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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사11: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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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참고 : | 실시간 온라인 새벽기도(1749) 2015.12.7 |
희망의 씨를 뿌리십시오 (이사야 11장 1-5절)
< 희망의 씨를 뿌리는 삶 >
이사야 7-10장에는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의 죄로 인해
이방인의 침략을 받아 멸망하리라는 암울한 예언이 나옵니다. 그러나 바로 이어서 본문에서는 메시야 왕국의 도래와 남은 자들의 회복에 관한 말씀을
통해 새로운 희망과 비전이 제시됩니다. 즉 이새(다윗의 아비)의 뿌리에서 나올 메시야가 공의와 성실로 세상을 통치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3-5절),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늘 내일을 향한 찬란한 희망을 가지십시오. 그 희망이 사람을 크게 달라지게 만듭니다.
예수님은 말씀했습니다.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21).” 보물뿐만 아니라 꿈과 희망이 있는 그곳에도 마음이
있습니다. 즉 꿈과 희망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삶은 크게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늘 희망을 가지고 희망의 씨를 뿌리며 사십시오. 희망의 씨를
뿌리는 삶이란 어떤 삶을 말할까요?
1. 인정해주는 삶
참된 평화는 어디서 올까요? 상대방의 위치에 서서 상대방을
이해하고 인정해줄 때 생깁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평화는 무력이나 강요에 의한 평화가 아닌 남의 입장과 가치를 존중하면서 생기는
평화입니다.
상대방의 처지를 이해하면 어떤 경우에도 대화가 됩니다. 공동체의 질서와 평화를 해치는 것이 아니라면 다른 것을 다른
것으로 이해해 주고 “너는 왜 그 모양이냐!”라고 하지 마십시오. 그 모양이 어떻습니까? 자기가 생각하는 모양만이 진리가 아닙니다. 성공하고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을 보면 대개 윈윈 전략을 씁니다. 남에게 비참한 패배감을 안겨주는 승리는 복된 승리가 아닙니다. 심지어는 경쟁자도 일종의
파트너라고 생각하고 같이 윈윈하려고 할 때 참된 평화를 얻습니다.
바둑 고수와 하수의 가장 큰 차이는 적은 집 승부에 대한 안목의
차이입니다. 하수는 상대방의 대마를 잡을 생각만 하다가 자기 대마가 잡힙니다. 그러나 고수는 이길 수 있다고 확신하면 무모하게 대마를 잡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한 집만 이겨도 이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늘 남에게도 유익을 주려고 하는 영적인 고수가 되십시오. 지식이나 능력이나 이해력은
조금 부족해도 이해심을 가지고 남을 이해하고 인정해주려고 할 때 희망은 확대될 것입니다.
2. 굳건히 믿는
삶
살면서 늘 “나는 정말 하나님을 인생의 해답으로 알고 믿고 있는가?”라고 자문해 보십시오. 하나님을 지식적으로나 관념적으로
알지 말고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알아야 합니다. 즉 하나님에 대해서(know about God) 알지 말고 하나님을 알아야(know God)
합니다. 예전에 미국 샌디에고에서 자살한 어떤 사람의 자동차 번호판에는 이런 글귀가 있었습니다. “Jesus is the Answer(예수님이
해답이시다).” 그는 예수님에 대해서는 알았지만 예수님을 알지는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지식적으로 알지 말고 인격적으로 알아야 절망을 희망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1994년 극심한 가뭄이 왔을 때 많은 국민이 동원되어 가뭄해결에 노력했지만 땅은 무섭게 갈라졌습니다. 한 해
농사 다 망친 줄 알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자 국민 5백만 명이 몇 달 동안 해결하지 못한 일을 단 5시간의 비가
해결했습니다. 다음날 신문에 이런 기사가 나왔습니다. “어제 내린 비는 5조원의 가치가 있었다.”
하나님은 단번에 5조원을
내려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재 능력이 부족하고 초라해도 결코 꿈과 희망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믿는 성도의 힘은 결코 작은 힘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영을 받기만 하면 본문 3-5절 말씀처럼 공의와 정직으로 세상의 빛이 되어 살 수 있습니다. 작은 설탕과 소금으로도 음식
맛이 현저히 달라집니다. 펜으로 쓴 글 한 편이 영혼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굳게 믿으면서 ‘작은 것’의 맛과 멋과
힘을 아는 사람이 결국은 행복을 소유하고 희망의 씨앗이 될 수 있습니다.
3. 과정을 밟는 삶
쉽게 이뤄지는 꿈과
비전은 거의 없습니다. 꿈과 비전 때문에 오히려 고통스런 상황을 더 많이 겪을 수 있습니다. 다윗도 왕이 되기 전에 양을 치는 과정을
겪었습니다. 그러므로 고통의 과정을 너무 단축시키려고 하거나 생략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너무 일찍 받는 축복은 사실상 축복이 아닙니다. 열
살짜리 아이에게 자동차 키를 주는 것은 결코 축복이 아닙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 주어져도 다룰 능력이 없으면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좋은
아빠는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너무 일찍 주지 않고 때로는 “아직 안 돼!”라고 말합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돌아온 탕자
얘기는 자녀에게 물질을 일찍 너무 많이 주면 오히려 자녀를 망친다는 사실을 잘 말해줍니다. 철들지 않은 자녀에게 준 많은 물질이 오히려 인생을
망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므로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다룰 능력이 없는 것은 너무 일찍 주지 마시고 늘 과정에서 인내하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축복을 주어야 할지를 가장 잘 아십니다.
과정과 단계를 생략하려는 기도도 너무
많이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인내를 원하는데 인내과정이 없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가 아닙니다. 과정을 잘 통과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축복을 준비하시는 것’보다 ‘축복을 위해 우리를 준비시키는 것’을
더 선호하십니다. 사실상 이미 축복은 준비되었습니다. 문제는 주어진 축복을 다룰 능력이 준비되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베들레헴에서 태어나 갈릴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는 과정을 거치셨습니다. 세례 받는 과정도 거치셨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에 매료된 군중들은 예수님이
바로 왕관을 쓰길 원했지만 예수님은 왕관을 쓰기 전에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십자가(cross)를 통해야 영광(crown)을 얻고 번민을 통과해야
환희를 누릴 수 있습니다. 기분 나쁨을 겪어보지 않으면 기분 좋음을 실감하기 힘들고, 가난이 없으면 풍요가 빛나지 않고, 아파보지 않으면 건강의
복을 깨닫지 못하고, 고통의 경험이 없으면 작은 축복에 대한 감사와 감격도 없게 됩니다.
하나님이 두신 과정과 단계를 밟는 것을
기쁘게 여기십시오. 여기저기 치유 집회를 쫓아다니면서 자꾸만 과정을 생략하려고 하십시오. 치유 집회에 가서 잘못된 믿음을 얻어 영혼과 가정이
죽고 실제로 병들어 죽는 경우도 얼마나 많습니까? 과정을 무시하면 늘 감사보다 불평이 앞선 인생이 됩니다. 영광의 무대가 저절로 주어지기를
바라지 말고 다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 올려놓는 삶만 좋아하지 마십시오. 과정과 단계를 두신 하나님의 섭리를 찬양하고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제 자리에서 일어나 강하게 밀어붙여서 사탄을 당황하게 하고 낙심시키고 충격에 빠뜨리십시오. 하나님이 있게 하신 과정을
생략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 과정은 하나님에 의해 ‘주문된 것(ordered)’이지 ‘제안된 것(offered)’이 아닙니다. 즉 그 과정을
선택하느냐 마느냐 제안(offer) 받은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을 선택하도록 주문(order)받은 것입니다. 행복한 인생을 원하면 ‘엘리베이터의
기적’보다 ‘에스컬레이터의 기적’을 더 기뻐하십시오. 과정을 중시하는 성도에게 고통과 시련이 있는 것은 아직 축복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4. 약자를 돕는 삶
꿈과 비전은 욕망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아이에게 꿈이 뭐냐고
물으니까 ‘전교에서 1등하는 것’이 꿈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꿈이 아닙니다. ‘전교에서 1등’은 전교에서 한 명만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을 위한 꿈은 될 수 있어도 공동체 전체와 다수를 위한 하나님의 꿈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1등의
성적’에 있지 않고 ‘다수의 행복’에 있습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1등을 해도 의외로 행복감이 많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1등의 꿈도 자신을 위한 꿈은 아닙니다. 그런 꿈은 성취해도 다른 면에서의 실패와 나락과 좌절과 불행을 가져다줄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약자와 전체를 생각하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따르려는 꿈과 비전을 가지십시오. 그런 큰 꿈과 비전을 품고 공부도 하고
역량도 키우고 계획도 세우고 과정도 거치십시오.
일등을 목표로 하지 말라는 말은 “공부하지 말라! 땀을 흘리지 말라! 계획을
세우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렇게 잘못 들으면 의존적인 인생이 됩니다.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삶은 삶의 목적을 그저 먹고사는 것에 두는
삶이고 그보다 더욱 비참한 삶은 땀을 흘리지 않고 남의 손에 의존해서 살려는 삶입니다. 그런 삶이 없도록 최고는 되지 못해도 최선을 다하십시오.
공부도 열심히 하고 땀도 열심히 흘리십시오. 또한 그런 삶을 통해 하나님이 강자의 축복을 주시면 약자를 이해하고 살 길을 열어주려는 ‘겸손한
강자’가 되십시오.
< 예수님의 손이 되십시오 >
어느 날, 유고에 살던 작은 체구의 18살 소녀가
수녀의 길을 작정하고 집을 떠날 때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얘야! 앞으로 어떤 일이 있어도 예수님의 손을 놓지 말고 네가 사랑하는 예수님의 손이
되어 살아가거라.” 그 후 그녀는 그 어머니의 음성을 늘 기억하면서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예수님의 손이 되어 살았습니다. 그녀가
1979년 노벨 평화상을 받은 테레사 수녀입니다. 그녀는 작고 능력도 없었지만 한 손으로는 예수님을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가난한 인도 영혼을
붙잡으며 일생을 아름답게 산 것입니다.
힘이 없고 무엇이 없다고 하지 마십시오. 말구유에서 태어나신 예수님을 생각해보십시오.
작은 불이 큰불을 일으킵니다. 소수의 인물이 역사를 변화시키는 씨앗이 됩니다. 하나님은 숫자를 통해 일하시지 않고 꿈과 비전과 희망을 통해
일하십니다. 세상은 어두운데 맑은 샘물을 흘리는 의인이 적다고 실망하지 마십시오. 의인이 적을수록 의로운 소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은
더욱 커질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기분 좋은 승리는 역전승입니다. 반면에 제일 기분 나쁜 패배는 역전패입니다. 인생
전체에서도 역전패를 당하는 인생이 아닌 역전승을 꿈꾸는 인생이 되십시오. 그런 역전승을 원한다면 반드시 전제로 있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소수의 길과 개척의 길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소수가 영원한 소수가 아니고 다수가 영원한 다수가 아닙니다. 처음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처음 되듯이 소수 된 자가 다수 되고 다수 된 자가 소수 됩니다. 대개 보면 거룩한 비전을 가진 소수의 인물이 세상을
바꿉니다.
작아도 작게 보이지 말고 우습게 보이지 말아야 합니다. 이슬람 극단주의 그룹인 IS가 미국도 건드리고 소련도 건드리지만
신기하게도 어느 한 작은 나라는 가장 원수처럼 여겨야 할 나라인데도 잘 건드리지 않습니다.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그 말은 이스라엘이 우습게
여겨지지 않고 무섭게 여겨지는 강소국가란 말입니다. 그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큰 영향력을 미치고 온유하지만 연약하지 않은 강소교인의 꿈을
가지십시오.
요새 기독교 서적의 베스트셀러 기준이 8000권입니다. 지금 우리는 매달 월새기(월간 새벽기도) 7900권을 발행해
선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습니다. 앞으로 하나님이 필요한 기초재정을 주시면 네트영어를 론칭해서 적절한 때에 상장해 선교 자립기반을 구축할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앞으로 때가 되어 <월새기 영어판>도 발행하면 미국과 전 세계에서도 유력한 문서선교 후원자들과 커넥션이
이뤄지면서 자립기반이 더욱 견고해지고 지구촌 전체를 대상으로 선한 영향력을 미칠 날이 올 것입니다. 그 꿈이 실체화되도록 기도해주십시오.
파스칼은 처음에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다가 나중에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면서
거듭난 후에 더욱 큰 인물이 되었습니다.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알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세상이 어둡고 경제가
어려울수록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알고 예수님의 손이 되어 살기를 힘씀으로 어둔 세상에 희망의 씨를 뿌리는 희망 전도사들이 되십시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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