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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9:8-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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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9장 8절-19절: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뿐이었더라 저희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경계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저희가 이 말씀을 마음에 두며 서로 문의하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 하고 이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가라사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거니와 어찌 인자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리라 하였느냐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가 왔으되 기록된 바와 같이 사람들이 임의로 대우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저희가 이에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큰 무리가 둘렀고 서기관들이 더불어 변론하더니 온 무리가 곧 예수를 보고 심히 놀라며 달려와 문안하거늘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가 무엇을 저희와 변론하느냐 무리 중에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벙어리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 왔나이다 귀신이 어디서든지 저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하여 가는지라 내가 선생의 제자들에게 내어 쫓아 달라 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세 제자는 산에서 내려오면서 서로 마음속에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다는 게 무엇일까?’ 하고 있었다. 우리가 이것을 이치적으로 생각해 보면 첫째는, 안 죽는 곳에서 온 사람이면 죽어도 산다. 두 번째는 이 분이 주는 것이라면 안 죽는 것으로 주는 것이니 그것을 먹으면 영원히 산다.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바로 그것이 들어있다. 교회 인도자들이 가르치고 깨우치는 것이 만일 그것이 없다면 예수 믿는 게 모두가 허사가 되고 만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어도 살아나는 것으로 믿어야 하고, 또 무엇이 살아나는 것인지를 알고 믿어야 한다. 자기가 죽는 것으로 믿고 있다면 무엇이 죽는 것인지를 모르고 믿고 있는 것이다. 예수 믿는 것은 사는 것으로 들어가 있다. 주는 것이 사는 거고, 받는 것이 사는 거고, 신앙하는 모든 사고방식이 이룰구원으로 사는 것이다. 그 질이 그렇다. 하나님은 죽는 법이 없듯이.
11절-13절: 모세뿐만이 아니라 모든 선지자나 사도들도 선재적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사람들이다. 그런데 제자들은 “말4:5-6에서 말한 것이 세례요한을 말하는 것인지? 세례요한을 말하고 있다면 예수님께서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거니와’ 라고 했는데 ‘모든 것을 회복’이란 또 무엇을 말씀하심인지?” 하며 궁금해 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것을 회복하거니와’ 라고 한 것이 세례요한을 말하는 것이라면 이건 분명히 회개의 세례이다. 회개도 바르게 회개되는 회복성을 알지 못하면 회개가 안 된다. 세례요한이 회복을 하는 것이라면 회개의 세례인데, 이건 방향과 목적을 바로 잡은 것을 말하는 거다. 그래서 요한의 회개의 세례를 받은 자는 예수님을 만나게 돼 있다. 그런데 요한의 회개의 세례를 받지 않는 자는, 그 때로 보면 당시의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핍박하고 세례요한을 임으로 대우하고 죽였다.
또 회복한다는 것을 구약의 엘리야를 두고 말을 한다면 엘리야가 모든 것을 회복한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갈멜산에서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제물을 태우고, 바알의 종들을 죽이고, 백성들의 마음을 여호와께로 돌아오게 했다는 점에서 엘리야가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했다는 뜻일까?
그러나 또 이 말씀을 초림하신 예수님으로 본다면 예수님께서 무엇을 회복한 것인가? 모든 마귀의 시험을 다 이기셨다는 점에서, 죄와 사망을 다 이기셨다는 점에서, 믿고 구원을 얻을 자는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모든 것을 회복한다는 것일까?
‘그런데 어찌 인자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리라 하였느냐?’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심은 우리 대신 육신의 고난을 다 당하심이고, 두 번째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이룰구원 면에서 시련과 연단을 받을 때 당신처럼 지혜롭게 잘 이겨내라고 본을 보여주심도 있다.
그러니까 ‘회복’이라고 할 때 비뚤어지고 안 된 것을 바로 잡아준다는 면에서 엘리야로 통해서 갈멜산에서 된 일을 보여주고, 또한 그 속에는 예수님의 우리의 구원을 위한 사역을 미리 보여주고 있는 거고, 또 세례요한으로부터 신앙의 본질로 바로 들어가는 세례를 받아야 만이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도 주님 앞서 미리 보낸 종들이 ‘첩경을 평탄케 하라’는 그 사역을 바로 하면 성도들이 재림의 주님을 인격적으로 잘 만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현재적으로 교훈적인 면에서 교회 인도자들이 그것을 잘 하면 성도들이 주님을 현재적으로 인격적 결합적으로 잘 만나게 되는 것이다.
세례요한 당시로 볼 때 역사적으로는 그 일을 하라고 세례요한을 주님보다 6개월 먼저 보냈는데, 이 세례요한이 베푸는 회개의 세례를 통해 인격적으로 주님을 못 만난 자는 주님을 핍박하고 죽이게 된다.
당시로 보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는데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왜 한꺼번에 예수님께로 가지 않았을까? 혹자들은 예수님이 오셨는데도 세례요한이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지 않고 거머쥐고 있었다고 하는데 그건 그렇지 않다. 왜냐? 우리가 이룰구원의 사상으로 성경을 보지 않으면 절대로 성경해석은 안 된다.
왜 세례요한의 제자들 중에 예수님께로 간 사람이 있고, 가지 않고 세례요한에게 그대로 있는 사람이 있는 것일까? 세례요한이 붙들고 있어서냐? 그건 아니다. 그러면 무슨 뜻이냐? 세례요한으로부터 듣고 배워서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질적 수준이 안 돼 있으면 부득이 세례요한에게 머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계시적으로 말해준다. 그게 바로 되면 그 신앙성이 예수님께로 향해져 들어가는 거다. 안 그러면 아무리 예수를 믿어도 인격적으로 예수님께로 향해지지를 않는다.
모든 교회의 종들은 역할로 말하자면 교인들로 하여금 예수님께로 향해질 수 있도록 세례요한의 사역을 해야 한다. 교회의 교훈이 질적 본질적으로 정확하게 적중성으로 들어있어야 예수는 구원이요, 길이요 생명의 이치로 인격화 실상화 되는 그 면으로 교인들이 들어가는 거다. 신앙의 질이 그렇다. 질적으로 보면 참 중요하다.
성경을 신앙의 본질에 입각해서 보지 못하면 성경이 하나도 해석이 안 되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신앙은 ‘예수 믿으면 천국 간다’로만 끝나는 게 아니고 사람마다의 신앙의 형태가 질적인 면에서 아주 다양하게 들어있어서 어떤 사람은 천천히 올라가도 곧장 올라가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빨리 간다고 하면서도 이리 갔다 저리 갔다 꼬불꼬불 가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빙 둘러서 가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성경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사람의 정신을 돌리려고 하니까 무슨 나무 꺾듯이 보는 게 아니다. 나무를 꺾듯이 하려고 한다면 정신이 그렇게 되는 거냐? 스스로 깨달아야 스스로 바로 잡고 가는 거다. 그런 면에서 교회 인도자들의 책임이 무겁다.
14절-19절: 산 아래로 내려오니까 산 아래는 산 위의 장면과는 딴판이다. 무리들이 빙 둘러있고, 가운데는 간질 하는 아이를 두고 아홉 제자가 서기관들과 변론이 붙었다.
이 때 예수님을 먼저 발견한 무리들이 무서워서 예수님께 달려와 인사를 한다. 이에 예수님께서 ‘너희들이 무엇을 가지고 변론을 하느냐?’ 하고 물으니 무리 중에 한 사람이 뛰어나오며 하는 말이 ‘선생님, 벙어리 귀신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리고 왔나이다. 선생의 제자들에게 내어 쫓아 달라 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라고 했다. 그러니까 아홉 제자들이 귀신을 쫓는다고 할 때는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신 후이니까 예수님은 거기에 안 계셨다.
그런데 벙어리 귀신이 들렸다고 했으니까 이 말을 자세히 생각해 보면 이 아이가 그 전에는 말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귀신이 들려놓으니 병어리가 되어서 말을 못한다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성경에 보면 ‘어릴 때부터 성경을 가르치라. 그리하면 어른이 되어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으리라’고 했다. 그러니까 벙어리 귀신이 들린 이 아이는 성경을 배우고 익히고 할 어린 아기 시기 때에 아마 부모가 성경을 안 가르쳐준 모양이다.
교회학교 교사들이 아이들을 가르칠 때 국어책을 읽듯이 가르치지 말라. 아이들에게 신학도 가르치지 말라. 성경도 모르고 글도 잘 못 읽는 판에 신학을 어떻게 배우겠느냐? 가르치는 선생의 입장이라면 아이들의 알아듣는 수준이나 정신적 마음적 수준에 대해 연구가 들어가는 건데 녹음기에 녹음을 하듯이 가르치는 건 안 된다.
어릴 때부터 성경을 가르치라는 게 성경을 계속 읽어대라는 것은 아니다. 아이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으로 쉽게, 다시 말하면 아이들에게 국어책을 읽듯이 하게 되면 안 된다. ‘누가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그런 표현이 아니고 아이들이 모든 인격 면에서 느끼도록 해 주려니까 여러 가지로 음성이나 행동의 표현이 나오고 하는 거다. 그러니까 ‘호랑이가 울었습니다. 닭소리가 났습니다’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말을 하면서 ‘어흥’ 하면 ‘아, 호랑이로구나.’, 그 다음에 ‘꼬꼬댁 꼬꼬’ 하면 ‘아, 닭이구나’ 할 수 있도록 자연스럽게 표현을 하라는 것이다. 이러려면 연구를 해야 한다. 안 그러면 아이들이 지루해서 못 듣는다.
실력 있는 선생인지, 연구를 하는 선생인지 보면 안다. 그리고 일주일 동안, 아니면 이주일 동안 연구를 한 선생인지 아닌지, 그 자리에서 금방 만들어서 하는 건지 금방 드러난다. 그러니까 준비를 해야 한다. 뭘 하든지 준비가 있는 거다. 준비 없는 선생은 은혜도 못 받는다.
어쨌든 교사들은 주일학교부터 가르치며 올라가면서 신앙 믿음이, 모든 지혜가 자꾸 열리고 올라가야지 주일학교 교사를 하다가 잘리면 올 데 갈 데가 없다. 주일학교 교사를 하다가 잘리더라도 교회는 나오는데 이렇게 되면 ‘일을 하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 하는 그거와 똑같이 된다. 교회에서 가르치던 사람이 잘리면 빨리 교회 오기도 그렇고, 늦게 오기도 그렇고 사람이 참 멋쩍어진다. 어쨌든 교회에서 잘리지 않도록 하라. 쉽게 말하면 하나님 앞에서 잘 보이고 자꾸 올라가야 그게 자기 복이고 그런 거다.
어른들이나 목사들도 신학을 하려면 힘든 건데, 그리고 신학은 성경을 많이 읽은 사람이 하는 건데 주일학생에게 신학을 가르치면 어떻게 되겠느냐? 성경에 있는 내용을 재미있게 잘 구성을 해서 가르쳐도 되는 거다. 그러면 학생들이 감동을 입는다. 교사들이 준비할 때 성령의 감화성을 입으면 듣는 아이들도 들을 때 감화성을 입어간다. 그건 왜 그러냐? 인격성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교회 외의 일상에서 아이들을 귀찮게 하지 말아라.
벙어리 귀신이 들었다는 것은 아무래도 아이가 자라는 동안에 교육적인 면과 정서적인 면에서 문제가 있지 않았나 싶다. 벙어리라고 할 때 가정교육에 있어서 정서면에서, 그리고 구타나 억압 강압에서, 그리고 무관심에서, 그리고 뇌의 이상으로 오는 언어 벙어리, 성격적으로 벙어리, 부모나 어른들의 정서불량에서 말문을 닫은 벙어리 등 여러 가지 형태의 벙어리가 있다.
귀신이 들린 것과 사람의 영혼과는 연관관계가 없다. 사람의 영은 그 영을 지은 하나님과 절대적인 관계가 있는 거다. 마귀와 사단 악령 등도 우리 영과는 관계가 없다. 우리의 이성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구원을 이뤄나갈 때는 영인성장도 잘 되고, 이성과 몸도 성화되고, 하나님의 온전으로 성품화 되어나가고, 죽을 것이 없는 영생으로 다 통과가 되지만 우리의 이성이 세상을 소원 목적하고 살면 우리의 몸은 악의 병기가 된다.
그럴 때에 마귀나 사단이나 악령이 즉각적으로 찾아온다. 이렇게 되면 많은 시험과 올무에 걸리게 된다. 이렇게 되면 자기의 이성이 어두워지고 판단이 흐려진다. 여기에다 어려움에 부딪히기라도 하면 그 성격 성질에 의해서 자동적으로 감정폭발도 나오고 귀신들린 짓도 나오게 된다.
마귀는 성결구절을 가지고 합리화 시키게 하고, 사단이 하는 짓은 남을 모함하고 헐뜯게 만들고, 악령은 들어와서 남을 죽이게 만든다. 자기의 성격 성질이 하나님의 성품으로 거듭나지 못하면 악령 귀신이 붙게 돼 있다. 하나님의 허락이 그렇게 들어가 있다. 이러면 사람이 판단이 흐려져서 도덕성을 잃게 되고 정상적인 생활을 벗어나게 되고 사람이 추해진다.
선악과가 뭔지 모르는 사람들은 아예 사단이나 마귀나 악령이나 귀신에게 노출이 된 상태다. 이런 사람에게는 생명과를 먹게 함으로써 거기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게 사람이 죄에서 탈출이 되는 거다.
세상 모든 것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있는 것이므로 지나가는 것을 잡고 불만을 터뜨리면 본인만 병든다. 항상 실력을 보강할 것이다. 그러려면 자타의 구원의 생각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긍정적으로 사는 것이 좋다. 이런 삶을 살 때 돌발 상황에서는 작전상 후퇴도 지혜로운 일이다. 하나님에게는 돌방상황은 없으나 인간에겐 그런 것이 있다.
그리고 늘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성경 보기, 구원에 관한 활동하기, 이웃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살고, 평소에 악기를 가지고 찬송을 하는 것, 고상한 좋은 음악을 듣는 것 등도 좋다. 소란스런 음악은 피하는 게 좋다. 그런 음악을 들으면 항상 뇌 속에서 그런 작용이 나오게 된다.
영화도 욕지거리만 계속 나오는 걸 보면 자기는 안한다고 해도 보고 들은 그것이 자기의 잠재의식 속에 녹음이 돼 있어서 사건을 만나면 그것이 툭 튀어나오게 된다. 그리고 보는 것도 혐오스런 것은 피하라. 그런 것을 계속 보면 사람의 판단을 흐리게 해서 공격성의 사람이 된다. 조용하고 잔잔한 음악은 마음으로 편하게 하지만 TV 보는 것을 취미로 삼고 있으면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말하자면 더러운 귀신이 들어올 수 있는 구실을 만든다.
벙어리가 무엇이냐? 혀 놀림이 잘 안 되어서 말이 분명하지 못한 게 벙어리다. 두 번째는 자기 마음속에 있는 뜻을 말로 표현을 못하는 것도 벙어리다. 멀쩡한 사람이 벙어리 귀신들린 사람처럼 살면 안 된다.
귀신의 모양이 어떻게 생겼느냐? 어릴 때 도깨비를 그리라고 하면 머리에 뿔을 그렸다. 귀신을 그리라고 하면 혓바닥을 내놓고 머리카락 길게 그린다. ‘귀신이 어떻게 생겼느냐’ 그게 문제가 아니라 성경으로 보면 ‘성령’이라는 글자와 ‘귀신’이라는 글자를 같이 쓰고 있는 것을 보아서 오늘날 교회 안에서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서 사람을 여러 가지로 해치고 교회에 덕을 세우지 못하며 여전히 큰소리치고 있는 것을 볼 때 우리 입장에서 그렇거니 하고 넘어갈 수 없는 문제다.
모든 악령류들은 성령 혹은 성령의 은사인 것처럼 역사를 해서 교회를 속인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교회를 속인다고 할지라도 절대로 속일 수 없는 것은 성령을 받았다고 하는 그들의 소원 목적을 보면 성령을 받은 것인지, 악령을 받은 것인지 알 수 있는 것이다.
성령은 세상기준이 아니다. 세상기준은 선악과 먹고 나온 거다. 성령은 하나님 기준에서 보는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곧, 우리의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의 이룰구원에 대해 신령한 것으로 모두 말씀하신다. 성령님은 예언 방언을 하더라도 거룩한 성도를 붙잡고 역사하신다. 세상 육적이며 성질이 더럽고 한 그런 자들을 붙잡고 역사하지 않는다 그 말이다. 세상 소원 목적을 쫓는 믿음 없는 교인들을 붙잡고 역사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귀신이 교회 안에서 성령의 흉내를 내는데 세상 소원 목적을 가진 목사나 교인을 붙잡고 역사를 한다. 따라서 어느 집회에서 누가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 먼저는 그 집회의 강조점의 정신 사상 소원 목적이 무엇인지를 분별해야 한다. 그러면 그 사람이 뭘 받았는지가 나오는 거다. 받았다고 하는 그 소리만 듣지 말고 무슨 집회에서 그걸 받았다고 하느냐 그 말이다. 집회가 분별이 되면 받았다는 그게 악령인지 성령인지가 나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방언도 배워서 나오는 방언이 있다. 원래 방언은 지방 말이고 외국 말인데, 선생이나 학원에서 방언을 배웠다는 뜻이 아니고 어디 이상한 데 가서 숨도 못 쉬게 연속해서 ‘할렐루야 닛시, 할렐루야 닛시’ 하다 보면 입에서 ‘날랄랄라’ 하고 나오면 그걸 방언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사람의 신앙은 개떡 같다. 그러면 이건 악령의 장난이다.
세 번째는 개인의 신앙이 영인지 육인지? 그거에 따라서 그가 하는 방언이 성령인지 악령인지 알 수 있다. 네 번째는 진짜 성령을 받았다면 성령은 구별하는 영이기 때문에 육적 세상적 교회는 못 다니게 된다. 육적으로 세상적으로 인본주의 사고방식으로 흐르는 그런 교회는 안 간다.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서 그런 교회에 가는 건 성령이 아니라 그 말이다.
다섯 번째는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 왜 진리이치는 못 알아듣느냐? 그렇다면 이건 성령이 아니다. 여섯 번째는 성령은 질서정연한 성령이라. 그런데 왜 밤에 모여서 잠도 안 자고 ‘날랄라라’ 하다가 일을 하고 활동을 하야 할 낮에는 왜 잠을 자느냐? 그게 질서정연한 생활이냐?
일곱 번째는 모이면 방언을 배우고 안수하고 방언을 전달하기. 이건 성령이 아닌 전염병이다. 여덟 번째는 방언을 한다고 했는데 왜 한 방언인데 통역자마다 통역의 내용이 다르냐? 이건 성령이 아니다. 아홉 번째는 자기의 성격 성질도 고치지 못하고 교회에 덕도 못 끼치고 문제를 만들고 있으면서 방언을 한다고 하는 것은 성령이 아니다.
열 번째는 방언 글씨라고 하는 그 글씨가 왜 지렁이처럼 돼 있느냐? 이건 성령이 아니다. 열한 번째는 성령을 받아서 방언을 한다면 외국사람을 만나면 전도를 해야지 왜 안 하느냐? 안한다면 성령이 아니다. 열두 번째는 지금은 각 나라 말로 성경이 번역이 돼 있다. 그런데 한국의 교인이 방언을 했는데 이것을 통역자가 통역하기를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라고 통역을 했다면 한국어 성경에도 이미 그렇게 번역이 돼 있으니 그 방언은 하나마나다. 그러니 이것도 성령이 아니다. 열세 번째는 진리생명의 이치를 깨닫고 자체화 하는데 힘쓸 줄은 모르고 성령을 받겠다고 하는 그 발상은 귀신의 짓들이다.
성령님의 역사는 우리의 이룰구원, 하나님의 온전에 관한 깨달음을 주지만 악령류에게 잡아먹힌 사역자들은 성경을 들고 세상에 속한 종교운동 물질중심 운동으로 치닫고 있다. 거룩한 성령님은 성도들이 예언 방언을 해도 성도들의 이룰구원을 말한다. 이것이 아니면 성령은 아닌 것이다.
성경을 기록한 목적은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기 위해서이다. 창세 이후로 모든 사사건건 환경 존재가 성경 속에 종합적으로 기록이 돼 있는데 그렇다면 그 사건을 왜 일으킨 것이냐? 그 목적은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려고.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세상을 만드신 목적 역시도 그 목적이다. 그리고 우리가 살면서 겪는 모든 사건 역사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려 함이 들어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 믿는 목적이 세상에서 부자 되기 위해서냐? 돈이 좋으냐, 지혜가 좋으냐? 지혜다. 말은 이렇게 알아듣는데도 마음은 자꾸 돈으로 간다면 그 사람은 지혜를 무시하는 사람이다. 이건 어리석은 자이다. 지혜 속에는 돈만 아니라 모든 게 다 들어있다. 돈만 가지면 다라고 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세상을 며칠을 살겠느냐? 자칫 잘못하면 그 돈 때문에 자기가 죽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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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가 인격자이신 하나님의 가장 깊은 심원인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부터 발로된 인간구원의 의사를 좇아서 신앙을 해야만이 기독교 본질에서 이탈하지 않고 가장 효율적 적중적으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덧입을 수 있고, 성도 각자가 이 땅에서 이렇게 덧입은 하나님의 성품의 양에 따라 장차 천국에서의 누림에 차등이 생기게 됨을 성경을 통해 알 수가 있습니다.
김경형목사님께서 교역자 및 신학생을 대상으로 20여년 동안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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