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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엡5: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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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조성희 자매 |
참고 : | http://www.saegilchurch.or.kr/284937 |
펜들힐에서의 만남(에베소서 5장 8-9절)
2014년 2월 2일 주일예배
조성희 자매(새길교회 교우)
공동체에게 감사 인사
지난 10여 년간 제게 풍성한 사랑을 베풀어 주신 새길 자매, 형제들에게 감사의 인사를드립니다. 또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했지만 제게 인격을 가르쳐 주시고 삶에 모범을 보여주신 스승 이정모 선생님, 감상적인 제 신앙에 논리를 가르쳐 주신 길희성 선생님, 나이를 뛰어넘어 좋은 친구가 되어 준 지복임 선생님, 신앙의 자극을 주었던 배정은, 이창엽 친구들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새길에 있는 동안 항상 앞에서 세 번째 자리를 지켜주셨던 박민병, 송요엽 선생님과 언제나 옆에 있을 줄 알았던 임동건, 박옥진 선생님, 그리고 최근 우리를 떠난 오랜 형제, 자매들과도 보고 싶다는 마음을 전합니다.
나는 왜 길을 떠났나?
작년 1월 말에 저는 지난 22년간 어린이 관련 교육회사에서 교육 프로그램 기획 및 교재 개발자로 살아 왔던 월급쟁이의 생활을 정리하고, 남은 제 인생을 좀 더 의미 있는 시간에 집중할 것을 생각하며 3년간 저 자신을 위한 시간을 갖기로 했습니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생각과 삶을 일치시키고, 어려운 사람의 편에 서서 인간의 자유와 해방을 위해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저에게 주는 선물과도 같은 이 시간에 제가 생각한 목표는 영어 공부와 퀘이커리즘을 경험하고 공부하는 일이었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좋은 친구들을 많이 사귀고 싶은 생각이 있지요. 영어 공부는 미국의 강한 영향 속에 살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나이가 들어도 계속 일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려는 것과 한국의 좁은 땅과 문화적 제약을 뛰어 넘어 국제적인 시야를 갖고 자유롭게 살고 싶은 욕구에서 도전하는 것입니다. 퀘이커리즘 공부는 ‘인생과 우주 그 자체’의 의미를 알고 싶었고 제게 중요한 부분이 된 새길 공동체를 좀더 넓고 깊게 발전시키고, 남은 인생에 영향을 줄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싶은 소망에서 출발했습니다. 작년에 저는, 15일간 인도 여행을 하고, 5개월간 필리핀에서 영어 공부를 했고, 9월 중순부터 12월 중순까지 미국 펜들힐에서 학생으로 머물며 영적 여행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또 얼마 있다가 다음 행선지를 향해 길을 나서게 될 것입니다.
펜들힐을 가기 전에 들른 인도와 필리핀의 경험은 동양인으로서의 뿌리를 자각한 기회였고, 우리가 너무 쉽게 잃어버린 과거를 보고 온 시간이었습니다. 이것은 앞으로 서양사회에서 영어와 퀘이커리즘을 배울 때에도 저 자신을 잃지 않고 동서를 연결하려는 태도를 갖게 할 귀한 경험이 될 것입니다.
펜들힐이란 어떤 곳인가?
펜들힐은 미국 펜실바니아 주, 필라델피아 근처에 있는 퀘이커 수도원이자 평신도의 내적 성장을 위한 학교입니다.
퀘이커는 1647년 영국에서 시작한 기독교 신앙 운동의 하나로 개신교에서는 가장 진보적인 종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목사가 없이 평신도 한 명 한 명이 목사 역할을 하며, 예배에서 모든 형식과 계획을 없애고, 고요함 속에서 성령의 임하심을 믿으며, 자신에게 찾아온 하느님의 가르침을 공동체와 나누는 것이 특징이지요. 예배는 공동체가 고요함 속에서 내 안에 있는 하느님의 씨앗, 하느님이 우리를 창조하실 때 불어 넣어 주셨던 하느님 닮은 형상을 일깨우고 하느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예배에는 설교나 찬송이 없습니다. 그냥 고요함 속에서 각 사람에게 찾아온 하느님을 만나고, 그 만남을 공동체와 나누라는 부르심을 받은 자가 일어서서 증언하는 감화(vocal ministry)가 있을 뿐입니다. 감화는 짤막한 단락이나 시가 될 수도 있고, 때로는 찬송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저는 이 퀘이커 예배에서 하느님을 경외하며 드리는 예배가 어떤 것인지를 체험했습니다. 무수히 많은 상념들을 떨쳐내고 고요함 속에서 하느님과 만나는 기다림의 시간을 갖는 것, 고요함 속에 들어가는 행위는 바로 자기를 비우고 내 안에 하느님이 들어 오실 공간을 마련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쉽게 되지 않지만, 자꾸 연습하고 하느님을 만나려는 소망을 가지면 문이 열리지요.
펜들힐은 미국에 있는 퀘이커 평신도 사제 교육을 위해 1930년에 세워졌는데 지난 83년동안 퀘이커만이 아니라 다양한 교파에서 찾아 온 학생들이 1학기 3개월 과정에 참여하거나 가을, 겨울, 봄학기로 이어지는 1년 과정에 참여하면서 내적 성장을 이루고 돌아간 곳입니다. 또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있는 주말 프로그램에 참여하거나 아무런 프로그램도 참여하지 않고 그곳에 머물면서 조용히 휴식을 취하고 돌아가기도 합니다.
과정을 모두 마친 제가 펜들힐에 대해 느낀 것은 ‘펜들힐은 어머니다.’ 입니다. 저는 펜들힐 공동체를 통해 ‘어머니 하느님’을 경험했습니다. 그곳은 매우 여유롭고 풍족했으며, 모든 것이 수용되는 분위기 속에서 자기를 사랑하고 존중하는 법을 배우게 합니다.
펜들힐에서는 모두가 부드럽게 말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원하면, 그것을 하십시오.’
아마 펜들힐에서의 자유와 충만함(mindfulness)의 경험을 통해 ‘진정한 인간다움’ 곧 ‘하느님의 자녀됨’을 느끼게 하고, 그것을 모델로 펜들힐을 나설 때, 바깥 세상의 그렇지 않음에 변화를 줄 힘을 길러 주기 위함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함석헌 선생님이 62년, 67년에 펜들힐 학생으로 머물면서 ‘펜들힐의 명상’이란 유명한 글을 쓰셨고, 한명숙 전 국무총리와 박성준 교수도 이곳에 계셨고, 정지석 목사님은 이곳에서 2000년 머물면서 우리나라 평화학 박사 1호 논문을 준비했고, 큰딸 세온을 낳았습니다. 또 2010년에는 국경선 평화학교의 비전을 보시기도 했지요.
저는 작년 가을 이곳에서 김경재 선생님을 가까이서 뵈며 많은 것을 배웠고, 펜들힐에 온 성공회 신부님과 30년 만에 만난 대학 동창과 학생으로 있으면서 서로를 깊이 드러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나는 펜들힐을 어떻게 알았나?
여기서 잠깐 펜들힐을 가기까지의 인연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퀘이커들은 이를 커넥션(connection)이라 말하며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데, 저도 돌이켜 보니, 모든 것이 하느님의 예배하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각의 인연의 사슬로 엮여 있음을 신비롭게 느끼게 됩니다. 제가 펜들힐을 알게 된 것은 2010년 정지석 목사님이 새길 공동체를 떠나 펜들힐에 가셨을 때입니다. 퀘이커에 대해 잘 알지도 못했을 때인데, 전옥희 선생님을 만나 펜들힐에서의 경험을 듣고, 홈페이지를 둘러보면서 저도 가고 싶다는 소망을 갖게 되었지요.
당시 저는 새로 옮긴 회사에서 저를 뽑은 대표이사가 그만 두면서 회사 안에 입지가 불안정해졌고, 오랜 직장생활로 극심한 피로를 느끼던 중, 사직서를 내고 집에서 쉬고 있었을 때입니다. 하지만, 그때까지 제대로 놀아 본 적이 없어서 ‘무엇을 하며 쉬어야 할지’ 방법을 몰랐고, 돈도 없었습니다.
그런 제게 펜들힐은 ‘언젠가는 갈 곳’ 이란 소망이 되었고 회사를 그만 둔 실업자에게 ‘펜들힐을 가기 위한 준비’ 로 집중할 것이 되었지요.
그때 미국 유학 중이던 정경일 형제에게 메일을 보내 ‘펜들힐에 가고 싶은데 어떻게 영어 공부를 하면 좋겠냐’고 물었습니다. 정경일 형제는 펜들힐에 가는 것을 기쁘게 격려해 주면서, 영어 공부를 위해 미국 공영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인 On being. org 사이트를 소개해 주면서 그곳에서 영어 음성과 텍스트 파일을 다운 받아 영어를 듣고 공부할 것을 알려 주었습니다.
이 사이트는 신앙, 종교, 윤리 등의 문제를 현대 뇌과학에서부터 고대 영적 전통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분야의 전문가들과 만나 대담하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이 사이트에서 자료를 다운 받아 듣고 읽으면서 저는 그때까지 제가 가졌던 좁은 시야의 생각의 틀을 깨고 과학과 종교, 삶을 분리해서 보았던 것을 연결하는 시도를 하였습니다.
또 이 기간에 저는 함석헌과 그 제자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새길 넥스트를 월 1회 맡고 있었는데, 이전에는 시간이 없어서 읽지 못했던 전기문이나 자서전을 읽고 학생들에게 소개했지요. 사진 저널리스트 유진 스미스, 유진 스미스가 찍은 슈바이처, 그리고 간디 자서전을 읽으려고 책을 펼쳤는데, 번역자가 함석헌 인 것을 보고, 제가 모두 외국 사람의 삶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간디보다 함석헌을 먼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함석헌 평전’ 을 읽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저는 함석헌이야말로 우리 현대사를 살아온 분으로 우리 시대의 참 스승이고, 우리가 꼭 알아야 할 분임을 깨달았습니다.그 이후 함석헌이 직접 쓴 책을 읽으면서, 그 글의 쉽고 힘 있음, 사상의 종횡무진에 감탄했고 역사가이자 기독교인이신 선생님에게서 한국인으로서의 주체성과 그 사상의 뿌리 같은 것을 느꼈지요.
그리고 함석헌 기념사업회에서 실시한 함석헌의 저서 ‘뜻으로 본 한국 역사’ 강의를 그의 제자들에게 들었습니다. 총 3개월 12회에 걸쳐 들으면서 대학을 졸업한 이후 눈을 감고 있었던 역사의식을 다시 일깨우게 되었습니다.이 강좌에서 저는 ‘함석헌 연구’로 영국에서 학사, 석사, 박사 논문을 쓰고 그것을 토대로 ‘함석헌 평전’을 쓴 저자 김성수 박사를 만나게 되었고, 그에게서 ‘자신이 믿는 것을 삶속에서 실천하며 사는 퀘이커의 삶’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저도 ‘퀘이커리즘을 공부하고 싶다’는 소망을 갖게 되었지요.
또 함석헌에 관한 자료를 찾던 중, 정지석의 박사논문이 ‘퀘이커 평화 증언; 함석헌의 평화 사상과 한국 통일 신학’ 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정지석 목사님을 새로 알게 되었습니다. 새길에 계시는 동안 그 진면목을 알지 못했던 것이지요.
2010년 11월, ‘뜻으로 본 한국 역사’ 강의가 끝날 무렵, 저는 다시 취직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2년을 눈썹 휘날리게 바쁘게 일하면서 저의 영적 여행을 할 수 있는 여비와 마음의 준비를 하게 되었습니다.
김성수, 정지석, 정경일 이 세 분은 제가 펜들힐 지원서를 낼 때 필요한 세 명의 추천인이 되어 주었고, 보잘 것 없는 삶을 살아 왔다고 생각한 저에게 펜들힐로 갈 수 있는 길을 무료로 열어준 분들입니다. 아마 남은 인생은 제가 받은 친절을 다시 다른 분들에게 되로 갚는 시간으로 살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나는 펜들힐에서 무엇을 배웠나?
2년 동안 펜들힐에 가는 꿈을 마음 속에 지니면서 살았습니다. 왜 그렇게 가고 싶었을까요? 제 마음 속에 펜들힐은 저의 ‘영적인 고향’ 과도 같았습니다. 그곳에 가면 제 인생 후반부에 영향을 미칠 특별한 만남이 있을 것 같고 새힘을 얻을 것 같은 설렘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펜들힐에서의 제 여정은 제가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진행되었고, 순간순간 매우 고통스러웠습니다. 과정을 모두 마치고 나서야 하느님이 왜 제게 그런 고통을 주셨는지 깨닫게 되었고, 그것의 깊음에 신비로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장애인으로 살아 보기
펜들힐 생활을 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문제는 영어를 못해서 오는 답답함과 외로움이었습니다. 펜들힐 지원서에 제 영어 실력을 ‘잘함 good’ 이라고 표시했는데, 나중에 제 실력이 ‘거의 잘 못함 poor’ 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펜들힐에 와서 첫날 식탁에 앉아 간단한 인사를 하고, 사람들이 나누는 사소한 대화를 전혀 알아 듣지 못한 순간부터 저는 얼어 붙기 시작해서 침묵 예배 중에 나오는 감화, 간단한 공고 사항, 수업 시간에 지시와 의견 나눔 등을 거의 알아 듣지 못하면서 의기소침해졌고 매순간 영어 때문에 어려움을 느꼈습니다.
현실 영어는 제가 그 동안 들었던 아나운서의 또박또박한 발음이나 교실에서 학생들에게 쉽게 말하는 영어 선생님 영어가 아니라, 다양한 톤과 억양, 빠른 속도, 이해할 수 없는 슬랭 등이 혼합되어 잘 알아듣기가 어려웠습니다. 게다가 제 상대방들은 미국에서만 주로 살았던 사람들이고 저와 같은 외국인을 많이 상대해 보지 않아 대화의 속도 맞추기가 어려웠습니다.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고 말하기를 즐기는 미국 사람과 영국 사람들 틈에서 저는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장애인으로 살았고 읽기와 쓰기가 능숙하지 못한 무학의 위치에서 지냈습니다. 얼마나 답답하고 얼마나 힘들었을지 상상이 가시는지요? 아침에 눈을 뜬 순간부터 잠들기 직전까지 온통 영어에 대한 스트레스를 받으며 지냈습니다. 왜냐하면 인생 그 자체에 대해 의미를 나누며 그것을 소통하는 가운데 친구를 사귀겠다는 욕구가 있었는데, 사소한 대화에서부터 모든 소통의 도구가 ‘언어’, 바로 ‘영어’ 가 중심이 되어 친구를 사귀는 길이 막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이 경험을 통해 저는 세상의 질서가 어떻게 편성되었는지를 비로소 볼 수 있게 되었고, 누가 내게 친구가 되어 주는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제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경험이었는데, 이것을 통해 저는 우리나라에 있는 외국인 노동자가 겪는 이중고에 대해 이해하게 되었고, 미국에서 소수민족으로 사는 한국인들이나 이민자들이 겪는 어려움과 소외감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머리가 좋지 않다’고 흔히 말하는 기준이 철저하게 ‘언어적인 것에 유창한 가 아닌 가’로서만 평가한다는 교육심리학자들의 비판의 의미도 알게 되었고, 영어가 권력이 되었다는 의미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경험은 제게 새로운 문을 열어 주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상대를 이해하고 관계 맺는 방식이 언어 이외에 더욱 원초적이고 선험적인 비언어적인 것으로 시작할 수 있다는 것과 그것을 통해 소통의 참 의미를 알게 된 것입니다.
펜들힐 나무들과의 교감
무엇보다 펜들힐의 공간에서 혼자 있는 시간을 많이 가지면서 자연과 깊은 대화를 하게되었습니다. 특히 항상 말없이 옆에 있어주고 자신의 변화를 보여 주는 펜들힐의 나무들을 유심히 관찰하면서 나무들의 가지 뻗침의 다양함, 잎사귀의 다채로움, 같은 듯하면서 다른 색을 가진 그들의 다양함을 인식하고 나무의 이름들을 알고 싶다고 생각했지요.
어느 날 저녁 식사를 마치고 뒤뜰에서 나무를 바라보던 중, 펜들힐의 정원을 관리(Ground Manager)하면서 28년을 살아 온 로이드를 만났습니다.
“로이드, 펜들힐에 있는 나무 이름을 알고 싶어요. 어떻게 하면 될까요?”
“그래요? 내가 그린 펜들힐 나무들의 위치와 이름이 적힌 지도가 있어요.
내일 아침에 내가 그 지도를 에리(에리는 제 영어 이름입니다)의 우편함에 넣어 줄게요.
어떤 나무들이 궁금해요? 지금 나와 같이 가서 그 나무를 봐요.“
하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매일 오가며 보았던 미술실 앞에 있는 나무 쪽으로 같이 가서 그 나무 이름이 애플크랩(apple crab)이라는 것을 알려 주었고, 그 옆에 있는 키 큰 버드나무가 로이드의 아들이 태어났을 때 심은 나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브린튼 하우스 가는 길 왼편에 있는 특이하게 생긴 버드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를 발견하면 자기에게 말해 달라고 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침묵 예배가 끝난 후 제 우편함에서 로이드가 놓고 간 펜들힐 나무들의 위치와 이름이 적힌 지도와 나무 그림 사전과 로이드 명함 뒤에 적힌 메모를 보았습니다.
‘에리, 여기 지도에요. 그리고 참고할 만한 책을 놓고 갑니다. 마음껏 보고, 나중에 돌려주세요. 로이드’
그날 저는 너무 행복했습니다. 제 작은 질문에 귀를 기울여 주고, 한 두 마디의 대답으로 끝나지 않고, 저와 함께 나무가 있는 쪽으로 걸어가서, 그것의 이름을 알려 주고, 또 제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서 그것을 챙겨 주는 친절함에 감격했습니다.
비언어적인 소통의 도구, ‘진심’으로 다가가기
로이드의 친절함 덕분에 나무에 관심을 가지고 관찰하면서 사진을 찍거나 사진으로 표현할 수 없는 제 느낌을 그림으로 표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림을 그리면서 ‘자세히 보는 연습’을 하게 되었지요. 또 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움직임이나 표정을 관찰하면서 그 사람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모두 저와 같은 구도자, 자신의 참 모습을 찾기 위해 길을 떠난 사람들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먼저 긴장을 풀고 마음의 문을 열자 소통이 가능해졌습니다. 그들은 저의 영어 못함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고 기다려 주었고, 제가 자신들을 그릴 때 모르는 척 그대로 내버려 두었고, 때로는 모델이 되어 주기도 했습니다.
퀘이커 신앙과 실천에 대한 공부
펜들힐에 간 주된 목적이 퀘이커리즘을 경험하고 공부가 더 필요하다면 나중에 영국의 우드브룩으로 가서 정식으로 퀘이커 석사 과정을 밟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저는 여기서 Doug Gwyn의 ‘An introduction Quaker Faith and Practice’ 라는 정규수업과 Ben & Deborah의 ‘Inquirer’s weekend’ 라는 주말 워크샵 참여, 펜들힐의 학생 교육 담당자인 Bridget과 함께 하는 ‘A continuing conversation on Quakerism’ 을 들으면서 퀘이커리즘을 많이 알려고 했습니다.
선생님들의 정성스럽고 친절함, 그들의 검소한 생활 태도 등을 통해 퀘이커들이 자신들을 드러내는 여섯 가지 생활신조 SPICES인 검소함 Simplicity, 평화주의 Peace, 온전함 Integrity, 공동체 의식 Community, 평등주의 Equality, 자연에 대한 청지기로서의 자세 Stewardship 등의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3개월간 10주간 수업을 들으면서 저는 퀘이커리즘에 관한 큰 그림을 갖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퀘이커리즘을 말할 때 ‘신앙과 실천’을 함께 말함으로써 믿음과 삶을 분리하지 않고 다루고 있었는데, 그것은 내 안에 있는 하느님을 발견하고, 우리 모두에게 똑같이 있는 하느님의 씨앗을 가진 우리 자매 형제들이 그 존엄성을 파괴당할 때 그대로 있지 않는 절대자의 음성을 외면하지 못하는 퀘이커 공동체의 예배에서 비롯됨을 알게 되었습니다.
참 나의 발견
지난 3개월 동안 저는 참된 나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그것을 보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모든 교육과정은 영적인 성숙을 위해 치밀하게 잘 짜여있습니다. 수업을 준비하는 시간과 교실에서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과정에서, 영적 선배(Spiritual nurturer)와의 정기적인 대화를 통해서, 한국 친구들과 허심탄회하게 대화하면서 또 매일의 노동과 공동체 전체가 하는 수요 노동 등 여러 가지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참된 나의 존재를 발견하는 과정이 때로는 고통스럽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공동체와 함께하는 침묵의 시간은 제 안에 감추어 두었던 무의식의 세계를 끌어 올리고 참 나를 자각하게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이 시간이 참된 나를 발견하게 하는 자리이며 저의 좋은 씨앗을 싹 틔우기 위한 연습의 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또 ‘인종, 계급, 성 차별 등에 관한 용감한 대화’ 라는 수업을 들으면서 미국 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억압의 문제를 개인적, 제도적, 문화적인 차원으로 이해하면서, 그것과 무관하지 않는 내 안의 억압을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미국 사회의 억압의 틀을 공부하면서 저는 한국 사회 안에 있는 자기 존재의 부정에 대해 인식하게 되었고, 자신의 뿌리를 잃은 채 유령처럼 살아온 우리나라의 아픈 현실을 자각했습니다. 친구의 모습을 통해 나를 이해하게 된 것과 같은 이치이지요.
그리고 저는 계속 제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를 구성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이 참 나인가? 나의 뿌리는 무엇인가? 하고요. 그러면서 저는 저의 기억을 구성하고 있었던 여러 가지 것들을 끄집어 올리면서 그것들의 의미를 되새김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러다가 찬란하게 아름다웠지만, 억압으로 점철되었던 제 젊은 날의 모습을 회상하게 되었습니다. 그 기억의 실마리를 제공하며 끊임없이 제 앞에서 그때를 연결시켰던 제 대학 동창을 펜들힐에서 30년이 다 되어 만나 다시 친구가 되면서 젊은 날의 나의 약점들을 끌어안을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 하고 싶은 일
저 개인적인 삶이나, 우리 사회에 내재한 억압의 사슬 등을 자꾸 들여다보고 싶어집니다. 또 나를 구성하고 있는 것들에 관심을 갖고 싶습니다. 한국에 돌아오면, 스쳐 지나갔던 것들을 좀더 눈 여겨 보고 한국의 색, 한국의 무늬, 한국의 음악, 한국의 춤, 한국 음식 등을 주의 깊게 알아보려고 합니다.
또 제 어머니와 스승님이 살아오신 삶을 좀 더 자세히 들어 보려고 합니다. 마치 제가 펜들힐에서 저의 영적 자서전(Spiritual Autobiography)을 썼던 것처럼 저의 어머니와 스승님의 이야기를 듣고 글로 써 보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내 이름은 성희
마지막으로 제 이름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펜들힐에서 저는 처음에 제 한국이름 조성희 대신에 ‘에리 조 Ehri Cho‘ 라고 저를 소개했습니다. 에리 Ehri 는 제 영어 이름인데, 영어를 처음 배울 때 외국인들이 쉽게 기억하고 부르게 하려고 오래 전부터 사용한 이름입니다. 사실 제 한국 이름의 ‘성희’가 별 의미가 없어서 그런 것도 있었고요. 그런데 어느 날, 그들이 한국에 와서 저를 찾을 때 아무도 모르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과 아버지가 이름을 지어 주실 때 ‘성희’ 의 소리가 예뻐서 지어 주신 것인데 왜 그것을 몰랐나 하는 것을 깨달았지요. 그래서 제가 제 이름에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습니다.
성희 成(이룰 성) 姬(여자 희) 에서 誠(정성 성) 喜(기쁠 희)’ 의 의미가 담긴 이름으로요. 영어로 하면 ‘Integrity with joy’, 기쁨 속에서 온전한 삶을 추구한다는 의미가 담겨있지요. 그래서 제 이름을 생각하면서 퀘이커의 삶 ‘네가 믿는 바를 삶으로 보여 주라 Let your life speak’ 를 따르며 살려고 합니다.
감사합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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