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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5: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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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5장 1절-7절: 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다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나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이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저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제 몸을 상하고 있었더라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큰 소리로 부르짖어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하니.
성경은 누가 어떤 모양과 모습으로 나타나도, 어떤 큰 사건 있어도 전부는 우리에게 영적인 뜻을 깨닫게 해 주는 비유요 비사다. 영적인 뜻 곧, 하나님의 뜻이 나의 뜻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어느 시대 어느 장소 어느 환경 어느 사건을 만나도 영원 전서부터 마지막까지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우리에게 향하신 뜻은 당신처럼 온전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무슨 일을 하더라도 온전케 되는 그 목적에 도달을 해야 한다. 그게 곧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향하신 뜻이라.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목적의 뜻이라. 우리가 이 세상에 출생을 한 목적의 뜻이라.
세상 환경이 돌아가는 목적이, 또 창조물을 만드신 목적이 우리의 온전을 위해서이다. 우리의 온전이라면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지식, 하나님의 선,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거룩,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주권을 내가 입는 것이다. 성품이라면 성품이고 인격이라면 인격이고 속성이라면 속성이고 이런 자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오각의 오감성의 느낌이 있듯이, 희로애락의 느낌이 있듯이 영적인 기능 면에서 성령님의 감화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온전을 위해서 뱀을 들고 나올 수도 있고, 사단 마귀 사람 전쟁 귀신들린 사람, 각종 병자 등 다 들고 나올 수 있다. 누구의 온전 때문에? 다 나의 온전을 위해서.
우리가 이 점을 생각을 못하고 성경을 보게 되면 말은 역사적으로 사건적으로 다 성경대로 맞긴 맞는데 자기에게 온전하게 이루어질 그 면이 그만 쏙 빠져버린다. 사단 마귀의 수법은 지금 그 면을 노리고 빠지게 하려고 한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라고 했는데, 그리스도라면 안 죽는 건데 그런데 예수님께서 ‘내가 죽었다 살아난다’고 하니까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했던 베드로가 ‘그리 마옵소서’ 했다. 죽었다 살아날 바에야 왜 죽느냐 그 말이지. 왜 번거로운 그 일을 하느냐는 것이다.
이 사고방식의 주장이 일반적으로는 타당은 하지만 거기에는 신령천국에 올라갈 백성의 구원이 빠지게 하는 것이 그 속에 들어있다. 그러나 ‘구원의 일을 하려면 안 죽고 그냥 하면 되지 왜 번거롭게 죽었다가 살아나야 하느냐?’ 하는 그 말에 대하여 주님께서는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하시는 것이다.
이 이치를 그대로 갖고 와서 교회 목사가 사람을 위해서, 또는 사람을 의식한 크고 작은 사건 환경을 염두에 두고 말을 한다면 이건 사단 마귀에게 넘어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교인도 목사 자신도 이 사실을 모른다. 교회가 그렇게 나가고 있다면 그 교회가 온통 사단 마귀의 지배하에 있으면서도 그걸 모르는 거다.
선악과를 따먹으면 그 자의 보는 기준은 전부가 세상이다. 세상을 의식한 그 기준을 놓고 나가면 에덴동산 안에 들어가서 생명과를 먹을 수 있는 거냐, 없는 거냐? 먹을 수 없다. 허락이 안 된다.
온 교회가 그렇게 나가면 그 교회는 통째로 생명과를 못 먹는 거다. 그런 교회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믿는 사람은 이런 영적 면에 번개같이 민감하게 움직여야 하는 건데 육신적인 사고방식에 젖어있어서 그 면에 무뎌져 있으면 자신이 그런 것임에도 그 사실을 모르게 된다. 이건 믿음이 아니다.
본문으로 들어가서 거라사인의 지방이 나오는데 다른 데 보면 가다라 지방이라고도 했다. 이 거라사인의 지방에는 아마 죽은 사람들의 비석이 많은 듯하다. 그러니까 이곳은 죽은 자들을 기념하는 자들이 들르는 곳이다. 죽은 자들을 즉, 영육이 죽은 자들을, 그러니까 영과 육이 죽은 자도 있고, 영이 죽은 자도 있고, 또 육이 죽은 자도 있다. 또 신앙 면에서 죽은 자들도 있고. 어쨌든 비석은 죽은 자들의 무덤에 있는 것이다. 이렇게 죽었던 저렇게 죽었던 기념하는 비석이 있는 곳은 죽은 자들이 있는 곳이다. 기념은 살아생전에 남겨놓은 공력 업적을 써놓는 것이다.
무덤 사이에서 나온 귀신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서 절을 한다. 이룰구원의 차원에서 무덤을 분석해보면 무덤은 산 사람이 아닌 죽은 사람이 묻히는 곳이다. 무덤은 죽은 자가 묻혀서 썩는 곳이요, 무덤은 기능 지능이 감각과 의식이 정지된 곳이요, 무덤은 살아있는 사람과는 관계가 없는 곳이요, 무덤은 육에 속한 정을 끊지 못한 자들이 와서 우는 곳이다.
일반인들만이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 중에도 사람이 죽었는데 화장터에서 태우면 두 번 죽는 것으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물질적으로 보면 죽으면 다 원소로 돌아가는 것이다.
믿는 사람이라도 가족의 무덤을 지어놓으면 가봐야 한다. ‘여우가 파먹지 않았나’ 하고 살펴봐야 하고, 때마다 풀도 베어줘야 한다. 무덤은 가만 두면 비바람에 깎여서 자꾸 내려앉는다. 그래서 자주 가봐야 한다. 늘 관리를 해야 한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보면 그건 소용없는 일이다. 자주 산소에 가는 것은 죽은 사람이 자꾸 생각이 나서 가는 것이다.
육에 속한 정을 끊지 못한 자들이 와서 우는 곳이 무덤이다. 죽은 사람을 자꾸 생각하면 귀신들리기 쉽다. 그 다음에 무덤은 밤에 여우들이 눈에 불을 켜고 죽은 시체를 뜯어먹는 곳이다. 영적으로 말하면 선악과 따먹고 영이 죽은 육체들이 사는 세상을 무덤이라고 한다. 선악과 따먹고 육신은 아직 살아있으나 허물과 죄로 영은 죽었고 육체는 죽어가고 있는 자들이 사는 세상을 무덤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세상을 사망계라고 한다.
이 세상은 영적 기능과 지능이 죽어서 하나님과 단절된 자들이 사는 곳이요, 생명과를 먹지 못하는 곳이요, 쉽게 말해서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의 세계가 그렇다. 성경은 하나님의 철학이 나오는 거다. 성령님의 역사다.
예수님을 믿는 기독교인들이 생명과의 교훈과 정신을 먹지 않고 세상 땅에 속한 교훈과 정신을 먹으면 이룰구원 면에서 영생으로 영원히 사는 것은 없고 하는 것마다 전부는 사망으로 죽는 것이고 전부는 형벌이고 전부는 심판성이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생명과를 먹지 않고, 영에 속한 영의 양식, 하나님의 말씀을 먹지 않고 그냥 성경구절만 읽을 바에야 집에서 예수 믿고 성경 사서 읽으면 되는 거지 뭐 하러 교회에 다니고 하나님의 뜻을 찾느냐? 지금 이 말은 성경구절 속의 하나님의 뜻, 영의 양식 그걸 알아야지 그냥 성경구절만 읽고 끝나면 안 된다는 의미이다. 성경은 성령의 감화로 기록이 됐기 때문에 성경을 글자 문자로만 읽어서 되는 게 아니라 글자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도 성령의 감화로 깨닫게 되는 것이다.
‘심판성이라, 사망으로 죽는다’ 하는 것은 예수 믿는 사람이 잘 믿고 잘못 믿고에 따라서 지옥에 가고 천국에 가고 그걸 말하는 게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님의 피 공로로 은혜로 모두 기본구원은 얻었으니 천국에 가는 것이고, 천국에 가기는 가는데 그 다음에 영능의 실력을 닦아서 오게 하는 것이 성경의 교훈이더라. 이게 하나님 뜻이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자들아, 너희들은 기본구원에 신경 쓰지 말아라. 그건 예수님이 다 이뤄놓은 것이다. 이제는 이룰구원에 힘을 써라’ 하는 것이 성경의 교훈이다.
예수님이 이뤄놓은 기본구원 안에는, 예수님의 덕으로 내가 천국 가는 기본구원 안에는 기본부활과 하나님의 아들인 자권이 들어있다. 즉 태어나서 금방 죽어서 그 아이 족보에 빨간 줄이 그어져 있어도 그 아이는 그 집의 자식인 것과 같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무슨 이력과 공로가 있고 한 것에 따라서 그 사람이 이 세상에 산 기념이 되는 것처럼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을 얻었으면 이제는 말씀을 따라 살아감으로 해서 이룰구원의 공력을 쌓아가야 하는 것이다.
무덤은 영적으로 사망성을, 죽는 성질을, 죽는 것을, 죽어가는 것을 계시하고 있다. 세상 일반적으로도 산 사람은 공동묘지에서 살지 않듯이 예수 믿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정상적인 신앙을 갖는 사람은 사망성으로 살지 않는다. 부활 때에 죽은 것은 사망성은 부활이 안 된다. 왜? 그 성질이 신령성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을 닮은 게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
‘예수 믿어 세상에서 부자 되고’ 하는 것은 예수 믿는 사람의 정상적인 길이 아니다. 이건 다른 복음이고, 이질이고, 사단 마귀가 가는 길이고, 사단 마귀의 가르침이고, 거짓자들 이단자들이 하는 짓이다. 우리는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예수 믿지 말아라.
한 가정에서 같이 예수 믿으면서 그런 사고방식을 가진 가족이 있고, 진리노선을 가는 가족이 있다면 여기는 대립이 되는 거다. 부모가 이질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그 자식들은 죽을 때까지 바로 못 선다. 그렇게 영향을 끼치는 거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먹고 마시고 사는 것이 먹는 음식의 영양가가 부실하면 특히 아이들 뼈는 더 심하게 변모가 된다. 피부 골각에 이상이 생긴다. 영적 면에서도 신앙정신이 똑바르지 못하면 신앙의 기준을 잡는 것에 문제가 생기는 거다.
엄밀히 따져서 교회라는 것은 인간정실로 물질성을 따라 가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흑백이 분명히 나누어지는 곳이다. 질질 끌려서 믿는 건 안 믿는 거다. 우리는 그렇게 믿지 말라.
정상적인 신앙을 갖는 사람들은 많은 사람이 간다고 해서 덩달아서 세상 넓은 길, 사망 길, 심판 길의 자리로 가지를 않는다. 그런 신앙사상으로 사는 교회에는 안 간다.
주님이 계신 교회는 영생이요 생명이요 진리요, 그러니까 날마다 먹으면 먹을수록 구원을 이뤄가는 교회요, 구원을 이뤄간다는 것은 날마다 깨달음의 이치가 자꾸 성장한다. 자꾸 차여진다. 이러면 사람의 인격이 하나님처럼 변화되고 하나님의 속성을 가지게 된다.
또한 이 길을 가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혹 실수를 해도 ‘아차’ 하고 빨리 돌아 선다. 그런데 그걸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그것조차도 모른 채 계속 자기감정으로만 나가는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이 어떻게 되겠느냐?
진리이치의 말씀에 많이 절여진 사람일수록 제 자리로 돌아오는 게 빠르다. 그런데 개인감정으로 돼 있는 사람은 그 감정이 주격으로 돼 있으므로 옳은 진리이치로 들어오는 방법을 모를 수도 있고, 들어오기 불가능할 수도 있고, 개인감정으로 돌아다니게 된다.
목회를 할 때도 흑백이 분명히 나와야 한다. 임시성과 영원한 것, 하나님의 의사단일성 등을 분명히 갈라야 한다. 안 그러면 목회는 힘들다. 아는 자가 목회가 되는 거다. 그만큼 목회가 되면 그만큼 눈이 뜨인 거고, 다른 사람을 주님 쪽으로 밀착시키게 되는 것이다. 완전하지는 못하지만 그렇다.
주님이 계신 교회는 영생이요 생명이요 날마다 구원을 이뤄 나간다. 그러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교훈과 그 정신 사상이 없는 교회는 사망성이기 때문에 예수 부르고 예배드리고 열심부리는 것의 질이 사망성이므로 즉, 무덤이기 때문에 아무리 거창한 이력이나 업적이라도 전부는 죽은 것이다.
예수님께서 거라사인 땅에 도착하자마자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기다렸다는 듯이 무덤 사이에서 나왔다.
더러운 귀신이 들려서 무덤 사이에서 나온 사람의 성질과 행동과 모습이 어떻다고 했느냐? 정신이 멀쩡한 사람이 무덤에서 사느냐? 그건 뭐가 들렸다? 귀신. 영이 죽은 곳에서 그곳이 자기가 살 곳이라고 거기에 터를 잡고 있으면서 그 정신 소원 목적을 먹고 있는 사람은 성경을 통해서 보면 귀신들린 것과 같다. 그곳은 네가 살 곳이 못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예수 믿는 사람이 절간에서 화장실 청소를 한다거나 마당을 쓸어주면 한 달에 100만 원을 준다고 하니 거기에 취직해서 월급 타먹고 살면 되는 것이냐, 아무리 많이 준다고 해도 안 가야 하는 것이냐? 간다면 그 사람은 정신이 죽은 거다. 그렇게 해서 육신이 배불러봐야 그건 똥돼지밖에 안 된다. 사람의 가치가 안 된다. 사람의 가치가 먹고 배부른데 있는 것이냐? 인격에 있다. 사람의 가치를 알아야 한다.
귀신들린 사람의 성질과 행동과 모습이 어떠하다고 했느냐? 옷을 벗은 채 무덤이 있는 공동묘지로 뛰쳐나가는 것을 여러 번 붙잡아다 쇠사슬로 또는 쇠고랑으로 묶어놨는데 여러 번 풀고 나갔다는 것이다. 터치고 무덤으로 자꾸 간다.
무덤으로 가서 이 비석도 보고 저 비석도 보면서 비석 연구를 하는 거다. 비석 연구를 하면서, 또 그 정신을 기념하면서 자기도 그런 업적을 남기겠노라고 소리 소리 지르면서 돌을 가지고 자기 몸을 상하고 있다. 왜? 자기 기도 빨리 들어달라고. 그러니 누가 그 사람을 말릴 수 있을까?
이걸 들여다보면 귀신들린 교회 목사들이 하는 짓이다. 표현이 이런 거지 실질적으로 교회가 하는 짓이 그런 사상이 들어있다. 그 질은 사망성이다.
귀신들린 자를 감옥에 가두면 그 귀신이 나갈까? 약을 먹이면 더러운 귀신이 나갈까? 높은 영광자리 권세자리를 주면 더러운 귀신이 나갈까? 교회에서 직분을 주면 더러운 귀신이 나갈까? 여럿이 모여서 안수를 해 주면 더러운 귀신이 나갈까?
먼저 우리가 이것을 생각을 해 보자. 일반적으로 사람이 더럽다고 하면 그 사람에게 무엇이 묻었거나 냄새가 난다거나 때가 끼었는데 씻지 않았거나 오랫동안 옷을 갈아입지 않아서 더러워지고 냄새가 난다거나 하는 경우다. 그러나 그 옷을 벗고 씻으면 그 사람은 깨끗해진다.
또 사람이 더럽다 할 때 일반적으로 더러운 생각, 더러운 마음이 있다. 보통 보면 공중질서라든지 공동적인 도덕성을 어기고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말과 행동이 더러운 사람이 있다. 정신적 차원에서 이걸 잘 봐라.
점쟁이나 그 점쟁이에게 점을 보러 가는 사람의 정신은 둘 다 똑같다. 세상에서 부귀나 존귀나 영광을 얻고자 귀신들린 자를 찾아간다. 그리고 귀신들린 자의 말을 듣는다. 이는 모두 다 더러운 귀신들린 자들이요 더러운 정신들이다. 귀신들린 사람에게 뭘 물으러 가는 게 우리가 볼 때는 더러운 정신들이다. 귀신들린 정신들이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여기에는 더러운 마음, 더러운 정신, 더러운 행동이 도사리고 있다. 영적으로 보면 지금 교회 안에 그런 소원과 목적을 가진 자들이 수없이 많다. 지금 마지막 시대에 교인들이 불에 타서 없어질 저주받을 것으로, 형벌과 멸망 받을 것으로 구하고 있는 신앙상태들이 많은데 이는 더러운 귀신들린 자라는 것을 성경이 계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사람의 정신이 맑은 정신이 있고, 비에 옷이 젖듯이 세상에 젖어있는 정신이 있다. 그 정신이 들면 그 행동이 나오게 돼 있다. 예수를 믿는 자들이 하나님 것, 신령하고 거룩하고 영생적인 것을 구하고 가져야 하는 것인데도 그걸 구하지 않고 여전히 세상의 불탈 것 썩을 것 심판 받을 것으로 자기의 인생의 목적적으로 구하고 있다면 이는 더러운 귀신이 들린 것이다. 성경에 영생과를 먹으면 살고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고 가르쳐 주고 있는데도 여전히 세상 것을 구하고 있다면 이는 더러운 귀신들린 자이다.
종교적인 사명자, 종교적인 영웅성, 종교적인 허영성, 종교적인 허풍쟁이 그런 정신 사상은 인간들의 강압이나 억압이나 수단이나 인간들의 유전이나 전통이나 제도나 도덕성이나 철학이나 세상 법으로 묶어놓지를 못한다. 감옥에 넣어도 그 정신은 안 없어진다.
무덤에 비석이 많다. 비석에는 그 사람이 살아생전 이뤄놓은 공력 업적 이력들이 자랑스럽게 써있다. 비석은 기념이라. 기독교 안에서 ‘누가 순교를 당했네’ 하며 후대 사람들이 책을 써서 전하면 거기서 예수정신이 올 수 있는 거냐? 참고는 된다. ‘아, 이 사람이 이런 정신으로 살아왔구나. 참 훌륭하다’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자기 정신은 예수님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선악과 따먹고 영이 죽은 이 사망계에다 자기의 비석 또는 자기 종교적인 업적과 기념을 남기고자 하는 자는 성령은 아니고 더러운 귀신들린 것이다. 세상적 육적 비진리적 옛사람 부패성적 마귀적인 그런 더러운 귀신들린 자, 더러운 신앙정신이 수없이 많다.
왜 귀신들린 자가 큰 소리를 지르면서 자기 몸을 치는 것이냐? 자기 몸을 자학하는 것은 자기 기도 들어달라고 하나님을 겁주고 하나님께 데모를 하는 것이다. 사람이 불결하고 더러운 정신이 들어가면 세상 법이나 종교법이나 억압 강압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런 걸 많이 볼 수 있다. 이상한 교회에 가서 이상한 정신이 들어놓으면 부모형제 처와 자식이 다 헤어진다. 잘못된 거기 가서 살고 거기 가서 몸 바치고 그게 사명인줄 안다.
잘못된 가르침을 받으면 사람이 그렇게 된다는 것을 왜 모르느냐? 일반적으로 보면 사람이 정상이다. 그런데 성령의 눈으로 구원목적을 놓고 보면 귀신들린 거고 사단 마귀 들린 거다. 귀신들린 교회에 가면 아무리 해도 안 나온다.
그가 멀리서 예수님을 보고 달려왔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안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교회를 다닌 자로 보여진다.
그가 예수님께 절을 하면서 큰 소리로 부르짖기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라고 했다.
귀신들린 자가 성전 안에서 기도하면서, 회당 안에서 기도하면서 예수님을 향해서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한 것처럼 오늘날 교회 안에 예수이름을 부르면서 기도는 하는데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하는 그런 기도가 많다. 기도를 하는데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한다는 건 예수님과 통하는 기도냐, 안 통하는 기도냐? 안 통하는 기도다.
사람과 사람이 안 통한다는 건 무슨 뜻이냐? 사람이 통하는 건 머리로 통하느냐, 마음으로 통하느냐? 마음으로 통하는 거다. 마음으로 통하듯이 예수님과 우리와 통하는 것은 마음으로 통한다. 그 마음은 진리를 붙잡은 마음이다.
그러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하는 기도는 어떤 기도냐? 진리와 상관이 없는 기도요, 주님 닮는 것과 상관이 없는 기도요, 주님의 소원 목적과 상관이 없는 기도다. 이런 기도는 귀신들린 기도이다. 이런 기도는 다른 말로 하면 세상에서 부자로 살게 해 주고 자기 원대로 해 달라는 것이니 그 말을 내용적 질적으로 보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하는 말과 같은 것이다. 우리가 왜 그런 기도를 하겠느냐?
우리가 말을 할 때에 남을 자꾸 깎아내리면 자기가 올라가느냐, 내려가느냐? 올라가려고 깎아내리는 건데 내려간다. 그러면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자기가 올라가려고 그런 말을 하는 거냐, 내려가려고 그런 말을 하는 거냐, 아니면 이것도 저것도 모르고 그런 말을 하는 거냐? 사실은 스스로 모르고 하는 말이다. 그런데 그러면서 다른 사람을 깎아내리기 위해서 그 말을 하는 거다.
사람의 말은 말 속에 말이 있다. 그걸 봐라. 말 속의 말을 들을 줄 알아야 한다. 입의 말만 들으면 안 된다. 그런데 우리는 ‘누가 잘 했네. 누가 잘못 했네’ 그렇게 듣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속성에 기준을 놓고 거기에 맞춰서 듣고 판단을 내리는 거다. 그러면 양쪽에서 아무리 잘했어도 둘 다 기준에서 어긋난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렇게 보지 않고 사람의 말에 신경이 쓰여지면 듣고 판단하는데 문제가 큰 것이다.
목사의 기준만이 아니라 우리 성도들의 기준도 하나님의 성품에 기준을 두고, 그 다음에 자타의 구원을 위해서 지혜롭게 생각을 해야 한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을 대상으로 20여년 동안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영원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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