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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책 뒤안길] 데모당 당수 이은탁의 좌파 보고서 <불온한 상상>
목회독서교육 김학현 목사............... 조회 수 594 추천 수 0 2015.10.07 19:32:02출처 : | 김학현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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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갱이라고... 제발, 함부로 지껄이지 마라"
[책 뒤안길] 데모당 당수 이은탁의 좌파 보고서 <불온한 상상>
김학현(연서교회목사) 2015.08.10 11:12
책 <불온한 상상> 표지
<불온한 상상>(이은탁 지음 / 디스커버리미디어 펴냄 / 2015. 7 / 304쪽 / 1만5000 원)
여보! 우린 너무 안온함에 길들여진 채 사는 건 아닌지 부끄럽소, 우리가 안달하면서 보다 나은 삶의 질을 위해 달려갈 때 목숨을 걸어야 자본과 권력으로부터의 해방이 주어질 수 있다는 사실에 눈뜬 이가 있소. 스스로를 좌파며(요즘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면 자신을 좌파라 하는 이가 없는데) 데모당 당수라 말하는 이인데, 사회운동가 이은탁이 그 사람이오.
지금도 아파하는 노동의 현장과 물대포 쏟아지는 거리에 나가면 만날 수 있을 그, 꿈과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길이라면 혈서를 쓰면서 달려들 그, 연대와 저항을 위한 대안이 ‘침묵은 똥이다’를 외칠 수 있는 용기라며 가만히 있는 것 자체가 죄임을 자랑하는 거리의 용사, 그는 지금 인터넷에서 데모당 당수로 ‘질풍노도’(필명)의 분노를 휘갈기고 있다오.
그가 일생을 길거리에서 그려 온 꿈의 서사 <불온한 상상>(디스커버리미디어 펴냄)은 기득권과 맘몬이즘에 길들여진 이들에게는 다소 품을 수 없는 ‘날 것’임에 틀림없소. 어떤 이는 안일에 젖어 자본이 주는 마력에 푹 빠져 급신거릴 때, 누군가는 노동의 가치와 인권의 교두보로써 최루가스 남발하는 거리에 있었다는 걸 새삼 깨닫게 해주는 책이오.
지금, ‘나라의 근본이 백성’인 게 맞을까
지금도 세종대왕께선 세종로 한복판을 지키고 계신데, 그의 말은 헌신짝처럼 버려지고 구겨진 것을 무엇으로 설명해야 옳을지 모르겠소. 백성이 무시당하고, 밥그릇을 잃은 이들이 아우성쳐도 불순한 사상 때문이라고 내동댕이치는 세상 아니오.
여보!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요, 밥은 백성의 하늘이다”라고 말한 이가 누군지 아오? 애어른 할 것 없이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 존경한다고 입술에 침을 튀기는 조선의 제4대 세종대왕(1418~1450)께서 하신 말씀이라오. 지금도 세종대왕께선 세종로 한복판을 지키고 계신데, 그의 말은 헌신짝처럼 버려지고 구겨진 것을 무엇으로 설명해야 옳을지 모르겠소. 백성이 무시당하고, 밥그릇을 잃은 이들이 아우성쳐도 불순한 사상 때문이라고 내동댕이치는 세상 아니오.
왕정시대보다 더해 국민이 살아가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시대인 걸 아오? 물론 기득권을 가진 이들에게는 전혀 실감이 안 가는 말이긴 하오. 고공 농성을 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매스컴에서 대할 때 우린 남의 이야기 보듯 하오. 그러나 우리 노동 운동사에서 1931년 5월 29일 평양의 고무공장 노동자 강주룡이 평양 을밀대에 올라가 저임금에 항의하며 인간답게 살겠다고 외친 게 효시라오.
2013년 이맘때 해고된 학습지 여성 노동자가 25m 혜화동 성당 종탑에 올라갔소. 2003년 한진중공업 김주익 노조위원장은 35m 높이의 8호크레인에 올라가 129일간 투쟁하다 싸늘한 시신이 되어서야 땅을 밟을 수 있었소. 그가 남긴 말이 무언지 아오?
“노동자가 한 사람의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나라, 그런데도 자본가들과 썩어빠진 정치꾼들은 강성 노조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고 아우성이다. 1년 당기 순이익을 1.5배, 2.5배 주주들에게 배당하는 경영진들, 그러면서 노동자에게 회사가 어렵다고 임금 동결을 강요하는 경영진들, 그토록 어렵다는 회사의 회장은 거액의 연봉에다 50억 원 정도의 배당금까지 챙겨간다.”(본문 232쪽)
여보! 찜통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지금도 이 나라에서 어느 누군가는 밥을 달라고, 최소한의 인간 대접을 받게 해달라고 외치고 있다는 건 참 슬픈 일이오. 세종대왕 시대에도 없었던 일이 지금 국민들의 표로 당선된 박근혜 대통령 치하에 있다는 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소. 오늘(6일) 발표한 담화에서 박 대통령은 임금피크제 도입을 주장하며 “청년들에게 더 많은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도록 대기업과 고임금·정규직들이 조금씩 양보와 타협의 정신을 발휘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그들이 정말 양보할 것이라 생각하는 이들이 얼마나 되겠소.
쌍용자동차 노동자, 스타케미칼 노동자, 캐이블방송 씨앤앰 노동자 등의 고공농성은 그야말로 하늘인 밥을 요구하는 몸부림이라오. 지금도 부산시청 앞 광고탑 위에서 택시 월급제와 처우개선을 이유로, 서울의 광고탑 위에서 CJ대한통운 택배노동자들이 벌금문제 약속을 지켜달라고, 국가인권위원회 광고탑에서 기아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간접고용과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농성하고 있소.
최소한의 인간적 대접을 목표로 싸우는 고공 농성자들에게 국가인권위원회가 먹을 것을 공급하지 않아 비난을 받기도 했소. 이 나라에서 백성이 근본이고, 밥이 여전히 하늘인지 묻지 않을 수 없소. 가진 자는 더 가지려고 혈안이 되어도 정당한 경제활동이고, 따듯한 밥을 위해 목숨 건 투쟁을 하는 국민은 국가발전을 저해하는 불순한 사상을 가진 이로 매도되는 이 세태를 세종대왕은 무어라 말씀하실지 궁금하오.
‘빨갱이 새끼’라고 함부로 말하지 말라
여보, 무엇을 어떤 눈으로 보느냐가 항상 문제가 아니겠소. 대통령의 눈으로 볼 것인지, 국민의 눈으로 볼 것인지. 가진 자의 눈으로 볼 것인지, 국민의 눈으로 볼 것인지. “부유한 쪽에 사는 우리는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큰 폭격기를 타고 제3세계에서 ‘또 하나의 작은 목표’를 파괴하려는 조종사의 눈으로 이 세계를 보고 있다”(273쪽)는 표현은 참 실감이 나오. 이스라엘의 눈(미국의 눈)으로 팔레스타인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지적하는 말이오.
역사는 승자의 것이라고 했던가요. 그렇게 쉽게 쓰인 역사 속 한 귀퉁이에서 낯선 이방인처럼 인간의 기본적 행복권마저 확인 못하고 사는 이들이 있다는 걸 책은 깨닫게 하는구려. 저자는 교도소를 들락거리며 보리밥 한 덩이로 허기를 채울 수 없어서 ‘밥치기’(순서를 정해 한 사람에게 밥을 몰아주는 일)를 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이렇게 외치고 있소.
“빨갱이라고, 빨갱이 새끼라고 제발, 함부로 지껄이지 마라. 이제 상처받을 나이는 지났지만 다스리지 못한 분노가 여전히 가슴 깊은 곳에서 활화산처럼 끓고 있다. (중략) 그들은 백주대낮에 광장을 활보하며 ‘빨갱이 사냥’을 ‘종북 척결’로 이름을 바꿔 외치고 있다.”(본문 83쪽)
여보, 우리가 ‘불온한 상상’에 미쳐 일생을 데모하며 산 저자 이은탁을 모두 수용하기는 불가능하오. 하지만 책상머리에 앉아 이 세상이 변하기를 기다리는 것 또한 자기기만이라고 생각하오. 저자는 “투쟁을 경시한 채 선거에만 목을 매는 정치 세력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소. 그건 모두가 거리 투쟁에 나서란 뜻은 아니라고 생각하오.
적어도 시각의 변환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겠소. 국민의 눈, 억압받는 자의 눈, 노동자의 눈, 못 가진 자의 눈 말이오. 그런 눈을 가진 이를 싸잡아 ‘빨갱이’니, ‘종북’이니 몰아세우는 것은 어불성설 아니겠소. 국민의 눈을 지닌 이가 어찌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노조는 안 된다”는 망발을 쏟아낸 고 이병철 삼성 회장을 경영의 귀재라고 말할 수 있겠소. 롯데가의 다툼을 보며 몇 안 되는 특정인들의 놀음에 국민 모두가 놀아난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소.
여보, 우리나라에만 있는 재벌과 특정 정치인이 나라를 뒤흔드는 꼴불견을 우리가 그리도 존경해마지 않는 세종대왕께서 보시면 무어라 말씀하실지 참 궁금하오. 저자가 말하는 거리투쟁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을지라도, 이 나라의 근본이 국민이고, 국민은 최소한 인간 대접을 받고 굶주리지 말아야 한다는 원리는 존중되었으면 좋겠소. 여보, 돈과 권력 앞에 자유와 인권을 팽개치지 맙시다.
※뒤안길은 뒤쪽으로 나 있는 오롯한 오솔길입니다. 책을 읽으며 떠오르는 생각의 오솔길을 걷고 싶습니다. 함께 걸어 보지 않으시겠어요. 이 글에서 말하는 ‘여보’는 내 아내만이 아닙니다. ‘너’요 ‘나’요 ‘우리’입니다.
김학현(연서교회목사) nazunj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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