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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11:17-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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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5.7.1 주일예배 http://sungamch.net 춘천성암교회 |
이런 여자 어디 없습니까?
요11:17-35
제목이 좀 그렇죠? 음식도 잘하고, 머리도 좀 깨어 있고, 성적인 매력도 있는 그런 여자를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미셀 푸코는 이 사회가 오랫동안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적 장치를 통해 인간 사회를 통제해 왔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런 경계를 두면 여자는 여자다워 지려는데 관심을 집중하며 살게 되고, 남자는 남자다워 지려는데 목숨을 건다는 겁니다. 그러면 사회는 이것만 잘 조정하면 사회를 조율 통제할 수 있는 거죠.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성적 사회통제 시스템을 교란하고 파괴하셨다는 것을 보여드리려는 게 오늘 설교의 요점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 운동을 실행하시던 때에는 남자나 여자나 그 역할이 대등했습니다. 누구나 그에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하셨던 것처럼 말이죠. 그런데 예수 운동이 교회라는 제도 안으로 들어오면서 점차 여성은 남성들에게 밀려, 소위 부엌데기 신세로 전락하게 됩니다. 요즘도 개신교도의 대부분이 여자이면서 교회 안에서는 남자들이 목소리 내는 자리를 다 차지하고 있거나, 남자들이 의자에 앉아 고함을 내는 동안에 여성교우들은 밥이나 해대고, 문턱에서 한복입고 안내나 하는 시중꾼의 면모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이런 사회적인 시스템을 거부하십니다. 이걸 ‘탈성화 전략’이라고 부릅니다. 사회가 통제를 위해 구분 짓고 있는 남성과 여성의 경계를 허문다는 뜻입니다. 이것 또한 그리스도의 복음에 해당합니다.
이걸 위해 등장하는 게 바로 마르다-마리아 텍스트입니다. 누가복음(10:38-42)과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에 나오죠. 누가복음에선 지리적인 배경 없이 마르다-마리아 자매의 집에서 집회 때 있었던 에피소드 정도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여기선 탈성화전략이 보이는 게 아니라 반대로 성적경계의 확증을 읽게 합니다. 누가 과연 여자다운가? 이걸 느끼게 해 주는 것이 누가복음의 마르다-마리아 텍스트라는 말이죠. 누가복음에서 마리아는 당시로서는 과감하게 여성의 일을 외면하고 남성중심의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보통 여자들이 하는 뒤치다꺼리에 몰두해서 그만 예수님에게 꾸중을 듣는 것처럼 보입니다. 분주하게 부엌이나 들락거리는 마르다 너보다 마리아가 하는 행실을 칭찬 하는 듯이 보인다는 말입니다. 만약 이대로 성경을 본다면 예수님은 세상의 인습적인 가치에 동조하는 겁니다. 허드렛일이나 하는 여자는 하찮고, 방안에서 공부나 하는 남자 또는 그런 부류는 여자보다 상위적 존재라는 세상 인식 말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요한복음에서 이걸 깨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공동체가 읽는 마리아는 누가복음과 같지 않습니다. 예수의 발치에 다소곳이 앉아있는 소극적인 마리아를 지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르다의 행동을 적극적인 것으로 이해합니다. 요한복음은 그녀의 행동을 ‘디아코네인’으로 묘사하는데, 이는 여성의 역할을 폄하 하는 내용의 단어가 아닙니다. 마가복음에선 엘리트 제자들의 직무가 바로 ‘디아코네인-섬김’이라고 표현되어 있을 만큼 남성이나 여성의 차별 없이 막중한 역할을 말할 때 사용된 단어였습니다. 그러니까 요한복음의 마르다-마리아는 ‘누가 여성스러우냐’가 아니라 ‘누가 적극적이고 누가 다소 곳(소극적)하냐’의 대조인 것이죠. 즉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여인과 소극적으로 행동하는 여인이 예수에 의해 대조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성의 경계를 허무는 일입니다.
그러면 누가복음에 나오는 마리아를 두둔하는 예수는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합니까? 그건 훗날 교회의 해석이지 예수님의 해석은 아니라는 게 학자들의 이야기입니다. 교회는 여자들이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게 못마땅한 겁니다. 한마디로 나대는 게 싫은 거예요. 남자들 뒤에서 수발이나 들어주는 걸 바랐던 겁니다. 그래서 마리아를 칭찬함으로 여성다움으로 여자들을 교회 안에서 규율하려는 것이었지요. 이런 여자가 좋은 여자라는 거예요. 고분고분하고, 말 잘 듣고, 대꾸하지 않고, 자기 생각 없이 시키는 대로 하고, 명령에 수복하고, 복종 잘하고, 그러면서도 애 잘 낳아 기르고...뭐 그런 장치라는 말입니다. 예수가 이런 걸 용납하셨을까요? 오늘 본문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나사로가 위독하다는 전갈이 예수님에게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로 떠나지 않고 이틀 뒤에야 마르다의 집이 있는 베다니에 도착합니다. 이미 나사로는 죽은 지 나흘이 지났습니다. 예수님이 마을에 당도했다는 소식을 듣고 마르다는 얼른 마중을 나옵니다. 그때 마리아는 집에 있었습니다. 오라비가 죽었고, 그래서 슬픔 중에 있는 정황으로 보자면 마르다의 처신보단 마리아의 처신이 맞지 않습니까? 슬픔에 쌓여있는데 마르다의 행동은 좀 방정맞기도 하지요? 그런데 보세요. 마르다는 그런 방정 중에도 예의를 차립니다. 여기서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건 뭡니까?
마중 나온 마르다와 예수의 대화를 한 번 들어 보세요. “주님이 계셨더라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거예요.” 예수님이 대답을 합니다. “나사로는 다시 살아날 거야.” 위로의 말 치곤 조금 뜬금없지요? 상식 밖의 말이라는 거죠. 죽은 이가 살아난다니요, ‘죽은 이에게 너무 연연하지 말라’거나, ‘고인의 뜻을 잊지 말게’하죠, 보통은 말입니다. 여기서부터 뭔가 다르다는 걸 아실 법 한데요. 마르다가 다시 뭐라고 하는지 보세요. “물론이죠. 마지막 부활 때에는 그리 될 것을 믿습니다.” 이거 뭐예요? 상가 집에서 문상 중에 하는 대화치곤 뭐가 다르지 않습니까? 이걸 그동안 당연한 것처럼 보았던 거예요. 마르다는 예수님의 이상한 말에 최선을 다해 마치, 교독문 하듯이 답하고 있습니다. 미리 말을 맞추어 놓은 듯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마르다는 예수님의 상식 밖의 말에 조화 시켜서 대답을 할 만큼 능숙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이미 마르다는 예수를 전체적으로 이해하고 읽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를 아는 겁니다. 자, 마르다가 이러자 예수가 뭐라고 하십니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 것이다.”
이건 베드로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마리아에게 하는 말도 아닙니다. 남자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하찮게 여기는 마르다에게 하신 말입니다. 이 엄청난 말을, 제대로 배우고 깨달았어도 알아들을까 말까하는 말을 지금 마르다에게 쏟아내고 계신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다시 묻죠.“내가 한 이 말을 믿느냐?” 참으로 어마어마한 상황이 아닙니까? 그럴 때 마르다가 뭐라고 합니까? “당신은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습니다.” 믿는다는 말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건 한 존재와 그 존재가 펼치는 미래에 대한 믿음의 문제인 것입니다. 오빠가 죽어서 슬픈 그런 감정의 문제가 아니었어요, 그녀에겐. 예수님의 물음에, 예수님의 가르침에, 예수님에 대한 더없는 정답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다시 예수님과 마리아와의 대화를 보시기 바랍니다. 오빠가 죽었다고 집에 쑤셔 박혀 있던 마리아는 마르다가 전해준 이야기를 듣고 그제야 예수님에게로 갑니다. 그녀도 마르다처럼 예수에게 말합니다. “주님이 계셨더라면 제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겁니다.” 문장만으로는 마르다와 같죠. 하지만 뉘앙스는 전혀 다릅니다. 그녀는 예수를 보자마자 통곡을 하며 그렇게 말했던 겁니다. 그 슬픔이 얼마나 절절하게 표현이 되었는지, 예수님도 덩달아 격앙되고 산란해졌습니다.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물은 거라곤 “어디에 장사 했니?”그 한마디였습니다. ‘무덤이 어디야?’그것만 묻고는 그도 그냥 울었다는 겁니다.
이제 보입니까? 자매를 만난 예수님이 전혀 다른 사람 같다는 걸 말입니다. 마르다와의 만남은 마치 지혜문답을 하는 거 같지 않습니까? 마치 세례문답을 하는 것처럼, 정답을 요구하는 질문과 더 없는 올곧은 대답으로 일관하는 마르다와 예수님이 보이십니까? 무슨 문상이 이럴까 싶을 만큼 독특합니다. 마르다는 자신의 감정을 최소한 죽이고, 예수님의 방문이 지닌 본질적인 것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반면 마리아는 어떻습니까? 만나자마자 그녀는 울음을 터뜨립니다. 그리고 예수도 슬픈 울음을 같이 웁니다. 마리아는 상대반의 본질을 읽지 않습니다. 데 감정에 겨워 울기만 합니다.
이쯤 되면, 우리는 요한복음이 묘사하는 두 사람의 케릭터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르다는 활동적이라면 마리아는 소극적인 여잡니다. 마르다는 자기 밖의 사람을 읽을 줄 아는 여자라면, 마리아는 자기 밖에 모르는, 자기감정이나 이해가 전부인 여자입니다. 마르다가 공적 활동에 필요한 여자라면 마리아는 매우 사사로운 친밀감으로 사는 여자입니다. 마르다가 어머니 같은 모성성을 가진다면 마리아는 그저 어리광만 피우는 딸의 성정을 가졌습니다. 아니 마르다는 어머니적 이라기보다는 남성적입니다. 그런 점에서 성적 역할의 경계를 깨뜨리는 탈성적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시대 안에, 사회 안에, 교회 안에 장치된 남성과 여성의 차별적인 경계를 해체하는 겁니다. 이게 요한복음의 마르다-마리아 이야기의 의의입니다.
이제 나는 개인적으로,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마르다’같은 여자 혹은 남자를 만나는 일만큼 감동적이고 행복한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공자가 ‘세 명의 제자만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말씀 하셨다는데, 저 또한 ‘죽음의 장’앞에서도 죽음 너머의 물음과 답을 주고받을 수 있는 그런 여자, 그런 남자가 그립습니다.
마르다와 같은, 이런 여자 어디 없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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