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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씨와 도둑>은 최용우 개인 책방의 이름입니다. 이곳은 최용우가 읽은 책의 기록을 남기는 공간입니다. 최용우 책방 구경하기 클릭! |
저자 : 김남준 | 출판사 : 생명의말씀사 판매가 : 15,000원 → 13,500원 (10.0%, 1,500↓) 김남준 목사의 인간의 존재 의미와 진정한 행복에 관한 신학적, 철학적 고찰“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지정하신 행복은 하나님과 이웃, 창조세계의 만물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가운데 누리는 하나님 자신의 확장된 행복입니다. 인간의 참된 행복은 하나님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올바른 관계를 맺음으로써 자신뿐만 아니라 이웃들도 하나님의 행복 안에서 살게 하는 데 있습니다.”▒ 출판사 서평거룩함의 펼침이 행복한 삶이고, 행복한 삶의 접힘이 거룩함이다!기독교 신앙에 관해 심도 있는 가르침을 주고 참된 신앙생활의 표목을 제시해 온 김남준 목사가 치열한 인생길에서 잠시 멈추어 서서 ‘인간답게 잘 사는 것’이 무엇인지 돌아…[더보기▶] |
김남준 목사님의 <인간과 잘 사는 것>을 읽으면서 각 챕트마다 일부분을 옮겨적었습니다.
가능하면 읽어보는 것으로 만족하시고 죽 긁어다가 다른데로 옮기는 것은 좀 삼가해 주시길 바랍니다.
저작권 문제 때문에 글이 여기저기 복사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아시겠지요?
햇볕같은이야기 5265-5302호까지 한편씩 나눈 글입니다. -최용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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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준<인간과 잘 사는 것/생명의말씀사>중
1.잘 산다라고 말할 때
우리가 “잘 산다”라고 말할 때, 그 의미 규정은 대화의 맥락에 따라 달라집니다. 경제적 형편을 이야기 하다가 그 말이 나왔다면 그것은 ‘부유하게 산다’는 의미일 것이고, 사회적 지위와 관련해서 나왔다면 그것은 ‘성공 가도를 달린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이 추구하는 ‘잘 사는 것’의 의미는 그런 차원이 아닙니다. 이것은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존재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입니다.
2.그리스도의 십자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세계와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창조하시고, 인간에 의해 타락한 세계를 구원하시고 완성하시고자 하는 경륜의 지혜가 십자가를 통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것을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고전2:7)이라고 말합니다.
3.기독교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복음에 대한 믿음을 토대로 모든 사물의 가치과 질서를 재배열하여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상대주의에서 오는 현대인의 혼란과 확고한 윤리의 근거를 잃어버린 삶에 대한 대안으로 기독교 사상의 가치를 다시 숙고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4.신학의 관심사
신학이라는 학문의 궁극적인 관심사는 무엇일까요? 신학의 궁극적인 관심사는 인간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잘 사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이래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곧 인간으로서 잘 살기 위한 기독교의 가르침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했으며, 이것은 필연적으로 인간의 삶에 대한 기독교의 전 포괄적인 관점을 받아들인다는 것이었습니다.
5.기독교 신앙과 신학의 목표
순간을 살다가 사라지는 것 같은 인간의 삶을 영원에 잇대인 의미를 갖게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따라서 복음은 단지 불신자들을 예수 믿게 하는 수단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세계와 어떤 관계를 맺으며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포괄적이고 우주적인 관점을 제공합니다. 이 관점에 관한 하나님의 지혜를 알고 그분 앞에 사는 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과 신학의 목표입니다.
6.기독교 신앙의 유익
우리가 누리는 만족이 진정한 행복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항구적인 안전성을 가진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파도처럼 출렁거리며 흘러가는 수많은 삶의 현실적 사태들 속에 살면서도 그것들에 매이지 않는 관점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사태들을 관통하는 인생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유익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통해 이러한 지식들을 가질 뿐 아니라 그것들을 극복하며 살 수 있는 힘을 은혜로써 공급받는다는 것입니다.
7.나중에 깨닫게 되는 사실
기독교 신앙에서는 인생의 제일 큰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실제로 처음부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독교 신앙을 갖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처음에는 자기의 행복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신앙을 갖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된 존재라는 사실은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야 깨닫게 되는 사실입니다.
8. 신학은 하나님 앞에 잘 서기위한 학문
신학은 타락한 인간이 자신의 죄 된 인간성과 불완전한 세계로 말미암아 고통 받는 현실에서 인간으로서 참으로 ‘잘 사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해답을 하나님의 선행적인 도움인 계시에 의존하여 찾아가는 학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학은 하나님 앞에서 잘 살기 위한 학문입니다. 그리고 그 ‘잘 살기’는 새로운 세계관과 인생관을 전재로 합니다.
9.기독교 신앙이 전달되기 위해서는
기독교 신앙이 이 세상 가운데 힘 있게 전달되기 위해서는 그 안에 정확하게 우주의 기원, 인간 존재의 의미, 도덕률의 근거와 잘 사는 삶의 기술을 묻는 철학적인 질문들에 대한 충분한 답변이 담겨져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답변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그리스도인들이 믿고 의지하기에 충분하여야 합니다. 비기독교인과도 소통할 정도의 보편적 설득력도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물론 이성을 초월하는 진리의 영역에 대해서는 여전히 믿음을 요구하지만 말입니다.
10.기독교 신앙의 목표
기독교 신앙의 목표는 인간의 참된 행복입니다. 그러나 그 행복은 타자와 단절된 자기중심적이고 자아도취적인 행복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잘 살기 때문에 그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이 하나님께서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에 이바지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이웃을 행복하게 한 삶 안에서 누리는 행복입니다.
11.신적 질서
인간이 진정으로 행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의도를 따라 하나님과 인간, 자연 세계와 올바른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하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 안에서 사물들의 질서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필요합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이러한 신적 질서에 대한 무지와 자기가 설정한 잘못된 질서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됩니다. 우리가 인간 존재의 의미를 사물들의 질서 안에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12.질서(秩序,order)
식물 잎사귀가 질서 있게 뻗어 있다. 그래서 이탈리아의 수학자인 레오나르도 피보나치는 “이 세계는 신이 수열을 가지고 놀이를 한 것이다.”라고 했던가! 절대적 타자로서 존재하는 그 어떤 피조물도 창조주에게 비견될 수 없으나, 또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어떤 식으로든지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본뜨며 존재한다. 만물의 아름다움 역시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질서, 조화, 균형에 있다.
13.모든 지식의 근원
티끌 같은 물질인 분자와 원자, 렙톤과 쿼크에서 시작하여 우주를 휘돌아 하나님 자신에게로 회귀하는 하나님의 사랑에 이르기까지,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총망라하여 존재하는 모든 것의 관계는 하나님의 관계적인 존재의 모상이며, 어떤 사물도 이러한 관계의 질서 없이는 존재하지도, 작용하지도 않습니다. 모든 자연적 사물들과 영적인 것들이 하나님 안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칼빈이 지적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모든 지식의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14.인간 존재의 탁월성
자연적 사물들은 자연 질서 안에서, 도덕적 사물들은 도덕 질서 안에서 그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러한 두 가지 질설르 이해하고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을 가졌는데, 이것이 바로 인간 존재의 탁월성입니다.
15.인간이 다른 피조물과 다른 점
인간은 다른 피조물들과 달리 지상세계와 천상세계를 알고, 하나님과 다른 인간 그리고 자연세계와 바르게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을 지녔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해(知解), 곧 알고 이해하는 능력을 지닌 존재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연과 인류 세계에 신적인 질서를 심으셨을 뿐 아니라 그 질서가 인간에게 알려지는 것을 기뻐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질서의 발견은 곧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으로 그분의 지혜와 능력에 대한 찬양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16.하나님에 대한 절대 의존
인간의 행복은 하나님에 대한 절대 의존 안에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자에 대한 맹목적 굴종이 아니다. 지성으로써 하나님의 지혜 앞에 굴복한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절대 의존의 표현은 성경을 사랑하고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다. 그 속에서 하나님과 이웃들과 더불어 올바른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힘을 얻게 된다.
17.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당신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심은 당신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만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받지 않으셔도 잃어버릴 것이 없으시지만,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만 참된 행복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당신을 사랑하라고 명하심은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18.참된 경건은
나와 상관없이 단절된 모든 사람들이 사실은 한 가족처럼 사랑하며 살았어야 할 존재들임을 생각하면 가장 먼 이웃도 낯설지 않다. 인간의 존엄과 가치는 그의 지위나 소유 혹은 재능에 달린 것이 아니라 그 사랑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말미암는다. 참된 경건은 이웃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19.인간과 존재의 질서
인간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존재의 질서 속에 있습니다. 그 존재의 질서는 곧 가치의 질서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떠오릅니다. 인간은 행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존재의 질서 속에 있는데, 왜 그 안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존재의 질서를 이탈하려는 욕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행복해질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20.죄(罪)
인간이 끊임없이 하나님께서 지정해 주신 존재의 질서를 이탈하려는 것은 결국 자신이 하나님처럼 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을 우주의 중심인 것처럼 여기고 자신의 행복이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며 사는데 이것이 바로 죄입니다.
21. 악(惡 malum)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존재의 질서를 뒤따르는 가치의 질서를 받아들이기를 거절하고, 자기의 주관에 따라 가치의 질서를 세우는 것! 인간이 이렇게 자의적인 질서를 세우는 것은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의도에 대한 도전이며, 신적인 질서를 전복시키려는 시도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세워진 잘못된 질서에 대한 사랑이 바로 악(惡 malum)입니다.
22.올바른 관계
기독교 신앙에서는 ‘인간으로서 갖는 행복’과 ‘인간으로서 잘 살기’가 분리되지 않으며, 이 두 가지는 곧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맺기’와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은 ‘인간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과 나아가 ‘자연세계와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을 포함합니다.
23.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사람을 가장 행복하게도 하고 가장 불행하게도 한다. 살아야 할 희망도, 죽고 싶은 절망도 대부분 사람을 통해서 온다. 사랑의 대상이 하나님이라면 그것은 잃어버릴 염려가 없는 사랑이나, 사랑의 대상이 인간이라면 그것은 언제나 상실할 수 있는 사랑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기억은 언제나 아픔이 되어 떠난 사람의 자리에 남겨진다. 그리고 그것은 오롯이 보낸 사람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24.경건의 진수
한 인간으로서 인생을 사는 길을 논하기 전에 먼저 익혀야 할 덕목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이 그 우연적인 외모나 지위, 학식이나 재산의 유무와 관계없이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들을 예의와 사랑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은 기독교의 모든 영적 체험이나 신비한 지식을 능가하는 경건의 진수입니다.
25.즐겁게 속박되는 인생
모든 사랑은 묶임이다. 사랑이 식으면 관계가 속박처럼 느껴지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인생의 참 기쁨은 가치 있는 속박 속에서 타인과 함께 살며 공동의 목표를 이루어 가고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 안에서 자신을 실현하는 것이다. 즐겁게 속박되는 인생을 사는 길은 무엇일까?
26.인간의 행복과 관계 맺음
인간의 행복은 행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데 있고, 하나님께서는 관계적 삼위일체 안에 있는 행복을 인간들 사이에 수립되는 올바른 관계를 통하여 확장하십니다. 따라서 인간이 이웃과 올바른 관계 안에서 행복을 증진하는 일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바탕으로 하지 않고서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27.하나님의 기쁨
하나님과 인간을 비롯한 모든 사물을 알고 이해할 수 있는 지성의 능력, 그것들의 아름다움을 인식하고 즐거워 할 수 있는 감정, 그것들을 하나님의 질서에 따라 사랑할 수 있는 의지의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을 닮아 그러한 능력들을 자유롭게 자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선(善) 안에서 인간의 자율과 자유가 행사되는 것에서 기쁨을 누리셨습니다.
28.자연세계를 창조하신 목적
인간의 ‘잘 사는 것’은 단지 사람들과만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자연 세계를 향해 우리의 올바른 의무를 행하는 것까지 포함된다. 왜냐하면 자연세계는 인간의 ‘잘 살기’가 펼쳐지는 장이기 때문이다. 자연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은 그 안에서 인간이 하나님과의 평화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실현하며 창조세계의 선량한 관리자로 살아가는 것이다.
29.어느 법학 교수
어느 법학 교수가 젊은 시절 법조인으로서 자신의 고민을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인간이 왜 존엄한지를 알아야 법의 가치를 알 수 있을 텐데, 법을 배우지만 인간이 왜 존엄한지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인간이 누구인지, 그의 삶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그가 ‘잘 사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은 피조물인 인간과 창조주이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는 한 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30.행복과 관계
하나님 자신이 행복의 근원이시기에, 인간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다시금 올바른 관계를 맺지 않고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지정하신 행복은 하나님과 이웃, 창조 세계 만물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가운데 누리는 하나님 자신의 확장된 행복입니다.
31.구원의 약속
인간은 자신에게 부여받은 자유 의지로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하고 타락하였지만, 불행하게도 자신의 힘으로는 이미 깨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할 수 없었습니다. 최초의 인류가 타락하자 하나님께서 구원의 약속을 주신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32.인간 존재의 위대함
인간의 생명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질 때가 있다. 자연의 큰 힘 앞에서는 작은 바람에도 쉽게 꺼질 수 있는 촛불과 같다. 그러나 인간 존재의 위대함은 육체의 힘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에 있다. 신자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은 어떤 경우에도 소멸하지 않는다. 비록 곧 꺼질 듯 바람에 나부끼는 작은 불꽃같을 지라도....
33.타락의 결과
오늘날 우리 앞에 펼쳐진 온 인류의 잔혹한 전쟁의 역사와 인종간의 갈등, 종교 간의 참혹한 보복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계획에 정면으로 배치된 현실입니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다른 인간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며, 자신의 행복 안에서 타인을 행복하게 하고, 타인의 행복 안에서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영적인 사랑과 생명을 끊임없이 공급받는 의존의 관계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타락으로 인해 대부분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인간은 이웃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34.타락한 인간과 자연세계
타락한 인간은 자연세계와도 올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게 되었는데, 이것 또한 인류에게 커다란 불행과 위기를 가져왔습니다. 산업혁명 이후 인간의 자연세계에 대한 무분별한 파괴와 착취는 심각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최근 한 세기 동안 일어난 환경 파괴와 오염으로 수많은 자연재해와 기상이변이 나타났고, 에너지에 대한 자본주의의 탐욕은 석유나 천연가스 같은 자원들을 무분별하게 채굴하여 심각한 환경의 위기를 자초하게 만들었습니다.
35. 산업혁명과 자연파괴
산업혁명은 모든 것을 하나님처럼 풍족히 누리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에 날개를 달아 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꼭 필요하지 않은 재화의 소비를 우해 꼭 필요한 자연환경을 파괴하는 결과를 낳았다. 인류의 생존과 행복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자연환경의 파괴는 결국 인간을 불행하게 할 것이다. 가까이 하기에 너무 두려운 자연환경이 되게 한 것은 인간의 커다란 잘못이다.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을 떠나 어디로 가며, 인간의 육체는 자연을 떠나 어디에 거주 할 것인가?
36.하나님의 대리자
자연 세계가 질서 안에서 쉼과 행복을 누리는 데 인간은 하나님의 대리자입니다. 비록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탁월한 존재이기는 하지만, 다른 피조물과 함께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이라는 동일한 위치에서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지순한 사랑으로 선량한 관리자의 의무를 다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37.미래의 인류를 위해
우리가 미래에 태어날 인류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에너지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환경에 대한 가공할 만한 만행을 멈추어야만 합니다. 끊임없는 우려와 경고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핵발전소의 건설과 원시림의 개발 등은 자연세계의 쉼과 인류의 행복을 현시대의 탐욕과 바꾸는 것입니다.
38.무분별한 생태 환경의 파괴
대규모 기업 집단에 의한 농산물의 생산과 목축 산업, 유전자 조작을 통한 다량 생산에 따른 생물학적 위험 등은 인간의 미래 환경에 대한 전망을 어둡게 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에너지를 값싸게 얻어 맘껏 쓰고자 하는 인간의 탐욕이 가져올 수 있는 재앙의 아주 작은 실례일 뿐입니다. 이러한 무분별한 생태 환경의 파괴는 결코 남의 일이 아닙니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이러한 폭압적이고 수탈적인 태도는 결코 창조주 하나님의 의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분부하신 자연에 대한 올바른 정복과 다스림이 아닙니다.
39.하나님의 계시의 이유
행복이나 진리 같은 개념은 인간에게 선험적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배워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초월하여 인간의 정신 안에 그것들을 아는 감각이 이미 심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인류가 타락한 후에도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그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신 것은 바로 이러한 감각 안에서 스스로의 힘으로는 다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돌아올 수 없는 인간들을 부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40.잘 사는 것
우리가 비록 인간의 의미에 대한 철학의 유장한 논의들을 다 알지 못해도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고 복음의 도리를 따라 살 때 ‘잘 사는 것’이 가능한 이유가 비로 이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특히 그분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통하여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의 질서들을 비로소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인간으로서 ‘잘 사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게 됩니다.
41.인간은 하나님의 대리자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당신의 대리자로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따라 자연 만물들을 질서 있게 관리하게 하셨습니다. 비록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망가진 세상이라고 할지라도, 그 책무를 다할 때 자연 만물들은 지금보다 좀 더 나은 기쁨과 만족과 쉼을 누리게 됩니다.
42.없는 것이 진정으로 있는 것이다.
우리 주위에는 우리 마음을 끌어당겨서 우리 존재의 일부가 되어 버린 사물과 사고방식이 얼마나 많은가! 그것들 중 상당수가 사실은 갈퀴로 치워 내야 할 쓰레기 더미에 불과한데... 더 많은 것들을 가짐으로써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덜어 내고 비움으로써 행복해지는 법을 배워야 한다. 모든 것을 누리는 사람은 아무것에도 매이지 않는 사람이므로, 없는 것이 진정으로 있는 것이다.
43.설탕물
오늘날 인간의 광기어린 소비생활은 영혼과 정신이 허기진 상태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육체를 위해서 꼭 필요하지도 않은 것들을 획득하느라고 한 달 동안 노예처럼 돈을 벌기 위해 일하다가 하루 동안 쇼핑을 하면서 자신이 이 땅의 자원들로 더욱 행복해질 것이라고 기대하지만, 이는 마치 여름 뙤약볕에 타는 듯한 목마름으로 고통하는 나그네가 마시는 한 사발의 차갑지만 진한 설탕물과 같을 뿐입니다.
44.하늘 자원
영혼은 하늘로부터 창조되었기에 하늘 자원을 필요로 합니다. 이것은 천상 자원으로서 먹고 입고 마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롬14:17) 더 간단하게 말하자면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영적인 양식인 진리의 말씀을 통해 주어집니다. 이것으로써 삶의 다양한 사태들을 헤치고 나갈 힘과 용기를 얻고 치열한 인생살이 속에서 불변하는 가치를 위해 희생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하여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용서하며, 자신보다 더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섬기고, 정의를 위해 희생할 수 있는 용기를 갖게 합니다.
45.인간 영혼의 갈망
인류 역사에 나타난 다양한 종교와 철학, 도덕과 윤리, 학문과 예술의 추구는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데서 오는 결핍을 대신하고자 하는 인간 영혼의 갈망을 보여줍니다. 물론 그 안에 상당한 진리의 요소들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왜곡된 편견과 선입관으로 인해 진리에 속하는 사실들까지 자의적으로 연결하여 오히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을 보지 못하게 하고 말았습니다.
46.질서의 망(網)
인간은 행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음으로써 행복해질 수 있지만, 그것을 바탕으로 인간들과 올바른 관계를 맺음으로써도 행복에 다가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창조하신 인류가 하나님과 이웃과 더불어 올바른 관계를 맺는 ‘질서의 망(網)’ 안에서 자연 만물을 선하게 관리하면서 행복을 누리도록 하셨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인간의 학문, 예술, 기술 등은 지금보다 더욱 도덕적이고 탁월한 방식으로 발전하였을 것입니다.
47.사랑으로 하나님을 알게 된다
인류가 행복을 추구하지만 거기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가지 않으려는 완고한 자기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상과 지상의 두 세계를 실재와 모형처럼 창조하시고 그 모든 세계를 하나의 사랑으로 묶고자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지상에서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은 불완전할지라도 그 자체로 영원을 향한 사닥다리가 됩니다. 다시 말해서 사랑으로 영원을 알게 되고, 영원 자체이신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48. 사랑을 안다는 것은
사랑을 안다는 것은 곧 영원을 안다는 것이며, 영원을 안다는 것은 곧 시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을 안다는 뜻입니다. 사랑이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을 아는 길은 오직 그분을 사랑함으로써 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영원이시고, 사랑이시라는 말의 의미입니다.(요일4:16) 그러므로 순수한 하나님의 사랑, 곧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인간은 참된 행복에 이르지 못합니다. 하나님 자신이 복의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49.너는 누구냐?
어떤 사람이 죽어서 저승에 갔습니다. 염라대왕이 물었습니다.
“너는 누구냐?” 그는 대답했습니다.
“저는 대한민국 사람으로서 한 아내의 남편이고 두 아이의 아빠입니다.”
그러자 염라대왕이 말했습니다. “누가 너에게 출신 국가와 가족관계를 물었느냐? 너는 누구냐?” 그가 다시 대답했습니다.
“저는 불교신자이고 금융회사에서 일했습니다.” 그러자 염라대왕이 노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누가 너더러 종교와 직업을 물었더냐? 도대체 너는 누구냐?” 그러자 그는 울부짖으며 외쳤습니다.
“제발 어느 누가 내가 누구인지 좀 말해주시오.”
50. 불행의 원인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불행은 인간이 주관적으로 느끼는 행복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고자 하시는 행복이 불일치한데서 나옵니다. 인간의 죄와 타락은 선과 악에 대해 하나님의 기준보다 인간 자신의 판단을 신뢰하는 교만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51.인생의 의미
시계는 여러 개라도 그 목적은 하나다. 정확한 시간을 가리키는 것이다. 재능과 직업은 달라도 그리스도인은 동일한 소명으로 이 땅을 사는 존재들이다. 인간의 지혜는 시간과 공간 속에 살면서도 그것을 뛰어넘는 영원의 관점에서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묻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52. 자유를 향한 갈망
여유와 허무, 자유와 고독이 교차할 때 인간의 마음은 그 경계의 담장 위를 걷는다. 그래서 사르트르가 “인간은 자유롭기 때문에 불안하다.”고 했을까? 인간 존재 자유를 향한 끝없는 갈망은 그를 무서운 고독 앞에 세운다. 인간은 무엇으로 그것을 극복해야 하는가?
53. 존재의 외로움
인생을 살다 보면 어두운 밤길을 홀로 걷듯 친구도 없이, 동행하는 이도 없이 가야할 때가 있다. 한 사람의 인생의 마지막 동반자는 바로 자기 자신이다. 존재의 외로움은 자기를 대면하는 낯섦이다.
54. 잘 살 수 있는 길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떠나, 당신 없이, 당신 바깥에서 행복을 찾기 때문에 불행해진 인간들을 위하여 인간으로서 잘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인간, 자신, 자연세계와 맺은 관계로 질서 지워진 가운데 타자와 올바른 관계를 맺고 그들의 쉼과 복된 상태에 이바지하는 삶입니다.
55.인간의 자유
하늘을 나는 새들을 보며 자유를 생각한다. 새의 자유가 하늘을 나는 것이듯 인간의 자유는 진리를 향한 정신과 영혼의 속박 받지 않는 비상에 있다. 인간의 자유는 정신의 비상이다. 더 높은 가치와 아름다움을 위해 날아오르는 것에서 자유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56. 올바른 관계맺음
인간의 행복이 관계맺음에 있다면 ‘잘 사는 것’은 올바른 관계 안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의도하신 ‘인간’이라는 유(類)와 개체의 고유한 특성을 잘 드러내는 것에 있습니다. 이것은 거룩함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인간이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은 먼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음으로써 그분께만 배타적으로 종헌 된 존재, 즉 거룩하게 되어야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57.판단자 하나님
잘 산다는 것은 곧 거룩하게 산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잘산다는 것을 한정하는 ‘잘’이라는 말은 인간의 행위나 상태에 대해 궁극적인 판단자가 있음을 전재로 합니다. ‘잘 사는 것’이 있으면 ‘잘 못 사는 것도’ 있을 것이고, 어떤 기준이 없이는 ‘잘’과 ‘잘못’을 판단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잘 사는 것이라는 말 속에는 인간을 초월하는 판단자, 인간이 살아가면서 궁극적으로 대면하야 하는 하나님이 계심을 전재로 합니다.
58.인간 창조의 목적
하나님께서는 창조세계에 대한 당신의 영원한 관념들이 시공간 속에 나타나는 창조를 통하여 기뻐하셨으며, 창조 이후에 인간과 자연적 사물들이 당신의 관념 속에 있었던 두 질서, 곧 자연적 질서와 도덕적 질서를 드러내고 증진하는 것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특히 인간은 자연세계에 노동을 더함으로써 만물의 선함과 아름다움을 증진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곧 인간 창조의 목적입니다.
59. 영혼의 자유가 없다면
모든 권력을 가진 왕이 자신의 궁전 창문에 이렇게 육중한 쇠창살을 친 것은 무엇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까? 모든 것을 누린다고 할지라도 영혼의 자유가 없다면 그것은 참으로 인간으로서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우리로 하여금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지 못하게 가로막는 것은 무엇인가?
60.인간이 잘 살지 못하는 이유
잘 사는 것의 여부를 판단하는 객관적인 기준과 행복하다고 느끼는 인간의 주관적인 판단의 조화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갈 때 가능해집니다. 인간이 잘 살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과 인간을 지으신 목적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창조의 목적대로 사는 것이 자신에게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61.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인간과 만물이 당신 안에서 쉼과 만족을 얻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영적인 교통 안에서 생명과 사랑을 공급받음으로써 인간이 참된 행복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함으로 그 질서를 벗어났고,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의 파괴 속에서 불행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이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이 드러나는 기회가 됩니다.
62.인생의 발자취
한 사람의 인생의 발자취는 그의 사람됨이 그려온 궤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중생과 회심을 통해서 이미 새롭게 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아직 완전하지 않은 신자들을 성화를 통해 거룩하게 하십니다. 성화는 신자의 일생동안 계속되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역사로 구원받은 죄인을 죄의 부패에서 깨끗하게 하시며 그의 전 본성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갱신하여 죄인으로 하여금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63.그리스도와의 연합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에서 최고의 신비는 구원받은 신자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이 결합은 본질적으로 신령하고 신비한 연합입니다.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와 피조물인 인간의 연합이기 때문에 그러하고 교회를 통한 연합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접붙여지는데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가 되십니다. 이렇게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접붙여짐으로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룹니다.
64. 절대적, 상대적 의미의 십자가
절대적인 의미의 십자가는 우리의 죄와 상관없이 그리스도 때문에 애매하게 당하는 고난입니다. 정의 실현과 복음 전파를 위한 박해나 단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이웃으로부터 받는 미움이나 사회적 불이익을 포함합니다. 상대적인 의미의 십자가는 전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우리의 죄 때문에 당하게 되는 고난과 시련, 고통을 의미합니다.
65.절벽에도 생명은 있다
절벽에도 생명은 있다. 생명은 어느 철학자가 말한 바와 같이 “모든 죽음에 항거하는 기능이다.” 신자의 생명은 에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66.성령의 은혜
시련과 고난, 환란과 역경 속에서 깊이 고통 받을 때 우리 안에는 생명 보다는 죽음의 기운이 득세하지만, 성령의 은혜를 통해 부활의 기운이 스며들며 죽음을 이길 생명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미워할 수밖에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의지가 생겨납니다. 이것은 단지 이론과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매일 매일 살아야 하는 우리의 삶의 문제입니다.
67.사람 됨
한 나무의 열매는 그 나무의 ‘나무 됨’의 산물이다. 이는 마치 한 사람의 일생이 그 사람의 ‘사람 됨’의 궤적인 것과 같다. 이 나무가 저 나무의 열매를 맺을 수 없듯, 한 사람의 삶은 그 사람의 사람됨을 벗어날 수 없다
68.은혜와 생명력
계곡에 넘치도록 흐르는 풍부한 물이 그 산에 생명을 주듯, 신자의 마음 안에 흐르는 은혜가 그의 인생을 생명력있게 만든다.
69.진리와 함께 사는 삶
찬란한 햇살은 눈 덮인 설원의 차가움을 잊게 해준다. 진리의 빛 아래 사는 사람들은 쓸쓸하거나 외롭지 않다. 진리와 함께 사는 삶에는 늘 사랑의 교통이 있기 때문이다.ⓒ김남준 (열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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