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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롬9: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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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참고 : | 실시간 온라인 새벽기도(1641) 2015.7.2 |
온새기(1641) 선한 근심은 필요합니다 (로마서 9장 1-3절)
<
근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
본문에는 동족을 향한 사도 바울의 애틋한 사랑과 근심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사실 그런 근심은
필요합니다. 근심에는 선한 근심과 나쁜 근심이 있습니다. 선한 근심은 필요하지만 나쁜 근심은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무려
300번 이상이나 “근심하지 말라! 두려워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근심하고 두려워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는 죄입니다.
예수님은 “염려로 키를 한 자도 자라게 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염려와 근심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돈이 없다고
아무리 근심해도 1000원도 생기지 않습니다. 그 시간에 조금 더 기도하고 조금 더 땀을 흘리는 것이 낫습니다. 고린도후서 7장 10절 말씀을
보면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근심은 삶을 파괴하는 쓰레기와 같습니다. 쓰레기를 버러지 않고 남겨두면 온 집안에
악취가 진동하고 건강도 나빠지듯이 마음속에 근심과 두려움을 품고 있으면 그 쓰레기로 마음과 육체까지 병들게 됩니다.
잠언 17장
22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 뼈는 피를 만드는 곳입니다. 그런데 근심은
바이러스와 같아서 뼈를 마르게 해서 병들게 합니다. 실제로 의사 선생님들의 말에 의하면 질병의 70%이상이 근심과 불안과 공포 때문에 생긴다고
합니다.
베드로전서 5장 7절에서는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고 했습니다. 이 시간에 기도하십시오. “주님! 나의
근심과 무거운 짐을 주님 손에 맡깁니다. 이 시간 말씀 듣고 기도하고 찬양하는 중에 평안을 주시고 이제 더 이상 항상 제가 고민하고 근심하는 그
문제로 인해 더 이상 근심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게 하소서!”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면 마음속에 놀라운 평안이 주어질 것입니다.
< 선한 근심은 필요합니다 >
그처럼 나쁜 근심은 버려야 하지만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가진 것과 같은
선한 근심은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왜 근심했습니까? 본문 3절 말씀을 보십시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사도 바울은 동족을 사랑해서 동족에 대한 깊은 근심을 가지다가 동족을 위한 일이라면 자신이 저주
받아도 좋다는 마음까지 가졌습니다.
모세도 자기 민족이 죄를 짓자 가슴아파하며 말했습니다. “하나님! 우리 민족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저의 이름을 하나님의 생명책에서 제하셔도 좋습니다.” 예레미야도 자기 백성을 위해 눈물 흘리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근심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내 눈이 어찌하여 눈물 근원이 될꼬 하고.” 그렇게 울며 예레미야는 예루살렘
거리를 헤맸습니다.
미국에 찰스 피니라는 유명한 전도자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가 시카고의 거리에서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갑자기 거리에서 펑펑 울기 시작했습니다. 같이 가던 사람이 물었습니다. “목사님, 왜 우셔요?” 피니가 대답했습니다.
“보세요! 저렇게 영생을 모르고 지옥으로 가는 무리를 보십시오.” 그러면서 거리에서 가슴을 쥐어뜯고 통곡했습니다. 그런 사람이 우리 중에도 많이
일어나야 합니다.
영혼을 위해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것이 큰 축복이고 특권입니다. 마태복음 9장에 보면 주님은 방황하는 무리를
민망히 여기셨습니다. 그런 주님의 근심과 눈물을 가지고 내 주변의 죽어가는 영혼들을 위해 눈물로 씨를 뿌려야 합니다. 주님은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도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우리 한국 교회에는 눈물로 씨를 뿌릴 구령의 열정을 가진 일꾼이 필요합니다.
한 통계에
의하면 95%의 교인들은 영혼을 한 사람도 교회로 인도하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 말은 아직도 교인의 90% 이상이 일꾼이 아닌
구경꾼이란 말입니다. 왜 성도들이 전도를 안 합니까? 어떤 성도들은 말합니다. “저는 전도할 줄 몰라요. 전도는 제 은사가 아니에요.” 그러나
전도는 방법이나 기술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만 있으면 얼마든지 전도할 수 있습니다.
헬렌 켈러는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말할 수 없었던 삼중고의 소녀였습니다. 그런 소녀를 어떻게 교육합니까? 아무도 교사로
자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설리반은 교사로 자원하며 말했습니다. “그녀를 교육하는 단 한가지의 교육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터치입니다.”
그 사랑의 터치로 설리반은 헬렌 켈러를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기적의 여인으로 키워냈습니다. 한 영혼의 가치와 가능성이 얼마나 큰지 결코 잊지
마십시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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