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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행3:1-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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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부겸 목사 |
참고 : | 2011년 1월 2일 주일설교 수도원교회 http://blog.naver.com/malsoom/119372169 |
성경말씀 : 사도행전 3장 1절~10절
설교제목 : “하느님의 진리는 살아서 움직이신다”
【오후 세 시 기도를 하는 시간이 되어서,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올라가는데,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인 사람을 사람들이 떠메고 왔다. 그들은 성전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게 하려고, 그 앉은뱅이를 날마다 '아름다운 문'이라는 성전 문 곁에 앉혀 놓았다. 그는,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들어가려는 것을 보고, 구걸을 하였다.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그를 눈여겨 보고 나서, 그에게 "우리를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 앉은뱅이는 무엇을 얻으려니 하고, 두 사람을 빤히 쳐다보았다. 베드로가 말하기를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그대에게 주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 하고, 앉은뱅이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는 즉시 다리와 발목에 힘을 얻어, 벌떡 일어나서 걸었다.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그가 걸어다니는 것과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보고, 또 그가 '아름다운 문' 곁에 앉아 구걸하던 바로 그 사람임을 알고서, 모두 그에게 일어난 일로 크게 놀랐으며, 이상하게 여겼다.(사도 3:1~10)】
<책 이야기>
최근 톨스토이의 『참회록』을 읽어보았는데, 조금 실망스러웠습니다. 물론 좋은 메시지들도 있기는 했습니다.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이 책은 이성주의자(理性主義者)의 갑갑한 독백 같은 느낌이 너무 강했습니다. 톨스토이는 오로지 인간의 이성을 신봉하는, 합리적인 사상가 정도의 인물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좀 갑갑했습니다.
경제적으로 풍족했고, 그래서 시간이 넘쳐났던 톨스토이는 너무 한가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톨스토이의 글은 지루하게 늘어지는 경향이 있었고, 글 속에 강렬한 열정이라든가 긴박한 불꽃이라든가 칼날 끝 같은 예리함이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읽기가 좀 답답했습니다. 물론 제 개인적 소감일 뿐입니다.
제가 알기에, 톨스토이는 기독교 신앙과 관련해서 일체의 기적 이야기를 거부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다만 이성적으로 합리적인 신앙 이야기만을 좋아했습니다. 비이성적인 신앙은 미신으로 치부했고, 그래서 그런 비이성적 신앙 이야기는 그의 신앙생활에서 철저하게 제외시켰습니다. 물론 톨스토이의 그런 이성주의적 경향이 시대적인 상황상 어쩔 수 없다는 점을 저도 인정은 합니다. 당시 러시아 정교회가 비이성적 신비주의로 우매한 민중을 현혹시키는 아주 잘못된 종교정책을 취하고 있었고, 그런 부당한 교회 현실에 대해서 톨스토이가 문제를 지적하는 차원에서 ‘이성적 신앙생활’을 주창하게 되었다고 생각은 듭니다.
그러나 이성적 신앙생활의 폐단 역시 우리가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그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성경 이야기>
이제 성경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후 세 시 기도를 하는 시간이 되어서,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올라가는데,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인 사람을 사람들이 떠메고 왔다. 그들은 성전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게 하려고, 그 앉은뱅이를 날마다 '아름다운 문'이라는 성전 문 곁에 앉혀 놓았다. 그는,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들어가려는 것을 보고, 구걸을 하였다.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그를 눈여겨 보고 나서, 그에게 "우리를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 앉은뱅이는 무엇을 얻으려니 하고, 두 사람을 빤히 쳐다보았다. 베드로가 말하기를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그대에게 주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 하고, 앉은뱅이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는 즉시 다리와 발목에 힘을 얻어, 벌떡 일어나서 걸었다.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그가 걸어다니는 것과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보고, 또 그가 '아름다운 문' 곁에 앉아 구걸하던 바로 그 사람임을 알고서, 모두 그에게 일어난 일로 크게 놀랐으며, 이상하게 여겼다.(사도 3:1~10)】
오늘 성경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문 앞에 있던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기적을 행한 이야기입니다. 글쎄요. 놀라운 이야기이고, 쉽게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정말 특히 조심해야할 이야기입니다. 예전에나 지금의 많은 부흥집회 현장에서 이 ‘앉은뱅이’ 이야기가 단골메뉴로 거론되면서 ‘기적 체험의 현장’ 이야기거리로 이 성경 본문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기적이란 그렇게 쇼하듯이 일어나는 약장수용 볼거리는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성경말씀을 해석해야 할까요? 글쎄요. 저라고 뾰족한 수는 없습니다만, 저는 이 성경말씀을 ‘진리(眞理)의 역동성(力動性)’이라는 말로서 풀어보려 합니다. 즉 “참된 이치는 힘차고 활발하게 움직이는 성질이 있다”는 말로 이 성경구절을 풀어보려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느님의 진리는 살아서 움직인다는 점입니다. 하느님의 진리가 가만히 앉아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다는 점입니다. 움직이는 것이죠. 움직이게 하는 겁니다. 살아서 숨쉬는 실체, 그래서 역동적으로 역사하는 실체, 그게 하느님의 진리라는 것이죠.
<성경의 해석>
서른살 안팎의 젊은 나이지만 하느님 진리의 세계로 진입한 청년 예수, 그리고 그와 더불어 지내면서 역시 하느님의 진리로 진입한 인격이 된 두 사람, 베드로와 요한이 어느 날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갈 때, 그 문 옆에는 태어날 때부터 앉은뱅이인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베드로와 요한을 쳐다보았습니다. 그 앉은뱅이가 베드로와 요한에게 바라는 바는 ‘은이나 금’이었습니다. 즉 돈이었습니다. “돈을 좀 줍시오.”
그때 성전 문을 지나던 베드로와 요한에게 앉은뱅이의 간절한 마음이 읽혀졌습니다. 그래서 문득 걸음을 멈춰섰습니다. 앉은뱅이가 간절하게 구걸하는 돈,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그 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잠깐 고민에 빠졌지만, 이내 평정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두 사도가 보았을 때 그 앉은뱅이에게 근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 앉은뱅이에게 근본적으로 더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그 돈을 벌어들일 수 있는 육체적 건강이었고, 더 나아가서 그에게 필요한 근원 중의 근원은 하느님의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은 그 두 가지의 선물을 그 앉은뱅이에게 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소리쳤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그대에게 주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 베드로는 앉은뱅이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고, 그는 즉시 다리와 발목에 힘을 얻어, 벌떡 일어나서 걸었습니다.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갔습니다. 사람들이 그가 걸어다니는 것과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보고, 또 그가 '아름다운 문' 곁에 앉아 구걸하던 바로 그 사람임을 알고서, 모두 그에게 일어난 일로 크게 놀랐으며,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하느님의 진리는 살아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진리는 불치병인 앉은뱅이를 고칠 수 있습니다. 왜일까요? 하느님의 진리는 살아있는 실체이기 때문입니다.
<작은 예화 하나 / 설교의 결론>
오래전 그림을 그리시는 조광호 신부님이 쓰신 책 『꽃과 별과 바람과 시』(샘터)를 읽었는데, 거기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20대 초반의 젊은날에 청년 조광호는 강원도의 어느 산골 채석장에서 일을 했었는데, 그때 작업환경이 참 위험했습니다. 산만한 바위들이 굴러 떨어지는 데서 일을 하다보니, 위험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젊은이가 쩔쩔매면서 전전긍긍하니까, 작업반장쯤 되는 노인네가 너털웃음을 지면서 이야기하더랍니다. “젊은이 사람이 바위를 피하는 게 하니라, 바위가 사람을 피해간다네!” 어느 덧 노년에 이른 조광호 신부님은 지금도 그 작업반장의 이야기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물론 우리가 위험한 삶의 상황들을 조심하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만, 그 한편으로 “바위가 사람을 피해가는 것임”을- 즉 하느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시는 것임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진리의 역동성입니다. 하느님의 진리는 이성 안에 갇히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진리는 이성 안팎에서 자유롭게 움직이시는 실체입니다. 하느님의 진리는 이성(理性)이나 과학(科學), 논리(論理)와 철학(哲學) ……… 등등의 그 어떤 구분 안에 갇히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진리는 그 모든 것들을 넘나들면서 ‘성령의 역사’를 실행하는 실체입니다. 또한 하느님의 진리는 너와 나, 그들과 우리들, 남한과 북한, 강대국과 약소국, 지구별과 우주만물 …… 그 모든 구분들을 넘나들면서 하느님의 진리는 살아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리의 역동성입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이제 설교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말씀의 제목을 “하느님의 진리는 살아서 움직이신다”라고 잡아보았습니다. 오늘 이 설교말씀의 제목을 잘 묵상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축도
이제는 진리의 세계로 진입한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와 우리 생명의 근원 되시는 하느님의 신비로운 사랑과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아름다운 곳으로 인도해 주시는 성령님의 은총이 우리 수도교회 교우들 머리 위에 영원토록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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