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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출처 : | 월간<기독교사상>2015.10월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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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의 형성과 역사
본문
들어가는 말
마가의 다락방에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으로 시작된 기독교는 예루살렘에서부터 팔레스타인을 거쳐 3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로마제국 전역에 퍼져나갔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유대교의 시기와 방해, 로마제국의 탄압, 이단의 난립이라는 삼중고를 겪었지만 신앙의 열정과 공동체 의식을 바탕으로 어려움을 극복하고 굳건하게 뿌리를 내렸다.
313년 밀라노 칙령의 선포로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승인하고 이후 전권을 잡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막대한 지원을 받게 된 기독교는 급속하게 늘어나는 교인수와 함께 서서히 부와 권력을 지니게 되었다. 교리논쟁이 일어나고 예배는 형식화되어갔으며 교인들의 신앙 또한 해이해지면서 세속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러자 모진 박해를 받으면서도 신앙의 순수함과 뜨거움을 지켜왔던 교인들은 새로운 신앙의 돌파구를 찾게 되었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박해를 받는 상황에서 이상적으로 여겼던 순교신앙을 더 이상 추구할 수 없게 되자 일상생활을 통해 자기절제와 수련을 모색하였고 자연스럽게 수덕신앙이 나타나게 됐다. 수덕적 삶은 일상적 순교(daily martyrdom) 또는 영적 순교(spiritual martyrdom)라고 불리며 초대 기독교인들의 신앙적 이상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수덕주의(修德主義, asceticism)는 그리스어 ‘askesis’에서 유래했는데 이 말은 고대 운동선수들의 ‘훈련, 연습, 실천’을 일컫는 말로서 “극기 또는 자기부정의 실천을 통해 자신을 정화하고 덕을 쌓아 신에게 접근하고 궁극적으로 신과 합일을 이루려는 노력”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기독교인의 삶은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순례라고 할 수 있다. 이 순례는 여러 단계로 이루어지는데 실천(praxis)으로부터 정관(靜觀 또는 觀想, ‘theoria’) 또는 수덕적 삶으로부터 신비적 삶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정화(purification)에서 계몽(illumination)을 거쳐 합일(unification)로 이르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정화, 계몽, 합일의 단계는 신플라톤주의의 가르침과도 맥을 같이 하며 후대에는 수도원 생활의 주요 요소가 된다. 수덕주의는 수도원주의의 전 단계로서 수도원주의는 수덕주의의 제도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수도원주의의 시작과 성장
수도원주의(monasticism)라는 말은 그리스어 ‘monasterion’에서 유래했는데 고대에 독거하며 수도생활을 하는 은자의 거처나 수도자들의 공동생활 주거지를 일컫는 말이었다. 그리스어 ‘monos’는 ‘홀로’(alone)라는 뜻이며 ‘monachos’는 ‘독거자’(solitary one)를 의미한다. 기독교 이전에 쿰란의 에세네파나 이집트의 데라퓨테파(Therapeutae)가 공동생활을 했지만 기독교 수도자들의 공동생활과 역사적으로 직접적인 연관성은 없다. 마찬가지로 그레코 로마 시대에 사라피스(Sarapis) 사원에 종교적 은둔자들이 있었으나 이 또한 기독교와 관련되지는 않는다. 기독교 수도원주의의 초기 발전에 유대교나 그레코 로마 철학이나 동방종교가 영향을 끼친 흔적은 있으나 그것들은 당시 일반적인 수덕주의의 경향의 일환으로서 모두가 공유하는 것들이었다.
기독교 수도생활의 기원은 그리스도 재림의 지연으로 인한 종말론적 신앙의 약화에 대한 대응, 로마제국의 기독교 승인과 지원으로 초래된 교회의 급성장과 세속화에 대한 반발에서 찾을 수 있다. 기독교인들의 이상이 순교에서 수도생활로 대체되면서 기독교인들의 이상적 모델은 순교자에서 수도자로 바뀌었다. 수도자들은 자신들을 세상의 욕망과 삶으로부터 분리시키면서 초대 기독교인들이 꿈꾸었던 종말론적인 성자들의 공동체 대신에 세상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는 천상의 공동체를 형성해 나갔다. 이 새로운 성자들은 신자들의 추앙을 받으면서 영적 능력과 가르침으로 권위를 지니고 교회와 신자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3세기 말부터 4세기에 걸쳐 동방의 이집트, 팔레스타인, 시리아 등지에 전형적인 수도원 형태가 나타나는데 세상과 격리되어 홀로 생활을 하는 독거 수도원(獨居, eremitic monasticism)과 수도자들이 공동체를 이루어 규범에 따라 수도생활을 하는 공주 수도원(共住, cenobitic monasticism)이다. 또한 이 두 형태를 절충한 반(半)공주 수도원(semieremitic monasticism)은 공동체 안에서 각자 독자적인 거처를 세우고 개별적으로 수도생활을 하였다.
독거 수도원주의의 대표자는 이집트의 안토니(Anthony, 약 251-356년)라고 할 수 있다. 그는 20세에 부모를 여인 후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고자 하거든 가서 네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 19:21)는 성경말씀을 듣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마을 외곽에서 수도생활을 하다가 황야로 나아가 20년 동안 악령과 투쟁하며 수도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이 은둔처로 찾아와 그를 따라 수도생활을 하며 가르침을 청하였다. 안토니는 결국 수도자들의 영적 스승이 되었고 그의 수도생활은 독거 수도원주의의 모델이 되었다. 안토니의 삶은 알렉산드리아의 교부인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약 296-373년)에 의해 『안토니의 생애』(Life of Antony)로 저술되어 이 책을 읽은 많은 사람들이 감명을 받고 수도생활의 길로 들어서기도 했다. 이집트뿐만 아니라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에도 안토니 같은 수도자들이 있었다. 그 지도자들은 황야교부들(desert fathers)이라고 불리며 또한 데오도라(Theodora), 신클레티카(Syncletica)와 같은 황야교모들(desert mothers)도 있었다. 신클레티카의 가르침 중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가장 쓴 약이 독 있는 짐승들을 쫓아내듯이 금식하면서 드리는 기도는 악한 생각들을 쫓아낸다
보물이 드러나면 그 가치를 잃는 것처럼 미덕은 알려지면 사라지게 된다. 초가 불 가까이 있으면 녹듯이 영혼은 칭찬에 의해서 파멸되며 모든 수고한 결과를 잃게 된다.
암문(Ammun, ?-약 350년)은 나일 삼각주 지역의 니트리아(Nitria) 산 근처에 반공주 수도원을 세웠다. 고아 출신인 그는 22세에 친척에 의해 강제로 결혼했으나 18년 동안 아내와 함께 살면서 독신생활을 했으며 그 후 황야로 나아가 수도생활을 하였다. 암문의 삶을 본받으려는 사람들이 그의 주위에 몰려들었고 자연스럽게 수도자들의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또한 마카리우스(Macarius, 약 300-약 390년)도 나일 삼각주 지역의 황야에서 수도생활을 하면서 그를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공동체를 이루었고 암문이 세운 수도원과 함께 곱트 수도원(Coptic monastery)의 모체가 되었다. 이들 황야교부들의 곱트어 가르침은 그리스어로 번역되어 『교부들의 가르침』(Apophthegmata patrum, Teachings of the Fathers)이라는 이름으로 후대에 전해졌다. 이 모음집은 당시 이집트 수도자들의 가르침과 삶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같은 이집트 출신인 파코미우스(Pachomius, 약 292-346년)는 공통된 규범에 따라 함께 일하고 함께 예배드리는 공주 수도원을 세웠는데 이 명칭은 공동생활(‘koinos bios’, common life)이라는 말에서 생겼다. 파코미우스 말년에는 9개의 남자 수도원과 2개의 여자 수도원(수녀원)으로 늘어났으며 그의 통솔을 따르는 수도사는 3천 명에 이르렀다. 공주 수도원은 후대에 가장 일반적인 수도원 형태로 자리 잡게 되었다. 소아시아에서는 바실리우스(Basil of Caesarea, 330-379년)가 수도원을 세웠는데 그는 수도사의 역할이 영적이며 동시에 사회적이어야 함을 강조하며 사람들이 사는 마을 안에 수도원(urban monastery)을 설립했다. 그가 저술한 수도원 규범(‘Rule of St. Basil’)은 동방 수도원 규범의 모범이 되었으며 후대에 서방의 베네딕트가 규범을 만들 때 영향을 끼쳤다.
서방 최초의 수도사로 불리는 마르티누스(Martin of Tours, 약 316-397년)는 몇 년간 은둔생활을 하면서 자신을 단련한 후 고울(Goul) 지방의 리귀제(Ligege)에서 본격적인 수도생활을 시작했는데 그의 주위로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자연스럽게 수도원이 시작되었다. 그는 투르의 감독으로 선출된 후에도 수도생활을 계속하며 성직자의 직무를 수행했다. 그가 죽은 후 전기(‘Life of Martin’)가 쓰였는데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어 수도사의 길로 들어서게 했다. 로마의 히에로니무스(Jerome, 342-420년)는 안디옥 부근의 황야에서 수도생활을 체험한 후 로마로 돌아와서 본격적으로 수도원주의를 전파하기 시작했다. 그는 특히 로마제국 상류층 여성들의 성경공부를 지도했는데 그중 한 사람인 파울라(Paula)는 히에로니무스를 따라 시리아와 이집트 등지를 순례하였고 베들레헴에 수도원을 세웠으며, 또 다른 제자인 노(老) 멜라니아(Melania the Elder)는 예루살렘 근처에 수녀원을 설립했다. 카시아누스(John Cassian, 약 365-433년)도 일찍이 이집트 수도사들에게서 감명을 받고 고울 지방에 2개의 수도원을 세웠다. 수도원 운동은 영국으로 건너가 켈트 지역으로 확산되었으며 6세기에는 영국 전역과 특히 아일랜드 지방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몬테 카시노(Monte Cassino) 수도원을 설립한 베네딕트(Benedict of Nursia, 480-540년)는 후대에 베네딕트 규범(‘Rule of St. Benedict’)이라고 알려진 수도생활의 규범을 저술하여 후대 서방 수도원 규범의 기초가 되었다. 베네딕트 수도원은 서방세계 전역으로 퍼져나가서 수도원 운동의 한 축을 형성하였다. 북아프리카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 of Hippo, 354-430년)도 수도원을 세우고 규범을 썼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의 수도사였다.
수도원주의의 발전과 개혁
그레고리우스(Gregory of Rome, 약 540-604년)는 590년 로마의 감독으로 취임한 후 북쪽으로 선교사들을 보내 유럽 전역에 기독교가 전파되는 초석을 놓았으며 중세의 문을 열었다. 10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고울, 아일랜드, 이탈리아, 스페인을 비롯하여 앵글로 색슨족, 게르만족이 기독교로 개종하였고 마지막으로 스칸디나비아까지 기독교 복음을 받아들였다. 중세에 로마가톨릭교회의 세력과 교황의 권위는 절정에 이르렀으며 수도원 운동은 전성기를 맞았다. 중세 유럽의 수도원 운동은 대체로 베네딕트 수도원의 공주수도원 형태를 따라 이루어졌다. 한편 6세기 말부터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잉글랜드에는 켈트 수도원주의(Celtic monasticism)가 나타났다. 아일랜드 출신 선교사인 콜룸바누스(Columban, 약 543-615년)는 유럽 전역을 순회하며 켈트 수도원을 세웠는데 이 수도원들은 후대에 베네딕트 규범을 기준으로 채택했다. 8세기에서 13세기에 이르기까지 수도원의 영향은 사회, 문화적으로 중세 유럽 사회와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베네딕트의 시대라고 불릴 정도였다.
그러나 기존의 수도원 제도와 생활에 대한 실망과 비판이 일어나며 개혁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는데 909년 프랑스에서는 클루니(Cluny) 수도원이 설립되었고 후일 수도회로 발전하여 엄격한 수도생활과 수도원의 자주성을 강조하면서 교회개혁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11세기에는 카말돌리(Camaldolese) 수도회와 카투시안(Carthusian) 수도회가 설립되어 엄격한 독신 수도생활과 관상생활(觀想, contemplative life)을 강조했다. 1098년에는 시토(Citeaux) 수도원이 설립되어 시토 수도회(Cistersian Order)의 모태가 되었으며 베네딕트 규범을 더욱 철저하게 준수할 것을 주장했다.
12세기에 새로운 수도회가 등장했는데 프란체스코 수도회와 도미니크 수도회이다. 이탈리아 출신인 프란체스코(Francis of Assisi, 약 1182-1226년)는 세속적 삶을 버리고 청빈과 설교의 사도적 삶을 선택했다. 그는 1209년 ‘작은 형제회’(Friars Minor 또는 Lesser Brothers)를 창설하고 성경말씀(마 19:21, 눅 9:3)대로 무소유 청빈생활로 오직 노동과 자선금만으로 생활을 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사랑과 평화를 펼치는 탁발수도회(托鉢, mendicant order 또는 걸식수사단)로 출발했다. 프란체스코는 이어 클라라와 함께 1212년 ‘가난한 클라라회’(Poor Clares, 클라라관상수녀회)라는 제2수도회를 설립했으며, 1221년에는 신도들로 이루어진 제3수도회(在俗兄弟會)를 조직했다. 프란체스코 수도회는 보나벤투라(Bonaventure), 존 둔스 스코투스(John Duns Scotus) 등을 배출했다. 도미니크(Dominic, 1170-1221년)는 스페인 출신으로 당시 프랑스 남부에서 성행하던 이단종파인 카타르파(Cathars)를 상대로 선교활동을 하던 중 설교와 청빈한 삶의 중요함을 깨닫고 1216년 탁발수도회를 설립했다. 도미니크 수도회는 특히 설교와 학문 연구를 중시하여 소속 수도사들은 파리대학을 비롯한 유럽의 여러 명문대학에서 수학했으며 알베르투스(Albert the Great), 스콜라주의의 대가인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신비주의자인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등을 배출했다. 도미니크 수도회는 이단자들을 개종시키기 위해 종교재판에도 깊이 관여했으나 폭력과 고문을 사용하고 마녀사냥을 하는 과오를 범하기도 했다.
수도원 생활
초기 수도생활은 현 세상과 분리되어 다가올 세상을 맞아들이기 위한 준비로 시작되었다. 기도와 영적 실천과 자선에 치중하는 경건한 생활은 고기와 술을 멀리하고 화려한 옷과 치장을 삼갔고 시간이 흐르면서 성 관계와 혼인을 금하게 되었다. 수도자들은 자신의 집이나 마을 외곽의 거처에서 수도생활을 하였으며 이들의 금욕적 실천은 날이 갈수록 더욱 강화되었다. 수도원 제도가 정착되면서 수도사는 청빈(poverty), 정결(독신, chastity), 순명(obedience)의 서약을 하고 수도원장의 지도와 통솔 아래 성무일과(Divine Office)에 따라 예배, 기도, 성경낭송, 노동으로 이루어지는 규칙적이고 수덕적인 생활을 했다. 서방 수도원에서 하루 일과는 대체로 새벽 2시부터 시작해서 해진 후인 6시 30분경까지 이루어졌는데, 여덟 번의 일과기도(8 canonical hours, 八定時課: matins, 朝課; laud, 讚課; prime, 一時課; tierce, 三時課; sext, 六時課; nones, 九時課; vespers, 晩課; compline, 終課)가 있었다. 음식은 기본적으로 달걀, 생선, 치즈, 콩, 우유, 꿀이 제공되었으며 베네딕트 규범이 지켜지는 곳에서는 그의 지시에 따라 고기가 금지되었으나 철저하게 지켜지지는 않았다. 수도사들은 하루 종일 말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으며 필요한 경우 침묵을 깨지 않기 위해서 표정이나 손짓으로 의사소통을 하였다. 예를 들면, 빵을 표시할 경우 양손의 엄지와 다른 손가락으로 둥근 원을 나타내었다. “게으름은 영혼의 적이다”라는 베네딕트의 가르침대로 수도사들은 성무일과 외에 각자 맡은 작업과 노동에도 온 힘을 기울였다.
수도원은 교육과 학문의 장이기도 하였다. 수도사들은 성경뿐만 아니라 고대문헌과 교부들의 저술을 읽고 번역하고 필사본을 만들었는데 이런 작업은 유럽 문화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수도원은 경제적으로 자급자족의 공동체였다. 수도사들은 각기 임무를 나누어 생활에 필요한 모든 일들, 예를 들면 원예, 양봉, 낙농, 약초재배 뿐만 아니라 음악, 미술, 건축, 의술 등 모든 분야의 기술과 지식을 습득하고 생활에서 펼쳐나갔다. 수도원은 또한 선교기지이기도 하였다. 동방의 수도사들이 인적이 드문 황야에서 홀로 수도생활을 한 반면에 서방의 수도사들, 특히 로마의 그레고리우스 감독이 유럽의 복음화를 위해 파송한 수도사들이나 유럽 곳곳을 순례하며 수도생활을 전파하고 수도원을 세운 켈트 수도사들은 선교사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수도사들은 수도원 밖 세상으로 나아가 가난한 사람들과 병자들을 도우며 봉사와 구제활동을 하였고 상담자로서 신앙이나 생활의 문제를 같이 의논하고 조언을 하며 신앙의 길을 인도하였다.
수도원 운동에는 여성도 참여하였다. 특히 왕족이나 귀족 여성들은 수도원을 지원하거나 스스로 수녀원을 세우고 수녀원장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여성에 대한 편견과 혐오는 수녀도 여성으로서 욕망을 억제하지 못하고 유혹에 약하다는 여론을 조성해 수녀들을 세속으로부터 격리시켜 수녀원 안에 유폐하는 법령을 만들어 시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억압에도 불구하고 수녀들의 수는 갈수록 증가했다. 수녀원은 남성이 지배하는 가정이나 사회와 달리 여성의 주체적이고 자율적 공동체였다. 수녀들은 수도생활뿐만 아니라 수녀원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모든 일을 각자 나누어 담당했으며 특히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여성 수도자들 중에서 아시시의 클라라(Clare of Assisi), 빙엔의 힐데가르트(Hildegard of Bingen), 노르위치의 줄리안(Julian of Norwich), 시에나의 카탈리나(Catherine of Siena), 아빌라의 테레사(Teresa of Avila) 등 지도자, 학자, 저자, 예술가, 신비주의자, 예언자가 배출되었으며 이들은 여성 특유의 심성과 재능으로 학문과 문화의 꽃을 피웠다. 종교개혁자들이 수도원 개혁과 폐쇄를 강행했을 때 남자 수도원은 별 문제 없이 지시에 따랐지만 수녀원은 경우가 달랐다. 수녀원 중 일부는 종교개혁에 맞추어 개신교 수녀원으로 전환하기도 했고, 또는 규모를 줄이고 어린이 학교를 개설하거나 봉사단체를 설립하여 돌파구를 찾기도 했으며, 일부 수녀원은 강렬하게 저항하여 가톨릭 수녀원으로 남기도 했다.
나가는 말
기독교인의 여러 가지 방식의 삶의 길 중 하나인 수도원주의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치면서 이를 통해 구원을 얻으려는 신앙에서 시작되었다. 수도사는 또 다른 형태의 순교자로 여겨졌고 수도생활은 매일매일의 일상생활에서 겪는 순교였다. 수도사들은 세상에 속해 있지만 세속적 질서와 욕망으로부터 벗어나 천상의 세계에서 사는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이상을 제시하였다. 그들은 성자로서 추앙을 받았고 거룩한 능력과 신성한 권위를 인정받았다. 그러나 중세 수도원 중심의 기독교는 세상에 대해서 부정적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신앙생활이란 가능하면 세상과 분리되어서 영적 생활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이해되었고 세속적 삶이나 직업은 하찮고 열등한 것으로 여겨졌다. 소명(‘vocatio’, calling)이라는 말을 수도원이나 교회의 직분을 갖는 것으로 이해했고 사회적 제도나 신분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으로 변하지 않고 바꿀 수 없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수도원이 교회정치에 관여하거나 세속권력과 결탁하기도 했으며 이단이 발생하기도 했는데 4세기에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메살리안파(Messalians)가 성례전을 통한 은총을 부인하고 오직 기도를 통해서 성령에 사로잡힐 때 영적 능력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여 물의를 일으켰고,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영지주의와 마니교의 영향을 받은 프리스킬리안파(Priscillianists)가 나타났다가 이단으로 정죄 받기도 했다. 중세는 특히 교황과 성직자들의 권력이 최고조에 달하던 때였지만 이와 함께 부패와 타락이 만연했던 시기였다. 성직의 매관매직과 성직자들의 축재, 축첩이 성행했다. 성직자들의 설교는 많은 부분이 하나님의 심판, 마귀, 죽음, 지옥에 대한 내용으로 이루어졌고 계속되는 흉년과 특히 흑사병으로 교인들의 불안과 공포는 가중되고 미신이 성행했다. 중세 교인들은 성자의 유골이나 유품을 숭상하여 그것들을 통해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병을 치료받을 수 있다고 믿고 그것들을 수집했으며, 예수의 죽음을 슬퍼하며 흘렸다는 성모 마리아의 눈물이 병에 담겨 널리 팔리기도 했다.
중세 후기 유럽에서는 십자군전쟁을 겪은 후 봉건제도가 붕괴되고 왕권이 강화되었다. 전성기를 누렸던 교황권은 아비뇽 유수를 겪은 후 쇠퇴하기 시작했고 르네상스의 영향을 받은 인문주의자들은 교회의 권위와 가르침에 도전하였으며 도시가 형성되고 중산층이 등장하여 기존의 왕족과 귀족, 성직자로 이루어진 권력층에 도전하였고 결국 1517년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되었다. 종교개혁자들은 로마가톨릭교회의 사면권과 면죄부 판매가 부당함을 지적하며 오직 성서에 근거한 교리를 주장했다. 종교개혁자들은 수도원의 부패와 타락상을 잘 알고 있었으며, 수도원주의를 근본적으로 인간의 의지와 노력으로 구원을 성취하려는 펠라기우스주의와 같은 맥락에 있다고 여겼다. 종교개혁에 동조하는 영주와 시의회는 수도원을 폐쇄했고 이에 따라 오랜 전통을 이어오던 많은 수도원들이 문을 닫았고 수도사들은 살아남은 다른 수도원으로 이주하든지 세속생활로 돌아가야만 했다. 수도원은 이후 프랑스 혁명으로 다시 한 번 쇠퇴의 길을 걸어야 했고 근대 산업화와 세속화의 거센 물결은 더욱더 수도원주의의 지속을 어렵게 했다.
정용석 | 교수는 한국신학대학과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유니온 신학대학원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론으로 석사학위, 오리게네스의 영성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기독교 사상사』 『기독교 영성의 역사』 등이 있고 그외 다수의 논문이 있다. 현재 이화여대 기독교학부 교회사 교수로 기독교 역사, 사상사, 영성사를 가르치고 있으며 기독교 여성사를 집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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