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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히13: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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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경일 형제 |
참고 : | http://www.saegilchurch.or.kr/222326 |
환대하는 공동체
2014년 1월 5일 주일예배
정경일 형제(새길기독사회문화원 원장)
자매형제들을 꾸준히 사랑하십시오. 나그네 대접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천사를 대접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있으면 여러분도 함께 갇혀 있는 심정으로 그들을 기억하십시오. 학대 받는 사람들이 있으면 여러분도 같은 학대를 받고 있는 심정으로 그들을 기억하십시오 (히브리서 13:1-3).
매년 새해가 되면?우리는 서로에게 묻습니다. “올해 꿈이 무엇입니까?” 그리고는 갖고 싶고, 하고싶고, 이루고 싶은 것을 서로 나눕니다. 그렇게 꿈을 나누는 이 새해 아침에 저도 꿈 이야기를 하나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소원이나 희망은 아니고 얼마 전에 꾼 꿈 이야기입니다. 어쩌면 저의 가장 깊은 소원과 희망이 담겨 있는 꿈입니다.
저는 수직의 낭떠러지를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겨우겨우 바위 틈에 발 디딜 자리를 찾아 조금씩 아래로 내려갔지만, 좀처럼 바닥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제가 선택한 방향이 맞는지도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길이 끊겨 내려갈 수도 되돌아 올라갈 수도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현기증이 나며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바로 그 때! 저 아래에서 올라오고 있는 한 낯선 사람이 보였습니다. 순간 깊은 안도감에 후유, 숨을 내쉬었지요. 그가 올라온 길을 따라 내려가면 아래로 내려갈 수 있을 것이었습니다. 그도 저를 보고 같은 마음으로 숨을 돌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역시 제가 내려온 길을 따라 올라가면 될 것이었으니까요.
무척 강렬한 꿈이어서 깨어난 후에도 한참을 누워 그 꿈이 제게 말해 주는 것을 듣고자 했습니다. 그때 제 마음 깊은 곳에서 들려온 소리는 “서로 환대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꿈에서 그 낯선 사람과저는 서로를 환대함으로써 서로를 구원했습니다. 깎아지른 절벽 같은 세상에서 길을 찾는 여행자들도 서로를 환대하며 서로를 구원합니다. 저는 오늘 우리가 만나고 환대해야 할 세 여행자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이웃종교인
우리가 환대해야 할 첫 번째 동료 여행자는 이웃종교인입니다. 세상에 다양한 종교들이 있다는 것은 세상에 다양한 생명이 있다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생명 다양성이 자연의 이상적인 상태이듯 종교적 다양성 역시 바람직한 현상입니다. 저는 가끔 상상해 보곤 합니다. 세계에 그리스도교가 유일한 종교이고 모든 인류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떨까? 남들은 어떨는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저는 지루하고 지겨워서 살 맛이 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다행히(!) 세계에는 많은 종교가 있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종교적 다양성은 불가피할 뿐만 아니라 바람직한 현상이기도 합니다. 생명 다양성이 개체 생명체의안녕에 필수적이듯이 종교적 다양성도 개별 종교의 안녕에 필수적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종교 사이의 바람직한 관계의 은유는 ‘공생’symbiosis입니다. 생물학적으로 공생은 둘 혹은 여럿의 생명체가 서로에게 유익을 주는 상호적 관계를 뜻합니다. 종교들의 공생 역시 서로를 보완하고 변혁하는 상호적 관계입니다. 이런 종교적 공생은 종교적 혼합주의syncretism와 다릅니다. 서로를 환대하지만 서로의 정체성을 잃지 않습니다. 상호 환대와 공생 속에 각각의 종교가 더 건강해지고, 깊어지고,풍요로워집니다.
물론 이웃종교인을 환대하고 그들과 공생하는 것이 두려울 수도 있습니다. 우리 신앙의 정체성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고 염려할 수도 있고,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식을 지도 모른다고 불안해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잃을 정체성이라면, 그렇게 쉽게 식을 사랑이라면, 목숨 걸고 지킬 필요가 있을까요? 저는 그 동안 이웃종교인과 만나 대화해 오면서, 우리 자신에 대해, 우리가 사랑하는 그리스도에 대해 좀 더 자신감을 가져도 좋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웃종교인도 그리스도께서 자기비움의 삶으로 드러내신 진리에, 그리고 가난한 자로서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사셨던그의 사랑에 감동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합니다. “나그네 대접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천사를 대접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 나그네가 이웃종교인이라면, 우리는 그들을 환대함으로써 천사를, 하느님을 만날 지도 모릅니다. 이웃종교인을 환대할 때 얻는 가장 큰 유익은 새로운 종교적 지혜를 배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원래 새로운 것은 남에게서 배우기 마련입니다. 제 꿈속에서 저와 그 낯선 사람이 서로 가 보지 않은 길에 대해 지식을 교환했듯이, 종교인들도 서로 보지 못했던 진리의 다른 면에 대해 지혜를 나눕니다. 그러면서 영적으로 더 깊어집니다. 불자는 더좋은 불자가 되고, 무슬림은 더 좋은 무슬림이 되고, 그리스도인은 더 좋은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그러니 새해에는 두려움 없이 이웃종교인들을 환대함으로써 더 좋은 예수 따르미가 되기를 꿈꿔 봅니다.
고난 받는 이웃
우리가 환대해야 할 두 번째 동료 여행자는 고난 받는 이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합니다.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있으면 여러분도 함께 갇혀 있는 심정으로 그들을 기억하십시오. 학대 받는 사람들이 있으면 여러분도 같은 학대를 받고 있는 심정으로 그들을 기억하십시오.” 고난을 겪는 이들에 대한 특별한 관심과 환대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심장입니다. 우리가 고난 받는 이들을 환대하며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곧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였습니다. 또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으며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주었습니다" (마태복음서 25: 35-36).
이런 그리스도교적 환대와 사랑을 오늘날 상징적으로 대표하고 있는 분은 교황 프란치스코입니다. 미국의 <타임>지는 2013년 ‘올해의 인물’로 교황 프란치스코를 선정했습니다. 예상했던 바입니다. 2013년 Facebook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단어는 “교황 프란치스코”였습니다. 그는 지난 해 3월 13일 266대 교황으로 선출된 이래 일 년도 채 지나지 않아 세계에서 가장 사랑 받는 종교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에 대한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고 벌써 ‘어록집’까지 나올 정도입니다. 그가 이토록 큰 사랑을 받는 이유는 고난 받는 이들에 대한 그의 특별한 관심과 사랑 때문입니다. 교황 프란치스코는 부유하고 강한 이들의 탐욕과 폭력을 단호히 비판하며 가난하고 약한 이들을 위한 정의를 선포합니다. 그래서 그를 “가난한 자의 목소리”(The Voice of the Poor)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또한 교황 프란치스코는 말로만 이웃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거리에서 노숙자들을 만나고, 가난한 이들과 밥상을 함께 하고, 병든 이들을 두 팔로 감싸며 안아 줍니다. 그는 ‘프란치스코’를 교황의 이름으로 정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가난을 상징했던 분이었고, 평화를 대변했던 분이었습니다. 가난한 교회, 그리고 가난한 사람을 위한 교회, 이 어찌 우리가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교황의 이 말에서 우리는 교회가 세상에서 고난 받는 이를 환대하고 사랑할 때, 교회도 세상으로부터 환대 받고 사랑 받게 된다는 단순하면서도 명쾌한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고난 받는 이를 환대하는 것은 우리에게 새로운 꿈이 아닙니다. 새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 해방의 소식을 선포하신 것이 바로 복음과 선교의 핵심”이라고 믿는 예수 따르미들이 세운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꿈을 계속 꾸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난 받는 이들에 대한 우리의 환대와 사랑이 더 구체적이고, 더 직접적이고, 더 지속적일 수 있도록 우리의 꿈에 색채를 입히려고 합니다. 그것이 세상을 환대하고 세상으로부터 환대 받는 예수 따르미의 길입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다종교 사회인 한국에서 종교적 이웃과 고난 받는 이웃은 둘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런 종교적, 사회적 현실에서 ‘종교간 대화 없는 해방의 실천’과 ‘해방의 실천 없는 종교간 대화’ 모두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가장 전위적인 두 신학운동인 ‘민중신학’과 ‘종교신학’(혹은 토착화신학)은, 변선환 선생님께서 표현하신 것처럼, ‘양극성’의 관계로 떨어져 존재해 왔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새길에서는 이 두 신학운동이 조화롭게 공생해 왔습니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현 새길의 <신학위원> 구성입니다. 신학적으로 보면, 신학위원 중 한완상, 최만자, 권진관 선생님은 ‘복음의 사회정치적 의미’와 씨름해 오신 분들이고, 길희성, 차옥숭 선생님은 ‘복음의 종교문화적 의미’를 깊이 탐구해 오신 분들입니다. 그리고 이분들이 고생하며 닦아 놓으신 신학의 길을 편하게 따라가고 있는 저는 두 신학운동을 계승하고 종합해 ‘사회참여적 종교신학’을 구성하려고 합니다. 이처럼 종교적 이웃과 고난 받는 이웃을 동시에 환대하며 대화적, 변혁적 그리스도교 운동을 해 나갈 수 있는 공동체는 새길 외에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사회정치적 신학과 종교문화적 신학이 조화롭게 공생하는 새길은 하느님께서 한국교회에, 아니 세계교회에 주신 선물이라고 믿습니다.
우리 안의 이웃
히브리서 저자는 또한 말합니다. “자매형제들을 꾸준히 사랑하십시오.” 우리가 환대해야 할 세 번째 동료 여행자는 공동체 안의 자매형제들입니다. 우리가 한국에 있는 수만 개의 교회들 중에서 이 작은 새길교회에서 만난 것은, 노랫말처럼, '우연'이 아니라 '바람'이었습니다. 제도교회의 울타리 안에서 ‘순한 양'으로 안전하게 사는 것을 거부하고, 위험하지만 자유롭게 진리의 시냇물을 찾는 '목마른 사슴'으로 살기를 선택한 이들이 친구들을 바랐고, 그 간절한 바람으로 만나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친구들도 다툴 때가 있듯이 공동체를 살아가는 우리도 서로 갈등할 때가 있습니다. 종교적 이웃과 고난 받는 이웃을 대하는 관점과 방식의 차이로 인해 갈등하기도 하고, 생각이 같더라도 관계의 어긋남으로 인해 갈등을 겪기도 합니다. 공동체 안으로 더 깊이 들어올수록 갈등에 휘말릴 기회가 더 많아집니다. 그만큼 상처를 입거나 입힐 기회도 더 많아집니다. 하지만 갈등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신학자 칼 라너는 하느님의 영은 갈등을 통해서도 공동체를 성숙시킨다고 합니다. 갈등 속에서도 서로를 환대한다면 우리는 함께 변화하고 성숙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갈등 속에서 움직이는 영 대신 자기의 욕망을 따르면서 서로에게 피할 수 있고 불필요한 상처를 줄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불필요한 상처를 피하면서 함께 성숙할 수 있을까요?
그 답을 두 주 전에 “할렐루야” 합창 연습을 할 때 찾았습니다. 그날 지휘자 이경재 형제님께서 많은 말씀을 하셨는데, 그 중 두 마디가 가슴에 깊이 와 닿았습니다. 첫 번째는, “음정이 틀려도 좋으니 ‘정확하게’ 발음하십시오”라는 말씀이었고, 두 번째는, “쉼표에서 쉬세요. 쉬어야 앞으로 나아갈수 있습니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우선, “정확하게 발음”한다는 것은 공동체 안의 ‘언어문화’를 성찰하게 해 주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상처를 주고 받는 현상을 관찰해 보면 의견 차이나 대립이 상처의 근본 원인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다른 생각을 갖고 있어도 화합할 수 있는 반면 같은 생각을 갖고 있어도 불화하며 상처를 주고 받을수 있습니다. 그런 상처의 대부분은 우리의 잘못된 언어 습관에서 생깁니다. 평신도 공동체인 새길에는 제도교회의 위계적 상하관계나 직장의 세속적 이해관계 같은 것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 언어입니다. 우리는,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지만,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남에게 상처를 주는 언어를 사용할 때가 많습니다. 남을 가르치려고 하고, 다른 것을 틀렸다고 하고, 꾸짖으려고 하고, 판단하려고 합니다. 잠언 기자는 말합니다. “따뜻한 말은 생명의 나무가 되고 가시 돋힌 말은 마음을 상하게 한다” (잠언 15:4).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정확하게 발음"하듯 부드럽고 따뜻한 언어를 사용한다면 우리가 겪는 불필요한 고통의 대부분은 사라질 것입니다.
다음으로, “쉰다”는 것은 모든 것을 멈추고 하느님과 함께 머무는 것입니다. 우리가 상처를 입고 입히는 더 근원적인 원인은 우리 안의 자아가 너무 크고 또 많기 때문입니다. 내 자아로 꽉 채워진 마음의 집에는 하느님께서 들어와 사실 수 있는 공간이 없습니다. 자연히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공간도 없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사랑 받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사랑 받는 것을 욕망합니다. 그리고 욕망했던 그 사랑을 받지 못할 때 상처를 입고, 다시 남에게 상처를 입힙니다. 이런 관계적 상처에 대한 헨리 나웬의 통찰은 아픈 만큼 예리합니다. “하느님으로부터만 받을 수 있는 것을 남에게서 받기 원할 때 우리는 서로에게 악마가 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은 상처를 입지도 상처를 입히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공동체 안에서 관계적 상처를 겪을 때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쉬면서 하느님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신비는 우리의 마음이 하느님의 사랑으로 가득 채워질수록 공동체의 자매형제를 받아들이고 환대하고 사랑할 공간이 오히려 더 늘어난다는 것입니다.
조금 있다 우리는 “할렐루야” 합창을 하게 됩니다. 어쩌면 우리가 하는 ‘합창’에 환대의 모든 의미가 들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따뜻하게 말하고, 나와 다른 음을 마음챙겨 경청하고, 고요히 쉬면서 하느님의 현존을 느낄 때, 우리는 아름다운 합창 같은 공동체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새해에는 종교적 이웃, 고난 받는 이웃, 그리고 우리 안의 이웃인 자매형제들을 환대하며, “할렐루야” 합창하듯 살 수 있기를 바라고 다짐해 봅니다. 그런 바람과 다짐이라면, 새길에서도 한 번쯤은 서로에게 ‘할렐루야’를 흥겹게 외쳐 보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할렐루야!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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