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밤이 무척 길군요...그러나 이 어두운 밤도 끝날 때가 있겠지요? 그래요 해는 곧 뜰 것입니다. 밝아오는 새벽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
성경본문 : | 출20:1-17 |
---|---|
구분 : | 들꽃편지560호 |
오늘의 십계명
1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2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풀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7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9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0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13 살인하지 살라
14 간음하지 말라
15 도둑질하지 말라
16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17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출20:1-17)
서론:십계명에 숨은 비밀
1.너는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2.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3.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4.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5.네 부모를 공경하라
6.살인하지 말라
7.간음하지 말라
8.도둑질하지 말라
9.거짓 증거하지 말라
10.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서론: 십계명에 숨은 비밀
구약성경의 첫 부분에 나오는 다섯권의 성경을 모세오경이라 합니다. 모세가 기록한 성경이라 해서 모세오경이라 하는데 사실은 모세가 기록했다고 믿는 사람들은 우리나라 기독교인들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세오경은 모세가 죽은 뒤 약 700-800년이 지난 후인 남북이스라엘 요시야왕 때 편집된 책이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이야기가 전승으로 내려오기는 했지만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정리되어 있지는 않았습니다.
모세가 활동했던 당시에는 국가의 형태가 완성된 시대가 아니고 족장시대였기 때문에 국가를 운영하는데 필요한 ‘율령’같은 것이 없었습니다. 모세오경이 ‘율령’형태로 기독된 것은 국가의 형태를 갖춘 후대에 편집되었다는 증거입니다.
먼저 히스기야가 유다 왕국에서 개혁정책을 펴다가 거세되고 이후에 히스기야의 개혁정책을 지지하던 세력들이 요시야를 왕으로 옹립한 뒤 히스기야의 개혁정책을 계속 이어나갑니다.
요시야가 스무살이 되던 해 ‘신명기’가 국가 문서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밖에 많은 구약 성경들이 이 시기에 편찬되었습니다. 신명기는 특히 구 지배세력들을 견제할 개혁적인 정책들을 많이 반영하였습니다.
이때 요시야 개혁정부가 바뀐 여러 가지 정책을 널리 대중들에게 알리는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백성들이 대부분 글을 모르는 까막눈이었거든요. 그래서 율법을 최대한 단순화 시켜서 전하는 방법을 썼는데 그것이 십계명입니다.
계명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것이지만 그것이 열 개로 딱 나뉘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산문형태였고 그것을 ‘십계명’이라고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모세의 계명이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계율 형태로 전해져 내려온 것을 요시야왕이 시대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계명을 재해석하여 개혁정부가 추구하는 공공성 투쟁의 의지를 담아 백성들이 단숨에 기억하기 쉽도록 ‘십계명’ 형태로 간결하게 만들어낸 것입니다.
지금부터 수 천 년 전에 광야에서 떠돌아다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만들어진 계명이 수 천 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 할 만큼 유효한가요?
요시아왕도 당시의 역사적 해석, 시대정신을 담아 계명을 재해석하여 적용했습니다. 우리도 십계명을 ‘개인적’으로 적용 하고 마는 소극적인 해석에서 벗어나 오늘날의 역사적, 시대적 대의를 담아서 십계명을 다시 재해석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1.너는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유일신론은 신(神)은 오직 하나님 한분밖에 없다는 뜻이고, 택일신론은 여러 많은 신들 가운데 선택해서 믿는다는 뜻입니다. 십계명 중에 제1계명은 분명히 택일신론입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믿지 말라는 말은 아무리 봐도 다른 신이 있다는 뜻입니다.
모세가 가나안 땅으로 이제 막 들어가려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며 가장 염려스러웠던 것은 가나안 사람들이 섬기는 ‘엘’이라는 신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나안 사람들을 남김없이 모두 죽이라고 명령을 내렸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말을 듣지 않고 일부 거민들을 남겨 두었습니다.
그 결과로 세월이 흐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백성들과 뒤섞여서 하나님을 ‘엘 하나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신과 가나안의 신이 뒤섞여버렸습니다. 모세가 염려하고 우려했던 일이 벌어진 것이지요.(지금도 하나님을 ‘엘’이라 합니다.)
요시야왕은 이것을 분리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십계명 중 가장 첫 번째 계명을 “너는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로 딱 정합니다. 그리고 가나안의 신을 비롯한 맘몬의 신, 블레셋의 신등 온갖 잡동사니 우상단지들을 다 불태워버립니다.
온갖 잡다한 신들을 섬기는 것보다도 더 어리석은 것은 아무 신도 안 섬긴다고 하는 ‘무신론’입니다. “나는 무신론자야” 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것은 “나는 아버지가 없이 생겨난 호로자식이야”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무신론자들의 태도는 우주의 존재 양식으로부터 도피해서 솔직하게 우주와 자연을 대면하지 못하고 어쨌든지 좁은 자기를 살려보려는 현대인들의 자만심이자 불쌍한 몸무림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유일신(唯一神)입니다. 온 세상을 창조하신 조물주이십니다. 하나님은 오직 한 분 밖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은 아직도 택일신(擇一神)입니다. 수많은 신들 가운데 자기가 믿는 신을 자기가 선택합니다. 그것을 ‘종교의 자유’라고 합니다. 넋빠진 어떤 기독교 부모는 “종교는 자유다. 자식의 종교는 자식이 선택해야 한다”고 하면서 자식이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종교는 자유가 아닙니다.
만약 이 시대에 다시 십계명을 만든다면 제 1계명은 ‘너는 나 외에 다른 신들이 있다는 말에 속지 말라. 나는 유일신이다.’
2.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제2계명은 꽤 깁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풀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20:4-6)
주일학교 다닐 때 이거 외우느라고 엄청 고생했습니다. 성경이 개역성경에서 개정성경으로 바뀌면서 십계명의 문장도 바뀌어 다시 새롭게 외우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네요. 그냥 어릴 적 외운 내용이 입에서 자동으로 나옵니다. 저는 그냥 옛날 버전으로 외우다 죽으렵니다.
제2계명의 핵심은 ‘새긴 우상(형상)을 만들지 말라’입니다. 요시야왕이 유다 예루살렘을 정결하게 하면서 아세라 목상, 아로새긴 우상, 부어만든 우상, 바알의 제단, 태양상(대하 34:1-7)등을 찍어 불태워버렸습니다. 그야말로 예루살렘에 아로새긴 우상들이 가득했기 때문에 그것을 금지하는 계명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은 모든 것의 근원이면서 동시에 초월자이시기 때문에 그냥 올(all)인데, 어떤 물건을 신이라고 하면서 거기에 절을 하는 것은 그 순간 신을 모독하는 것이 됩니다. 그야말로 올(all)인 신을 어떤 형상 안에 가두어버리는 셈이 됩니다.
첨단 과학문명은 사람들을 달나라로 날려 보내고 있는 그런 시대에 그 우주선을 쏘아 올리는 자리에 돼지머리를 차려 놓고 돼지 주댕이에 돈을 물려가며 고사를 지내는 모습은 너무 웃기다 못해 서글픔까지 느껴집니다.
교회 벽에 붙여놓은 ‘십자가’도 우상이라고 떼어버린 교회도 있는데, 그건 좀 오버(over)입니다. 십자가는 형상이 아니라 상징(icon)입니다. 상징은 상징일 뿐 그것에 절하고 섬기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상숭배’라는 것은 하나님 보다 더 집착하고 소유하고자 하는 마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초월적인 하나님보다도 현실적으로 더 많은 물질, 큰 명예, 더 큰 교회 이런 것을 갖고 싶은 마음에 매이게 되면 그것이 곧 우상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마도 오늘날 가장 많은 사람들이 ‘돈’에 마음을 두고 돈을 따라다니니 가장 큰 우상은 ‘돈 우상’일 것입니다.
만약 이 시대에 다시 십계명을 만든다면 제 2계명은 ‘너를 위하여 돈을 우상으로 섬기지 말아라’
3.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제3계명은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십계명은 원래 긴 문장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어느 부분을 자르느냐에 따라 순서가 달라집니다. 천주교는 1-3계명을 두 부분으로 잘랐고, 기독교는 세부분으로 잘랐지만 사실상 1-3계명은 하나로 봐도 무방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는 말은 부모의 이름을 함부로 말하지 않은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제 부친의 존함은 ‘최’자 ‘운’자 ‘경’자입니다.” 사실은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는 근원이자 초월자이시기 때문에 어떤 ‘문자’로든 온전히 담아내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나라에는 세상에 자랑할 만한 진귀한 문화유산인 ‘조선왕조실록’이 있습니다. 조선이라는 나라 500년 역사가 고스란히 기록으로 남은 것입니다. 하지만 조선이 사라진 지 1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조선왕조실록을 눈앞에다 펼쳐 줘도 읽을 수 없습니다. 그걸 읽으려면 전문가들의 ‘번역’이라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모세가 활동했던 당시의 전승들이 800년 세월이 흐르면서 다 사라졌습니다. 그러다가 요시아왕 시대에 성전을 재건축하는 과정에서 대제사장 힐기야가 율법책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흘러 그 내용을 알 수 없는 책을 학자들을 동원하여 새롭게 편찬하였습니다.
언어라는 것은 30년만 지나도 그 내용이 모호해지기 때문에 그 시대의 언어로 새롭게 재번역을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모세의 율법은 무려 800년이나 지난 책입니다. 때문에 요시아왕은 거의 새로 쓰다시피 하며 당시의 시대적인 배경을 문서에 반영한 것입니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亡靈)되이’ 일컫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호를 ‘소홀하게’ 혹은 ‘생각 없이’ 부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에 대하여 헛되고 부질없고 경솔하고 모욕적인 그 모든 언행심사(言行心事)를 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의 영적 유익을 위한 선한 목적 없이 영광과 위엄으로 충만한 그 높고도 거룩한 이름을 가벼운 입술로 헛되이 부르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모독일 수밖에 없습니다. 거짓 맹세와 불경한 서약을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경우도 하나님의 이름을 만홀히 여기고 더럽히는 것입니다.
만약 이 시대에 다시 십계명을 만든다면 제 3계명은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존함을 함부로 들먹이면 괴씸죄에 걸리리라’
4.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제4계명은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하루살이는 입도 없고 항문도 없어서 먹고 싸지 못하니 하루밖에 살지 못합니다. 모기나 벌은 외적 에너지를 공급할 수 없어서 태어날 때 자기 몸에 가지고 있던 에너지를 다 사용하면 죽습니다. 반면에 인간은 계속해서 몸에 새로운 에너지를 공급하면서 생명을 연장 하여 살아갑니다.
즉, 인간에게는 먹고사는 문제가 매우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초기 바리새인들과 율법주의자들은 안식일에 대한 규율을 39개나 만들어서 안식일에는 절대로 일을 못하게 했습니다. 하루 벌어먹고 사는 사람들이나, 목동들, 뱃사공, 떠돌이, 창녀 같은 계층들에게 하루 동안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것은 대단히 고통스런 일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안식일 규정은 가난한 이들에게는 ‘폭력’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씀으로 풀어주셨습니다. 안병무 박사는 ‘이것은 가장 구체적인 인권선언이다.’라고까지 평가했습니다.
안식일은 단순히 하루를 쉬는 문제가 아니라, 가난한 이나 부자들이 모두 하루 정도 일을 하지 않아도 먹고 사는 일에 지장이 없는 세상을 만들어야 하는 사회 공동체적 문제로 인식해야 합니다.
안식일이 주일로 대체된 요즘에는 주일은 ‘예배를 드리는 날’이니 주일성수를 해야 한다고 해석하고 강조합니다. 당연히 일주일에 하루 일을 하지 않고 쉬는 날 모두 모여 예배를 드려야 하겠지요.
그러나 ‘안식일’의 제정 이유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노동의 문제가 핵심입니다. 하나님도 일을 하지 않았으니 인간들도 일을 하면 안 된다. 가진 자들은 여종이나 남종이나 짐승들까지도 일을 시키면 안 된다는 것이 제4계명입니다.
만약 이 시대에 다시 십계명을 만든다면 제 4계명은 ‘기업이나 주인은 6일 일하면 7일분 급여를 주어라’
5.네 부모를 공경하라
제5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스위스의 렌취니크 박사는 세계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정치가들을 분석해 보았는데 그들 상당수가 고아였다고 합니다. 고아는 고아라는 무시를 당할 때마다 자신을 무시한 사람들과 자기를 버린 부모를 향해 무엇인가 보여주어야 한다는 강한 권력욕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연구결과를 분석하여 ‘고아가 세계를 지배한다’라는 책을 썼습니다. 자녀와 부모와의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라고? 아마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십계명 중 제5계명을 가장 지키기 힘들어 할 것입니다. 조선 500년을 관통하며 유유히 내려온 ‘유교적 전통’이 급속한 산업화 시대를 겪으면서 어떻게 손을 쓸 수없이 무너졌습니다. 아버지 어머니들은 시골에서 도시로 유입되어 하층구조를 이루며 생존하기에도 바빠 자녀들을 거의 방치했습니다.
그 결과 ‘세대차이’라는 것이 생겼습니다. 급변한 세상에서 아직도 유교적 사고를 하는 부모와, 텔레비전의 영향으로 미국식 급진적 사고를 하는 자녀들 사이에 긴장과 갈등관계가 유지되다가 ‘서태지와 아이들’이후부터는 주도권이 자녀 세대로 넘어가버렸습니다. 그 과정에서 부모들과 자녀들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깊은 갈등의 골짜기가 생겼습니다.
오늘날 4-50대 중년세대들은 “부모를 공경하라고? 그들이 해준 게 뭔데?” 오늘날 부모와 자녀들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영화가 ‘국제시장’입니다. 부모세대도 나름대로 가족들을 위해 ‘해준 것’이 많다고 항변하는 영화입니다.
부모세대들은 독재 시대의 희생자들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가족을 지키고 사랑하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 시대 우리에게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부모를 용서하는 것’입니다. 국가의 무시무시한 폭력 앞에서 처자식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4-50대 또한 자식들에게 용서 받아야 할 부모들입니다. 그들을 입시지옥으로 몰아넣고 그들이 누려야 할 미래의 자원을 다 땡겨서 말아먹어버린 것, 천문학적인 빚을 남겨준 것들 모두 회개하고 용서받아야 합니다.
만약 이 시대에 다시 십계명을 만든다면 제 5계명은 ‘네 부모를 용서하라 그리하면 네 자녀들도 너를 용서할 것이다.’
6.살인하지 말라
제6계명은 <살인하지 말라> 총칼로 혹은 주먹이나 도구로 누군가를 때려죽이는 것만이 ‘살인(殺人)’이 아닙니다. 이웃을 미워하거나 다른 사람을 죽이고 싶어 하는 생각까지도 살인입니다. 살인 중에 가장 잔인하고 극단적인 살인은 ‘자살’입니다. 자살은 자기가 자기를 죽이는 살인입니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들 가운데 자살율 단연 1위 자리를 오랫동안 내주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 사회는 모든 책임을 자살자에게 떠넘기기만 할 뿐 그가 왜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했는지에 대한 관심이 없습니다.
그것은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교회와 목회자는 자살한 교인의 장례조차도 거부합니다.
자살이 자살한 사람만의 잘못인지 한번 분석해 봅시다. 1987년 우리나라는 민주화운동의 열망이 폭발하여 민주화가 더 이상 꿈이 아닌 현실이 되었습니다. 모두가 평등하고 행복한 그런 세상이 올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10년 후 우리나라는 외환위기(IMF)를 맞이합니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무한 생존경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려 들어갑니다. ‘모두의 평등, 모두의 행복’이라는 말은 이 순간 용도폐기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남들이야 어찌되었든 자기 자신만은 살아남기 위해 모든 여력을 있는 대로 다 가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야말로 이 세상은 ‘돈’ 외에 다른 것은 모두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기는 살벌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무한경쟁에서 탈락한 대다수의 국민들, 현재를 살아갈 힘도, 노후를 기대할 희망도 없는 사람들에게 남은 것은 빚과 생존에 대한 공포뿐입니다. 고로 자살은 ‘국가적 사회적 타살’의 결과입니다.
우리가 현재 만들고 있는 ‘생명 파괴의 세상’은 저주의 세상입니다. 그러한 일에 기독교 장로 대통령이 앞장섰다는 사실에 절망할 뿐입니다. 이런 사회적 배경을 무시하고 단순히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키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 너무 공허한 메아리일 뿐입니다.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또한 인간은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마땅히 서로(각자의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존중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가능한 방법을 동원하여 인간의 몸과 생명을 보호해야 하며 개인의 삶의 행복을 증진시켜야 합니다.
만약 이 시대에 다시 십계명을 만든다면 제 6계명은 ‘자살시키지 말라’
7.간음하지 말라
제7계명은 <간음하지 말라> 성경에서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은 누구에게 해당되는 계명일까요? 정답은 ‘여자’입니다. 성경이 쓰여지던 그 시대는 아주 엄격한 가부장제 사회였습니다. 남자가 하면 로맨스(romance)요 여자가 하면 ‘불륜’이라는 공식이 확고하게 적용되는 시대였습니다. 남자에게는 ‘간음’이란 것 자체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거시기를 남자 혼자 할 수 있나요. 분명 여자랑 했음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죄가 아닌데 여자는 죄라니... 솔직히 말하면 유교적 전통이 아직도 뿌리 깊게 남아있는 우리나라도 똑같습니다. 우리나라도 혼외 관계에 대해 남자에게는 관대하지만, 여자에겐 매우 가혹합니다.
그때 예수님이 간음한 여자를 끌고 온 남자들에게 뭐라고 하십니까? 남자들 보라고 땅바닥에 글씨를 쓰지요. “짜식들아, 쪽팔린 줄이나 알아라. 재미는 너그들이 다 보고 죄는 여자에게 덮어 쒸우냐? 차라리 덜렁거리는 것 다 띠어버려라. 창피하다”... 라고 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원시공동체에서는 아이를 낳고 모유를 제공하는 여자의 생물학적 능력은 공동체의 존속이 여성의 몸에 달려 있다고 보았기에 남자들은 여자의 모성을 경외하고 찬양했습니다. 원시공동체에 ‘여신’이 많은 이유입니다.
그러나 기원전 3천년 전후 가부장제가 확립되면서 남자들은 여자를 ‘소유’의 개념으로 보았습니다. 십계명은 바로 이 지점에서 만들어졌습니다. 자신의 소유인 여자가 ‘간음’을 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내 아이의 엄마여야 되는 모성이 간음을 하면 가부장은 자신의 대를 잇지 못할 수도 있기에 모성을 상당히 폭력적으로 통제해 왔던 것입니다. 이 계명을 오늘날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대한민국 국회는 ‘간통죄’는 죄가 아니라며 ‘폐지’를 시켰습니다. 남녀가 섹스를 하는 것은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할 수는 없고 서로 합의한 상태에서 재미를 본 것이기 때문에 어느 쪽도 죄라고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여자의 손만 잡아도, 성적인 말을 해도 그것은 ‘성희롱죄’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드러나게 하면 죄가 되고 아무도 모르게 숨어서 하면 죄가 아니라는 황당무계한 세상입니다. 혼전 관계, 혼전 동거, 낙태가 텔레비전 화면에 자연스러운 것으로 방송이 되는 세상입니다.
만약 이 시대에 다시 십계명을 만든다면 제 7계명은 ‘남자도 간음하지 말라’
8.도둑질하지 말라
제8계명은 <도둑질하지 말라> 큰 도둑이 있고 작은 도둑이 있습니다. 8계명은 큰 도둑에 대한 계명이고 10계명은 작은 좀도둑에 관한 계명입니다. 대도(大盜)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것을 훔치는 사람이 간땡이가 부은 큰 도둑입니다.
만약 5000가구가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가 무슨 일이 있어 다 사라져버리고 빈 터만 남아 있다면, 그 터는 누구의 소유가 될까요? 거기에 살았던 5000가구가 땅을 5000 조각으로 나누어 한 조각씩 소유하게 될까요?
정답은 ‘그 누구의 소유도 아니다.’ 입니다. 아파트에 살고 있던 5000가구는 ‘땅’을 소유한 것이 아니라 공간을 점유하고 그 공간에 대한 사용권만 있기 때문입니다. 텅 빈 허공을 동서남북 위아래 막아서 네모 반듯한 상자 같은 어떤 ‘허공’을 사용하는데 수 억원씩 돈을 낸다는 게 어쩐지 누군가에게 사기를 당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습니까?
성경은 땅에 대한 개인의 배타적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모든 땅은 하나님이 만든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레25:23)입니다.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은 땅에 대한 소유권이 아니라 ‘경작권’만 갖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땅을 사고 파는 것은 성경적이 아니며, 그 땅에 집을 짓든 농사를 짓든 그 땅을 ‘사용할 권리’만을 사고 팔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물, 불, 공기, 산, 강, 나무, 햇볕처럼 땅도 공(公)으로 주셨습니다. 모두가 공유하고 사용해야 할 것들을 그 누구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정의(正義)란 무엇입니까? 자기 것이 아님에도 자기 것(私)처럼 여기는 것을 다시 공(公)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국가가 앞장서서 땅장사를 하고 강과 산을 파 해치면서 큰 도적질을 하고 있지요. 국가가 국민을 위하지 않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역사상 가장 큰 부자라고 하는 솔로몬의 부(富)는 백성들의 고혈을 짜서 만든 것입니다. 솔로몬왕 때 수많은 백성들이 수탈을 견지지 못하고 다른 나라로 도망갔습니다.
만약 군대에 간 아들이 군대에서 나라를 지키다가 다쳐서 병원에 입원 하면 병원비는 누가 낼까요? 그 부모가 내야 됩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 지금 우리나라 군대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천문학적인 국방비가 중간에 다 도둑을 맞아 어디론가 사라지고 부족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이제 군대에 입대하면서 자기 총이나 군복을 자기가 사가지고 들어가야 할지도 모릅니다.
만약 이 시대에 다시 십계명을 만든다면 제 8계명은 ‘공(公)을 사유화 하지 말라’
9.거짓 증거하지 말라
제9계명은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한마디로 거짓말하지 말라는 계명입니다. 그러나 9계명은 어쩌면 다른 아홉 개 계명을 한 순간에 무력화시켜버릴 만큼 엄청난 의미를 담고 있는 계명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거짓말 중에 가장 큰 거짓말은 ‘교회가 하는 거짓말’입니다.
한 수족관이 있었는데, 어느 날 넓은 바다에 살던 고등어가 잡혀 들어왔습니다. 고등어는 수족관 밖에 넓은 세상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다 함께 수족관을 탈출하자고 합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권력을 잡고 있는 올드넙치는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물고기들 사이에 소문을 퍼트립니다.
“불가사리의 발은 50개다.” 그 후로 다른 물고기들은 그것이 “사실이다” 파와 “아니다” 파로 갈리어 끊임없이 논쟁을 하면서 수족관을 탈출하려던 본래의 계획을 까마득하게 잊어버립니다.
이 이야기는 ‘파닥파닥’이라는 애니메이션 영화의 줄거리이지만, 수족관을 교회라고 할 수 있고 ‘불가사리의 발이 50개’라는 이야기는 ‘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이 오셔서 ‘새로운 세상’ 이야기를 하십니다. 사람들이 새로운 세상에 관심을 가지려는 순간에 기득권자들은 예수를 잡아 죽여버립니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이야기는 잊혀졌습니다.
지난 2천년 동안 간혹 눈이 맑은 자들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새로운 세상을 발견하고 그것을 이야기하려고 할 때마다 순식간에 제거를 당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겹겹이 견고하게 굳어진 교회의 교리와 전통은 아직도 ‘불가사리의 발이 50개다 아니다’로 날밤을 새고 있고, ‘새로운 세상’에 대해서는 아무도 관심이 없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말씀하신 ‘새로운 세상’을 이 땅에서 조금이나마 이루기를 원한다면 2000억짜리 건물을 ‘성전’으로 위장하면서까지 짓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정말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한다면 교회가 부익부빈익빈(富益富貧益貧)이 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원래 이 세상은 거짓의 세상이기 때문에 세상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오직 교회만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데, 어찌된 일인지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고 우려하는 시대가 되었네요.
만약 이 시대에 다시 십계명을 만든다면 제 9계명은 ‘무조건 믿으라고 하는 말은 무조건 의심하라’
10.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제10계명은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중세시대 교회는 모든 죄의 근원이 되는 7대죄(七大罪)를 엄하게 다스렸는데, 그 안에 ‘탐욕’과 ‘인색’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탐욕’이라는 말은 ‘이윤의 극대화’라는 단어로 바뀌었고, ‘인색’이라는 단어는 ‘절약정신’으로 바뀌어 긍정적인 의미로 미화되어 사용됩니다. 이제 어느 나라든 GDP(국내총생산)를 높이는 일, 경제를 살리는 일이라고 하면 못하는 짓이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과 종교 개혁자들은 ‘탐욕’을 합리화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금욕’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다가 막스 베버라는 칼뱅주의자가 ‘금욕’ 대신 ‘은혜(은총)’이라는 단어를 들고 나와서 하나님의 은혜로 부자가 되어 성공하는 것이 기독교의 가치인 것처럼 호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금욕, 절제, 인내, 섬김’ 같은 기독교의 가치는 순식간에 ‘은혜, 성공, 응답, 복’ 같은 탐욕적 언어로 바뀌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예수 안에서 유혹을 이기고 승리하세요”라는 인사가 “예수 믿고 복 받으세요”로 변했습니다.
‘탐욕’을 미화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엄청난 부를 축적한 자들은 상상 초월의 갑질을 하며 지구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부를 대물림하면서 이 땅에서 천국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마땅히 내야 될 세금도 마치 빈자에게 적선하듯 찔끔 내주고 있습니다. 그들의 탐욕은 끝이 없고 그들의 인색은 한이 없습니다. 유럽 선진국들처럼 우리나라도 기업이윤의 반 이상을 세금으로 환수해야 마땅합니다.
반면에 경쟁에서 도태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두통과 스트레스와 정신병에 걸려 고통을 호소합니다. 세상에는 온통 쓰러진 자들의 고통스러운 신음소리가 가득합니다. 그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삶이 나아질 수 없는 구조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절망합니다.
그러자 교회는 발 빠르게 ‘치유’ 또는 ‘힐링’이라는 새로운 분야의 인기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어냈습니다. 교회가 ‘탐욕’과 ‘인색’함을 버리라는 10계명을 철저하게 지키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 한 ‘치유사역, 힐링사역’은 날로 번성할 것입니다.
만약 이 시대에 다시 십계명을 만든다면 제 10계명은 ‘부자들 수입의 반은 무조건 세금으로 거두어라’ ⓒ최용우
월간<들꽃편지>제560호 에 실림
햇볕같은이야기 5296-5306호에 한편씩 씀
참고/
그랜드종합주석 -출애굽기
레노바레성경-출애굽기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