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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창4:1-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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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서한수 목사 |
참고 : |
성경말씀: 창세기 4:1-15절
설교제목: 예배에 목숨을 걸어라!
소매치기 생활을 함께 하던 두 청년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교회 앞을 지나는데, 한 청년이 문득 마음에 찔림을 받았습니다. 그는 교회 안으로 들어가 예배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같이 들어가 보자.” 그러나 친구는 거절했습니다. 결국 그 청년은 교회에 들어가 예배를 드렸고, 다른 청년은 지나쳐 버렸습니다. 그로부터 20년이 흘렀습니다. 두 청년 중에 교회에 들어가기를 거절하고 자신의 길로 갔던 사람은 중범죄를 짓고 오랫동안 교도소 신세를 지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교도소 안에서 미국의 신임 대통령 취임에 관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대통령 취임 소식을 듣던 중에 그는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미국의 신임 대통령으로 취임하는 사람이 바로 과거에 그 소매치기 동지였기 때문입니다. 교회로 들어가 예배드리기 원했던 그가 바로 미국의 20대 대통령인 제임스 가필드(James Abram Garfield, 1831~1881)였습니다.
한 사람은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놀라운 변화를 받음으로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되었고, 다른 한 사람은 회개의 기회를 차 버리고 자신의 길로 감으로써 무기수로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여러분께서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죄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가 자식을 낳았는데 첫째 아들이 가인이고 둘째 아들이 아벨이었습니다. 가인은 하나님께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드렸고 아벨은 양을 제물로 드립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물만 받으시고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시죠? 그래서 화가 난 가인이 동생인 아벨을 죽이는 끔찍한 일이 일어납니다.
자, 그런데 여기서 제물을 드린다는 것은 오늘날로 말하면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바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본문을 예배의 시초라고 주장합니다. 예배란 영어로는 worship 또는 service라고 합니다. 한 가지 의심스러운 것은 왜 하나님께서는 예배라는 것을 만들어서 이렇게 인류최초의 실인 사건이 나게 했느냐는 것입니다. 예배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며 어떻게 드려야 할까요?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예배에 성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로 예배는 정성을 다해 준비해야 합니다.
본문 말씀 3절과 4절을 다 함께 읽겠습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고 아벨은 양을 치는 자였습니다. 가인이라는 이름의 뜻은 "얻다 또는 소유하다"라는 뜻이고, 아벨은 “공허한 것, 헛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3절에서 “세월이 지난 후에‘라는 의미는 히브리어 원어로 보면 ”날들의 끝에“라는 의미로서 이 날은 안식일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가인과 아벨이 안식일, 즉 주일이 되어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하여 준비를 합니다. 가인은 하나님께 어떤 제물을 드렸다구요? 3절에 보면 “땅의 소산으로” 드렸고 아벨은 4절에 보면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드렸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가인의 제물은 하나님께서 받으셨나요? 그러면 아벨의 제물은 왜 받으셨을까요? 하나님은 기분에 따라서 변덕을 부리시는 분이신가요? 아니면 아벨은 피의 제사를 드렸고, 가인은 곡식으로 드렸기 때문에 가인이 드린 제사가 피의 제사가 아니라서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3절을 원어로 보면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드렸다고 나오고, 아벨은 그 자신과 함께 첫 새끼들과 그리고 그것들의 기름으로부터 그의 양을 제물로 드렸다고 나옵니다. 여기서 가인과 아벨의 차이는 첫째로, 아벨은 자신을 드렸지만, 가인은 자신을 드렸다는 말이 나오지 않고, 둘째로 아벨은 그의 소산 중에서 가장 좋은 것, 즉 이스라엘 사람들은 양의 기름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으로 그 기름을 드렸지만 가인은 그의 소산 중에서 드렸다는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세 번째로 아벨은 자기의 소유 중에서 제물을 드렸지만 가인은 자기의 소유에서 드렸다는 말이 없습니다. 즉 아벨은 자기의 소유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고르고 또 골라서 가장 좋은 것을 드렸다는 말이고, 가인은 아마도 자기에게 필요 없으며, 팔수도 없고, 자기 소유도 아닌 것 중에서 손에 잡히는대로 준비 없이 가져왔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즉 아벨은 정성껏 고르고 또 골라서 준비했지만 가인은 정성껏 준비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이 미워서도 아니고, 아벨만 편애해서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정성껏 준비하지 않고 드리는 제물은 받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고기가 드시고 싶으셔서, 쌀밥이 드시고 싶으셔서 양을 바쳐라, 곡식을 바치라고 하시겠습니까? 바로 그 사람이 정말 마음을 다해 정성껏 준비한 것인지를 보신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1장 13절에 보면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라고 하셨습니다. 준비되지 않은 예배, 정성 없고, 마음 없는 예배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으십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게 예배를 준비하십니까? 예배를 정성껏 준비하십니까? 아니면 또 주일이야, 뭔 주일이 이렇게 빨리 와, 귀찮아 죽겠네. 이러십니까? 바라옵기는 부디 정성껏 잘 준비하셔서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시기를 소원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에게 이처럼 예배를 드리는 사람의 준비와 정성을 요구하실까요?
둘째로 예배는 자신을 드려야 합니다.
본문 말씀 4절과 5절을 다 함께 읽겠습니다.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이 말씀 속에서 하나님께서 예배를 통하여 무엇이 드려지기를 원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4절은 히브리어 원어를 번역하면 “아벨은 그 자신과 함께 첫 새끼들과 그리고 그것들의 기름으로부터 그의 양을 제물로 드렸다.”는 의미가 됩니다. 즉 아벨은 자신을 드렸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벨은 자신을 드리니까 하나님께서 아벨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자신을 드렸다는 말이 없습니다. 이렇게 드린 결과는 엄청나게 차이가 있습니다. 자신을 드린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고, 자신을 드리지 않은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배를 통하여 자신을 드리느냐 아니냐의 차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배를 통하여 왜 자신을 드려야 할까요? 자신을 드린다는 의미는 무엇을 말할까요?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한 이래로 그 죄를 그냥 두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이 죄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고 있어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복을 주실 수도 없고, 함께 하실 수도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예배를 통하여 죄를 사해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마련하신 것이 바로 죄를 지은 사람을 대신해서 제물을 바치면 죄를 용서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제물은 죄인인 자신을 대신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자신의 죄를 대신할 제물만을 드리는 것이 예배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올바른 예배란 바로 예배의 자리에서 자기 자신을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자기가 제물이 되어 자신을 죽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제물이 나를 대신해서 죽지만 그 제물과 함께 자신을 죽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인은 제물만 드렸지 자신은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벨은 자신을 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예배란 바로 자신을 죽이는 자리입니다.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죽는 자리가 바로 예배의 자리입니다. 자신이 지난 한 주간을 살아오면서 지었던 죄를 고백하는 자리이어야 합니다. 자신의 죄를 철저하게 고백하고 그 죄 값을 치르는 자리가 바로 예배의 자리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죄를 지었으면 누구든지 사망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자신을 죽이는 뼈저린 회개 없는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아무리 많이 짓고 예배의 자리에 나와도 하나님께서 직접 죽이시지 않으시니까 너무 쉽게 예배의 자리에 나옵니다. 복만 받으려고 합니다. 자신은 죽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은혜의 장치인 나를 대신해서 죽는 제물만 의지한 채 자신을 죽이지 않습니다. 가인이 철저하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예배를 드렸다면, 자신을 죽이는 예배를 드렸다면 살인을 저지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배의 자리는 내 죄를 죽이는 자리이며, 내 욕심을 죽이는 자리이고, 내 욕망을 죽이는 자리이며, 미움과 원망과 시기와 질투를 죽이는 자리이며, 더 나아가서 철저하게 내 자신을 죽이는 자리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생명을 드리니까 하나님께서는 나를 대신한 제물만 받으시고 내 목숨은 다시 살려 주시는 것입니다. 즉 죄를 용서해 주셔서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로 인하여 죽을 인생을 불쌍히 여기셔서 제물을 대신 받으시고 나는 다시 살려 주셔서 거듭나게 해 주시는 자리가 바로 예배의 자리인 줄 믿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서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매일 자신을 죽이는데 우리는 시간마다 자신을 죽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배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예배에 목숨을 걸면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에 목숨을 걸지 않으면 마음도 죽고 양심도 죽고 영도 영원히 죽습니다. 부디 예배에 목숨을 거셔서 승리하시기를 소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예배는 삶속에서도 드려져야 합니다.
본문 말씀 7절을 다 함께 읽겠습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은 받으시고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시니까 가인의 안색이 변합니다. 화를 내고 분노합니다. 이렇게 안색이 변한 가인에게 하나님께서 책망하십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가인이 화를 내고 얼굴을 들지 못하는 이유로 그가 선을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선’이라는 단어는 보통 착한 일이나 도덕적으로 깨끗한 일을 말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물론 도덕적인 삶, 윤리적인 삶도 원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선이라는 것은 히브리어로 보면 ‘야타브’라는 단어로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위에 대한 인간들의 응답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예배를 통하여 자신의 죄를 용서 받고 죽을 목숨을 다시 살려 주셨으니까 얼마나 감사하겠습니까! 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면서 살다보면 불평이 나올 수 있을까요? 원망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너나할 것 없이 모두 죄인입니다. 그런데 이런 죄인을 살려주실 뿐만 아니라 지켜주시고, 갈 길을 인도해 주실 줄 믿습니다. 늘 보호해 주실 뿐만 아니라 때에 따라 복도 주셔서 이렇게 살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가 사는 것은 한 가지라도 하나님의 은혜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교회에서뿐만 아니라 삶속에서도 늘 감사와 기쁨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이렇게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려면 예배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다면 한 주간을 참으로 기쁘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인은 이렇게 자신을 드리지 않았으니까 감사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삶속에서도 늘 불평과 짜증과 원망만 늘어놓다가 결국에는 살인자가 되고 맙니다. 한 주간을 살면서 늘 예배드리는 마음으로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야 하는데 가인은 예배를 통하여 자신을 드리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삶속에서도 예배드리는 생활을 하지 못했습니다. 가인은 예배에 실패함으로 결과적으로 인생에서도 실패자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가인은 예배에 실패자가 되니까 살인자가 되고 거짓말쟁이가 되어서 쫒기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예배에 목숨 걸지 않는 사람은 가인처럼 다른 사람의 목숨을 위험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내 제물은 받지 않으시고 왜 다른 사람의 제물을 받으시느냐고 원망하고 불평할 필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 자신이 예배에 목숨을 드렸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인자가 된 가인에게 하나님께서는 벌을 내리십니다. 그러니까 가인은 이 벌이 너무 무겁다고 견딜 수 없다고 또 불평합니다. 우리가 가인보다 나은 점이 있을까요? 그런데 이런 못된 녀석을 그냥 숨을 조용히 거두어 가시면 되는데 그런 가인에게 표를 주셔서 또 지켜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런 가인을 지켜 주실까요? 하나님께서는 비록 죄인일지라도 사랑하셔서 차마 잘못되는 것을 두고 보실 수가 없으신 것입니다. 우리를 너무너무 사랑하셔서 차마 우리를 제물 삼지 않으시고, 우리를 대신해서 자기 아들을 제물로 잡아 죽이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가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줄 믿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립시다. 세상에 살다보면 늘 죄라는 녀석이 우리를 노리고 있습니다. 예배에 성공하면 아무리 죄가 문 앞에 엎드려서 우리를 덮치려고 해도 우리는 그 죄를 다스릴 줄 믿습니다. 죄를 넉넉히 이길 줄 믿습니다. 예배에 목숨을 걸어서 기쁘고 감사한 삶, 또한 복도 받고 죄도 넉넉히 이기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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