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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욥23:8-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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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서한수 목사 |
참고 : |
성경말씀: 욥기 23장 8절-17절
설교제목: 누구와 가시렵니까?
월남전이 거의 끝나갈 무렵에 미국의 어느 가정에 전화가 걸려 옵니다. 이 집에는 월남전에 아들을 보낸 엄마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 엄마가 전화를 받습니다. “엄마! 엄마 아들 스티브예요! 엄마 보고 싶어요?” “오 그래 내 아들 스티브구나. 그래 어디 다친대는 없고. 엄마도 네가 너무 보고 싶구나. 그래 언제 집에 오니?” “네 이제 전쟁이 끝나서 곧 집에 갈게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그런데 엄마 한 가지 부탁 드려도 될까요?” “부탁, 그래 네 부탁이라면 뭐든지 들어줘야지. 무슨 부탁인데?” “네 엄마. 저와 함께 전쟁을 치른 친구가 한 명 있는데요. 이 친구가 좀 다쳤어요. 한 쪽 다리도 없고, 한 쪽 팔도 없어요. 그리고 한 쪽 눈도 실명이 되었는데 돌아갈 집이 없데요. 이 친구를 데려가서 집에서 함께 지내도 될까요?” “아이고 참 안 됐구나! 집에 데리고 오는 것은 좋은데 함께 있는 것은 좀 귀찮지 않을까!” “네 알겠어요. 엄마 사랑해요.” 이렇게 전화를 끊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에 뉴스에서 월남전에 참전했던 군인이 건물 옥상에서 떨어져 자살했다는 보도가 나옵니다. 이 뉴스를 보던 엄마가 깜짝 놀라고 맙니다. 그 자살한 군인이 바로 자기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은 한 쪽 다리도 없었고, 한 쪽 팔도 없었고, 한 쪽 눈도 없었습니다. 엄마는 현장으로 달려가 이 아들을 끌어안고 통곡을 했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욥기의 주제는 ‘고난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왜 고난을 당해야 하나? 그리고 어떻게 해야 고난을 이길 수 있는지’를 말해줍니다. 욥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욥이라는 사람은 고난 받는 사람의 표본이었습니다. 욥기 1장에 보면 그는 순전하고, 정직하고, 악에서 떠난 의로운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엄청난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많은 재산과 열 명의 자식들을 모두 잃었고, 몸에는 악창이 나서 기왓장으로 긁을 만큼 죽을 지경이 되었구요. 부인마저 욥을 저주합니다. 이렇게 자기에게 닥쳐온 고난을 욥은 어떻게 대처했을까요?
우리도 살아가면서 고난을 겪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욥처럼 고난을 겪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누구나 어려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자기에게 닥친 고난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정신병자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고난을 통하여 오히려 더 믿음이 굳건해 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고난을 통하여 오히려 복을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이 어려움과 고난을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해야 고난을 이길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왜 고난을 주실까요? 오늘 본문을 깊이 생각해 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로 고난을 당할 때 세상적인 방법을 찾지 말고 하나님만을 찾아야 합니다.
본문 8절에서 9절을 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욥은 아무런 문제없이 잘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고난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많던 재산은 물론이거니와 열 명이나 되는 자식들을 모두 잃었고 몸에는 병까지 얻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고난이 왜 자신에게 일어났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아니 이해가 되지를 않습니다. 자기는 의롭게 살았는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친구들이 찾아와서 위로한답시고 하는 말을 통하여 더 상처만 커집니다. 이런 상황에서 욥은 하나님을 찾습니다. 자기에게 왜 이런 고난을 주셨는지 한번 만나 따지고 싶어서 하나님을 이리저리 찾아봅니다. 그런데 사방으로 다 찾아보아도 하나님을 찾을 수 없다는 겁니다. 자신은 이렇게 고난을 당하고 있는데 도대체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하고 계셨느냐는 것입니다. 자기가 당하는 고난을 하나님은 알고나 계신지 억울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만 합니다. 자신은 고난 가운데 힘들어 하고 있는데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지 찾을 수가 없습니다.
욥이 이렇게 고난을 당하는데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을까요? 욥은 고난을 당해서 눈물이 마를 날이 없는데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셨을까요? 정말 욥이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께서는 뒷짐만 지고 계셨을까요? 그럴까요?
하나님을 찾을 수 없었던 욥은 하는 수 없이 세상적인 방법이란 방법은 다 해봅니다. 친구도 만나보고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을 찾아보지만 해결책이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지치고 낙심만 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낙심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세상적인 방법을 찾아서는 안 됩니다. 세상적인 방법을 찾으면 찾을수록 문제만 꼬이게 됩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고 세상에서 방법을 찾으면 하나님과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렵지만, 쉽지 않지만 하나님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믿음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힘든 때일수록 하나님을 붙드십시오. 하나님이 보이지 않을 때 일수록 더 무릎을 꿇고 기도해야 합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아모스 5장에서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찾으면 문제를 해결해 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을 찾으면 살길을 보여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 무릎 꿇으면 어떤 고난도 이기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욥처럼 하나님을 찾아보았지만 하나님이 보이지 않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을 어디서 찾아야 할까요? 하나님은 어디에 계실까요?
두 번째로 고난을 이기려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본문 10절 전반부를 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욥은 자기가 가는 길을 하나님께서 아신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욥이 가는 길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아실까요? 전지전능하신 분이시니까 안 보아도 다 아시겠죠?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신데 욥이 가는 길 정도는 능히 아시겠죠? 그런건가요? 본문 10절을 한글로 번역할 때 히브리어 한 단어를 빠뜨렸습니다. 바로 ‘임마디’라는 단어로 ‘~와 함께, ~와 같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임마누엘’이 무슨 뜻이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라는 뜻인 것처럼 오늘 본문에 나오는 임마디라는 단어와 임마누엘이라는 단어의 원형은 같습니다. 10절의 히브리어를 번역하면 “참으로 그 분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길을 아십니다.” 이렇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즉 욥은 사방을 다 찾아보아도 하나님을 찾을 수 없었는데 그런데 그렇게 찾을 수 없었던 그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 계셨다는 것을 깨달은 겁니다. 욥은 멀리서 하나님을 찾았지만 찾을 수 없었는데, 막상 하나님께서는 멀리 계신 것이 아니라 아주 가까이에 즉, 바로 자신과 함께 계시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내가 고난당할 때 하나님은 나 혼자 내팽겨 쳐 놓고 내버려 두신 분이 아니라, 내가 힘들 때 나를 모른 체 하신 분이 아니라, 내가 눈물 흘릴 때 나와 함께 계셔서 같이 울어 주시고, 내가 아파 할 때에 함께 아파하시고, 내가 고난을 당할 때에 나와 함께 하셔서 고난도 이기게 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셨구나라는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어떤 고난이라도 넉넉히 이길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어떤 어려움도 이기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 중에 지금 고난당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어려움 당하시는 분이 계신가요? 우리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셔서 힘주시고 능력 주셔서 어떠한 고난도 이기게 해주실 줄 믿습니다. 멀리 세상에서 찾지 마시고 아주 가까운 곳에서 늘 여러분과 함께 하시는 주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가 힘들 때나, 어려울 때나, 아플 때나, 괴로울 때나, 슬플 때나, 가난할 때나, 늘 우리와 함께하시는 분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 어떤 고난과 역경도 이길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는 분이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하여 우리를 단련시키신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본문 10절 후반부를 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욥은 자신과 함께 길을 가시면서 자신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단련시키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단련시키시는 이유는 순금처럼 되게 하시려고 단련하신다는 것입니다. 순금은 불순물과 섞여 있으면 빛이 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순금인지 알아보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더럽게 묻은 때와 불순물을 걸러내야 금으로서 값어치가 있습니다. 이처럼 더러운 때를 벗겨내려면 다른 방법으로는 벗겨낼 수 없다고 합니다. 또한 순수한 금을 얻으려면 반드시 뜨거운 용광로에 들어가야 그 속에 있는 불순물을 거를 수 있다고 합니다.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100퍼센트 순금을 얻으려면 이처럼 용광로 불길을 견뎌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를 순수한 믿음의 사람으로 단련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고난이라는 용광로에 집어넣으시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떨어내고 불태우고, 없애버리고, 지워 버려야 할 것이 너무 많기 때문에 고난이라는 용광로에 집어넣으시는 것입니다. 이 용광로에 들어가야 이런 불순물을 걸러낼 수 있기 때문에 우리를 용광로에 집어넣으시는 것입니다. 용광로의 불길을 견뎌낸 쇠가 단단해 지는 것처럼, 고난이라는 용광로의 불길을 견뎌야 순수한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고난이라는 용광로에 집어넣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말씀 13절에서 14절을 보면 “그의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라고 말씀하는데 이 말씀은 10절의 말씀처럼 단련하셔서 순금처럼 만드시는 그것을 반드시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작정하셔서 순수한 믿음의 사람으로 만드시려고 단련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이 쉽지 단련 받는 것을 좋아할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단련 받으려면 고난 가운데 있어야 하는데 “하나님 괜찮거든요, 고난 가운데 두세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욥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단련하시려고 고난 가운데로 몰아넣으실 뿐만 아니라 그런 고난을 반드시 이행하실 분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받은 고난을 통하여 재산도, 자식도, 명예도 다 잃었는데 그 고난이 계속된다고 생각하니까 숨이 막히고 두렵고 떨리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겠지요.
그런데 여기서 욥이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다가올 고난에 대한 두려움만 보았지 그 고난 너머에 있는 기쁨을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다가오는 고난이 너무 크다는 두려움 때문에 그 고난만 보았지, 그 고난을 다스리시고, 극복하게 하실 뿐만 아니라, 이기게 해 주셔서 정금같이 만들어 주실 하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자기에게 닥친 고난만 보았지 하나님께서 그 고난 속에서도 자기와 함께 하신다는 것조차 잊고 말았습니다. 고난이 하나님의 단련이라는 것을 깜빡 잊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고난이 다가올 때 그 고난만 바라보면 두렵고 떨려서 지고 맙니다. 실패하고 맙니다. 그러나 고난을 통하여 나를 단련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나가면 이길 수 있습니다. 고난을 이기고 난 후에 값비싼 인생, 순금과 같은 믿음의 사람으로 바꾸어 주실 주님을 믿고 나간다면 반드시 승리할 줄 믿습니다. 배는 풍랑이 불면 불수록 더 빨리 간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닥친 고난만을 보지 말고, 그 고난을 이기게 해 주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자랑하실만한 믿음의 사람으로 바꾸어 주실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나아갑시다.
그렇습니다. 다가오는 고난이 아무리 클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 견디게 해주실 줄 믿습니다. 이기게 해주실 줄 믿습니다. 승리하게 하실 줄 믿습니다. 뛰어 넘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 앞에 닥친 상황만 보지 마시고, 그 상황을 다스리시는 주님, 그 주님께서 결국에는 우리를 멋진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 주실 것을 믿고 나아갑시다. 그러면 임마누엘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해 주셔서 거뜬히 이기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 언제나 우리와 동행해 주실 줄 믿습니다.
(핵심)
이렇게 우리를 절대로 절대로 떠나시지 않으시는 주님께서 딱 한번 우리를 떠나신 적이 있으셨습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고난을 당할 때나 늘 우리와 함께 하신 주님이신데 딱 한번 우리를 떠나셨는데 그게 언제였을까요?
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고통을 꼽자면 어떤 것일까요? 바로 죽음의 고통이겠죠. 아니 죄로 인하여 영원히 고통당하는 고통이 가장 큰 고통이겠죠. 주님께서는 죄인이었던 우리를 건지시기 위하여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의 모진 고통을 감당하셨습니다. 이 십자가는 누가 달려야할 십자가입니까? 이 십자가에서 누구의 손과 발에 못이 박혀야 합니까? 주님은 마땅히 우리가 져야할 이 십자가를 홀로 지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리고 뚜벅뚜벅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사랑하는 내 아들아! 사랑하는 내 딸아! 네가 당하는 고통을 내가 대신 당할 테니까 너는 이 십자가에 오지 마라! 내가 대신 당할테니까, 너는 여기 오지마. 여긴 너무 아픈 곳이야! 내가 대신 아플께. 나 혼자 갈께. 넌 오지마. 오지마.” 이렇게 말씀하신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쓸쓸하게 홀로 피를 흘리시며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습니다. 죄인인 우리가 마땅히 달려야 할 십자가를 우리를 대신해서 죄 없으신 주님께서 홀로 그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이렇게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심으로 승리의 주가 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려고 우리를 잠시 떠나신 것입니다. 이렇게 십자가에 달리셔야만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실 수 있기 때문에 그 고통의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이처럼 그 고통의 십자가를 지신 주님 때문에 우리가 영원히 주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줄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 고난 가운데 계신 분이 있으십니까? 어려움 당하는 분들이 계십니까? 히브리서 2장 18절에 보면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이 당하는 고난을 그냥 내버려 두실 리가 있겠습니까? 우리 주님께서 반드시 그 고난을 이기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 어떤 고난이라도 반드시 승리하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귀를 만드신 분이 어찌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겠습니까? 눈을 만드신 분이 어찌 우리를 돌아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의 손을 만드신 분이 어찌 우리의 손을 붙잡아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의 발을 만드신 분이 어찌 우리의 길을 인도해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다. 임마누엘 되시는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해 주셔서 늘 우리를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고 싶으셔서 십자가의 그 모진 고통도 참아내신 주님께서 늘 우리와 함께해 주실 줄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누구와 함께 이 세상을 살아가시겠습니까? 누구와 함께 가시렵니까? 바로 우리 주님 손 붙들고 주님과 함께 가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 우리를 고난 가운데서 넉넉히 이기게 힘주시는 주님, 그래서 우리를 순전한 믿음의 사람들로 만들어 주실 그 주님, 그 주님께서 우리와 늘 함께 하심으로 우리에게 어떤 고난과 역경이 다가온다고 할지라도 넉넉하게 이길 줄 믿습니다. 승리할 줄 믿습니다.
세상 사람은 다 버릴지라도 절대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는 주님, 그 주님께서 바로 여러분과 함께 계십니다. 그 주님 손을 꼭 붙들고 살아갈 때 어떤 고난도 역경도 이겨내고 순금과 같은 믿음의 사람으로 멋지게 만들어 주실 줄 믿습니다.
마태복음 28장 20절 후반부 말씀으로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아멘!
기도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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