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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대상19: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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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창인 목사 |
참고 : | 광성교회 1999년 4월 18일 주일 설교말씀 |
대상19장 1-5
멋있는 성도
김창인 목사
역대상 제 19장 제 1절 ~ 5절
1절 : 그 후에 암몬 자손의 왕 나하스가 죽고 그 아들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
2절 : 다윗이 가로되 하눈의 아비 나하스가 전에 내게 은혜를 베풀었으니 이제 내가 그 아들 하눈에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고 사자를 보내어 그 아비 죽은 것을 조상하게 하니라 다윗의 신복 들이 암몬 자손의 땅에 이르러 하눈에게 나아가 조상하매
3절 : 암몬 자손의 방백들이 하눈에게 고하되 왕은 다윗이 조문사를 보낸 것이 왕이 부친을 공경함인 줄로 여기시나이까 그 신복이 왕에게 나아온 것이 이 땅을 엿보고 탐지하여 함락 시키고자 함이 아니니이까
4절 : 하눈이 이에 다윗의 신복 들을 잡아 그 수염을 깎고 그 의복의 중동볼기까지 자르고 돌려 보내매
5절 : 혹이 다윗에게 가서 그 사람들의 당한 일을 고하니라 그 사람들이 심히 부끄러워하므로 다윗이 저희를 맞으러 보내어 이르기를 너희는 수염이 자라기까지 여리고에 머물다가 돌아오라 하니라
오늘 역대상 제 19장 1절에서 5절까지 있는 말씀 가지고 “멋있는 성도”란 제목으로 말씀드립니다.
여러분 멋이라는 말하고 맛이라는 말하고는 비슷하면서도 다르지요. 우리 사람은 아주 멋이 있어야 됩니다. 그럼 그 멋이라는 뜻이 무엇인가? 사전에서 찾아 봤더니 ‘하는 짓이나 모양새가 격에 맞아 훌륭한 것.’ 그렇게 설명했어요. 그래서 이 말을 뒤집어 얘기하면 격에 맞는 말, 격에 맞는 행동, 격에 맞는 모양새 이럴 때가 참 멋있다. 그렇게 얘기한다는 얘기입니다.
예를 들면, 술집여자들, 술집에 안 가서 잘 모르긴 하겠지만, 지나가다가 술 팔고 싸우는거 보면 이 술집여자들은 그저 욕지거리예요. 보통 욕지거리가 아니야. 무슨 욕을 빼놓고 말을 못하지 않아요? 또 그리고 쌍소리예요. 그 쌍소리 빼 놓곤 얘길 못할 정도예요. 그런데 예를 들어서 대통령 부인이 술집여자처럼 말마다 욕지거리, 말마다 쌍소리를 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건 격에 맞지를 않죠. 그러니까 격에 맞는 말을 하고, 격에 맞는 행동을 하고, 그 격에 맞는 모양새를 갖출 때 참 멋있다 그런 얘기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사람,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하는 이런 격을 가지지 않았어요. 그럼 그 격에 맞는 생각도 해야되고 말도 해야되고 그 다음에는 행동도 해야 되고 모양새도 갖춰야 된다. 그런 얘기입니다. 그래서 “멋있는 성도”
1. 보은의 멋 (1~2)
그러면 오늘 본문의 가르침을 따라 생각해 보겠는데, 멋있는 성도가 뭐냐하면 은혜를 갚는 성도가 참 멋있습니다.
그 은혜 갚는 다는 말을 한 마디로 줄이면 보은(報恩)입니다. 무슨 멋이 있느냐 하면 보은의 멋, 그 멋이 있는 성도입니다. 다윗 왕이 나이 많아 죽어갈 때에 아들 솔로몬에게 왕위(王位)를 이어주면서 유언을 몇 마디 남깁니다. 유언이라고 하는 거는 아주 심각한 얘기 아닙니까? 평소에 늘 생각하던 것을 유언으로 남기지 않느냐 그 말입니다. 그 몇 마디 중에 한 마디가 저 길르앗, 즉 요단강 건너편에 있는 길르앗 땅에 있는 바실래라고 하는 사람, 그 사람에게 은혜를 굉장히 많이 입었으니까 그 아들에게 반드시 은혜를 베풀어주어라는 겁니다.
여러분 이렇게 유언할 때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무슨 뜻인지 다 알아듣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르니까 설명을 해야되지 않아요? 그러면 다윗이 유언에 남길 정도로 바실래에게 입은 은혜가 무엇이냐 그 말입니다.
다윗이 압살롬의 반란을 당하지 않아요? 즉, 쿠데타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쿠데타군이 예루살렘으로 진격해 와서 예루살렘을 점령해버렸습니다. 사실은 거의 끝난 거 아닙니까? 그래서 다윗은 너무 급한지라 신도 못 신고, 기드론 시내를 건너 도망갔습니다. 그때 당시 왕이 신도 못 신고 도망간다는 것이 보통 창피를 당하는 게 아닙니다. 그 때 당시 종들은 신을 못 신어요. 주인들은 꼭 신을 신습니다. 그런데 신을 못 신었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창피한 일 입니까? 그리고도 살아남지를 못하겠으니까 요단강 건너까지 도망을 갔습니다.
그 땅에는 바실래라고 하는 큰 부자가 살았어요. 그런데 쿠데타 군이 예루살렘 수도를 점령했고, 왕은 지금 쫓겨왔는데 누가 감히 그 왕을 돕겠다고 나서겠습니까? 도와줬다가 나중에 쿠데타가 성공하는 날에는 자기의 운명이라는 건 박살이 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바실래는 쫓겨온 왕과 따르는 사람들에게 자기의 재산을 털어 가지고 뒤를 봐주지 않았습니까?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도와주었습니다.
나중에는 다윗이 패전병들을 전부 모아 가지고 압살롬의 반란을 진압합니다. 그렇게 하고는 그 바실래라고 하는 노인에게 예루살렘으로 함께 가자고 요청했습니다. 내가 은혜를 갚겠다는 겁니다. 한사코 바실래는 안 간답니다. 즉 바실래는 고향 땅을 지키고 고향에서 죽겠다는 마음이었습니다. 하도 다윗이 간청을 하니까 그렇다면 내 아들 김함을 좀 데리고 가 주십시오. 다윗이 그 아들 김함을 데리고 와서 다윗 평생에 극진히 은혜를 베풉니다. 신세진 것 아버지에게 은혜를 입은 것을 아들에게 그렇게 갚았습니다. 그리고는 자기가 죽게 되니까 그 아들 솔로몬에게도 계속해서 은혜를 베풀라는 거였습니다. 얼마나 멋있습니까? 자기 평생에 은혜를 갚았으면 이제는 됐다 싶은데, 아들에게까지 대(代)를 이어서 은혜를 갚으라고 했으니 참 멋있는 성도입니다. 보은의 멋. 이 멋을 갖춘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 1절, 2절 “그 후에 암몬 자손의 왕 나하스가 죽고 그 아들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 다윗이 가로되 하눈의 아비 나하스가 전에 내게 은혜를 베풀었으니 이제 내가 그 아들 하눈에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고 사자를 보내어 그 아비 죽은 것을 조상에게 하니라 다윗의 신복 들이 암몬 자손의 땅에 이르러 하눈에게 나아가 조상하매”
읽어드린 본문이 무엇이냐 하면, 다윗이 사울의 추격을 받았습니다. 이 잡듯이 뒤져 죽이려고 합니다. 사울은 왕입니다. 유대 땅에 있어 가지고는 발붙이고 숨어 있을 곳이 없어요. 그래서 암몬자손의 땅. 암몬 나라로 갔습니다. 그때 암몬왕 나아스가 박대를 하려면 박대를 할 수 있는데도 다윗 일행을 맞이해 가지고는 얼마나 극진히 도와주는지. 다윗이 그 때 받은 은혜와 신세진 것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모든게 아쉬운 것이 없을 때 크게 도움을 주는 것보다는 정말 아쉬워 견딜 수 없을 때 조그만 도움이 두고두고 기억이 되는 겁니다.
제가 신학대 다닐 때 점심도 제대로 못 먹을 때 아닙니까? 식당에 가 밥사 먹는다는 것은 생각도 못할 일이었습니다. 어느 분이 찾아오더니 식당에 가자 그럽니다. 못 견디는 척 하고 따라갔습니다. 따라갔더니 뭘 먹겠냐 그래요? 식당에 메뉴를 보니까 도무지 뭐가 뭔지 알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거나 시켜주십시오. 그랬더니 돈까스를 시켜요. 돈까스가 나왔는데 어쩜 그렇게 맛 좋습니까? 난 생전 처음 먹어보았습니다. 그래서 내가 속으로 돈 벌면 하루 세끼 돈까스만 먹고산다고 다짐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어느 정도였으면 내가 그렇게 생각했겠냐고요. 내가 그 분의 도움을 평생 잊겠어요? 지금은 돈까스 열번을 사줘도 그렇게까지 생각 안 할겁니다. 그러니까 괜찮게 사는 사람끼리 사준다 그러지 마시고, 정말 먹지 못해 아쉬워하는 사람, 도움이 아쉬운 사람들을 도와주십시오.
다윗이 바로 그런 도움을 받았어요. 죽은들 잊습니까? 그러다가 다윗이 사울의 뒤를 이어 왕이 됐어요. 그러고 있는데 암몬 자손의 왕 나하스가 죽었다는 겁니다. 즉 자기 은인인데, 그 아들 하눈이 대신해 왕이 되었다는데 가만히 있을 수가 없지 않아요? 자기의 신복들로 조문 사절단을 만들어 조상(弔喪)을 하게 했다는 것이 본문입니다. 무얼 들고 갔다는 말은 기록되 있지 않아 모르지만 빈손 들고 갔겠어요? 은혜를 갚으려고 하는데 말입니다. 그렇게 오래두고 기억하고 있다가 신세 진 것과 은혜 입은 것을 꼭 갚는 다윗. 어쩌면 이렇게 멋집니까?
열번 잘해주다가 한 번 섭섭하게 해 주면 열번 잘 해준 거 다 잊어 먹고 섭섭한 거 그거만 들고 돌아다니며 얘기하지 마시고요, 한 번 섭섭하게 한건 잊어버리시고 열번 잘 한 것만 기억하면 자신에게도 큰 유익이 될 겁니다. 다윗처럼 은혜를 갚을 줄 아는 성도, 참 멋있는 성도입니다.
한 번은 숙종왕 때. 숙종이 개성에 행차를 했어요. 그런데 개성 성문 밖에는 효자 하나가 살았습니다. 그런데 자기 어머니가 평생에 왕을 한 번 뵙고 죽었으면 원이 없겠다는 겁니다. 언제나 아무나 왕을 볼 수 없잖아요? 그런데 어머니가 늙었어요. 이제 병도 들었어요. 마침 숙종 대왕께서 개성에 행차를 한다는 겁니다. 아들은 아주 효자인지라 이때다 싶어서 불편한 어머니, 걷지도 못하는 어머니를 업고서 왕이 지나가는 곳으로 나갔습니다. 길가에서는 제대로 못 봅니다. 지나갈 때까지 머리 숙이고 있어야지. 고개 들었다가는 죽습니다. 그러니까 맞은편 언덕에 가서 서있었습니다.
언덕에서는 어떤가요? 실컷 볼 수 있잖아요? 나중에 그 사정을 알게 된 숙종 대왕은 그 효자에게 큰상을 내렸다는 것이 아닙니까? 어머니의 은혜를 힘입어 태어났고 자랐고 자기가 자신이 되었는데 그 은혜를 기억하고 효도하는 이 아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사람에게 대한 계명을 주실 때 첫째 부모에게 잘하라는 것이 아닙니까? 부모의 은혜를 생각지 못하고 보답하지 못하는 그 주제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한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 말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뭔지 아십니까? 교회 와서 거룩 거룩하고 혼자 봉사한다고 주름 잡아도 집에 가서 자기 시어머니 시아버지 알기를 뭐처럼 아는 여자라면 그 믿음을 어디에 써먹을 겁니까? 믿음은 예배당에서 찾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 집구석에서 보면 됩니다. 은혜를 보답할 줄 아는, 은혜를 보답하는 보은의 멋, 다윗이 얼마나 멋진 성도입니까? 여러분들도 이런 멋진 성도가 되기를 주의 바랍니다.
2. 화평의 멋 (3~4)
두 번째로는 화평의 멋입니다. 어떤 가정에 장가 안 간 총각 형제가 있어요. 물론 부모도 있고, 그런데 그 집안에 그렇게 형제우애가 좋아요. 동생이라면 형이 그냥 끔뻑 죽고 동생은 형이라면 목숨 내놓고 그렇게 의(義)좋게 사는데, 형이 장가들었어요. 그 집안에 여자 하나가 들어오더니 한달, 석달, 6개월, 1년 지나고 났더니 형제가 개 싸우듯 싸워요. 누구 때문 이예요? 사람하나 잘 들어 와야됩니다. 그렇게 화평하게 살던 형제인데 여자 하나들어 온 후에 왜 그렇게 싸움판이 벌어집니까? 얼마나 불행합니까? 가정도 불행하고 여자 자신도 불행합니다.
이제는 그 반대로 형제가 그렇게 싸우는 집안에 형이 장가를 들었는데 너무 좋은 여자를 맞이했습니다. 그래가지고 자기 남편한테 시동생에 대해서 말을 잘하고 시동생한테는 형의 말을 잘하여 화해를 시켰습니다. 그렇게 둘도 없는 형제가 됐어요. 밤 낮 개 싸움하던 집안에 화목하고 천국과 같은 집안이 됐습니다. 화평을 도모하는 것과 불행을 도모하는 것은 천국과 지옥의 차이입니다. 여러분, 가는 곳마다 화평케 하는 성도의 삶 얼마나 멋있습니까?
본문으로 돌아가서 3절, 4절 “암몬 자손의 방백들이 하눈에게 고하되 왕은 다윗이 조문사를 보낸 것이 왕이 부친을 공경함인 줄로 여기시나이까 그 신복이 왕에게 나아온 것이 이 땅을 엿보고 탐지하여 함락시키고자 함이 아니니이까 하눈이 이에 다윗의 신복 들을 잡아 그 수염을 깎고 그 의복의 중동볼기까지 자르고 돌려보내매”
이 본문을 보면 기가 막힙니다. 다윗은 암몬 자손의 왕 나하스의 그 왕의 아들 하눈과 화평을 도모하며 살고싶어 했으면 화평케 한 다윗 아닙니까? 화평케 하는 사람은 아주 멋있는 사람입니다. 암몬 자손의 왕 나아스가 죽고 아들 하눈이 대신하여 왕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다윗이 조문사절을 보냈더니, 그 아들 하눈이 왕이 되고 조문사절을 영접하며 얼마나 좋아했습니까? 너무너무 감격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바로 밑에 있는 방백들이 문제였습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얘기하면 사람을 잘 둬야되요. 사람 잘 둬야 된다니까요. 그러니까 그 밑에 있는 방백들이 왕이여 너무 좋아하지 마십시오. 왜? 다윗이 저렇게 조문사절을 보낸 것이 진짜인줄 아십니까? 착각하시면 안됩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조문 사절을 보내는 척 해 놓고는 이 땅을 샅샅이 조사하고 탐지하고 알아두었다가 빈틈이 어디 있다 하는걸 알아낸 다음에 반드시 쳐들어와 우리를 굴복시키려고 하는 겁니다. 알아서 하십시오. 그래서 하눈이 그 말을 듣고 보니까 그럴 듯 했습니다.
그래서 그래? 그러더니 조문 사절을 불러 수염 절반을 깎고 의복을 중동볼기 까지 짤라 버린 후에 개 쫓듯이 쫓아 버리고 말아요. 그렇게 되면 다윗과 하눈 사이에 친구가 됩니까? 원수가 됩니까? 은혜를 원수로 갚은 겁니다. 다윗은 그렇게 화평케 하고자했고 암몬 자손의 왕도 그렇게 알았는데 그 밑에 있는 방백들이 왜 그렇게 친한 친구 사이를 이렇게 불화 즉, 원수를 맺게 합니까? 두 왕 사이를 그렇게 갈라놓고 말았습니다. 나중에는 큰 전쟁이 일어나지 않아요? 나중에는 암몬 사람들이 젊은 피를 많이 흘리고 큰 손해를 보는 것 아니었습니까? 왜 이렇게 됐습니까? 화평케 하자는데 왜 그렇게 시비를 걸고 조문사들에게 하지 못할 짓을 하여 원수를 맺어놓고 맙니까? 그러기에 화평케 하는 것은 그렇게 멋진 일입니다. 그 반대로 불화케 하고 원수를 맺는 것은 그와 반대로 한참 잘못된 일입니다. 여러분 다윗처럼 화평케 하는 사람이 될지라도 결단코 원수맺고 은혜를 원수로 갚고 친구를 원수로 만들어 놓는 이런 불행스러운 일은 없기를 바랍니다. 다윗은 화평케 하는 화평의 멋이 있는 성도였습니다. 할렐루야!
3. 배려의 멋 (5~ )
세 번째로는 배려의 멋이 있었습니다. 사전을 찾아보니까 배려란 ‘이래저래 마음 써주는 것’ 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도 마음 써주고 저렇게도 마음 써 주고 이렇게도 저렇게도 신경을 써 주는 것을 말합니다. 이걸 배려라고 그래요. 그러니까 흔히 쓰는 말로 말하면 늘 너를 생각하는 그 멋. 나만 나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너를 생각하는 그 멋. 그게 있어야 되지 않아요? 나만 나라고 생각하는 건 믿지 않는 사람들이 더 잘하는데 이게 어떻게 멋있는 성도겠어요. 그렇다면 성도로써는 멋이 없어요. 나보다 오히려 너를 생각하는 이 배려의 멋이 귀합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5절을 보면 “혹이 다윗에게 가서 그 사람들의 당한 일을 고하니라 그 사람들이 심히 부끄러워하므로 다윗이 저희를 맞으러 보내어 이르기를 너희는 수염이 자라기까지 여리고에 머물다가 돌아오라 하니라”
이 말이 뭐냐하면, 우리 나라가 일본의 식민지로 있을 때 단발령이 내려서 상투 자른 적이 있죠? 뭐를 알수 있나요? 상투 자르는 걸 본적이 없고, 잘린 일도 없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얘기 들어서 알잖아요? 우리 조상들이 상투 잘리니까 고맙다고 그랬어요? 집에 돌아가서 자살한 사람도 있고요, 집에가 통곡을 한사람도 있습니다. 상투 자른걸 그렇게 부끄러운 일로 여겼습니다.
이 말씀을 드린 까닭은 다윗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수염을 깎이면 그 만큼 부끄럽게 여긴 거예요. 그 것도 어떻게 깎았느냐 하면 절반을 깎았다고 했습니다. 수염이 긴데 그 절반을 깎은 거 아니에요. 양쪽을 갈라놓고 한쪽은 깍고 한쪽은 그대로 둔겁니다. 염소처럼 말입니다. 그게 얼마나 창피한 꼴을 당한 겁니까? 또 옛날 다윗왕 때 바지를 중둥볼기 까지 잘랐다는 말은 엉덩이가 다 보일 정도로 잘랐다는 말입니다. 뒤로 돌아서면 엉덩이가 보이지만 앞으로 돌아서면 뭐가 보일까요? 상상을 해봐요. 그런 창피를 당한 겁니다.
암몬 자손의 땅에서 돌아오면 제일 먼저 이르는 데가 여리고성 아닙니까? 너무너무 부끄러워서 벌벌 기다시피 합니다. 다윗에게 사람을 보내서 우리가 이 지경을 당했는데, 예루살렘으로 올라갈까요? 어떻게 할까요? 라고 물었습니다. 무슨 소리냐? 그 자리에 가만있어라. 사람을 보내주마. 여기에는 사람만 보낸 것으로 되 있지만 맨손으로 보냈을까요? 옷을 싹 갈아 입히고 거할 거처를 마련해 주고 수염이 자랄 때까지 여기 있어라. 생활의 뒷 책임을 내가 다 지겠다는 뜻이 아닙니까? 얼마나 멋있는 왕입니까?
그 사람이 망신당할 때, 난감한 일을 당할 때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배려를 베푼 다윗이에요. 나 보다 너를 더 생각하는 성도. 그 배려의 멋이 있는 성도입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 마당에 주차 할 때요. 나 아닌 너를 좀 배려해 주십시오. 교회 봉사한다고 2부 3부 예배 할 때까지 마당에 차를 그냥 세워두지 마세요.
여러분 지난번에 광성지도 못 봤어요? 그냥 왔다가 주차할데가 없어서 차들이 막 돌아간다고 말입니다. 왜 그래요? 제직이 먼저 마당에 주차하고 있으니 전도해서 데리고 오면 차 댈 때가 있어야지요.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그럴 때 새로 믿고 오는 교인들을 좀 생각 못 해주겠습니까? 제직들이 조금 걸어도 되고 주차비가 들어도 지하 주차장에 가면 좀 어떻습니까? 너를 생각한다는 게 큰 거 아닙니다. 그만한 손해 안보고 너를 생각한다는 말은 거짓입니다. 그만한 손해도 교회에서 못 보는 사람이 어디에 가서 누구를 배려하겠습니까?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른다? 새빨간 거짓말 아닙니까? 너를 생각하십시오. 다윗이 바로 그 신복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배려해 주는 배려의 멋. 얼마나 멋있습니까? 여러분, 교회에서나 직장에서나 동네에서나 너를 생각해 주는 이 배려. 아주 멋있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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