을 하며 스스로의 의식주를 책임지겠다고 마음먹은 것입니다. 얼마나 복된
마음입니까?
하나님이 나눔을 도전할 때 자기 의식주도 해결하지 못하면서 나누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의식주에 대한 책임도
중요합니다. 믿음은 현실과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이원론 종교가 아닙니다. 참된 믿음은 능력과 책임감을 증진시켜줍니다. 나눌 수 있는
능력을 기르고 의식주의 기본 책임도 완수하면서 드리고 나누고 베푸는 ‘드나베의 삶’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런 삶의 기본적인 목적을 잃지 않으면
삶의 과정에 위기가 있어도 하나님이 그 위기를 축복의 기회로 만들어주시고 결국 최종승리를 주실 것입니다.
< 건짐 받고 높임
받는 길 >
시편 59편은 표제에 있는 대로 사울이 사람을 보내어 다윗을 죽이려고 그 집을 지킨 때에 지어진 시편입니다.
얼마나 다급한 위기 상황입니까? 다윗은 그런 위기 상황에서 건짐 받고 높임 받았습니다. 그처럼 문제를 극복하고 건짐 받고 높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바른 기도를 드리십시오
본문 1절 말씀을 보십시오.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원수에게서 나를
건지시고 일어나 치려는 자에게서 나를 높이 드소서.” 이 구절에서 ‘원수’나 ‘일어나 치려는 자’는 다윗을 죽이려는 사울과 사울이 보낸 군사들을
뜻합니다. 다윗은 자신을 원수의 손에서 구원하시고 더 나아가 원수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높은 곳으로 자신을 들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또한 ‘악을
행하는 자’와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의 손에서 구원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2절).
당시 사울의 군사들은 다윗을 죽이려고 자객처럼
다윗의 집을 둘러싸고 엎드려 기다리며 다윗을 치려고 했는데 그렇게 다윗을 죽이려는 이유는 다윗의 잘못이나 죄 때문이 아니라 사울의 병적인
시기심과 왕좌를 빼앗길 것이란 염려와 불안 때문이었습니다(3절). 그처럼 자기에게 허물이 없었지만 대적들이 와서 죽이려고 매복했기에 다윗은
주님께 자신을 돕기 위해 깨어 살펴달라고 기도했습니다(4절).
더 나아가 다윗은 기도하면서 자기만 위해 기도하지 않고 기도의
범위를 확대해서 악한 나라들을 벌하고 악인들에게 은혜를 베풀지 말아달라고 기도했습니다(5절). 다윗은 기도할 때 단순히 하나님이 자기편이
되어달라고 기도하기보다 공의의 심판이 이뤄지기를 원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처럼 기도하는 것 자체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른 기도를
드리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2. 입술을 잘 지키십시오
당시 다윗의 대적들은 해가 저물 무렵에 다윗의 집 주변에
잠복한 후 밤에 개처럼 성을 두루 찾아다니며 다윗을 잡으려고 했습니다(6절). 또한 입으로 악을 토하며 입술에 칼을 품고 “누가 듣겠는가?”라고
했습니다(7절). 다윗의 추적자들은 다윗의 목숨만 노리지 않고 다윗을 비방하고 중상모략까지 하면서 자기들의 말은 아무도 듣지 못할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낮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습니다.
어떤 사람은 습관적으로 A 앞에서는 B를 깎아내리고 B 앞에서는
A를 깎아내리면서 열등감을 표출하고 자기를 높이려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계층편견, 빈부편견, 지역편견, 인종편견도 심합니다. 남을 일반화시켜
매도하면 그만큼 자기가 올라가는 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능력이 없고 정신적인 IQ가 낮을수록 대개 편견도 심합니다.
가끔
보면 사역자 중에도 남을 깎아내리는 것이 습관화된 사람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자기 교인들까지 뒤에서 깎아내립니다. 교인들이 사모에게 시험 드는
가장 큰 이유는 사모가 교인들을 뒤에서 깎아내리는 것 때문입니다. 그처럼 “누가 듣겠는가?”라고 생각하고 뒤에서 남을 비방하지만 나중에는 다
알게 되면서 결국 인심도 잃고 친구도 잃고 사역지도 잃습니다. 제일 이해가 안 되는 경우는 선교사가 인종편견과 민족편견과 지역편견을 가진
것입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그가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선교사가 되었을까 궁금합니다.
어느 날, 한 목회자가 수년 동안 크게 돕던
한 선교사의 선교후원을 딱 끊었습니다. 대화하면서 그 선교사가 지역편견이 심한 사람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저희 미국 기독교 선교연맹에서는
마지막 선교사 파송 인터뷰를 할 때 인종편견과 민족편견과 지역편견이 없는 사람이냐를 면밀하게 살핍니다. 그런 편견을 가진 사람을 선교사로
파송하면 선교 명목으로 자기 사역 확장에만 열을 올리면서 많은 문제를 낳기 때문입니다. 편견적인 태도는 자기 허세와 타인 매도의 태도가 동시에
배인 가장 나쁜 태도입니다.
어느 날, 한 사역자가 미국 입국수속 때 혼자만 따로 물건을 자세히 검색 당했습니다. 그러자
자존심도 상하고 수치심도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런 선별적인 조사는 출입국 관리들의 전권입니다. 의심스럽다고 느껴진 경우나 혹은 랜덤 선택으로
그렇게 조사받을 수 있기에 그런 상황은 이해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자존심이 상한 그 사역자는 그 상황을 그냥 넘기지 못하고 평소의
편견적인 습성을 입으로 표출했습니다.
당시에 까다롭게 검사한 사람이 흑인이었는데 조사 후에 출입국 사무소를 나오면서 옆 사람이
듣는 데서 큰소리로 말했습니다. “저 깜둥이 자식! 지가 뭔데 저렇게 까다롭게 굴어! 무식한 깜둥이 자식들이 더 동양인들을 차별해.” 그 흑인이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자기 일에 충실했을 뿐입니다. 그런 편견적인 말이 배인 사람은 되도록 멀리하십시오. 결코 유익이 없고 언젠가는 그로 인해
큰 낭패를 당할 것입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후임 목회자를 찾을 때 간단한 사모 이력서도 요구합니다. 왜 그럴까요? 일전에 한
장로님이 말했습니다. “목사님! 사모가 부족해도 그 사실을 겸손하게 인정하면 문제가 안 생기는데 자기 부족함을 덮으려고 자꾸만 뒤에서 교인들을
깎아내리면서 열등감을 표출하니까 문제가 생겨요. 그런 문제를 조금이라도 줄여보려고 그런 요구까지 하는 겁니다.” 결국 열등감이 표출된 사모의
뒷담화가 문제란 뜻입니다.
자신은 “누가 듣겠는가?” 하고 남을 깎아내리지만 사람들은 그 말을 들으면서 점점 그로부터 마음이
멀어지면서 경계합니다. “저 사람은 내가 없을 때는 남 앞에서 내 비난을 하겠구나?” 그러다가 결국 어떤 일을 계기로 그를 완전히 멀리하게
됩니다. 인생에서 가장 큰 낭비는 입술을 잘 관리하지 못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사람과 어울리는 것입니다. 결국 입술을 잘 지키는 것이
인생을 잘 지키는 비결입니다.
3. 최종승리를 확신하십시오
다윗은 대적들이 하나님의 진노로 소멸되어 하나님이 만물을
다스리는 하나님임을 만민이 알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13절). 결국 대적들은 개처럼 먹을 것을 찾아 유리하다가 배부름을 얻지 못하고 밤을
새우지만 자신은 요새와 피난처가 되시는 주님의 도움으로 아침에 승리의 찬양을 할 것이라고 고백합니다(14-16절). 간단히 말하면 악인들은 결국
비참하게 패배하지만 의인들은 결국 최종승리를 얻게 된다는 고백입니다.
살다 보면 다윗처럼 위기의 순간을 만납니다. 그때는 사울의
군사들이 다윗을 죽이려고 찾아온 것처럼 사탄의 생각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찾아올 때가 많습니다. “아무개야! 네 모습과 나이를 봐라! 너는 안
돼! 너는 희망이 없어! 큰 꿈과 비전을 버리고 현실에 순응하면서 살아!” 그 말에 넘어가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구원받은 성도를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했습니다. 청년은 왕자나 공주처럼 살고 중년은 왕이나 왕비처럼 살고 노년은 황제나 황후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의
영혼과 삶을 지켜주시고 최종승리를 주실 것입니다.
실제로 그 밤에 다윗을 죽이려고 했던 대적들은 허탕을 쳤고 다윗은 아침에
승리자의 모습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본문 17절 말씀을 보십시오. “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그처럼 성도도 잠시 패배한 것 같은 상황에 처할 수 있지만 최종적으로는 승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진리의 길을 결코 포기하지 마십시오.
살다 보면 도무지 기뻐할 수 없는 현실을 접합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기뻐하라고 합니다. 어떻게 힘든 현실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습니까? 최종승리를 믿으면 됩니다. 하나님은 어두운 현실 속에서 하나님을 붙잡는
사람에게 기꺼이 붙잡혀주시는 하나님입니다. 고난 중에 하나님을 진심으로 붙잡으면 그때부터 역전 인생은 시작됩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이 최종
승리를 주심을 확신하면 삶의 내용과 빛깔이 크게 달라질 것입니다.
< 승리를 현실로 만드십시오 >
느헤미야는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힘이라고 했습니다(느 8:10). 더 나아가 하나님을 붙잡는 것은 최상의 힘입니다. 힘든
현실에서 짜증을 내면 더 힘들어집니다. 또한 분노하면 그 분노가 자신부터 태웁니다. 힘들수록 더 기뻐하고 더 웃어야 합니다. 성도가 우울해지면
사탄은 웃고 성도가 웃으면 사탄은 우울해질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찬란한 미래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때가 되면 인생
역전의 시발점에 서게 됩니다. 그때까지 하나님을 붙잡고 기뻐하며 인내하십시오. 어둔 현실과 싸울 때 슬픔과 한으로 먼저 무너지지 말고 짜증과
분노로 먼저 거칠어지지 마십시오. 최종승리가 보장된 존재로서 굳건한 믿음으로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지혜와 창조성을 받아서 찬란한 새 역사를
준비하십시오. 계속 준비하면 하나님의 신비한 역사를 체험할 것입니다.
얼마 전에 둘째 딸 한나가 물었습니다. “아빠! 도대체
어디서 돈이 생겨서 매월 엄청난 손해를 보면서 7000권 이상의 월새기를 발행할 수 있어요? 너무 궁금해요. 아빠를 볼 때마다 가끔 신비한
분처럼 느껴져요.” 그때 제가 아주 원론적인 대답을 해주었습니다. “한나야! 순수하게 하나님의 일을 하면 하나님이 반드시 책임져주셔. 아빠가
신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신비한 분이야.”
인생을 살아가면서 너무 자기 몫만 집요하게 챙기면서 계산적으로 살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자기 몫만 챙기는 삶을 별로 기뻐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맡은 일에 충실하고 맡은 자리에 충성하십시오. 자기 사명을 위해 매진하고
하나님의 일에 깊은 관심을 두십시오. 현재의 모습이 실망스러워도 실망하지 마십시오. 믿음은 신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비한 분입니다. 외형에
너무 매달리면 진짜를 보지 못하게 됩니다. 또한 외형에 너무 매달리면 외풍도 많이 받습니다. 진짜 큰일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뤄짐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신비한 역사를 신뢰하십시오. 현실이 어떤 모습이든지 성도는 얼마든지 그 상황에서 역전승을 이뤄낼 수 있습니다.
사실상 성도는 패배했을 때도 큰 의미에서는 이미 승리한 존재입니다. 이미 승리한 상태에서 실제적인 승리를 이뤄내려는 존재가 바로 성도입니다.
그처럼 이미 주어진 하늘의 승리를 땅의 승리로 이뤄내려면 현실 속에서도 최선의 땀을 흘려야 합니다. 땅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삶이 결국 하늘의
삶입니다. 성도는 일상의 삶을 통해서도 하늘의 기운을 느끼고 하늘의 역사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가정과 일터와 직장에서
승리를 만들어내십시오. 찬란한 꿈과 비전을 가지고 계속 전진하십시오. 이미 승리는 준비되었고 목전에 다가왔습니다. 더 나아가 이미 승리한
상태입니다. 그 승리한 상태를 현실 속에서 발견해내고 실현해내기만 하면 됩니다. 승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기도 하지만 성도가 피땀으로
만들어내야 할 산물이기도 합니다. 성도가 열심히 씨를 뿌리는 자리가 바로 하나님 나라가 펼쳐질 자리입니다. 그처럼 최종승리를 확신하고 현실
속에서 최선을 다함으로 내일의 축복을 예비하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 이한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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