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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이워 죽임을 당하고 삼일만에

마가복음 궁극이............... 조회 수 423 추천 수 0 2016.02.29 10: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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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막9:28-32 
설교자 : 김경형 목사 
참고 : 궁극교회 주일예배 

9장 28절-32절: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종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하였나이까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그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 새 예수께서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시니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연고더라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무서워하더라.


성경의 모든 해석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려고 기록이 되었다’고 했듯이 이 온전에 맞춰서 해석을 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도 우리를 당신처럼 온전케 하려고 오신 것이다. 이 온전이란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으로 되는 것을 말하는 거다. 이 온전이 우리의 실상이다. 우리를 이 실상적 존재로 만들어 주시려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모양대로 우리 인간을 만들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로 통해서 하나님의 실상의 질을 가진 자로 우리를 만드신다.


하나님의 본질이 살상인데, 신앙의 세계에서 이 본질을 모르면 자기가 성경을 해석하면서 아무리 역사적으로 말을 하고 성경구절을 갖다 붙여도 그 해석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른다.


그러면 마귀는 성경구절을 안 붙이느냐? 거짓 종들은 성경구절을 안 붙이느냐? 이단자들은 성경구절을 안 붙이느냐? 여호와의 증인들은 성경구절을 안 붙이느냐? 여호와의 증인들만 이단이냐? 오늘날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오순절 은혜교회 열린교회 벌떼교회 무리교회 등등 이름도 다양한데 어쨌든 성경구절을 안 쓰는 목사는 없다. 성경구절을 안 쓰는 교회는 없다. 그러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자가 얼마나 되느냐?


질적으로 하나님의 성품에 맞는 사람을 본질의 사람이라고 한다. 구복주의 사회주의 은둔주의 신비주의 초절주의 현세주의 등등은 아무리 성경을 가지고 해도, 예수를 믿어도 주의가 목적이 그렇기 때문에 이거는 천국복음이 아니고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다. 이질로 나간 것들이다. 이거는 저주를 받는다.


목사님의 메시지가 하나님의 성품으로 들어가야 한다. 성경 속의 존재, 사건, 이사 가는 거, 노래 부르는 거, 시, 크고 작은 전쟁 전부는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온전을 이루기 위해서 기록이 된 것이다. 그럼에도 예수 믿는 사람이 예수를 못 닮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성품을 못 닮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세상화 된 인본주의 교회에서는 예수이름으로 하지만 목적이 종교적 사역으로, 종교적인 이력으로 들어가 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사람이 복되게 서는 것이 아닌데 이들은 이루어 놓은 일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한다. 이건 사람이 속성적으로 하나님의 본질의 사람으로 서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일을 하려면 돈이 있어야 하고, 건강해야 하고, 집이 부자라야 할 수 있는 것이니 이들의 말대로라면 그런 일을 할 수 없는 돈 없고 병든 사람들은 믿음이 없는 거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는 사람이 된다. 이게 마귀 수법이다.


마귀의 수법은 예수 믿게 하고, 부지런히 믿으라고 하고, 열심히 믿으라 하고, 빨리 가라고 하면서 밀어버린다. 그러면 사람이 넘어져 버린다. 이게 마귀의 수법이라. 일을 열심히 하게 하고, 기도를 열심히 하게 하면서 성경의 뜻을 모르게 하는 것이 마귀의 수법이다. 지혜지식적으로, 도덕성적으로 선 사랑 거룩 진실, 능력성적으로 의와 주권의 사람이 되지 못하게 만든다. 


성경을 모르는데 사람이 어떻게 주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지겠느냐? 그런데 수십 년을 믿고 충성봉사를 해도 아는 게 없고, 충성봉사는 열심히 하는데 사람이 성격이 고쳐졌나 성질이 고쳐졌나? 예수 믿기 전과 똑같다. 그러니 어떻게 전도가 되며,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의 복을 받겠느냐? 일반적인 이치로도 부모가 말 잘 듣는 자녀에게 용돈도 주고 맛있는 것도 사준다.


말씀에 순종이 들어가야 겸손인데, 말씀에 순종은 말씀대로 사람이 만들어지고, 인격이 고상하고 아주 높고, 지혜지식이 명철하고 총명하고, 일이 있을 때 그 판단력이 빠르다. 안 믿는 사람은 일을 놓고 물질적 이해타산으로 따진다. 주님은 ‘물질을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하나님 앞에 사람이 넘어지지 말아라. 믿음 팔아먹지 말아라. 바로 서라’고 하신다.


예수님께서 아이를 고치실 때에 그 아이를 어느 기준에 염두를 두고 고치심인가? 일반적으로 건강한 몸으로 살라고 건강의 의미로 고쳐주심인가, 아니면 이 세상 사람들 중에 인간기준이 있어서 예수님께서 그 사람의 기준을 염두에 두고 고쳐주심인가? 이방종교인들은 어느 기준으로 하느냐? 자기가 믿는 신이 기준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병자에게 안수하는 사람들이 어느 기준에 두고 안수를 하더냐? 기준도 알지 못하고 그냥 고쳐달라고 하고, 그냥 살려달라고만 하면 되는 거냐?


우리의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은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온전이다. 당신처럼 그 말이다. 우리는 존재적으로는 하나님은 아니로되 예수님처럼 그 성품이 닮아지는 것. 예수 그리스도의 분량에 이르기까지 장성하라. 성장하라. 예수 그리스도의 분량이라는 게 뭐냐? 키? 몸무게? 당신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속성 성품 인격 고차원적인 하나님의 지식 지혜를 말한다.


그 지식이라야 지혜가 나오게 돼 있다. 지식도 없는데 지혜가 어떻게 나오겠느냐?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성으로 이해타산이 들어가 있으면 하나님의 지식 지혜는 안 나온다.


성경은 누구의 지식이냐? 하나님의 지식이다. 솔로몬은 누구의 지혜가 나왔느냐? 하나님의 지혜가 나왔다. 하나님의 지혜는 판단이 어떻게 나오느냐? 죽은 것과 산 것을 갈라놓는다. 생명적인 것과 사망적인 것을 갈래내는 것이 지혜다. 교회로 말하자면 교인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아는 것이 지혜다.


신앙 믿음이 자라지 못하고 그 생명력이 죽어있는 교인을 누가 길렀느냐? 어머니는 양육자니 그 자녀의 신앙성을 보고 부모를 알 수 있다. 열매를 보아 속에서 무엇이 나오는지 알 수 있듯이 그 열매를 보아서 ‘이거는 어디서 나왔구나’ 하고 그 나무를 안다.


창세 때부터 마지막 그날까지 인간이 생긴 이후로 우리의 완전하고 온전하신 절대적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뿐이시다. 불교 유교 등 다른 것은 일반세상에서는 종교라고 하지만 그거는 세상이 그렇게 말하는 거고, 우리에게는 ‘신앙 믿음’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뿐이다. 이게 성경대로 믿는 것이다. 이 분만이 참 신이다. 다른 신은 신이 아니다.


30절-32절: ‘갈릴리’란 ‘원’이라는 뜻이다. 말하자면 원은 동그라미인데, 신앙 정신 사상적으로 느낌적으로 말하면 이것은 범위 한계 라인을 말한다. 정신 사상적 소원 목적 취미 추구에는 그 라인이 있다. 이건 무형적인 라인이다.


옛날 기차간에서 보면 긴 의자에 채소장사들은 양쪽 가장자리에 앉아있고 일반사람은 그 가운데 앉아있는데, 양쪽 가장자리에 앉은 채소장사끼리 얘기를 하면 가운데 앉아있는 일반사람에게 말을 하는 게 아니라 그 옆 가장자리에 있는 채소장사에게 말을 하는 것이다. 일반사람은 그들과 같이 앉아있고, 그들의 말을 같이 듣고 있어도 눈에 보이지 않는 채소장사들의 라인에서 제외가 되는 것이다. 채소장사끼리만 얘기를 하는 거다. 거기에는 보이지 않는 채소장사끼리의 라인이 있는 것이다.


성경에 지방의 도시이름이 나오면 반드시 라인을 생각하라. 유대 안에 예루살렘이 있는데 유대가 크냐, 예루살렘이 크냐? 유대가 크다. 그러니까 지역적으로 ‘유대’라 할 때는 이건 하나님의 백성 전체성을 말하고, 또한 그 지역을 들고 와서 어느 왕의 관할을 받는 한계를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유다 안의 예루살렘’ 하게 되면 ‘보통’이 아닌 ‘특’이 들어간다. 그러니까 평화의 성을 말하고자 할 때 ‘유대 안의 예루살렘’이라고 하기도 한다.


이 평화는 일반개념이 아니다. 하나님과 의사단일이 돼야 참 평화가 되고 참 화목이 되는 거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이걸 아느냐? 유엔에서 평화를 외치면 이건 하나님과 대적이 아니냐? 민주주의가 성경적인 거냐? 성경에서 제비뽑기를 한 것은 민주주의를 하자고 한 거냐?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고 하니 방편이 그 방편이 나온 거다.


그러면 오늘날 민주주의 식으로 투표를 하는 게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한 거냐? 아니다. 이건 성경의 투표와는 다른 거다. 우리 대한민국 백성이 다 하나님의 백성이냐? 눈에 보이는 것만 가지고 생각을 하니 이치가 맞아 들어가지를 않는다.


‘유대 안의 예루살렘’이라고 할 때 하나님의 특별보호를 받는 예루살렘 성을 의미하는데, 계:에 보면 성 밖으로 버려지는 사람이 있다. 또한 ‘예루살렘하고도 그 예루살렘 안의 성전’이라고 할 때는 하나님의 본질의 실상적인 것을 가지고 딱 재니 ‘아, 이건 아니구나’ 하고 밟혀지게 권 밖으로 내버려지는 것을 이룰구원에서 깨닫게 하려고 그 표현을 하는 것이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보고 ‘어린아이들과 같지 않으면 결단코 하늘나라에 못 간다’고 했는데 그럼 이게 지옥 간다는 말이냐? 이룰구원 차원에서 하나님의 속성적 성품으로 이뤄져 가는 그 면의 교훈임을 모르면 이런 말을 의례히 지옥 아니면 천국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그런 식의 해석이 이단일 줄을 모르고 있다. 마귀소리인 줄을 모르고 있다.


실질적으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속에 이질성이 얼마나 많으냐? 욕심도 많고, 성격 성질도 안 고쳐지고, 자기만 편하려고 하고. 이건 다 안 믿는 사람들의 속성이다. 그러면 믿는 사람이 이처럼 안 믿는 사람들의 속성을 가졌으니 앞에서 말한 사람들의 말대로라면 이들은 죽으면 어디로 가겠느냐? 지옥이라고 말할 거냐? 이건 이단소리다.


같은 이치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라고 했으니 그러면 제자들이 그 날로 어린아이들처럼 기저귀차고 발발 기어 다녔느냐? 말씀에서 이치를 바로 못 깨달으면 이건 소경이다. 이건 깨달음에 있어서 벗은 자와 같다. 이게 부끄러움이다. 성경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다.


나는 누굴 위해서 예수를 믿는 거냐? 이방 불신자들은 현세에서 자기에게 손해가 나는 것이라면 피터지게 싸우는데 예수 믿는 사람이 자기를 위해 믿는다고 하면 죽음 저 너머에서 자기가 존귀영광자기 될 것인지, 망해먹을 것인지 그 면을 현실에서 볼 줄 알아야 할 것이 아니냐? 그 면은 볼 줄을 모르고 세상 이해 타산적으로만 예수를 믿고 있으니 강도들에게, 거짓 종들에게, 마귀의 부림을 받는 자들에게 다 이용감이 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양떼들에게, 목자에게 순종만 하는 양떼들에게 거짓 종이 가면 이는 비유컨대 이리가 양의 옷을 입은 거라. 그래서 양을 다 잡아먹는다. 양의 노력과 수고와 시간투자성을 다 잡아먹는다 성장이 안 된다.


‘갈릴리’란 ‘원’이라는 뜻이다. 범위 한계 라인을 말한다. 왜 이런 용어를 들어서 우리에게 말씀을 하시는가? 그 은밀한 뜻은 갈릴리란 계시적으로 세상을 말하고 있다. 예를 들어서 ‘갈릴리 바닷가’ 하게 되면 세상의 축소판을 말하는 것이다. 세상의 축소판으로 갈릴리를 갖고 와서 그 안에서 되어지는 일들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걸 확대시키면 오늘날 예수 믿는 자기의 세상을 말해준다. 그걸 볼 줄 알아라. 계시의 눈은 크게도 보고 좁혀서도 보고, 한 사람으로도 보고 단체로도 보고, 그렇지만 변할 수 없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본질(하나님의 성품을 닮는 것)을 가지고 보는 거다.


‘갈릴리 바닷가에 산다’ 할 때 오지에서 사는 소외된 자들을 말한다. 어부들이 갈릴리 바닷가에서 고기를 잡으며 산다. 그러니까 이들은 가난한 사람들이다. 이걸 들어서 계시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뭘 근거를 삼고 더 큰 것을 잡아보며 살고자 하는지를 말해준다. 이들은 그물이 찢어지면 깁고, 더 큰 고기를 잡으려면 그물이 더 커야 하고 배도 커야 한다. 교회도 보면 그런 게 많이 들어있다. 그 요소성이 세상과 똑같다. 다만 모양새만 다르게 보이는 것뿐이다.


예수님께서 성전 안에서 짐승 팔고 돈 바꾸는 자들을 내쫓으면서 뭐라고 하셨느냐? ‘착하고 선한 사람들아’ 라고 했느냐? 강도들이라고 했다. ‘내 집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지 말라’고 했다. 그러면 그들이 무슨 강도짓을 했느냐? 일반적으로 그들은 강도짓을 안 했지만 예수님의 눈으로 보니 이들은 강도들이다. 이들은 성도들의 영적 면을 사냥하고 있었다. 물질을 들고 와서 달콤하게 만들고 영적 면을 싹 뺏어가고 있었다. 그게 보이느냐?


본문에서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 새’ 라고 했는데, 이는 ‘세상이라고 하는 가운데로 지날 새’ 라는 뜻이다. 갈릴리를 지나면서 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 하셨다. 즉 아무 말씀도 안 하셨다. 이는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지방의 여러 고을들을 통과는 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 갈릴리 지방의 사람들의 신앙이라고 하는 그 정신과 사상이 그 성질이 세상성으로 되어 있으면, 자기의 신앙 정신 사상이 질적으로 세상성으로 들어가 있으면 예수님은 한 말도 않고 그 가운데로 지나가 버린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뜻이냐? 자기 속에 세성성의 성질로 들어있으면 조명적 영감이나 각성적 영감으로 깨달음을 하나도 못 받는다는 것이다.


성경에 나타난 모든 것은 비유요 비사다. 이 비유와 비사 속에 상징적인 것도 들어있고 모형적인 것도 들어있다. 그러나 자기 속에 세상성으로 들어있으면 절대로 개달음을 못 준다. 자기 마음바탕 속에 세상 소원 목적 이해타산 평가로 들어있으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말씀이 지나가도 그에게는 조명적 각성적 영감의 깨달음은 없다. 이게 자기의 현실인데 이게 믿어지느냐?


오늘날 젊은이들 마음속에 머릿속에 배우들이 밟고 지나가고, 가수들이 밟고 지나갔다. 머리통이 그렇게 굳어졌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예수님이 지나갔다면 그 정신이 지혜로울 텐데 세상이 밟고 지나갔기 때문에 세상으로 굳어져 버렸다.


27절에 보면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주님께서 물으시니까 베드로의 고백이 있었다. 그리고 ‘인자가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살아난다’ 하는 그 말씀 끝에 베드로가 ‘그리마옵소서’ 하니까 예수님께서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했고, 9장 1절에서 변화산상에서 천국이 임하는 것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 외에도 많은 사건들이 있었지만, 어쨌든 제자들이 갈릴리를 통과하면서 무서워하고 두려워했다. 왜냐? 변화산상에서 헛소리 했다. 장막을 짓되 누구누구를 위해서?


그러면 변화산상에 나타난 이 세 분이 세 제자의 눈에 환상으로 나타난 거냐? 허상이냐? 실상이다. 천국에 들어가면 만나는 그 장면이다. 신앙의 세계에서 ‘보았네. 들었네. 꾸었네’ 하는데 이건 실상을 몰라서 그 모양이다.


산 밑에서 아홉 제자가 우스운 꼴을 당했다. 세 제자는 산에 올라가 있고 아홉 제자는 미친 자를 붙잡고 씨름을 했다. 그 신앙의 수준이 오늘날 교회의 모습이다. 오늘날 교회가 뭘 붙잡고 씨름을 하고 있느냐? 교회는 뭘 붙잡아야 하는 거냐?


성도가 육적인 것을 붙잡고 씨름을 한다면 무엇부터 미쳤다는 증거냐? 정신 마음부터 미쳤다는 증거다. 사람이 왜 그 지경까지 내려간 것이냐? 뭘 못 붙잡아서 그런 것이냐? 이치를 캐면 원인은 그냥 나오는 건데 오늘날 교회들이 알지도 못한 채 계속 귀신들린 기도를 하고 있다.


주님과 인격적 관계가 없는 물질적이고 육적인 기도는 귀신들린 자가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한 것처럼 귀신들린 기도일 뿐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이런 기도, 이런 설교를 많이 하고 있다.


믿는 우리가 주님과 인격적 수수관계로 살아야 하는데 그 관계는 다 끊어놓고 뭘 구하느냐? 교회에서 다른 거 하려고 하지 말라. 성경에서 영적 이치를 똑바로 깨달아라. 그러면 성령님이 자꾸 역사하신다.


권사 장로가 식당을 하는데 주일날 장사를 하면서 벽에 ‘처음은 미약했으나 나중은 창대케 되리라’ 라는 글을 써서 붙여놓은 것을 봤다. 이건 영적 이치적으로 말하자면 자기 몸을 파는 창녀 짓을 해서 십일조를 내는 격이라. 교회에서 그런 자를 장로 권사로 세운다. 다른 교회에서 그런 자가 자기 교회에 들어오면 옳은 종은 그걸 가만 두지 않는다. 먼저 믿은 자로서 먼저 뛰어야 할 텐데 그 모양이니 교회가 어떻게 되겠느냐? 그러니 교회가 바로 설 수가 없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죽는다고 하니까 베드로가 ‘그리 마옵소서’ 라고 해서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하는 책망을 받았다. 그 후에 예수님께서 ‘인자가 사람의 손에 넘기어 죽는다’고 하니까 제자들이 이제는 완전히 두렵고 무서워서 무엇을 물을 마음도 없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그 마음을 아시고 아무 말씀도 안 할 수도 있고, 어쨌든 생각과 마음이 두려움에 잡혀 있으면 예수님께서 동행은 하시지만 깨닫는 수입이 없다.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기어진다.’ ‘인자’란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인데, 이 인자가 사람의 손에 넘기어진다?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오셨고,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을 우리에게 이뤄주려고 오셨다. 천국의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을 온전히 입혀 주시려고 오셨다. 그런데 이 분이 사람들의 손에 넘기어진다는 이게 무슨 말이냐? 이 역사를 들고 와서 오늘날 우리에게 뭘 말하는 거냐? 간단히 말하자면 한 마디로 천국복음이 세상이라고 하는 땅의 사람, 땅의 복음에게 넘어간다는 말이다.


마귀의 짓은 성경을 말하면서 예수님의 천국 정신 사상 성품은 쏙 빼버리고 땅 쪽으로 소원 목적을 향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성도가 예수님의 성품으로 성장되고 장성되는 것은 없어지는 거다. 예수학교는 다녔는데 예수를 아는 지식은 없다. 그런 일들이 언제고 어느 시대고 교회 안에서 벌어지고 있다. 


예수님의 정신 사상을 쏙 빼버리고 예수님이 활동한 그 부분만 가지고 그 일을 하는 것이 신앙이라고 하니, 인간들이 자기 좋은 쪽으로만 믿고 있으니 이건 예수님이 사람의 손에 넘어간 것이다.


성경대로 본다면 오늘날 교회에 거짓 종이 많으냐, 참 종이 많으냐? 인간의 연대적으로 말하자면 2천 년 전부터 예수님 당시도 말세라고 했다. 그러면 2천 년이 지난 오늘날은 말세가 얼마나 더 가까워졌느냐? 말세가 되면 거짓 종들이 많다고 했는데 계:를 보면 거짓 종들이 90% 이상 되는 것 같다.


그러면 오늘날 자기가 다니는 교회를 말씀의 본질을 놓고 심사를 해 보았느냐? 본질을 모른다면 어쩔 도리가 없고. 자기가 예수를 믿는 신앙 믿음을 질적인 면에서 염려도 하고 걱정도 해 봤느냐, 아니면 성경구절대로만 봤느냐? 사람을 볼 때 모양새 신장 평수 겉만 보느냐? 눈에 안 보이는 마음 정신은 안 보느냐? 겉만 보면 100% 속은 사람이다.


그러니 오늘날 결혼 상대자를 보는 것도 하나님은 없다. ‘하나님-->인간-->물질’의 순서가 옳은 것인데 이게 그만 거꾸로 돌아가서 안 믿는 사람은 ‘물질-->인간’으로 돼 있고, 이들은 하나님은 없다. 믿는 사람은 ‘물질-->인간-->하나님’으로 하나님은 맨 밑으로 들어가 있다. 이게 타락인데 예수 믿는 사람이 이걸 타락인 줄을 모르고 있다. 지식적으로 소원 목적적으로 성질 성분적으로 타락으로 된 그 질을 모르고 있다.


사람이 소원 목적을 갖는 것이나, 설교를 할 때도 ‘하나님-->인간-->물질’의 순서로 되어야 정확하고 옳은 것인데, 물질은 일이요 사업이요 눈에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물질을 자기 머리 위에 올려놓고 살고 있다. 그래서 인간 타락 이후에 예수님의 복음은 ‘물질-->인간-->하나님’으로 돼버렸다. 예수님이 오셔서 이걸(하나님) 위로 올리는 거다. 제 자리고 놓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 자리로 놓으라고 하는데 안 들어가려고 한다. 이게 인간의 심성이다.


사람이 타락이 되어 물질이 자기 위에서 지배를 하고, 물질이 위에서 자기를 누르고 있으니 근심 걱정이고 스트레스를 받고 머리가 아프고 무겁다. 이치를 어기니 그렇다. 기독교인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이 자기 옆의 종으로 돼 있다. 하나님이 세상 것을 갖다 주는 인간 자기의 종으로 들어가 있다. 이처럼 이치를 어기면 이단소리가 된다. 거짓 종이 된다.


아무리 주여 주여 불러도 누구의 뜻대로? 아버지의 뜻대로. 그러면 아버지 뜻이 뭐냐? 주님 당신처럼 닮는 것. 하시하처를 막론하고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당신의 온전한 성품을 닮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다. 예수님을 닮는 이것은 가난해도 닮을 수 있고, 부자가 돼도 닮을 수 있고, 거지가 돼도 닮을 수 있는 거다. 그런데 이건 없이 세상의 사는 조건이 좋으면 잘 믿는 것 같고, 사는 조건이 나쁘면 예수님은 그냥 내버리고. 정신들이 그 모양이다.


예수님의 천국 정신 사상과 그 성품은 쏙 빼버리고 예수님의 활동만을 가지고 신앙이라고 하니, 병자 고치고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고 하는 것을 신앙이라고 하니 천국교훈의 사상은 없어졌다. 그렇게 성경을 가지고 세상 사람들이 좋도록만 해 주고 있으니 이것이 예수님이 사람들의 손에 넘어간 것이다. 천국복음이 세상복음이 돼서 사람의 주도권 그 사상으로 넘어간 것이다. ‘손’은 여기서 ‘세력’을 말한다. 예수님께서 세권 재권 학권 교권 지권 인권 등등 사람의 손으로 넘어가는 여기에는 돈을 좋아하는 제자의 손에 의해 넘어가는 게 들어가 있다.


목사들이 돈을 좋아하면 돈 많은 성도가 있으면 그가 믿음이 없어도 그 사람에 맞춰지게 돼 있다. 이건 넘어간 것이다. 그 교인이 나갈까봐 벌벌 떤다. 이건 영적으로 말하면 교회를 가르친다는 지도자들이 자기 육신의 안위를 위한 목적으로 예수이름을 이용한다는 말이 된다. 자기 노후대책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천국복음이 땅의 복음처럼 만들어져 버리게 된다. 이렇게 되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구원역사가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는 것처럼 완전히 진리복음이 힘을 못 쓰게 된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을 박으면 힘을 못 쓰듯이 그 말이다. 가견적인 그걸 들고 와서 오늘날 그런 정신 사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수님은 진리를 전하고, 하나님 말씀, 생명의 말씀, 좁은 길, 천국 길, 하나님 의사단일의 길로 가고 있는데 당시의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세상복음 육신의 안일을 목적으로 믿고 나가고 있으니 이 예수님을 나사렛 이단이라고 했다. 그런 것처럼 지금도 성도들이 자기 육신의 안위를 위한 목적으로 예수이름을 이용하니 천국복음이 땅의 복음처럼 만들어진다. 그렇게 되니까 예수님의 진리운동이 복음운동이 힘을 못 쓰게 된다. 그 이치를 알아야 한다.


예수님의 신체는 죽임을 당하지만 제 삼일 만에 살아나는 것인데, 이 살아난 몸은 변화 부활 승천될 몸이 된 고로 영원히 죽일 수 없는 몸이고, 영생의 사람이 됐다. 예수님의 33년의 전체의 삶이 안 죽는 요소로 살아났다.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우리는 바로 이 신앙사상과 정신과 마음을 갖는 거다.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는 우리가 영원히 죽지 않는 영원한 것이 들어있는 예언적인 사건들인데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손에 넘기어져서 죽는다고 하니까 이걸 깨닫지 못하고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고 있었다.


영의 세계는 미래로 갔다가 과거로 갔다가 그 속도가 눈 깜빡하는 것보다 빠르다. 그래서 우리가 창:에서 계:로, 구약에서 신약으로 순간적으로 오고 가며 깨닫는 것이다.


하나님이 지금은 많이 늙었느냐?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똑같다. 창세 전 영원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향한 그 구원계획의 설정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시대가 변해도 왕이 바껴도 우리에게 향하신 그 뜻은 변함이 없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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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가 인격자이신 하나님의 가장 깊은 심원인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부터 발로된 인간구원의 의사를 좇아서 신앙을 해야만이 기독교 본질에서 이탈하지 않고 가장 효율적 적중적으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덧입을 수 있고, 성도 각자가 이 땅에서 이렇게 덧입은 하나님의 성품의 양에 따라 장차 천국에서의 누림에 차등이 생기게 됨을 성경을 통해 알 수가 있습니다.


김경형목사님께서 교역자 및 신학생을 대상으로 20여년 동안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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