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눅23:34 |
---|---|
설교자 : | 김부겸 목사 |
참고 : | http://blog.naver.com/malsoom/108232305 |
2010년 6월 27일 주일설교
성경말씀 : 누가복음 23장 34절
설교제목 : 아는 자와 모르는 자
【그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누가 23:34)】
<책 이야기>
며칠 전 『미움이 그친 바로 그 순간』(송봉모 지음, 바오로딸출판사)을 잘 읽었습니다. 이 책은 원래 10여년 전 『상처와 용서』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책이었는데, 최근 들어 수정보완해서 새롭게 펴낸 책입니다.
먼저 이 책을 읽으면서 밑줄을 그었던 부분들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이 세상에 상처 없는 영혼이 있을까? 우리 모두는 세상에 태어난 그 순간부터 삶이 끝나는 그날까지 수많은 마음의 상처를 주고 받으며 살아간다. 성장과정에서 부모님이 아무리 많은 사랑으로 어린 우리를 보호하고 돌보아 준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어떠한 식으로든 상처를 받는다.”
“만나는 사람마다 친절하게 대하라. 그대들이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전쟁을 치르는 이들이다.”
“형제자매들이여, 우리 모두 가까이 다가앉자. 우리를 떼어놓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자. 적(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는 다만 불행하고 불쌍한 이들만 존재한다. 우리가 계속 누릴 수 있는 행복, 유일한 행복이 세상에 있다면 그것은 서로 이해하면서 사랑하는 것이다.(로맹 롤랑)”
“하느님의 나라는 용서의 나라이고, 하느님 나라의 통치방식은 용서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용서는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지 상대방이 뉘우쳤기에 하는 것이 아니다.”
“심리학에는 ‘적대자와 동일시 원리’라는 말이 있다. 사람은 무엇에 집중하는가에 따라 모습이 변한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밤낮으로 미워한다면 어느새 그 사람과 닮게 된다는 것이다.”
“원수를 향한 연민(憐憫)만이 자신의 선한 마음을 지키는 길이다.”
“값싼 용서와 섣부른 용서는 진정한 용서가 아니다.- 값싸게 서둘러서 용서하게 되면, 내 안에 있는 분노와 아픔을 억압하게 되고, 이때 억압된 분노와 아픔은 나중에 더 강력한 파괴적 힘이 된다.”
“치유는 과정이다. 상처가 하룻밤 사이에 깊어진 것이 아니라면 치유 또한 그렇지 않겠는가.”
“용서와 화해는 다르다. 용서는 내 개인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일이지만, 화해는 서로 상방 간에서 용서가 모두 이뤄져야만 가능하다.”
<삶 이야기>
인생을 살아가면서 절절하게 느끼는 점은, 역시 더불어서 함께 살아간다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일은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가족관계도 그렇고, 직장생활도 그렇고, 하다 못해 친목모임도 그렇습니다. 어찌됐건 인간은 더불어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존재인데, 애석하게도 ‘더불어 살아가는 일’이 굉장히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살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받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는 상처를 주지 않고, 또 상처를 받지 않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혹은 우리는 서로에게 상처를 덜 주고, 또 상처를 덜 받으면서 조금이라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오늘 그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성경 이야기>
먼저 성경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누가 23:34)】
오늘 성경은 이제 마지막으로 십자가에 달려서 죽임을 당하기 직전, 예수님과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 주변에 여럿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예수님에 대해서 비웃었습니다. “그들은 제비를 뽑아서, 예수의 옷을 나누어 가졌습니다. 백성은 서서 바라보고 있었고, 지도자들도 비웃으며 말하였습니다. "그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그가 하나님의 그리스도이고, 택하심을 받은 자이거든, 자기나 구원하라지." 군인들도 예수를 조롱하였는데, 그들은 가까이 가서, 그에게 신 포도주를 들이대면서 말하였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거든, 너나 구원하여 보아라." 예수의 머리 위에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고 쓴 죄패가 붙어 있었습니다.(누가 23:34~37)”
이때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향해서 올리신 기도가 오늘 성경본문입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누가 23:34)】저는 이 예수님의 기도를 생각할 때마다 깊은 감동을 받아왔습니다. 이처럼 아름다운 인간 사랑의 메시지가 또 있을까요! 아마 없을 것입니다.
<앎과 모름의 차이>
그러면 이제부터 왜 예수님의 기도가 위대한 메시지인지 찬찬히 따져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누가 23:34) 예수님과 그 사람들과 차이는 곧 앎과 모름의 차이였습니다. 아는 자는 의인이고, 모르는 자는 죄인입니다. 아는 자는 해방자이고, 모르는 자는 억압자입니다. 아는 자는 자유자이고, 모르는 자는 노예자입니다. 아는 자는 행복자이고, 모르는 자는 불행자입니다. 앎과 모름은 그만큼 중요한 차이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자칫 오해가 생길만한 점을 조심해야 하는데, 그것은 앎이라는 것이 단순히 책이나 몇 권 읽고, 대학이나 대학원을 나온 차원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안다는 것, 그것은 대학이나 대학원 나온 차원과는 무관합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앎이란 삶 속에서 무르익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앎이란 삶 속에서 깊은 성찰을 하는 자만이 도달할 수 있는 세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읽고 쓸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해도 괜찮습니다. 오히려 그런 사람이 인생의 진정한 앎에 더 깊이 도달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웃집 아저씨 이야기>
얼마 전 이사 간 집 근처에 술주정이 심한 아저씨 한 분이 살고 있습니다. 한 달에 한 두 번 정도 이 아저씨가 밤새도록 소리를 지릅니다. 집 근처에 사는 이들이 모두 괴롭습니다. 잠을 설치니까요! 그러나 웬만해서는 그 요란스러운 술주정을 참아줍니다. 술 취한 사람하고 입씨름하는 것이 귀찮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고 … 그래서 그럴 것입니다. 저 역시 다른 이웃들과 마찬가지로 그 아저씨의 요란스러운 술주정을 못 본 척해줍니다.
그리고 아주 오래 전 저희 집에 있었던 사건을 떠올리곤 해 봅니다. 20여년 전, 그러니까 제가 스물 댓살 안팎이었을 때, 저희 집에 젊은 총각과 그의 어머니가 세들어 살았었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가끔씩 술에 취해서는 밤새 싸우곤 했습니다. 그때 밤잠을 설치는 우리 가족들을 대표해서 제가 항의하곤 했습니다. 저 역시 소리 지르면서 “좀 조용히 좀 합시다” 하고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 총각과 어머니가 조용히 주무시곤 했습니다.
그때는 제가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부끄러운 마음이 듭니다. 왜냐하면 그때만해도 제가 인생을 잘 몰랐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전쟁을 치르면서 살고 있고”, 때때로 인간은 비참한 전쟁의 상처를 온몸으로 울부짖을 수 밖에 없다는 ‘인생의 진실’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앎과 모름의 차이는 큰 것입니다. 아는 자는 용서할 수 있지만, 모르는 자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아는 자는 사랑할 수 있지만, 모르는 자는 미움만을 쌓아갑니다. 아는 자는 풀어버릴 수 있지만, 모르는 자는 가슴에 맺힌 상처를 키워갑니다. 앎과 모름의 차이는 그처럼 엄청난 것입니다.
<설교의 결론>
그러므로 우리는 아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해방자, 자유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우리가 ‘아는 자’가 될 수 있을까요? 그 길은 곧 배움에 있습니다 배워야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삶 속에서, 역사 속에서, 자연 속에서, 내 속에서, 사람들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을 깊이 성찰함으로서 우리는 ‘인생의 진리’를 배우는 것입니다. 무슨 대학이나 대학원을 나와야 배우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 살아가는 삶 속에서 깊은 성찰을 통해서 인생의 진리를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배워야만 알 수 있고, 알아야만 자유할 수 있습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이제 설교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말씀의 제목을 ‘아는 자와 모르는 자’라고 잡아보았습니다. 이 설교 말씀의 제목을 깊이 묵상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축도
이제는 진리의 길을 직접 보여주신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와, 우리의 생명과 영혼을 언제나 치유해 주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성령님의 아름다운 동행이 사랑하는 수도교회 교우들 머리 위에 언제나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