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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6:31-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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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부겸 목사 |
참고 : | http://blog.naver.com/malsoom/114988433 |
2010년 10월 17일 주일설교
성경말씀 : 마태복음 6장 31절~34절
설교제목 : 십자가의 길을 가려면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라. 이런 것들은 모두 이방인들이 찾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잘 알고 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 일은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겨라. 하루의 괴로움은 그 날에 겪는 것만으로 족하다."(마태 6:31~34)】
<서정주 시 이야기>
최근 『미당 서정주』(윤재웅, 태학사)를 읽었는데, 그 책은 서정주 선생의 시세계에 대해서 평론하는 책이었습니다. 그 책에서 아주 흥미로운 시 한 편을 발견했는데, 시의 제목을 ‘뻔디기’입니다.
【예수의 손 발에 못을 박고 박히우듯이
그렇게라도 산다면 오죽이나 좋으리오?
그렇지만 여기선 그 못도 그만 빼자는 것이야
그러고는 반창고나 쬐금씩 그 자리에 부치고
뻔디기 니야까나 끌어 달라는 것이야
「뻐억, 뻐억, 뻔디기, 한 봉지에 십원, 십원
비오는 날 뻔디기는 더욱이나 맛좋습네」
그것이나 겨우 끌어 달라는 것이야.
그것도 우리한테 뿐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초등학교 육학년짜리 손자놈한테까지 이어서
끌고 끌고 또 끌고 가 달라는 것이야,
우선적으로 열심히, 열심히, 제에길!】
이 작품은 서정주 선생의 시 작품들 중에서는 아주 이색적인 시입니다. 평소 선생은 ‘풍류’나 ‘자유’, ‘바람’과 ‘무(無)의 세계’를 노래하곤 했는데, 이 ‘뻔디기’라는 시는 그런 맥락과는 다른 ‘저항의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됐건 그래도, 저는 이 시를 읽으면서 좋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시는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잘못된 폐단을 아주 적절하게 지적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에 대한 평론>
‘뻔디기’ 시의 메시지는 간결합니다. 우리 시대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숭고하고 근엄하고 무거운 삶을 피하라”는 메시지를 계속 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는 일일랑 빨리 벗어던지고, 그냥 그 상처난 자리에 반창고나 대충 붙인 후, ‘뻔디기’나 팔러 다니라는 겁니다. 그런 가벼운 메시지를 이 시대가 우리에게 계속 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대대손손(代代孫孫) ‘뻔디기’나 팔 것이지, 바보 같이 십자가를 질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말라는 이야기를 우리 시대가 계속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요. 아주 정확한 지적입니다. 뼈아픈 고발입니다. 우리 시대의 메시지는 그런 류입니다. 지금 당장 TV를 켜 보십시오. 그 TV는 어떤 삶을 권면하고 있나요? 십자가의 삶이 아닙니다. 그 정반대입니다. ‘뻔디기’의 삶입니다. 무거운 삶이 아닙니다. 가볍게 살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엊그제 TV를 보니, 어떤 연예인의 행복한 삶이 소개되고 있었습니다. 평생 적당한 인기를 얻어왔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풍요롭게 살아왔고, 또 그다지 큰 병에 걸린 적이 없으니 이래 저래 집안은 편안했습니다. 그 연예인이 한적한 시골에 별장을 차려 놓고, 한 없이 편안하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현황을 TV는 생중계하고 있었습니다. 그 세계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가당치도 않는 일이었습니다. ‘뻔디기’가 좋죠. 그냥 잘 먹고, 잘 자고, 잘 쉬고, 잘 노는 ‘뻔디기의 삶’이 좋은 것입니다. 이게 우리 시대의 사제인 TV가 우리에게 권면하는 인생의 길입니다. 그 연예인에게 ‘시대의 아픔’이라든가, ‘인류의 고통’이라든가, ‘불행한 이웃들’에 대한 연민 따위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세상의 친구들을 만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친구들이 우리에게 권면하는 인생의 길은 어떤 것인가요? 좋은 대학을 나와서 취직을 잘 해서 돈도 잘 벌고, 좋은 배우자 만나서 아들 딸 낳고 잘 사는 길입니다. 월급도 많이 받아서 해외여행도 좀 다니고, 좋은 아파트에 살면서 골프도 좀 치는 삶입니다. 그게 세상 친구가 권면하는 인생길입니다. ‘십자가’는 가당치도 않지요. ‘뻔디기’가 좋습니다.
<성경 이야기>
그러나 예수께서 권면하신 길은 다릅니다. 이제 성경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라. 이런 것들은 모두 이방인들이 찾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잘 알고 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마태 6:31~33)】
예수님께서 권면하신 길은 ‘뻔디기의 길’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길’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길을 간다면, ‘뻔디기의 양식’은 곁들여서 채워질 것이라는 메시지입니다. 아! 우리 시대의 메시지와는 정반대의 것입니다. 이를 어찌해야할까요?
솔직히 말씀드려서, 예수님의 이런 권면은 너무 어렵습니다. 소화는커녕 목구멍에서 탁 걸립니다. 너무 딱딱해서 씹히지도 않습니다. 고백하건데, 저 역시 예수님의 이 말씀대로는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뻔디기의 삶’을 자주 살곤 합니다. 그런데 양심은 살아 있어서, ‘뻔디기의 삶’을 사는 중에 문득문득 ‘십자가의 길’이 눈 앞에 떠오릅니다. 그래서 괴롭지요. 아마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이 그렇게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예수님의 권면을 읽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찌해야할까요? 어떻게 해야 예수님께서 권면하신 ‘십자가의 길’을 걸을 수 있을까요?
<또 성경 이야기>
그에 대한 해답 역시 예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내일 일은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겨라. 하루의 괴로움은 그 날에 겪는 것만으로 족하다.”(마태 6:34)고 하셨습니다. 그래요. 내일 일을 지나치게 걱정하는 사람은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없습니다. ‘뻔디기의 길’만을 갈 수 있을 뿐입니다. 내일 일은 내일에게 맡기고, 오늘 하루의 괴로움 앞에 담담할 수 있는 자, 그 ‘오늘의 사람’만이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의 삶을 살 수 있는 이가 하느님께서 일깨워주시는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 오늘의 삶을 담담하게 살아내는 이만이 하느님께서 일깨워주시는 ‘진리의 삶’을 살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이제 설교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말씀의 제목을 ‘십자가의 길을 가려면’이라고 잡아보았습니다. 오늘 이 시간, ‘십자가의 길을 가려면’이라는 설교말씀의 제목을 깊이 묵상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잠깐 기도하겠습니다.
* 축도
이제는 진리의 길을 직접 보여주신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와, 우리의 생명과 영혼을 언제나 치유해 주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성령님의 아름다운 동행이 사랑하는 수도교회 교우들 머리 위에 언제나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김부겸 목사<수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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