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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8:4-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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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8장 4절-10절: 제자들이 대답하되 이 광야에서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가로되 일곱이로소이다 하거늘 예수께서 무리를 명하사 땅에 앉게 하시고 떡 일곱 개를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그 앞에 놓게 하시니 제자들이 무리 앞에 놓더라 또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는지라 이에 축복하시고 명하사 이것도 그 앞에 놓게 하시니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 일곱 광주리를 거두었으며 사람은 약 사천 명이었더라 예수께서 저희를 흩어 보내시고 곧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달마누다 지방으로 가시니라.
제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이들이 6:31에서 예수님께서 떡을 장정만도 5천 명을 먹이시고 열두 광주리가 남은 것을 왜 기억을 못했을까? 워낙 큰 표적이라서 우리도 그게 기억이 나는데 제자들의 경우는 더더욱 잊어버릴 리가 없을 것 같은데 전혀 기억이 안 나는 것처럼 기록이 되어 있다. 왜 그럴까?
1. 아무리 생각하고 생각을 해도 그런 일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전혀 생각이 안 난다는 표현이다?
2. 예수님께서 5천 명을 먹인 것을 제자들이 다 알고는 있지만 ‘어려울 때 예수님이 어떻게 하시나’ 하는 걸 보려고 잊은 것처럼 예수님께 말을 하고 있다?
3. 한 마디로 제자들이 믿음이 없었다는 말이다?
정답은 3번이다.
5절: ‘너희에게 떡 몇 개가 있느냐?’ ‘일곱이로소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 중에 떡이 있다는 것을 알고 물으신 것일까, 모르고 물으신 것일까? 다 아시고 물은 것이다. ‘너희들이 먹을 것을 주어라’ 하심은 제자들에게 떡이 있다는 걸 알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보실 때는 이 일곱 조각의 떡은 무리들을 다 먹이고도 남을 수 있는 표적의 떡이다. 전 세계의 교회를 다 먹일 수 있는 떡 일곱 개이다. 상징이 그렇게 들어간다.
그러면 세상에 그런 떡이 어디 있느냐? 떡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다. 이 떡은 당신이 백성들을 영적 배고픔에서 배부름으로 구원시킬 수 있는 떡이다. 영적 배고픔에서 배부름이 된다는 건 만족을 말한다. 배고플 때는 ‘뭘 먹고 배를 채웠으면 좋겠는데’ 하게 되는데 이 때 뭔가를 먹으면 만족이다.
이 떡은 성도들이 광야교회에서 영의 양식을 먹고 영능의 힘을 얻어 신령한 천국이라고 하는 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구원의 떡이다.
떡이라 할 때 여러 가지 비유가 들어있는데 본문을 보면 이제 말한 계시의 내용이 들어간다.
이런 역사가 나타날 수 있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구원되는 참 하나님의 본질의 양식을 이 시대에 누가 가지고 있을까? 본문에 보면 ‘너희에게 떡 몇 개가 있느냐’ 하신 것은 오늘날 각 교회 목사에게 묻는 거다. 그러니까 이 시대에 그 표적이 일어날 수 있는 떡을 누가 가지고 있을까? 어느 목사님이 가지고 있을까?
마지막 시대에는 각 교회마다 먹으면 영적 면이 죽는 마귀가 주는 독이 들어있는 음식이 많다. 그래서 지금 영의 눈으로 보면 교회들이 ‘참단인지 이단인지’ 분간을 못한다. 성경구절 속에는 하나님이 뜻이 들어있는 것인데 교회 전도지들을 보면 그들 나름대로 성경을 해석해 놓은 것이 하나님의 이 뜻은 없어지고 육적으로 맛이 들어있다. ‘이단인지 아닌지’ 하는 것은 교리적인 면에서만이 아니라 성분적으로 그런 요소에서 나오는 건데 그걸 모른다. 그러니 ‘신앙인지 종교인지’ 구별을 못한다.
참 신앙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 예수님의 소원 목적 의사를 따른다. 그런데 그건 없고 딴 짓을 하는 건 성질적으로 보면 천국복음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것 전부는 땅에 속한 것이므로 이건 그 질이 본질이 아니고 이질이다.
이단과 거짓이 도둑이냐, 사람이냐? 이단과 거짓이 사람이냐, 사람이 아니냐? 이단일지라도 사람은 사람이다. 그러면 참 목자와 거짓 목자가 겉으로 무슨 표식이 있느냐? 없다. 도둑이 자기가 도둑이라는 무슨 표식이 있느냐? 없다. 이단과 거짓의 교회들이 ‘나는 거짓이요 이단이요’ 하는 겉으로 보이는 표식이 있느냐? 없다.
이단과 거짓을 겉으로 보이는 무슨 표식으로 찾는다면 그 사람은 겉으로 표식을 찾는 그 자체가 이미 거짓된 사람이다. 겉을 보고 뭘 찾으려는 사람은 이미 거짓된 사람으로 되어있는 거다.
예수님이 겉으로 무슨 표식이 있느냐? 없다. 당신의 언행심사, 걸음걸이, 생활 전폭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겉으로 표식을 찾는 자들이 이 예수님을 죽였다. 지금도 그렇다. 겉으로 나타나 보이는 것으로 좋은 교회를 찾는다고 하면 그 사람은 이미 진리본질의 신앙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 자체가 진리본질이므로 우리를 보시는 것도 우리 속의 진리본질의 신앙을 보는 것이다.
6절: 무리들이 우왕좌왕 소란을 피우게 하지 말고 모두 앉혀라. 서 있으면 막 우왕좌왕 한다. 무리 된 신앙의 질을 세워놓지 말고 바닥에 앉혀라. 무리들의 신앙은 선 게 아니다. 앉혀라. 떡을 먹게 하려면 앉혀라. 순종을 해라. 이적의 떡을 먹게 하려면 떠들게 하거나 설치게 하지 말고 겸손히 앉혀라. 떠들고 돌아다니면 남이 은혜 받는데 방해가 된다. 그대로 두면 안 된다. 오늘날도 역시 은혜 받을 자는 마음의 자세가 겸손하다. 하늘의 기운을 받을 자는 겸손하다.
돈을 사랑하는 자는 예수 팔고, 진리 팔고, 사람 팔도 다 팔아먹는다. 부자 되려고 교회 다니는 자는 많은 시험이 자기를 찌를 것이고, 하나님의 진리본질에 정함이 없는 자는 마귀의 놀림감이다.
신앙심이 없이 교회 다니면서 직분을 가졌다면 마귀노릇을 하고 있다고 보는 거다. 남을 깎아내리면서 자기 교만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얼마 안 가서 엎드러질 사람이다. 성호를 더럽히는 교인은 즉, 하나님 앞에 목사 장로 집사가 성호인데, 이런 교인은 자기의 인격이 더러워진다. 집사이면서 안 믿는 사람과 같은 정신이 들어있고, 주일을 바로 지킬 줄도 모르고 있고, 장로도 그 모양이고 목사도 그 모양이라면 이건 그 인격이 더럽다. 자기 얼굴이 깎인다.
‘떡 일곱 개를 손에 가지사 축사하시고.’ 감사를 드리고. 떡을 일곱 개를 손에 든다면 얼마만한 떡 일곱 개인가? 가지고 있어야 감사가 나온다. 안 가지고 있는데 ’받아놓았습니다‘ 하며 감사가 나올 수 있느냐? 받은 것을 가지고 감사가 되는 것이다. 내가 뭘 받았는지, 뭘 가졌는지도 모르며 ’감사합니다‘ 하는 건 거짓말쟁이다.
‘떡 일곱 개를 손에 가지사 감사를 드리고.’ 예수님께서 감사를 드리는 그 마음이 ‘이거라도 있으니 감사해야지. 이거라도 없었다면 어찌될 뻔 했겠느냐?’ 그런 뜻으로 감사냐, 아니면 온 교회들이 먹고 남아서 영능의 힘을 얻을 수 있다는 면에서 감사하다는 그 말인지?
이것은 계시이기 때문에 계시적으로 알아들어야 자기가 그만큼 눈이 열리는 거다. 성경은 전부가 축소가 돼 있다. 이걸 터뜨려 놓으면 온 세상이라도 모자란다.
우리도 불어날 수 있는 신앙의 요소가 있는 하나님의 본질을 가져야 한다. 본질에서 자꾸 써먹고 커지고 그러면 참 감사가 되는 것이다. 은혜 위에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더 받을 수 있다.
열 고을 스무 고을을 다스릴 수 있는 실력화 되고 믿음이 생산되고 건설되고 확장되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수 있는 믿음이 돼야지 불타질 믿음, 부끄럽고 소모되고 심판 받을 믿음은 형벌 받을 믿음이요, 이런 믿음은 예수 헛 믿고 헛 사는 인생이다. 그러니까 사망성공이다.
8절-10절: 감사를 드리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니 제자들은 또 무리들 앞에 그 떡을 놓았다. 그리고 작은 생선 두어 머리도 감사를 드리고 그렇게 나누어 주었다.
여기서 떡이 몇 개이던 생선이 몇 개이던 잘 빻아지고 가루가 되어 잘 익은 떡, 그리고 생선도 간이 적당히 되어 잘 굽혀진 생선이 예수님의 손에 즉, 구원역사에 올리어지기만 하면 예수님의 구원운동에 귀히 쓰임을 받는다는 이치가 그 안에 들어있다.
지금 내가 이룰구원에 관한 것을 확대를 시켜서 미래를 보이면서 현재적으로 알 수 있게 말씀을 드렸는데, 이걸 전체적으로 따진다면 예수님께서 ‘앉혀라’ 하실 때 겸손하게 앉음으로써 이런 표적을 맛 본 것이다. 그러니까 은혜 받을 자는 마음이 겸손하다. 마음속에서 하나님 앞에 고개를 치켜들지를 않는다.
선포되는 말씀이 비진리이면 그곳에 서 있든지 가든지 오든지 상관이 없으나 옳은 진리이치일 경우 마음속에 들어있는 정신자세가 너는 거기에 앉아라. 그래야 네가 받아먹을 수 있는 자세가 된다.
겸손히 앉은 다음에 예수님께 떡을 드리니 그 떡을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본다.
그러면 그 떡이 어떤 떡이냐? 설익은 떡이냐? 잘 익은 떡이다. 생선도 설익어서 비린내가 나는 생선이냐, 먹음직스럽게 잘 익혀진 생선이냐? 이게 이룰구원의 정신으로 보는 거다.
주님의 손은 구원역사의 손이요 복음역사의 손인데, 복음역사는 구원역사다. 이 구원의 손에 떡과 고기를, 혹은 그 물질을 드리니 4천 명이 먹고도 일곱 광주리가 남았다.
‘천국복음을 말씀하시더라. 하늘나라를 말씀하시더라’ 했는데 오늘날 교회를 보면 신령한 천국복음이 땅의 복음으로 바꿔졌다. 이거는 역사가 아니다. 마귀 짓이다. 이치를 알아라.
어떤 자가 하나님의 구원운동에 귀히 쓰임을 받느냐? 소제로 바쳐지는 자이다. 잘 빻아지고 잘 구워진 자가 주님의 구원운동에 쓰임을 받는다.
그리고 두 번째는 크게 쪼개진 떡을 먹건 작게 쪼개진 떡을 먹건 주님이 주시는 떡을 먹은 사람은 전부가 배부름의 만족이다. 자기가 먹기만 먹으면 대 만족이다. 배부르다는 것은 만족이라는 뜻이다.
그러면 어른에게 떼어주는 떡과 아이에게 떼어주는 떡이 크기가 같을까? 그리고 일곱 개의 떡과 두어 머리의 생선으로 4천 명을 먹인 것이라면 그 떡과 생선조각이 얼마나 컸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걸 가루처럼 작게 떼어야 다 먹일 수 있지 않을까?
떡과 생선의 숫자가 적은데도 몇 천 명을 먹였다는 것은 계시이기 때문에 여기에는 이적과 표적이 들어간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이 볼 때는 ‘아이고, 이걸 이 많은 사람이 어떻게 나누어 먹겠습니까? 차라리 한 사람에게 다 주세요’ 할 양밖에 안 되지만 하나님의 역사에게 들림만 받으면, 하나님의 손에 들림을 받기만 하면 모두가 먹고도 남는 만족을 얻게 되는 하늘의 축복된 떡과 생선이다.
그러니까 ‘이 떡과 생선을 얼마나 크게 많이 떼어 나누어 먹었을까’ 하는 그걸 말하려는 게 아니라 이 떡과 생선을 적게 뗄 수도 있고 조금 크게 뗄 수도 있는 건데, 어떻게 되었던 주님이 주시는 그것을 먹는 자는 각자에게 대 만족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먹기만 하면 만족을 주는 축복의 떡이라도 자기가 그걸 안 먹으면 그 자의 배는 부르지 않는 거다. 다시 말하면 만족은 없다. 영적 만족, 마음의 만족은 없다.
사람이 만족을 하면 기쁘고 즐겁다.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만족하면 기쁘고 즐거운 법이다. 하나님께서 인간 내 영을 만들 때 인간 내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그만큼 만족하게 돼 있는 게 자기의 영이다.
육적으로 말하면 우리의 배는 음식이 들어가서 어느 정도 차야 만족이 되는 거다. 안 먹으면 자기 배는 안 부르고 만족은 없다. 애굽 땅의 요셉의 창고에 아무리 곡식이 많아도 입 다물고 있는 쥐는 다 굶어죽었다. 그러면 굶어죽는 건 누구의 책임이냐? 자기 책임이다.
‘떡과 작은 생선 두어 마리’ 라고 했는데 ‘두어 마리’란 한 마리 반을 말하는 거냐, 세 마리를 말하는 거냐? 어쨌든 이것으로 광야에서 맛있게 특식을 먹였다. 광야로 나온 무리들은 이 특식을 먹었다. 이적의 떡이 특식이다. 요즘 ‘별미축복 대성회’ 하는 건 특식이 아니다.
8절: 배불리 먹었다는 것은 맛있게 먹었다는 말이고, 만족이 되도록 먹었다는 말이고, 불끈불끈 힘이 솟도록 먹었다는 말이다. 또 일곱 광주리가 남았다는 것은 모두 다 먹고 풍족했다는 말이다.
떡이 일곱 개에서 일곱 광주리로 불어난 것은 몇 배로 불어난 것이냐? 이것은 앞에서 말한 대로 불어날 수 있는 신앙을 의미한다. 자기가 가진 신앙이 하나님의 진리본질로 적중성을 갖고 있다면 이거는 하나님께서 역사할 수 있는, 은혜 위에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을 갖고 있는 것이다. ‘예수 믿어 부자 되자’ 하는 건 본질도 아니고 썩을 것이요 마귀시험에 걸려든 것이다.
앞에서 열 고을에서 스무 고을의 비유에서도 말했지만 몇 배로 많이 받은 것은 주인이 준 것을 자기가 이용하고 활용을 함으로써 된 것이다. 즉, 신령한 천국성, 천국의 것을 받고 거기에서 자꾸 깨달음이 나오고, 자기의 신앙 믿음이 성장이 되고, 이게 또 사용 활용화 되고, 건설되고 확장되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이게 안 되는 것은 아무리 예수를 오래 믿어도 재앙이고 앙화다.
불타질 믿음, 부끄럽고 수치 되는 믿음, 소모되는 세상을 소원 목적한 믿음을 가지면 형벌과 심판을 받을 믿음이요, 헛 믿은 거고, 헛 산 거고, 사망성공한 사람이다.
9절-10절: 떡 일곱 개와 두어 마리의 생선을 먹은 사람이 약 4천 명이다. 즉 인생 광야생활에서 먹을 것이 없어 배고픈 자에게 표적의 떡을 먹여 기운을 돋우어 집으로 돌아가 구원을 얻게 한 자가 4천 명이다.
그러면 이 4천 명이 광야에서 며칠을 있었느냐? 사흘이다. 그러면 떡과 생선을 먹었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광야에서 훈련을 받은 신앙, 광야에서 표적의 떡을 먹은 신앙, 광야에서 기운을 얻어 구원을 얻은 신앙, 광야에서 만족을 얻은 축복된 신앙을 말한다.
이 신앙을 받은 자들은 떡 일곱 개와 작은 물고기 두어 마리를 먹은 신앙의 기운을 가진 자들이다. 이들에게는 주님의 손에 붙들려서 축사된 그 기운이 들어있다. 예수님께서 배에 올라 달마누다 지방으로 구원의 일을 하러 가시는데 제자들도 그 기운을 가지고 동행을 한다. 이해가 가느냐? 지금 본문의 말씀을 확장시키면 구원도리가 엄청나게 불어난다.
그러면 오늘날 현재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광야교회 생활을 하는 것이고, 이 광야교회 생활을 하는 동안에 영능의 실력이 크라고 훈련 연단을 받는 것인데 세계 각 교회에서 말씀을 먹이는 걸 보면 이적과 표적의 떡이 아니다. 주님이 주신 떡이 아니고, 하늘의 신령한 만나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먹으면 즉, 그 정신 소원 목적을 먹으면, 그 소원 목적을 가지면 그 사람 속에서 주님의 심장으로 맥박으로 주님의 정신으로 가지게 되는데 그게 없다면 뭘 먹은 신앙이냐? 선악과다. 젊은 애들이 가수의 노래가 나오면, 나는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듣겠는데 즉흥적으로 부르는데 그건 의미가 없다. 그런 정신으로 들어가 있으면 안 된다.
달마누다 지방에서 어떤 자들이 나타났느냐? 예수님을 시험하고 힐난하며 트집을 잡아서 비난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려는 자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당시의 바리새교인들이다. 이들이 예수님께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했다.
이들은 광야로 나가서 예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표적의 떡을 먹은 자들은 아니다. 오늘날 마지막 때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구원의 말씀 듣지 않고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과 능력을 보여 달라고 하는 자들은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교인들과 똑같은 자들이다. 한국교회에 이런 자들이 얼마나 많으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가 들어있는 말씀을 먹어야 사람이 이치의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똑바로 서는 건데 뭘 보여 달라고 기도하는 이건 완전히 무당식이다. 교회가 이런 식으로 무당집이 돼버렸다. 이러면 사람이 떠들고 소란스럽고 정립 정돈이 안 된다. 이건 미친 거다. 말도 어떤 때는 옳은 말 같은데 방금 한 말을 바로 뒤집어엎는다.
성경구절적으로는 하늘의 뜻에 관한 말을 하는데 소원 목적적으로는 땅의 것을 구하면 이게 맞는 것이냐? 이건 말이 문제가 아니라 말하는 그 정신이 혼란스럽다. 정립이 안 됐다. 그래서 성경구절을 가지고 말을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는 말이 아니면 이는 정신병자와 같다. 성경에 있는 말씀을 깨달으려고 하지를 않고 자기도 성경에 있는 것을 보여 달라고 금식하며 떼쓰는 것은 마귀의 꾀임에 빠진 자로 보면 틀림이 없다.
성경의 간질병자는 불을 보면 달려가서 불에 뛰어들려고 하고, 물을 보면 물에 달려가서 넘어진다. 이 병자를 들고 뭘 말씀하려는 거냐? 오늘날 ‘불 집회, 성령 다이너마이트 집회, 또 물질 축복집회’ 운운하는 그런 데 가서 얼마나 엎어지고 쓰러지는지?
불에 들어가면 죽고, 물에 들어가면 죽는 거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 안의 집회가 물집회인지 불집회인지도 모르고 가서 엎어진다. 이것은 영적인 신앙 면이 자랄 수 있는 것이 다 죽은 거다.
성경은 우리의 영인성장을 위해 말씀하시는 거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내가 말하는 것은 영이라’ 하니까 제자들은 도망을 가지 않았지만 무리들은 다 도망을 갔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의 영인성장 즉,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렇게 되면 자지가 자기를 다스리고, 자기 주위를 다스리고, 자기 일생을 다스리며 참된 인생의 걸음걸이가 되겠는데 이건 없이 세상에서 물질축복을 받기 위해 용을 쓰고 떼를 쓰는 그 기도는 잘못됐다. 마귀의 시험에 걸려든 기도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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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가 인격자이신 하나님의 가장 깊은 심원인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부터 발로된 인간구원의 의사를 좇아서 신앙을 해야만이 기독교 본질에서 이탈하지 않고 가장 효율적 적중적으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덧입을 수 있고, 성도 각자가 이 땅에서 이렇게 덧입은 하나님의 성품의 양에 따라 장차 천국에서의 누림에 차등이 생기게 됨을 성경을 통해 알 수가 있습니다.
김경형목사님께서 교역자 및 신학생을 대상으로 20여년 동안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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