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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창2: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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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부겸 목사 |
참고 : | http://blog.naver.com/malsoom/111848886 |
2010년 8월 22일 주일설교
성경말씀 : 창세기 2장 19절
설교제목 : “사랑은 이름을 낳고”
【주 하나님이 들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를 흙으로 빚어서 만드시고, 그 사람에게로 이끌고 오셔서, 그 사람이 그것들을 무엇이라고 하는지를 보셨다. 그 사람이 살아 있는 동물 하나하나를 이르는 것이, 그대로 동물들의 이름이 되었다. (창세 2:19)】
<책 이야기>
최근 『지금 이대로 완전하다』(김기태 지음, 침묵의 향기)라는 책을 재미 있게 잘 읽었습니다. 저자 김기태 씨는 철학과를 졸업한 후, 대관령 목장 목부, 수도원 수사, 배타는 선원, 고등학교 윤리교사, 신문사 직원, 막노동 일꾼 등을 전전하면서 지낸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해 공사판 막일을 할 때였습니다. 그날도 오전 일을 열심히 한 후,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근처의 시골 길들을 산책할 무렵이었는데, 그의 눈에 파밭이 들어왔습니다. 조그만 텃밭에 파들이 자라고 있었는데, 문득 그의 머리 가운데 섬광처럼 “저것들은 파가 아니다”는 생각이 폭발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랬다. 그것은 파가 아니었다. 참으로 희한하게도, 바로 그 순간, 내가 무심히 바라보고 있던 그 파에서 ‘파’라는 이름이 딱 떨어져 나갔다. 파라는 대상과 ‘파’라는 이름은 아무런 연관이 없었던 것이다.
‘파’라는 이름은 단지 우리가 붙인 이름일 뿐, 내 눈 앞에 보이는 그것은 파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하나의 대상에서 하나의 이름이 떨어져 나가니, 바로 그 순간, 내 눈 앞에 펼쳐진 모든 대상들에서 모든 이름들이 한꺼번에 다 떨어져 나가 버렸다. 오, 이럴 수가! “그렇구나!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본래 이름이 없구나! 모든 것이 본래 이름이 없는, 그냥 ‘그것’일 뿐이구나…….” 나는 그 순간의 전율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는 이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듯 본래 이름 없는 이 세계와 만물은 온통 기적과 신비 덩어리이건만, 언제나 이름을 통해서만 그 모든 것들을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우리는 그렇기에,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눈부신 기적과 신비들 속에서도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고 누리지 못한 채 그저 메마른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구나!】
김기태 씨의 이 기록들이 제 마음에 남습니다. 정말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할 너무나도 중요한 이야기를 그가 해주고 있었습니다. 오늘 그 이야기를 잘 새겨볼까 합니다.
<성경 이야기>
이제 성경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주 하나님이 들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를 흙으로 빚어서 만드시고, 그 사람에게로 이끌고 오셔서, 그 사람이 그것들을 무엇이라고 하는지를 보셨다. 그 사람이 살아 있는 동물 하나하나를 이르는 것이, 그대로 동물들의 이름이 되었다. (창세 2:19)】
하느님에 의해 창조된 최초의 인간, ‘아담’이 지구마을에서 처음으로 한 일은 인연이 닿는 모든 자연물에 대해서 이름을 지어준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 창조 이야기를 단순히 동화 속의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읽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부 창조과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객관적인 사실’로도 읽지 않습니다. 저는 이 창조 이야기를 인간존재의 근원적 영성 이야기로 읽습니다.
여기 한 인간이 탄생했습니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어나는 1차 ‘육체적 탄생’, 그리고 성년의 나이에 이르러서 나름대로 생각할 줄 아는 존재로의 2차 ‘정신적 탄생’ … 인간은 그런 두 번의 탄생을 거쳐야만 제대로 된 인간으로 출발을 할 수 있습니다. 그 두 번의 탄생을 통해서 우리는 비로소 ‘아담’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아주 중요한 초점이 있는데, 그것은 ‘육체적 탄생’과 ‘정신적 탄생’에 이어서 ‘영성적 탄생’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비로소 하느님을 닮은 신비한 형상의 존재로 성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김기태 선생의 이야기나, 아담의 이름 짓기 이야기는 모두 ‘영성적 탄생’을 지칭하고 있는 ‘다르면서도 같은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시 이야기>
이야기를 하다보니, 김춘수 시인께서 쓰신 불멸의 시 <꽃>이 생각납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김춘수 선생이 말씀하신 <꽃>의 이야기는 창세기의 아담에게서 보여지는 자연물 이름 짓기와 같은 맥락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우주 만물의 이름을 지어주는 ‘영성적 관계’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김기태 선생이 말씀하신 것과 같은 ‘우주 만물 이름들의 해체’를 전제로 해야 합니다. 즉 과거에 있어왔던 이름들이 해체된 후, 오직 우리 자신만이 지을 수 있는 ‘하늘의 이름들’을 지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창세기 말씀의 결론적 메시지입니다.
<말씀의 적용>
그런데 이름 이름짓기의 영성은 단순히 동식물, 자연물, 우주만물에 대한 차원에만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보기에 더 중요한 맥락은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름짓기의 맥락이 더 중요한 초점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홀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제 주변만해도 많은 사람들이 포진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아니 어떤 의미여야 할까요? 그게 김춘수 선생의 시 <꽃>이 묻는 말이고, 김기태 선생의 독특한 체험이 묻는 질문이고, 창세기 아담 이야기가 일깨워주는 메시지입니다.
제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외형상의 이름들일 뿐, 내면적인 이름들은 아닙니다. 제가 제 주변의 사람들을 가슴에 품고 한 사람, 한 사람, 또 한 사람, 또 한 사람 … 새로운 생명으로 낳을 때, 비로소 그들이 제 가슴 속의 사람으로 탄생하는 것입니다. 즉 그 외형적인 이름들을 걷어내고, 제 마음 속의 깊은 사랑으로 잉태해서 새롭게 ‘영성적 관계’를 맺게 될 때, 그들은 전해 새롭고 아름다운 이름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인 이야기>
그러므로 저 파 밭의 파는 파가 아닙니다. 그럼 무엇일까요? 그건 각자가 그 파를 얼마만큼 깊이 품고 오랫동안 사랑했는가에 따라 달라지겠지요. 우리 가족을 사례로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우리 식구 최주환은 최주환이 아닙니다. 우리 아이 김재영은 김재영이 아닙니다. 우리 아이 김재경은 김재경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일까요? 그것은 제가 우리 가족들을 얼마나 진실되게 품고 사랑했는가, 얼마나 근원적인 물음으로 그들을 품었는가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이제 설교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말씀의 제목을 “사랑은 이름을 낳고”라고 잡아보았습니다. 오늘 이 설교말씀의 제목을 깊이 묵상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잠깐 기도하겠습니다.
* 축도
이제는 진리의 길을 직접 보여주신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와, 우리의 생명과 영혼을 언제나 치유해 주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성령님의 아름다운 동행이 사랑하는 수도교회 교우들 머리 위에 언제나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김부겸 목사<수도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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