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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나는 나구나!

누가복음 허태수 목사............... 조회 수 589 추천 수 0 2016.02.23 23:5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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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눅18:18-19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2015.9.22주일예배 http://sungamch.net 춘천성암교회 

아, 나는 나구나!  
눅18:18-19 
추석 설교 원고입니다.

지난주 금요일에 강원민방 회의실에서 춘천인문학교 첫 번째 강좌가 있었습니다. 채현국 이라는 팔순 노인의 에너지 가득한 강의가 이어지고 질문이 이어졌죠. 인문학교의 운영위원장이신 정 장로님이 처음 질문을 하면서 말 머리에 ‘존경한다’는 헌사를 하셨습니다. 그러자 채 선생님은 곧바로 ‘존경’이라는 말을 쓰는 건 원수를 맺는 계약이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이런 겁니다. 우리가 종종 누군가를 높일 때 그 이름 앞에 ‘존경하는’ ‘위대하신’ 이런 수식어를 붙이잖아요. 그런데 이런 수식어를 자신이 달고 있으면 진정한 나로서 살지 못하게 하고 거짓된 자기로 살게 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렇지도 못하면서 존경스러운 사람으로 살려고 하고, 선생으로 살려고 하고, 목사로 살려고 하는 겁니다. 성직자나 교사와 같이 남에게 모범이 되어야 하는 사람들이 더욱 그렇습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덧씌워지는 인격을 ‘페르조나’라고 합니다. 본래 가면이라는 뜻인데 사회적으로 규정된 인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처음엔 나를 표현하기 위해 가면을 썼는데, 나중에 가면이 내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고 그것이 내가 되어버릴 수 있습니다. 페르조나가 나 자신과 동일시되면 거짓 자아가 참 자기를 대신하여 살게 됩니다. 이래서 생기는 분열이 얼마나 많은지 우리가 알잖아요. 교회에서는 거룩한 장로인데 집에 가면 정반대로 사는 아버지 꼴 보기 싫어서 교회 안 나간다는 청년의 경우 그 아버지가 그렇습니다.

어떤 지도자가 예수께 와서 매우 겸손한 어투로 예수를 높이는 말을 하였습니다. “선하신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뜻밖에도 예수님은 “어찌하여 너는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나님 한 분밖에는 선한 분이 없다.”고 대답하십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선하신 분이 맞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찌하여 자신에게 선하다는 말을 하지 말라고 하신 걸까요? 예수님은 자기 자신으로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뭔가 군더더기 같은 수식어가 붙여지는 것을 거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설사 그것이 존칭이든 칭찬이든 자기에게 페르조나가 될 수 있는 것은 거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의 이름 앞에 수식어를 붙이기를 좋아하지만 예수님은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귀신들이 그런 존칭을 좋아합니다. 거라사의 귀신들린 사람 이야기에서 군대귀신은 예수님이 다가오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고 소리를 지릅니다. 오늘날 국회의원들이 일단 ‘존경하는 아무개 의원님’ 하고 나서 온갖 공격을 퍼붓는 것처럼, 예수를 높이는 칭호는 마귀의 수사학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계시하실 때 ‘나’ 외에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오셨을 때 제자들이 유령인 줄 알고 놀라 소리 지릅니다. 그때 예수님은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막 6:50)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나다”(에고 에이미)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자기를 계시하시는 용어이기도 합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을 물었을 때 하나님은 “나는 나다”(출 3:13)라고 답하십니다. 히브리어로는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 헬라어로는 “에고 에이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이름 앞에 ‘전능하신’, ‘거룩하고 자비로우신’ 이런 수식어를 쓰지만 하나님은 그런 것 없이 “나는 나다”라고 계시하십니다. 예수님도 바로 이 “에고 에이미”를 가지고 자기를 계시하십니다. 그렇게 참 자기로 사신 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똑같이 수식어에 갇혀 살지 말라고 하십니다. 마태복음 23장 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랍비라는 호칭을 듣지 말아라. 너희의 선생은 한 분뿐이요, 너희는 모두 형제자매들이다. . . 또 너희는 지도자라는 호칭을 듣지 말아라. 너희의 지도자는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마 23:8,10)

남이 씌워주는 화려한 가면에 자신을 가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선하신’이라는 수식어를 거부하신 것은, 실제로는 선하신 분이 맞는데, 우리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서, 또는 겸손하게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까? 이렇게 생각한다면, 예수님이 아무리 “나는 나다”라고 말씀하셔도 우리는 귀를 막고 “네, 맞습니다. 위대하시고, 자비로우시고, 선하신 주님” 이렇게 대답하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그것은 겸손의 말씀이 아니라 실제로 자신이 선하지 않다고 말씀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인간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선하기만 하거나 악하기만 한 사람은 없다고 합니다. 누구나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고, 밝은 면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너무 페르조나가 강한 사람은 자기 속의 어둠을 견뎌내지 못합니다.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결점도 자기만 갖고 있는 것처럼 불행하게 여기고 한없는 죄의식을 느낍니다. 그래서 카를 융은 우리 속의 그림자, 어둠을 통합해야 진정한 자기가 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융은 이것을 성서에서 배웠습니다. “어찌하여 너는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나님 한 분밖에는 선한 분이 없다”라고 말씀하실 때, 예수는 자기 속의 그림자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어둠을 통합하면서 진정한 자기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도 로마서 7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내가 원하는 선한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한 일을 합니다. 내가 해서는 안 되는 것을 하면, 그것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죄입니다. 여기에서 나는 법칙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곧 나는 선을 행하려고 하는데, 그러한 나에게 악이 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롬 7:21-24) 이 얼마나 진실한 고백입니까. 이렇게 자기 속의 그림자를 직시했기에 그는 그것을 통합할 수 있었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존재로 태어날 수 있었습니다.

야곱이야말로 그림자가 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형의 장자권을 빼앗기 위해 눈이 어두운 아버지와 어수룩한 형을 속였습니다. 외삼촌이자 장인인 라반을 속여서 더 많은 양떼가 자기 것이 되게 합니다. 그런데 야곱은 자기 속의 이런 어둠을 보며 좌절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 그림자를 회피하지 않고 직면하는데, 그것의 절정이 얍복강에서 천사와 씨름한 것입니다. 허리가 부러지는 고통 속에서 그 통합의 씨름을 포기하지 않았을 때 그는 새로운 자기로 탄생했고 이스라엘이라는 명예로운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선하신’이라는 수식어를 거부하신 예수처럼 우리도 그런 수식어, 가면, 페르조나에 갇히지 말아야 합니다. 사장, 회장, 판사, 검사, 변호사, 목사로서 본분을 다하는 것은 좋지만 그것이 가면이 되어서 나를 규정하게 내버려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것은 언젠가 내 얼굴에 붙어서 떼려고 해도 떨어지지 않게 되고 그때 우리는 자기 자신을 잃게 되기 때문에 허탈하고 불행하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사람이 가장 행복한 때는 자기 자신으로서 살 때입니다.

< 버드맨>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주인공은 젊은 시절에 배트맨이나 수퍼맨 같은 영웅 역할인 버드맨 역으로 알려진 배우입니다. 그는 지금은 브로드웨이에서 연극을 하면서 자기를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가 아무리 그 자신을 표현하려고 노력해도 그를 그 자신으로서 보아주지 않습니다. 사람들에게 그는 버드맨일 뿐입니다. 어디를 가나 버드맨이 망령처럼 붙어다니고 떨어지지를 않습니다. 급기야 그는 연극 속에서 자살하는 장면에서 모형 총이 아닌 진짜 총으로 자기 머리에 실탄을 발사합니다. 그의 그런 행동은 페르조나에 갇힌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한 것이었고 이것은 연극계에 큰 충격을 줍니다. 신문에서 대서특필했고 그는 다행히 코를 다쳤을 뿐 죽지는 않았습니다. 전화위복으로 이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나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화장실에 갔다가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숨어 있는 버드맨을 보게 됩니다. 그는 자신은 영원히 버드맨이라는 가면을 벗어버릴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영화는 그가 진짜 버드맨처럼 창문을 넘어 날아가는 것(자살)으로 끝납니다.

페르조나는 이렇게도 무서운 것입니다. 이제 어찌하여 예수님이 자신에게 ‘선하신’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을 거절하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외부에서 주어지는 가면이 될 때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진정한 자기가 되지 못하게 하며, 거짓된 삶을 살게 하고, 마침내 죽게 만듭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덧씌워질 수 있는 가면은 어떤 것입니까? 회장, 사장, 변호사, 판사, 검사,  성직자, 장남, 착한 사람, 착한 여자, 예쁜 여자...이런 것들이 분명 우리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이겠지만, 그것이 가면이 되는 순간, 우리는 자기를 잃어버리게 되고 우리의 그림자는 더욱 짙어집니다. 그러면 남의 그림자, 상대방의 어두운 면만 눈에 들어오게 되고 남을 비난, 배척하는 일만 하게 됩니다.

가을은 만물이 여름내 살아온 그 허위의 가면을 벗는 계절입니다. 추석은 자기가 태어난 그 본바탕을 가린 채 허둥허둥 살아온 생존의 페르조나를 벗는 날입니다. 고향이라는 거울 앞에서, 부모와 조상이라는 존재의 자궁 안에서 민낯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본래의 제 얼굴을 본 다음에 소리치는 것입니다.
“아, 나는 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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