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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6:1-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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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5.8.12 주일예배 http://sungamch.net 춘천성암교회 |
우리가 넘어서야 하는 것들(1)
요6:1-15
오병이어의 기적 이야기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우리가 읽은 곳에 있고요, 막6:32-44, 마14:13-21, 눅9:10-17에 나옵니다. 이제 우리는 이 기적이야기를 몇 가지 관점으로 나누어 볼 겁니다.
언제 이 오병이어의 기적이 행해졌을까요? 요한복음에만 ‘유월절’이 다가오는 때라고 되어 있지 다른 복음서에는 때를 기록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가(14:12), 마태(26:17), 누가복음(22:7)을 다시 살펴보면 해방절은 성만찬 나눔이 처음 있었던 시간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예수님이 행할 때 그분은 뭘 하고 있었을까요? 가르치고(막6:34), 병고치고(마14:14, 눅9:11)나서 저녁때가 되었을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하루 종일 굶었음직한 대중들이 최고로 배가 고팠을 때 일어난 것입니다. 바로 그때 배불리 먹는 사건이 일어났다는 겁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는 그런 이야기가 없습니다.
그러면 누가 그런 수많은 사람들을 보고 ‘저 사람들이 배고프니 먹이자’했을까요? 마태, 마가, 누구복음에는 제자들이 그러자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배고픈 사람들을 먼저 보았고, 생각해서 먹이자고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럼 물고기 두 마리와 빨 다섯 개는 어디서, 누구에게서 난 것입니까? 마태, 누가, 마가복음에서는 그 빵과 물고기는 제자들의 비상식량이었습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어느 소년에게서 나왔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때 이 소년을 묘사하는 단어가 ‘파이다리온’입니다. 이 낱말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요셉을 말할 때의 단어와 같아요. 노예처럼 팔려가는 아이라는 뜻입니다. 그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가장 불쌍할법한 이에게서 음식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기적을 행할 수 있도록 그 원인을 제공한 이가 제자들이 아니라 배고프고 불쌍한 사람들 중에 가장 불쌍한 아이라고 함으로 ‘제자들’과 ‘불쌍한 아이’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가장 지체높은 이들의 자리를 가장 천하고 비루한 아이가 대체하고 있는 겁니다.
자, 그 다음은 뭡니까? 비루할 데 그지없는 아이에게서 나온 빵이 어떤 빵이냐, 보리개떡 같은 반대기입니다. 왜 말씀드렸잖아요. 우리에게도 요즘 빵 하면, 대형마트에서 비닐 봉다리에 20~30개 넣어서 파는 빵이 있는가 하면, 서울의 고급 제과점에서 줄서서 기다렸다가 사는 빵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은 빵을 뜻하는 단어를 구별해서 사용하는데, 이 비루한 아이가 내 놓은 그 빵을 ‘크리띠노스’라고 했습니다. 이는 고급 빵을 의미하는 ‘아르토스’와 대비되는 단어입니다. 보통 예전에 쓰이는 빵은 ‘아르토스’입니다. 그러나 이 ‘크리띠노스’는 굶주린 사람들이 먹는 걸레빵 같은 겁니다. ‘파이다리온’ 즉, 거지 소년이 지녔음직한 빵인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수많은 군중이 몰려오는 것을 보고 제자 빌립에게 ‘빵’을 어디서 사야하느냐고 묻습니다. 5절에 그렇게 되어 있죠. 이에 빌립은 빵 값을 감당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이나 빌립이 말하는 ‘빵’은 아이가 내 놓은 반대기 개떡 같은 빵인 ‘크리띠노스’가 아닙니다. 고급 빵인 ‘아르토스’로 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이는 뭔가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겁니다.
요한복음에선 예수님이 그 보리 개떡 같은 빵을 받아가지고선 감사기도를 합니다. 반면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선 예수님이 그걸 높이 들고 축도를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축도 했다’와 ‘감사기도를 올렸다’에서 어느 쪽이 더 신령하게 느껴지고, 더 신비감이 듭니까? 마태, 마가, 누가복음서는 여기서 한 발 더나가서 예수님이 빵을 들고 ‘하늘을 우러러’라는 표현과 ‘빵을 떼며’라는 표현을 덧붙입니다. 굉장히 우아하고 신령스럽죠. 그러나 요한복음에는 이런 표현을 쓰지 않습니다.
자, 이제 여러분이 보신 것처럼 요한복음은 의도적으로 마태나 마가, 누가공동체가 이미 예식처럼 만들어버린 예수님의 오병이어 기적 이야기를 해체하려는 것으로 읽혀지지 않습니까?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나오는 이런 행위,‘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빵을 떼었다’는 표현들은 이미 초대 교회에서부터 성만찬 예식을 집례하는 양식으로 존재되고 있었다는 것이죠. 이런 예식적 차원을 요한복음은 해체하려는 것입니다.
뭐, 하늘을 우러러 축사를 했든지 아니면 그저 소박하게 감사기도만 올렸든지 그 다음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빵과 물고기에서 일어난 기적을 누가 대중들에게 시혜했을까요? 누가 빵을 나눠주고 물고기를 나눠 줬느냐 말입니다. 마태, 누가, 마가복음에선 제자들이 그 일을 수행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 제자들은 어디로 가고 예수님이 직접 그 많은 사람들에게 빵과 물고기를 골고루 나눠주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엄청난 노동이었겠죠?
그런데 이런 표현의 다른 방식은 예수님과 대중 사이의 존재인 제자들의 위치가 부정되고, 제자의 계보, 사도의 계보를 잇는 지도자들의 특권에 대해 도전하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왜 이러는 걸까요? 왜 삐딱하게 보면서 다른 해석으로 딴죽을 거는 걸까요? 뭐가 못 마땅한 것일까요? 예수를 그렇게 이해하고 믿으면 안 된다는 것이고, 예수가 하고자 하는 것은 본래 이것이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닐까요? 다음 시간에 이어서 보겠습니다.
우리가 넘어서야 하는 것들(2)
요6:22-28
지난 주일에 프린트해서 나눠드린 ‘오병이어’ 사건에 대한 사복음서 대조를 가지고 계시죠? 마태, 마가, 누가는 그 내용과 표현이 같고 요한복음은 다르다는 걸 보셨죠? 요한복음을 제외한 다른 세 복음서에서는 제자들의 역할 혹은 위치가 두드러지게 보인 반면 요한복음은 반대로 제자들의 개입을 제거하고 예수님이 모든 행위의 주인공이죠. 그리고 빵과 물고기를 나눠주는데 이런저런 군더더기가 없었어요.
오늘은 오병이어의 후속이야기를 볼 텐데요, 다른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아요.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이야기죠. 이제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오병이어의 사건이 있은 다음의 이야기를 연결해서 생각해 보겠어요.
먼저 22-27절을 보세요. 예수님이 누구하고 갈등을 빚고 있습니까? 사람들이 오병이어 표징을 경함한 뒤에 거의 미칠 정도로 열광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거기서 끝난 게 아닙니다. 이걸 빌미로 그를 왕의로 앉히면 좋겠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이런 분위기를 눈치 챈 예수는 홀로 산으로 들어가 숨습니다. 사람들은 눈에 불을 켜고 예수를 찾았죠. 그래서 숨어 있는 예수를 찾아냅니다. 25절에 그 원망과 간절함이 엿보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그저 평범한 질문이 아니라 논쟁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사람들에게 뭐라는지 보세요. “빵을 먹고 배가 불렀기 때문이 너희들이 그러는 게 아니냐?”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앞의 오병이어 사건이 긍정적인 게 아니라 부정적인 결과를 낳은 거예요. 빵을 먹은 수천 명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그 기적 속에서 뭘 읽은 겁니까?
진리, 사랑, 자비, 측은한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 하나님의 아들다움, 나눔 같은 걸 읽은 게 아닙니다. 요한복음의 대화로는 빵을 먹으면서 그들은 혁명의 징조, 새로운 이스라엘 체제(로마를 무너뜨리고)가 구축될 것 같은 징조를 읽은 것입니다. 혁명에 대한 상상력이 커졌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마태, 마가, 누가 공동체는 이 오병이어의 사건을 예전으로 설치하여 제도로써 이용하려는 거고, 일반 대중들은 사회전복적인 체제급진주의로 활용하려는 겁니다. 하나의 사건에 대해 예수와는 동떨어진 욕구를 작동시키고 있는 것이지요.
떡줄 놈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고, 사람들은 각기 제가 놓인 위치에서 제멋대로 예수와 그 내면 그리고 그의 행위를 가치 판단해 버린 겁니다. 26절에 ‘배가 불렀다’는 말씀과 27절에 ‘썩을 양식’이라는 단어를 새겨 보세요. 오병이어의 기적을 도구화하여 종교제도를 구축하려는 것과, 혁명으로 새로운 정치 체제를 일으키려는 승리와 성공의 욕망에 대한 종교집단과 일반 대중에 대한 비난이 읽혀지지 않습니까? 이게 바로 예수와 그들, 종교인들과 대중들의 갈등이고 차이인 것입니다. 이게 바로 요한복음이 다른 세 복음서와 다르게 갖는 시선입니다. 이게 빵을 먹고 고기를 얻어먹은 이들의 내면적인 욕구라는 겁니다. 이게 숨어 있다는 겁니다.
이렇게 요한복음의 저자나 그 공동체는 ‘오병이어’사건을 둘러싼 종교집단과 인간 군상들이 갖는 내면을 꿰뚫어 보고 있습니다. 그만큼 요한복음 공동체의 신앙의식의 수준이 높았다는 사실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런 예리한 통찰을 지니려면, 다른 복음서와는 다른 시선을 갖고 그걸 수용하려면 그럴만한 사회적인 토대가 갖춰져야 되지 않겠습니까? 아무나 이런 생각을 하고, 한 두 사람이 이런 생각을 했대서 그게 공동체의 보편의식이 되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 걸 보면 요한공동체는 전체적으로 수준이 상당히 심오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생각이 없거나, 무식하거나 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 증거는 이렇습니다. 요한복음에 주요등장인물들이 누군지 상상해 보세요. 요한복음서에 실명이 가론 된 이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니고데모와 아리마대요셉, 나사로 마리아 남매, 전임 대제사장이자 현직 대제사장 가야바의 장인인 안나스의 집에 드나들던 익명의 제자(18:15-시몬 베드르와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이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뜰에 들어가고), 왕가에 속한 익명의 관리(4:46-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으니)등이 나옵니다. 이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게 요한복음인데, 반면 갈릴리의 촌부들은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나온다고 해도 주된 행위자가 아닙니다. 그저 품격 있는 이들과 예수가 펼치는 기적들의 수혜대상들일 뿐입니다.
이걸 말씀드리는 까닭은 요한복음이 못난 사람들을 무시했다는 게 아닙니다. 다른 복음서는 갖고 있지 못한 예수님에 대한 요한복음만의 시선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이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시선이 가능하다는 거죠. 그러니까 요한공동체는 ‘눈뜬 사람’들이 많았고, 반면에 ‘눈뜨지 못한’이들은 엉뚱한 욕망을 위해 예수와 그의 행동을 해석하고 있었던 겁니다. 사실 공동체의 사회적 계층을 보려고 한다면 요한복음보다 누가복음이 훨씬 높은 계층의 사람들로 구성된 공동체입니다.
그럼에도 누가복음과 요한복음 간의 관점의 차이는 큽니다. 28절을 그 증거물로 제시합니다. 27절에서 오병이어를 경험하고 그걸 환호하는 짓은 ‘썩을 양식을 찾는’일과 다르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오병이어를 ‘먹는 것’이나 변형된 욕망으로 투사하는 모든 신앙 행위는 예수의 비난의 대상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걸 뻔뻔하게 말하는 세대에 우리가 삽니다. 여하튼, 28절에서 예수는 ‘그러지 말고~이러시오’합니다. 예수님이 정치적인 메시아라서 왕으로 세우면 좋겠다고 판단하는 것도 ‘썩을 양식’이고, 오병이어를 의전과 제도로 만들어서 종교화 하는 것도 ‘썩을 양식’이고, 좀 더 저급하게 출세하고, 부자 되는 근거가 된다고 믿는 오늘날의 신앙도 ‘썩을 양식’입니다. 그런 거 하지 말라는 겁니다. 단지 말라는 게 아니라 ‘이걸 하라’는 겁니다.
이거, 그게 뭔지 대중들은 몰랐습니다. 아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시선이 자기 자신과 내면의 욕심에 고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화가 나서 다시 묻습니다. 그러니 이건 묻는 게 아니라 소리치는 겁니다. 그게 28절입니다.
주님의 일이 예수를 의전화 제도화 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을 빌미로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변혁적 유익을 구하는 게 아닙니다. 그건 다 ‘썩을 일’입니다. 주의 일이란 ‘썩지 않는 일’입니다. 대중들은 그걸 모르는 거고, 요한공동체는 이미 ‘그 일’뭔지 알고 있다는 겁니다.
다음 시간에 이어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주의 일’, 하라고 하시는 ‘그 일’이 뭔지 보겠습니다.
우리가 넘어서야 하는 것들(3)
요6:28-40
지난 시간에 요6:28을 읽고 끝났습니다. ‘주의 일’이 뭐냐는 겁니다. 여기서 주된 언어는 ‘일’입니다. 바로 이걸 두고 대중과 예수가 서로 다른 이해, 해석, 실천적 적용의 차이를 갖고 있습니다. 앞에서 예수님은 대중들이 빵과 고기를 먹은 것을 빌미로 정치적인 메시아를 기대하는 것에 대해서 간단히 ‘썩을 양식’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보통사람들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즉,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서 종교적인 예전을 구축하는 일과, 더 나아가 체제 이데올로기를 전복하려는 것에 대해 예수가 옳지 않다고 했을 때 물었던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은 다시 ‘나를 믿는 것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여기서 ‘나를 믿는다’는 말은 ‘내가 행하는 것’입니다. 곧 그의 생각, 가치관, 삶의 방향 일체를 말하는 것이지요. 그러자 다시 30-31절에 대중들이 묻습니다.
*교우들 몇몇 분과 함께 [춘천인문학교]를 열려고 합니다. 9월18일에 그 첫 번째 수업으로 채현국 선생을 모십니다. 강사에는 고미숙, 한비야도 있습니다. 오늘날 ‘인문학’이라는 말이 많이 하는데 인문학이 뭐냐 하면, 욕망의 소비재가 되어 불쏘시개처럼 이용당하는 대중들을 깨워 그 불구덩이 속에서 나오게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가 지니고 태어난 생명을 풍성하게 누리도록 해주는 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가 보고 있는 예수님과 대중들의 사회적이고 종교적인 가치관의 충돌과정을 다루는 대목은 아주 의미심장합니다. 예수님은 위대한 인문가이기 때문입니다.
한 번 본문을 읽어 봅시다. 여기서 대중들이 말하는 ‘믿음의 조건’은 빵입니다. 그런데 그 빵을 모세의 빵과 동일하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떠돌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모세가 일으킨 그 빵의 기적을 보고 믿었고, 그 믿음이 유대교 신앙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들의 질문은 ‘우리도 당신이 일으킨 기적의 빵을 먹고 율법적인 종교에 머물러 있으라는 이야기냐? 그게 당신이 하는 일이냐? 그걸 믿으라는 거냐’는 겁니다. 그러니까 정치냐 종교냐“ 양단간에 뭐가 당신의 일이고, 뭐가 하나님의 일이냐 그거죠. 당시의 대중들로서는 이 둘 외에 다른거는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종교 아니면 정치 둘 중에 하나여야 했습니다.
33절 이하를 보세요. 예수님이 이제 다시 이런 대답으로 이해의 세계를 넓혀갑니다. “하나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빵은 곧 ‘예수’, 나다.”(33-35) 과거 모세의 빵은, 이스라엘의 독립을 위해 열렬하게 뛰어든 혁명가들의 빵은 썩을 양식을 위해 일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생명을 사람들에게ㅡ 주는 일이 아니라 대중들의 생명을 장악하는 일이니까요. 그러니까 종교와 정치는 권력을 갖는 일이고, 그 권력의 장악은 대중들의 생명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권한을 장악하는 일이라는 겁니다.
반면 하나님의 빵, 생명의 빵을 자처하는 예수는 누구의 생명을 장악하여 그걸 이용해서 또 다른 이익을 도모하는 게 아닙니다. 예수의 빵은 조건 없이 타인에게 자신을 공궤하므로 그로 하여금 풍성한 생명으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끝입니다. 요한복음이 말하는 성만찬은 바로 이것이라는 겁니다. ‘이건 예수님이 주시는 특별한 거다’어쩌고 하면서 예전화 의전화 시켜 제도적인 종교권력 안에 가둬 두는 게 성만찬이 아니라, 그렇게 해서 종교권력을 제도화하고 타인의 생명을 장악하는 게 아니라, 조건 없이 타인에게 자신을 빵처럼 먹여 줌으로 그로 하여금 그 일로 그 무엇이나 그 누구에게 예속되지 않는 자유의 삶을 살도록 하는 거, 종교제도나 정치권력에 빼앗겼던 삶을 되돌려 주는 일이 바로 요한복음 공동체가 의미하는 성만찬인 것입니다.
이게 바로 예수님이 하는 일이고, 이걸 믿는 것이 곧 예수를 믿는 것이고, 이걸 믿는다면 누굴 장악하여 나의 이익을 도모하려들지 말고 자신을 내주어 내가 그의 빵이 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게 성만찬의 진정한 뜻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모세의 빵과 다르다는 겁니다. 그건 썩을 빵이고, 예수가 하시는 이런 가치관으로 살아야 생명의 양식이 된다는 겁니다. 이게 예수님과 당시의 사회 혹은 종교가 지향하는 다른 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일, 예수님의 일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생명과 삶을 사회가 구축해 놓은 제도나 혹은 정치체제에 욕망의 불쏘시개처럼 쓰다가 소멸되는 것을 막는 거였습니다. 거기서 대중들을 꺼내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을 위해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다는 거고, 그렇기 때문에 그런 예수, ‘나’를 믿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세상의 불쏘시개가 되어 타버리지 않고 ‘영생’하게 된다는 겁니다. 바로 이런 전제, 자기 자신의 생명이 어디에서 누구의 욕망을 채워주는 소모품으로 사용되는지도 모르고 살던 이들이 ‘아, 그동안 내가 타인의 불쏘시개였네’하면서 자기 인생길을 가도록 해 주는 그것입니다. 그러니 ‘영생’은 상대적인 언어인 것이지요. 그걸 위해 예수처럼 나를 떡처럼, 고기처럼 내 놓아 배고픈 혼들이 먹게 해야 하는 겁니다. 그게 성만찬의 의미구요.
요한복음 6장이 얼마나 인문학적 요소를 담고 있는 텍스트인가 보세요. 1-15절에서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예수님의 오병이어에 대한 제도화, 직제화, 권위주의화에 대해서 논쟁합니다. 제자들은 그래야 한다는 거고 예수님은 그게 아니라는 거였습니다. 22-40절에서는 예수님과 대중들이 갈등합니다. 대중들은 예수의 오병이어 기적을 통해 승리 또는 성공주의를 추구하고 싶었습니다. 좀 더 정치적인 야망을 가진 이들은 그걸 빌미로 로마체제를 전복하는 정치적 메시아주의를 구현하고 싶었지만 예수님은 단칼에 ‘그건 썩을 짓이다’면서 결론지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는 당시의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영역의 인간들이 지닌 가치관과는 전혀 다른 세계를 제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 두 사회집단 즉, 제자들과 대중들과의 이해 충돌로 끝나느냐? 아닙니다. 41-50절을 보세요.
오병이어의 사건은 이토록 여러 집단군의 사람들을 곤혹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그냥 먹고 ‘할렐루야~~~’하고 끝난 게 아니지요? ‘오병이어’라는 음식 먹이는 사건이 사람들의 생각과 정신을 혼란스럽게 흔들고 있습니다. 이쯤 되어야 하나님이 보낸 아들 예수의 행동답지 않습니까? 마치 고요한 바다를 뒤엎는 태풍과 같은 일이 오병이어로 인해 일어나는 겁니다. 그럼 이번에는 어떤 집단이 예수와 갈등하나 맛만 봅시다. 바로 유대인입니다. 41절이 그 출발입니다. 비판의 주체가 유대인인데 갑자기 등장하는 거죠. 지금까지 유대인은 이 사건에 개입되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앞의 주장과 같습니다.
급기야 이런 일련의 이해 불충분, 각기 다른 해석은 제자들을 내분에 이르게 합니다. 그리고 일부 제자들은 예수 곁을 떠나갑니다. 이토록 여러 계층과의 갈등을 유발한 게 ‘오병이어 사건’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을 들쑤셔댄 다음에 남는 결론이 바로 ‘오병이어가 주는 사건의 진정한 예수 교훈’혹은 ‘복음’ 또는 ‘생명의 양식’이 되는 셈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오병이어 사건을 통해 여기까지 가야했었는데 그만 초반에 빵과 고기만 먹고 떨어진 셈입니다. 이게 기독교 현실인식입니다.
다음 시간에 전체적으로 오병이어의 사건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가 넘어서야 하는 것들(결론)
요6:66-71
오병이어 사건은 그리 간단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간편하게 ‘주님께 가기만 하면 배부르게 먹고 살 수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뜻에서입니다. 이미 예수님은 그런 태도에 대해서 ‘썩을 양식’을 구하는 어리석은 짓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오병이어 사건을 통해 로마라는 체제를 전복시키고 새로운 다윗 왕국을 세우기를 바라는 체제전복적인 능력으로 삼는 일도 배부르기를 기대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오병이어사건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여 예배 화하는 짓은 잘하는 것이냐? 그것도 예수님에게는 비판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욕망과 목적들을 사이에 두고 일반 대중, 제자들, 유대인들과 논쟁을 하고 계신 것이 요한복음 6장이었습니다. 이래서 요한복음의 오병이어 사건은 다른 복음서 기자가 보는 오병이어 사건과 다르다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오늘 본문의 마지막 부분에 보면, 제자들은 오병이어 사건으로 인해 갈등하고 분열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를 팔아야 되겠다고 생각한 시기도 바로 이 ‘오병이어’에서 출발합니다.
오병이어라는 하나의 행위에 대해 군중들, 제자들, 유대인들의 시각과 예수님의 본심은 달랐습니다. 이래서 대중들도, 유대인들도 심지어는 제자들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고 일부는 예수를 떠나고 또 배신해야겠다는 생각을 품게 됩니다. 이런 이해의 갈등은 예수 공동체들 간에 성만찬을 둘러싼 논란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면 잠시 성만찬을 둘러싼 초기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이견들을 보겠습니다. 그러니까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뭘 근거로 성만찬 예식을 하게 되었느냐 하는 겁니다.
마 26:26-29, 막14:22-25, 눅 22:15-20, 고전 11:23-25 에 성만찬에 대한 말씀이 나오는데, 여기서 주장하는 바는 성만찬이 모두 ‘마지막 만찬-최후의 만찬’에서 성만찬이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만찬은 유월절기와 상관이 있다고 했습니다(유월절 마지막 날에 혹은 절기 마지막 날에 등과 같이). 그러니까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성만찬을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된 식사의식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성만찬의 근간으로 여기고 있는 앞의 네 성서가 모두 같은 이해를 가고 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성만찬의 가장 오래된 표현 양식은 ‘주의 만찬’이었습니다. 즉 성만찬은 본래 공동식사와 관련된 예식이었습니다.
우리가 예배 마치고 2층으로 올라가 점심을 같이 나누는 것과 것은 것이었단 말입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를 제외하곤 그 어디에도 이 성만찬의 순서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위의 네 종류의 텍스트중에서 가장 오래된 고린도 전서에 보면 그래서 그들은 먼저 ‘빵을 나누고—식사를 하고— 잔을 나누’는 순서로 예식이 진행되었습니다(고전11:23-25). 그러니까 바울이 세운 공동체들을 제외하곤 모두 이런 순서로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순서를 바울이 바꾸려고 합니다. 즉 그는 배불리 먹는 식사를 성찬식에서 분리하도록 고린도 교회에 요구합니다(11:34). 배가 고프면 집에서 먹고 오라는 겁니다. 이건 식사 시간에 맞춰 참석할 수 없는 사람들과 일직부터 참석할 수 있었던 사람들의 갈등을 조정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니까, 일용 노동자와 공무원의 출퇴근 시간은 다릅니다. 그러면 이들이 예식에 참석하는 시간이 다른데 이렇게 되면 먼저 온 이들이 식사를 모두 먹어 버리게 되고 나중 온 이들은 먹을 게 없어집니다. 이런데서 발생하는 갈등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다가 세월이 지납니다. 서기 100년이 지날 무렵에는 대부분의 교회들이 회당식 전통을 수용하게 되고 그러다보니 말씀 따로+식사 따로 이렇게 분리가 됩니다. 유대인들은 밥 먹는 것과 말씀을 배우고 익히는 것을 분리해서 생각을 했거든요. 이렇게 점점 삶과 신앙이 분리 유리되면서 예배와 일상이 나누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어디 이 뿐입니까? 말도 예배언어와 일상 언어가 달라지고, 종교인과 세속인, 복장도 일반 성도와 사제가 구별이 됩니다. 종교가 점차 삶과 유리되어야 종교의 생명력이 유지된다고 생각을 했던 겁니다.
성만찬 이야기가 등장하는 네 성서 가운데 누가는 고전과 마가복음에 의존합니다. 마태복음은 마가복음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바울에게 성만찬은 유월절과 관련이 되었다는 것을 찾을 수 없습니다. 고전과 누가복음은 “여러분을 위하여”라는 헌정사가 ‘몸’과 ‘피’에 붙음으로써 성찬을 희생과 죽음과 연관시키고 있을 볼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여러분을 위하여”라는 헌정사가 없는 대신에 ‘잔’의 말씀에 “많은 사람을 위해 흘리는”이라는 첨구가 딸려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아주 오래 전부터 예수공동체는 예수의 죽음과 성만찬을 연결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전11:25에 ‘반복해서 거행하라’는 말씀을 볼 때 성만찬은 성찬이 일회적이 아니라 정기적인 예식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몸’과 계약을 병행시키고 있고, 마가복음은 몸과 피가 병행을 이룹니다. 그러니까 바울공동체는 성만찬이 몸과 몸이 연결된 공동체성에 관심하고 있다는 것이고, 마가나 마태공동체는 ‘피’를 말함으로 종말론적 지평에서 성만찬을 하고 있다는 것을 엿보게 됩니다. 그래서 마태나 마가나 누가는 종말론적 관점에서 ‘피’를 강조하면서 성만찬을 하는 거고, 바울 공동체는 종말론보다는 이방인들이 모인 공동체이므로 서로 간에 유기적인 관계 즉 ‘몸의 약속’으로 성만찬을 해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 이처럼 모든 성서가 그리고 모든 공동체가 똑 같은 생각을 하고 똑 같은 예식을 갖는 하나의 공동체가 초기 기독교 공동체인 줄 아시지만 이렇게 각기 달랐습니다. 연관이 있지만 조금씩 서로 다른 이해와 해석과 방향성을 갖고 있었던 겁니다. 이러면서 예수운동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던 거예요. 이렇게 이들 네 공동체, 마태, 마가, 누가, 고린도 공동체들은 별 갈등 없이 약간씩 다르긴 하지만 ‘성만찬’을 그들만의 예전으로 확립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요한공동체가 이런 ‘성만찬 의식’의 예전화에 시비를 걸고 나온 겁니다. 그게 뭘까요? 신앙과 일상을 구분지어 놓는 것에 대한 거부였습니다. 앞에서 말씀을 드렸지만, 처음 성만찬은 그저 식사였습니다. 그러던 게 유대교 전통을 따라 식사 따로+말씀 따로 이렇게 구분해 놓기 시작한 겁니다. 그래서 종교와 삶, 신앙과 생활이 분리된 의식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게 점점 말도 다르고, 복장도 다르고, 사고도 다르고, 행동도 다르게 되는 결과를 갖게 되는 거죠.
예식과 일상이 분리됨으로 일상이 후퇴하고 예식이 인간들의 삶의 앞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점점 일상이 종교의 예전 속에 갇히게 됩니다. 그러니 아무리 예전 안에서 사랑, 자유, 자비를 부르짖어봤자 예전 속에 포위당한 ‘갇힌 이데올로기’, ‘가로막힌 진리’가 되는 겁니다. 예수이름으로 하는 무슨 말이나 행동이 일상과는 괴리된 ‘자기들만의 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예수의 진리가 우주 전체에 작동하는 게 아니라, 인간 삶의 일상 속에서 영향력을 갖는 게 아니라 일상영역 밖, 즉 교회 안이거나 공동체 내에서만 효력이 있다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요한복음이 제기하는 비판적 ‘성만찬 예전 화’에 대한 다른 생각입니다.
오늘날 예배당 안에서 쏟아지는 무수히 많은, 아주 훌륭한, 말로만 들으면 세상이 금 새 천국으로 변할 거 같은 말들을 쏟아 놓고 또 주문처럼 외우고 있지만 사실 그것들은 고통당하는 이의 시선에서 출발한 게 아니라 고통을 거래함으로써 성취감과 이윤을 얻는 부류들만의 언어인 것입니다. 이게 예전과 의식화의 속임수입니다. 이걸 경계하라는 것이고, 이렇게 공동체가 만들어지면 안 된다는 것이고, 그 안에 자기만의 이득을 위해 웅크리는 교인들을 만들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게 성만찬을 바라보는 요한 공동체의 문제제기입니다.
기독교는 이미 예전화 의식화 되어 굳어져 있습니다. 일상과 의식이 구별되고, 거룩과 세속이 나뉘고, 목사와 성도가 각기 다른 언어 복장을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교회안의 사람들이 쓰는 언어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제 예수 신앙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만의 그 무엇’이 되었습니다. 이걸 넘어서야 합니다. 개개인이 자신을 둘러싼 종교의식적인 체질을 버려야 합니다. 교회는 겹겹으로 둘러싼 제도와 의전에서 자유로워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의 눈, 만 명의 사람이면 만 개의 눈으로 문제를 인식하고 세상을 살피는 안목을 지녀야 합니다. 이럴 때 비로소 교회는, 예수는 세상의 안내자가 될 수 있습니다. 당신만 아는, 당신만 끼고 사는, 교회 다니는 사람에게만, 그것도 교회의 질서에 충실한 사람에게만 세속적인 보상을 해주는, 그런 예수로는 안 됩니다. 이게 오늘 우리가 넘어서야 하는 숙제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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