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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11:12-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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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5.6.17 주일예배 http://sungamch.net 춘천성암교회 |
요즘 [교회]는 세상을 구원할 수 있을까?
막11:12-14
수요성서관통을 하면서 1500년 무렵에 등장하는 루터의 종교개혁을 읽고 있습니다. 우리는 ‘종교개혁’ 그러면 단순히 당시의 부패한 카톨릭의 제도나 교리를 바꾸거나 전통에 저항한 것이 전부쯤으로 알고 있지만, 루터의 종교개혁은 그때까지 교회와 성직자들이 지녔던 성서에 대한 눈을 다시 뜨는 것이었고, 전통의 교회로부터 탈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걸 ‘탈 정전’이라고 하고 ‘탈 교회’라고 합니다. 요약하면, 당시의 기독교인들이 이해하는 성서로는 사람을 구원할 수 없었고, 당시의 교회로는 세상을 구원할 수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이 일어났는데, 이 연장선에서 우리는 묻게 됩니다. 과연 ‘이 시대의 교회와 성서관이 세상과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느냐’고 말입니다.
마가복음 11장이 오늘 우리의 현실을 파악하고 진단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막11장은 간단히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예수’의 이야기입니다. 예루살렘 성 밖 베다니에서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시던 예수님은 시장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혹시 무화가 열매라도 따 먹을까 하고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가 있는 곳으로 갔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나무는 잎사귀만 무성했지 열매가 없었답니다. 그래서 예수님답지 않게 저주를 하셨는데, ‘이제부터 영원히 열매를 얻지 못한다’고 하셨다는 것이지요.
여기까지는 그저 누구나 이해가 됩니다. 어떤 설교에는 ‘열매 없는 신앙생활’에 초점을 맞춰 설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13절이 바로 그 ‘문제’입니다. 이 나무가 왜 열매가 없었느냐 하면, 열매가 달리는 때가 아니었다는 겁니다. 이를테면 ‘산에서 숭늉 찾는’격이 되는 겁니다. 무화가 나무로서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왜 무화과나무를 저주했을까? 이게 골치 아프니까 누가복음은 아예 이 단락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마21엔 ‘때가 아니었다’는 구절을 빼버렸습니다. 그러나 마가는 이 말씀을 덧붙이고 있는데, 예수님이 때도 아닌 그 나무를 저주한 것은 정당한 것일까요?
문제의 열쇠는 [때]입니다. ‘열매가 달리는 때가 아니다’했을 때 그 [때]말입니다. “이따 점심 때 만나자.”고 하죠. 여기서 [때]는 우리가 일상으로 쓰는 때입니다. 꼭 집어서 몇 시를 말하는 게 아니죠. 그저 두루뭉수리 한 시간입니다. 이런 [때]를 희랍어로 크로노스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마가복음이 말하는 ‘열매가 맺을 때’의 [때]는 막1:5에 나오는 말씀,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에 나오는 그 [때]와 같은 단어입니다. 이걸 카이로스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앞에 나오는 때는 사람의 시간이고, 뒤에 나오는 때는 하나님의 시간인 것입니다. 막9:21에 벙어리를 고치는 예수님의 사건이 나오죠. 언제부터 듣지 못했느냐고 묻자 ‘어릴 때부터’라고 하죠. 거기 나오는 ‘어릴 때’도 바로 카이로스가 아니라 사람의 시간 크로노스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오늘 무화과나무 저주의 사건을 다룰 때 ‘앵두나무에 앵두 달리는 초여름’이런 걸 생각하면 안 되는 겁니다. 그렇게 일상적인 인간사의 정황을 바탕에 깔고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런 상식적인 판단을 깔고 성서를 보게 되니까 예수님의 처신이 우스워지는 거죠.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무화과는 ‘앵두’나 ‘보리수열매’같은 걸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통상 성서에 ‘무화과’가 나온다면 그건 단순한 식물의 열매가 아니라 유대교를 말하거나 유대교의 성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14절에서 사람들이 이제 그 나무로부터 “영원토록 열매를 따지 못할 것”이라고 저주합니다. 예수님이 저주한 건 죄 없는 나무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무화과나무’는 유대교이기도 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우리가 신약성서읽기를 할 때 나눈바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말씀 하시는 무화과나무는 예루살렘 성전, 곧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 공급처는 이제 그 기능이 중단된다는 말씀인 겁니다. 결국 이 사건이 어디로 연결이 되는 보세요.
11:15-18에 뭐가 나오죠? 여러분이 아시는 성전청결사건, 보다 정확하게는 ‘성전무효화 사건’과 곧바로 연결이 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20절에 가 보세요. 성전을 상징하는 무화과나무가 ‘뿌리째’말라 버린 것으로 적혀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마치 예루살렘 성전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질 것”으로 예고된 것과 맥락이 같은 겁니다. 여기서 성전 대신 유용하다고 등장하는 게 믿음, 기도, 용서(23~25절)등이죠.
성전을 저주하고 그것을 무효화 한 예수님은 대신 대안을 제시하는 겁니다.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않으면 그대로 되리라....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러면 그대로 되리라...서로 용서하라” 우리는 이 구절을 앞뒤 잘라먹고 써 먹지만 사실 이 구절은 ‘성전이 무효화 된’, 요즘으로 치면 ‘교회가 무용해진’뒤에 믿는 자들이 할 수 있는 구원행동 인 것입니다. 이건 뭡니까? 이제 보이는 성전은 무너졌으니 보이지 않는 믿음, 기도, 용서가 중요해졌다는 것입니다. 성전이라는 공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시간이 더 중요해졌다는 말입니다. 장소가 아니라 때가 더 중요해 졌다는 것입니다. 나는 지난 번 책에서 이를 두고 ‘적시’와 ‘불시’라는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불시를 떠나 적시에 사는 것입니다. 그게 크로노스에서 카이로스로 나아가는 구원의 사건입니다. 이 시간의 변화가 바로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결국, ‘이 무화과의 때가 아니라’는 말씀은 ‘무화과 철’, ‘앵두 철’이라는 말이 아니라, 무화과로 상징되는 예루살렘 성전이라는 장소는 더 이상 하나남의 때를 위한 적절한 도구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참고로 요4:21이하에 나오는 여인과 예수의 대화중에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온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그것도 역시 하나님의 시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오늘 말씀은 혁명적인 말씀입니다. 유대교는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한 공간의 종교였습니다. 그리고 그 공간을 채우는 소유의 종교였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하나님의 시간위에 세워진 시간의 종교이며, 믿음의 종교였습니다. 유대교가 건축의 종교요, 장소 확보의 종교요, 보이는 종교였다면, 기독교는 역사의 종교이며, 영의 종교이며, 보이지 않는 종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가가 이야기하는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라는 내용이 지시하는 핵심입니다. 보십시오, 이후 예수의 제자들은 모두 보이는 공간이나, 장소나, 소유를 위해 살지 않고 모두 때를 따라 살지 않았습니까? 죽을 때 죽고, 모든 것을 내 놓을 때 내 놓고, 포기할 때 포기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카이로스의 시간에 삶의 기조를 맞추고 산겁니다. 루터의 종교 개혁은 다시 변질되어 곳의 종교가 되어버린 기독교를 때의 종교로 되돌려 놓으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이런 예수의 관점에서 곳의 종교를 구성하는 본거지가 아닙니까? 다시 말씀드리자면 유대교처럼 공간과 소유의 개념이상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겁니다. 보이는 종교의 표상이 오늘날 교회라면, 그것은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인 것이고, 그러면 영원토록 저주를 받아 열매를 내지 못하는 것이니, 예루살렘 성전이 그랬듯이 오늘날 교회도 세상을 구원하지 못하는,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인 것입니다. 그래서 ‘탈 교회’, ‘탈 정전’을 도모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시간을 따라 사는 [때]의 신앙으로 바꿔야 하는 것입니다.
막11:12-14
수요성서관통을 하면서 1500년 무렵에 등장하는 루터의 종교개혁을 읽고 있습니다. 우리는 ‘종교개혁’ 그러면 단순히 당시의 부패한 카톨릭의 제도나 교리를 바꾸거나 전통에 저항한 것이 전부쯤으로 알고 있지만, 루터의 종교개혁은 그때까지 교회와 성직자들이 지녔던 성서에 대한 눈을 다시 뜨는 것이었고, 전통의 교회로부터 탈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걸 ‘탈 정전’이라고 하고 ‘탈 교회’라고 합니다. 요약하면, 당시의 기독교인들이 이해하는 성서로는 사람을 구원할 수 없었고, 당시의 교회로는 세상을 구원할 수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이 일어났는데, 이 연장선에서 우리는 묻게 됩니다. 과연 ‘이 시대의 교회와 성서관이 세상과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느냐’고 말입니다.
마가복음 11장이 오늘 우리의 현실을 파악하고 진단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막11장은 간단히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예수’의 이야기입니다. 예루살렘 성 밖 베다니에서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시던 예수님은 시장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혹시 무화가 열매라도 따 먹을까 하고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가 있는 곳으로 갔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나무는 잎사귀만 무성했지 열매가 없었답니다. 그래서 예수님답지 않게 저주를 하셨는데, ‘이제부터 영원히 열매를 얻지 못한다’고 하셨다는 것이지요.
여기까지는 그저 누구나 이해가 됩니다. 어떤 설교에는 ‘열매 없는 신앙생활’에 초점을 맞춰 설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13절이 바로 그 ‘문제’입니다. 이 나무가 왜 열매가 없었느냐 하면, 열매가 달리는 때가 아니었다는 겁니다. 이를테면 ‘산에서 숭늉 찾는’격이 되는 겁니다. 무화가 나무로서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왜 무화과나무를 저주했을까? 이게 골치 아프니까 누가복음은 아예 이 단락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마21엔 ‘때가 아니었다’는 구절을 빼버렸습니다. 그러나 마가는 이 말씀을 덧붙이고 있는데, 예수님이 때도 아닌 그 나무를 저주한 것은 정당한 것일까요?
문제의 열쇠는 [때]입니다. ‘열매가 달리는 때가 아니다’했을 때 그 [때]말입니다. “이따 점심 때 만나자.”고 하죠. 여기서 [때]는 우리가 일상으로 쓰는 때입니다. 꼭 집어서 몇 시를 말하는 게 아니죠. 그저 두루뭉수리 한 시간입니다. 이런 [때]를 희랍어로 크로노스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마가복음이 말하는 ‘열매가 맺을 때’의 [때]는 막1:5에 나오는 말씀,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에 나오는 그 [때]와 같은 단어입니다. 이걸 카이로스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앞에 나오는 때는 사람의 시간이고, 뒤에 나오는 때는 하나님의 시간인 것입니다. 막9:21에 벙어리를 고치는 예수님의 사건이 나오죠. 언제부터 듣지 못했느냐고 묻자 ‘어릴 때부터’라고 하죠. 거기 나오는 ‘어릴 때’도 바로 카이로스가 아니라 사람의 시간 크로노스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오늘 무화과나무 저주의 사건을 다룰 때 ‘앵두나무에 앵두 달리는 초여름’이런 걸 생각하면 안 되는 겁니다. 그렇게 일상적인 인간사의 정황을 바탕에 깔고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런 상식적인 판단을 깔고 성서를 보게 되니까 예수님의 처신이 우스워지는 거죠.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무화과는 ‘앵두’나 ‘보리수열매’같은 걸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통상 성서에 ‘무화과’가 나온다면 그건 단순한 식물의 열매가 아니라 유대교를 말하거나 유대교의 성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14절에서 사람들이 이제 그 나무로부터 “영원토록 열매를 따지 못할 것”이라고 저주합니다. 예수님이 저주한 건 죄 없는 나무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무화과나무’는 유대교이기도 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우리가 신약성서읽기를 할 때 나눈바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말씀 하시는 무화과나무는 예루살렘 성전, 곧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 공급처는 이제 그 기능이 중단된다는 말씀인 겁니다. 결국 이 사건이 어디로 연결이 되는 보세요.
11:15-18에 뭐가 나오죠? 여러분이 아시는 성전청결사건, 보다 정확하게는 ‘성전무효화 사건’과 곧바로 연결이 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20절에 가 보세요. 성전을 상징하는 무화과나무가 ‘뿌리째’말라 버린 것으로 적혀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마치 예루살렘 성전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질 것”으로 예고된 것과 맥락이 같은 겁니다. 여기서 성전 대신 유용하다고 등장하는 게 믿음, 기도, 용서(23~25절)등이죠.
성전을 저주하고 그것을 무효화 한 예수님은 대신 대안을 제시하는 겁니다.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않으면 그대로 되리라....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러면 그대로 되리라...서로 용서하라” 우리는 이 구절을 앞뒤 잘라먹고 써 먹지만 사실 이 구절은 ‘성전이 무효화 된’, 요즘으로 치면 ‘교회가 무용해진’뒤에 믿는 자들이 할 수 있는 구원행동 인 것입니다. 이건 뭡니까? 이제 보이는 성전은 무너졌으니 보이지 않는 믿음, 기도, 용서가 중요해졌다는 것입니다. 성전이라는 공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시간이 더 중요해졌다는 말입니다. 장소가 아니라 때가 더 중요해 졌다는 것입니다. 나는 지난 번 책에서 이를 두고 ‘적시’와 ‘불시’라는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불시를 떠나 적시에 사는 것입니다. 그게 크로노스에서 카이로스로 나아가는 구원의 사건입니다. 이 시간의 변화가 바로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결국, ‘이 무화과의 때가 아니라’는 말씀은 ‘무화과 철’, ‘앵두 철’이라는 말이 아니라, 무화과로 상징되는 예루살렘 성전이라는 장소는 더 이상 하나남의 때를 위한 적절한 도구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참고로 요4:21이하에 나오는 여인과 예수의 대화중에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온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그것도 역시 하나님의 시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오늘 말씀은 혁명적인 말씀입니다. 유대교는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한 공간의 종교였습니다. 그리고 그 공간을 채우는 소유의 종교였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하나님의 시간위에 세워진 시간의 종교이며, 믿음의 종교였습니다. 유대교가 건축의 종교요, 장소 확보의 종교요, 보이는 종교였다면, 기독교는 역사의 종교이며, 영의 종교이며, 보이지 않는 종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가가 이야기하는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라는 내용이 지시하는 핵심입니다. 보십시오, 이후 예수의 제자들은 모두 보이는 공간이나, 장소나, 소유를 위해 살지 않고 모두 때를 따라 살지 않았습니까? 죽을 때 죽고, 모든 것을 내 놓을 때 내 놓고, 포기할 때 포기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카이로스의 시간에 삶의 기조를 맞추고 산겁니다. 루터의 종교 개혁은 다시 변질되어 곳의 종교가 되어버린 기독교를 때의 종교로 되돌려 놓으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이런 예수의 관점에서 곳의 종교를 구성하는 본거지가 아닙니까? 다시 말씀드리자면 유대교처럼 공간과 소유의 개념이상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겁니다. 보이는 종교의 표상이 오늘날 교회라면, 그것은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인 것이고, 그러면 영원토록 저주를 받아 열매를 내지 못하는 것이니, 예루살렘 성전이 그랬듯이 오늘날 교회도 세상을 구원하지 못하는,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인 것입니다. 그래서 ‘탈 교회’, ‘탈 정전’을 도모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시간을 따라 사는 [때]의 신앙으로 바꿔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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