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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출처 : | 월간 <기독교사상>2015.10월호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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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개신교에서 왜 ‘수도원’인가?
본문
언제부터인가 한국 기독교, 개신교에 ‘수도원’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이전 같으면 ‘기도원’이나 ‘수양관’이라고 불러야 마땅한 시설에도 ‘수도원’이라는 이름을 붙이기 시작했고, 여기저기서 수도원에 대한 긍정적인 논의와, ‘수도’를 내세운 작은 모임들을 쉬 찾아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와 더불어 ‘관상기도’ 같은 용어가 그 뜻을 충분히 새겨볼 겨를도 없이 유행하고, ‘영성’이라는 용어는 그 용례가 옳은지 아닌지를 따져볼 겨를도 없이 범람했습니다. 이런 용어의 유행은 ‘수도원’의 유행과 맞물려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현실을 보면서, ‘영성’이라는 용어가 성찰 없이 사용되듯이, ‘수도원’이라는 단어도 무비판적으로 쓰이지 않는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됩니다.
수년 사이에 신학자들과 목회자들 사이에서 ‘영성’이라는 말은 일반형용사의 하나처럼 되어서, 기도의 영성, 말씀의 영성, 수도원의 영성, 노동의 영성, 실천의 영성, 생활의 영성, 몸의 영성 등으로 어디에나 붙여 쓰게 되었습니다. 단어에 의미와 용례가 한정되지 않는다는 것은, 그 단어가 무의미하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없어도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수도원’ 역시 어디까지가 수도원이고, 왜 수도원이어야 하는지, 왜 이 시기에 ‘개신교’가 수도원을 말해야 하는지에 대한 성찰과 토론이 부족해 보입니다. 개신교는 구교(카톨릭)와 대비되는 용어로, 종교개혁의 후예들을 가리킵니다.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이 목전에 다가왔습니다만, 루터를 포함한 종교개혁자들은 대체로 수도원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이었습니다. 개혁자들이 비판적이었음에도 오늘날 우리가 ‘수도원’을 선호한다면, 그 분명한 이유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종교개혁의 ‘일방주의’에 대한 비판적 성찰 때문인지, 아니면 개혁자들의 수도원 비판의 참뜻을 해석한 결과인지, 전통을 따지는 것보다 더 절실한 현실의 이유가 따로 있는 것인지 물어야 할 것입니다.
짐작하는 바가 없지는 않습니다. 외형은 폭발적으로 커졌는데, 내실은 다지지 못한 한국 개신교의 가슴 아픈 현실이 주요 이유였을 것입니다. 사실 어떤 용어든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맥락이 있게 마련입니다. 영성(spirituality)이라는 용어가 널리 쓰이게 된 것은 기독교의 제도화, 세속화, 물질화에 대한 반작용이라는 측면이 있습니다. 수도원과 수도에 대한 관심이 커진 것도 그 반대의 현실, 극복하고픈 현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도 수도원은 교회와 신앙의 세속화, 권력화에 대한 반작용으로 생겨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오늘날 한국 개신교 일각에서 왜 수도원을 선호하는가에 대한 충분한 대답이 될 수는 없습니다.
대부분의 종교는 속세에서 물러난 수도자와 속세에 있는 신자의 이중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종교개혁은 이 구분을 허물었습니다. 삶의 모든 일이 신앙의 일이 되었습니다. 수도는 ‘천상의 세계’인 수도원 안이나 외딴 광야가 아니라, 세속 일상 한가운데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꼭 종교개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빈들의 소리’였습니다. 광야에서 험한 옷과 음식으로 금욕하면서 회개를 외쳤습니다. 유대교의 경건한 집단 에세네도 광야로 나가 수도원처럼 폐쇄적인 공동체를 꾸렸습니다.
이에 반해 예수께서는 마을과 도시를 다니며, 이른바 속세에서 사람들과 어울려 먹고 마셨습니다. 이것이 예수와 세례자 요한이 다른 점입니다. 물론 예수께서도 먼동이 트기 전 홀로 외딴 곳으로 나가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찾아온 제자들에게 마을로 가자고 하십니다.(막 1:35-39) 그는 시종일관 마을과 도시에서 활동했으며, 도시에서 붙잡혀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이런 예수에게서 수도원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기독교에도 자신을 깊이 성찰하고 정진하는 ‘수도’는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수도’가 그 핵심이 될 수는 없습니다. 불교처럼 속세를 멀리하고 암자나 사찰에서 일일일식, 묵언 등으로 금욕하며 정진에만 몰두하는 수도승들이 개신교에도 필요하다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그래야 기독교가 정화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수도원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정말 신앙의 훈련이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 수도원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대안은 아닐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생각한다면, 개혁신앙에 입각한다면, 세속에서 물러나는 것은 돌아오기 위함이어야 합니다. 한국개신교회의 현실을 보면서, 수도와 수도원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전통을 재해석할 수 있습니다. 전통을 파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유가 분명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수도원이 왜 우리에게 필요한지를 찬찬히 따져 물어야 합니다. 또한 수도원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생겨났는지, 기독교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는 데 긍정적이었는지 부정적이었는지, 수도원과 수도를 지향할 때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경계해야 하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종교개혁의 후예로서 우리는 수도원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한국의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수도와 수도원이 한국의 신앙정서와 어떻게 부합하는지 진지하게 묻고 토론해야 할 것입니다.
영성의 유행, 수도원의 유행, 열린예배 등의 유행을 보면서, 한국 기독교가 가장 경계해야 할 일은 무비판적 수용이 아닐까 싶습니다. 바울의 말처럼, 우리에게 모든 것이 허용되지만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며, 모든 것이 허용되지만 모든 것이 다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고전 10:23)
월간 <기독교사상>2015.10월 권두언 서진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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