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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마가복음 궁극이............... 조회 수 525 추천 수 0 2016.04.17 17: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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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막10:35-45 
설교자 : 김경형 목사 
참고 : 궁극교회 주일예배 

10장 35절-45절: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예비 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35절 앞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고난 받고 죽는 장면을 말씀하셨다. 그런데 그 말씀을 하신 후에 세배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구하기를 ‘주의 영광중에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 달라’고 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외무대신 내무대신이 되게 해 달라는 것이다.


이것을 구하는 정신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는 정신에서 나온 것이냐? 아니다. 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육적 정신에서 나온 것이다. 지금 말이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주시리라’ 이렇게 돼 있는 거지만 신앙의 원리가 예수 믿으면서 먼저 하나님의 속성적 성품으로 들어가면 모든 것은 뒤따라오는 건데, 지금 기독자들이 사람은 안 되고 자기 몸 밖의 것을 자꾸 먹으려 하고 있다. 세상 것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겨서 ‘내가 이걸 가져야 행복하겠는데’ 하며 목적을 거기에 두고 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모든 장소나 일터는 대화의 방편이요 전도의 방편이요 주님을 닮는 방편이지 그런 모든 삶의 터전이 목적은 아니다. 그런 방편을 옳게 바르게 잘 이용하다 보니 그 자리에서 자기가 큰 직임을 맡을 수도 있는 것이다. 가령 병원의 의사가 환자를 보면서 작은 병이라도 그 한 사람에게 정성들을 들여서 연구를 하면서 고쳐놨다면 그 실력이 어디 가겠느냐? 자꾸 능수능란해지지, 이름이 나지. 모든 이치가 그렇다.


현실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방편을 활용을 못한다면 사람이 자꾸 쭈그러진다. 넓음성이 없다. 마음이 풍부하지를 못하다. 마음이 윤택하지 못하고 기름지지를 못하다. 그러니 현실과 대립이다. 그런 사람이 돼버린다. 이런 사람이 어디를 간들 자기 마음대로 되는 데가 있느냐? 각자 자기 마음대로 살려고 하는 세상인데 누가 내 마음대로 비위를 맞춰 주겠느냐?


세상은 다 자기 계획대로 살려고 하지만 옳은 지식이 들어가면 그 사람은 사람이 바뀐다. 사람이 바뀐다는 것은 옳은 지식으로 바뀌면 옳은 성품의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일만 생각하던 사람이 사람을 생각하게 된다. 일을 할 때도 사람을 생각해서 일을 해야지 일 때문에 사람을 부리게 되면 사람이 망가지고, 거기에는 사람이 안 붙어 있는다. 사람을 위해서 회사가 돌아가고, 사람을 위해서 학교도 돌아가면 얼마나 기쁘고 좋으냐?


35절 앞에서 예수님께서 ‘내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죽는다’고 했는데 이 두 제자는 그 말씀을 듣고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 달라고 하니 이게 무슨 말이냐? 생각이 참으로 엉뚱하다. 예수님께서 ‘인자가 예루살렘에서 종교지도자들에게 능욕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삼일 만에 살아난다’는 그 말씀을 하셨는데, 이 두 제자는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하고 살아나신다면 굉장한 영광의 나라를 세울 것 같아서 그 때 주의 영광중에서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 달라고 한 것인가?


예수님의 살아나심은 시공간을 초월하는 신령한 부활체로 살아나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죽은 나사로가 나흘 만에 살아난 일이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난다고 하니까 이 두 제자가 죽은 나사로가 나흘 만에 살아난 그 회생으로 예수님께서도 살아나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그 말을 한 것일까? 아니면 ‘주의 영광중에’ 라고 했으니까 자기들도 신령한 부활체로 살아난다는 그 생각을 가지고 이 말을 한 것일까?


그러니까 주님께서 당신이 살아난다고 하신 것과, 두 제자의 입장에서 예수님이 살아나는 것을 생각하는 게 같은 뜻이냐, 다를 수도 있느냐? 지금 이 장면에서는 두 생각이 다른 거냐? 예수님께서 당신이 살아난다는 것과, 두 제자가 예수님이 살아난다고 하는 그게 생각이 다르다. 질이 다르다.


예수님의 살아나심은 단일성의 부활체로 살아나심이다. 그런데 우리는 변화 부활을 입기 전까지 우리 속에 예수화로 바꿔지는 거다. 그러니까 우리가 현재는 부활은 안 됐지만 우리 속에 들어있는 성질이 부활성이 들어있다. 그래서 마지막 날에는 부활체가 된다.


그런데 현재 육체를 입고 있는 우리의 속에 부활성으로 들어있는 이 요소는 시간 속에 제한을 받고 있다. 그래서 마음대로 안 된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의 부활성을 몸의 물질이 싸고 있기 때문에 마음대로 안 된다. 그러나 마지막 날 부활이 되고 나면 육신은 변화가 돼서 영육이 단일체가 된다. 그 때는 영육을 나눌 수가 없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부활체로 나타나니까 제자들이 처음에는 유령인가 하는 의심을 가지니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내 손과 발을 봐라’ 하며 표적도 보여주고 했다. 그래서 부활의 주님을 믿기는 믿는데 아직까지 미심쩍어하니까 부활의 주님께서 고기를 드셔서 제자들에게 확신을 주셨다.


그러면 왜 그 장면을 기록해서 나에게 보여주느냐? 주님이 부활체로서 모양도 갖추고 있고, 먹기도 하고 했는데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생각하라고 그 장면을 기록해서 나에게 보라고 하시느냐?


성경 속에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는 그 자유를 주시려는 것이다. 주님의 부활체처럼 먹을 수도 있고 안 먹을 수도 있고, 시공간을 초월해서 순간적으로 이동도 될 수 있는 참 자유다. 이러면 사망은 멀리 가버린 거다. 그 참 자유를 주시겠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주님의 부활체가 우리의 영원 궁극적인 구원의 모습이다.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의 부활체의 그 질로 되는 구원을 넣어서 나를 지은 것이다.


주님의 그 모습을 통해 인간 나의 존귀영광에 대한 가치력을 생각해 봐라. 오늘날 자기의 신앙이라든지 자기의 사고방식을 그 생각을 가지고 비교를 해 봐라. 그럼에도 하나님의 인간창조의 목적에서 당신의 사랑의 제 1 목적물로 된 자기의 존귀 영광성이 안 믿어지느냐?


인간 자기의 존재가치를 누가 떨어뜨리느냐? 여러 말 할 것 없이 자기가 떨어뜨린다. 자기는 어디에 구속돼 있는 거냐? 세상에 구속돼 있는 것만큼 자기는 진리화 되지 못한 거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진리로 자유가 안 돼 있다면 자기는 어디에 구속이 돼 있는 거다. 그만큼 자기는 무겁고 근심 걱정이고 고통이고 눌리고 있는 거다. ‘기독교 신앙이라는 거, 예수 믿는다는 게 뭐다’ 하고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다.


죽은 나사로가 나흘 만에 살아난 이건 회생인데, 두 제자가 예수님의 살아나심을 그렇게 알았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42절-45절의 말씀에 걸린다. 이들이 시공간을 초월한 부활체를 모르겠지만 설령 안다고 해도 그 신령세계는 영능의 실력제냐, 낙하산으로 떨어지는 임명제냐? 임명제가 아니라 실력제다. 임명제로 되면 천국이 아니라 싸움이 일어날 거다. 천국은 영능의 실력제라는 말씀이 43절-44절이다.


예수님께서 두 제자에게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실 수 있고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하니까 ‘할 수 있습니다’ 라고 했다. 그러면 예수님의 받을 잔과 세례가 뭔지를 알고 그 말을 하는 거냐, 모르고 그 말을 하는 거냐? 모르고 그 말을 하는 거다. 예수님의 마시는 잔과 예수님의 받는 세례는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 들어있는 우리의 구원의 하나의 과정인데, 그 과정 중에 있는 예수님의 마시는 잔과 예수님의 받는 세례가 어떤 사건의 내용인 줄도 모르고 그 말을 하는 거다. 겁도 없고 기가 막힐 말이다.


예수님이 당할 그 사건과 내용은 일반사람들의 출생과 살아온 것을 가지고는 안 되는 것들이다. 세상에서 아무리 도를 닦은 도인이라고 해도 안 된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인간 되어 오시는 방편이 특수했고, 세상에서 살으심이 특수했고, 그의 모든 살으심은 신령한 개념이고 뜻이었고, 그 언행심사로 나타나신 모든 활동성은 죽은 것이 없고, 죄에 감염된 것이 없고, 유혹과 미혹에 넘어간 것도 없고, 전부는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는 신령성으로 영생으로 생명으로 살려낸 살으심이었다. 하나님의 지공법에 만족을 이뤄드린 우리의 구원을 위한 삶이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자신에게 대한 이룰구원의 삶이다. 그러니까 이 이룰구원은 하나님의 영능의 실력으로 본질화 되는 의사단일 속성 성품 이런 것으로 자기 안에 채워 넣는 것이다. 예수님의 것으로, 이긴 것으로, 안 죽는 것으로, 이 죽을 것이 죽지 않을 것에 삼킨바 되는 예수님의 부활체 속에 든 부활성으로, 살아난 것으로, 이긴 것으로 우리 속에 채워 넣는 것이다. 예수 믿는다는 것에는 이게 들어있다. 이게 없다면 소용이 없다. 이 두 형제가 그런 예수님의 삶을 알았을까? 이 두 형제도 예수님과 똑같은 일을 하는 존재냐?


그러니까 함부로 장담을 하는 사람은 이미 넘어져 있는 사람인줄 알아라. 이 말씀을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 얼마나 장담을 잘 하는지. 그런데 다 떨어졌다. 신앙은 장담이 아니다. 성경에 보면 누가 장담을 잘 했느냐? 베드로도 장담을 잘 했다. 그러나 예수님을 부인했다. 신앙은 장담이 아니라 진리대로 사는 삶이라야 옳은 거다. 그게 안 돼 있으면서 장담을 하는 것은 못 쓴다. 장담하지 않고 도태되지 않고 뒤떨어지지 않고 생명의 좁은 길을 가려는 그 열심을 주님이 알아주고 사랑해 주신다.


예수님의 마시려는 잔이 무엇이냐? 표면적으로는 첫째로 십자가를 지는 사건이고, 두 번째는 이면적으로 보면 마귀가 최고로 발악을 하는 시험이다. 그걸 이겨야 한다.


마귀가 발악하는 그건 눈으로는 안 보인다. 무형적인 그것은 눈에 안 보이는데 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을 박는 거냐? 예수님의 우리의 구원을 위한 삶은, 그리고 십자가를 지는 그 사건에서도 영원 전부터 우리의 구원을 위한 그 사랑의 마음이 무슨 빛처럼 하나님과 연결이 끊어짐이 없어야 되는 건데 그걸 순간적으로 차단시키기 위한 방편이 마귀가 당시의 유대 종교인들과 로마 군인들을 동원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손에도 머리에도 다리에도 못을 박아서 자극을 주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 이걸 우리 개인에게 이룰구원으로 가지고 와서 보면 ‘너 예수님과 제발 좀 끊어져라’ 하고 말만이 아니라 사건이 들어와서 우리 마음에 자극을 주는 거다. 마귀는 우리를 하나님과 대립을 만들어 놓기 위해서 여러 가지 수법을 동원한다. 그런데 호응적인 방법으로 들어오면 거의가 넘어진다. 악한 도둑으로 오는 게 아니라 제일 가까운 제일 친한 자를 통해서 들어올 수 있다.


우리가 바로 믿고자 하는 마음을 가졌을 때 세상요소로 된 그 무엇이 와서, 사람이던 물질이던 돈이던 일이던 와서 그 마음을 끊는다. 끊으면 상처가 난다. 마음이 아프다. 마음이 아픈 것은 상처가 났다는 것이다. 두 번 나고 세 번 나고 자꾸 넘어지면 이제는 만성이 돼버린다. 이러면 죄를 지어도 무덤덤해진다.


세 번째는 예수님의 마시는 잔에서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대로의 중보의 일을 성공적으로 이루는 것이다. 잔은 들고만 있는 게 아니라 마시는 거다. 그 속에 들어있는 사건을 겪어야 되는 건데, 이 사건에서 지는 사람이 있고 이기는 사람이 있다. 예를 들면 권투선수가 링 위에 올라가서 ko돼서 비참하게 내려오는 사람이 있고, 벨트를 걸고 만세를 부르며 내려오는 사람이 있다.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으로 통해 세례를 받았다. 그러면 여기의 세례는 무슨 세례냐? 본문의 세례와 용어는 같으나 내용은 다르다. 세례요한으로부터 받은 세례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한 의식이다. 우리에게 보여주려고. 우리가 받는 세례도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함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의를, 하나님의 옳음을 자기에게 이루는 거다.


그러면 본문의 예수님의 받는 세례는 뭘 말하는 거냐? 세례는 완전히 물에 잠기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다 함은 완전히 죽음에 잠기는 것을 말한다. 죽음에 완전히 잠기는데,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 털끝만큼이라도 잘못이 있다면 죽음에 잠겨있던 그 분이 말하자면 떠오르겠느냐? 안 떠오른다.


그런데 예수님은 평소에 죽은 게 없고 죽을 것도 없고 죽어가는 것도 없고 전부는 100% 산 삶을 사셨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에 잠겼지만 죽지 않는 신령한 몸으로 되살아나는 것이다. 이게 부활의 몸이다. 우리가 어릴 때 나무배를 만들어서 물속에 집어넣었다 손을 떼면 배가 떠오른다. 물에 떠오르는 것은 물속에 가라앉을 요소가 아니라서 그렇다. 쇳덩어리는 그냥 밑으로 가라앉는다.


예수님의 오심과 살으심과 부활하심 모두는 일반성이 아닌 신령성 특수성이다. 그러면 두 형제가 그런 자격이 있느냐? 그런데도 39절에 보면 두 형제는 ‘할 수 있나이다’ 라고 했는데, 이렇게 말한 것은 아마도 단순히 십자가에 죽는 것만을 생각한 말인지도 모르겠다. 설령 그렇게 알았다고 할지라도, 그래서 두 형제가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달려 죽더라도 3일 만에 무덤에서 신령체로 부활을 해야 하는데 이 두 형제 속에 부활할 수 있는 게 들어 있느냐? 없다. 그러니 이게 얼마나 엉뚱한 말이냐?


40절: ‘우편과 좌편에 앉는 자는 그 날에 누구에게 예비 되었던 그들이 앉는다.’ 그러니까 천국은 낙하신 식이 아니라 영능의 실력자가 앉는 영능제이다.


그러면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 자리가 아직까지 비어 있느냐, 누가 이미 가서 앉아 있느냐? 천주교 교황이 앉아 있느냐, 시집 장가도 안 가고 열심히 일한 사명자들이 앉아 있느냐? 그 자리는 아직까지 비어 있느냐? 그 자리에 욕심이 없느냐? 우리교회 교인들은 그 자리에 목사가 앉으면 좋겠느냐, 내가 앉으면 좋겠느냐? 좋은 것에는 욕심이 있어야 한다.


욕심이라고 할 때 ‘욕심 욕(慾)자’가 있고, ‘하고자 할 욕(欲)자’가 있는데, 우리는 하고자 할 욕심으로 그 자리를 실력으로 자기가 앉고 싶어 하는 소원성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들의 평소의 신앙성질을 보면 정 반대의 느낌이 든다. 우리는 구원이 아니면 탓을 말라. 다 지나가는 거고 실속 없는 건데 왜 그걸 잡고 탓하고 신경 쓰고 병들고 하느냐?


천국의 제일 높은 그 자리는 세상 마지막 날까지 비어있다. 그 자리를 누가 차지하겠느냐? 그 날에 앉을 자는 43절-44절의 삶을 산 사람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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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가 인격자이신 하나님의 가장 깊은 심원인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부터 발로된 인간구원의 의사를 좇아서 신앙을 해야만이 기독교 본질에서 이탈하지 않고 가장 효율적 적중적으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덧입을 수 있고, 성도 각자가 이 땅에서 이렇게 덧입은 하나님의 성품의 양에 따라 장차 천국에서의 누림에 차등이 생기게 됨을 성경을 통해 알 수가 있습니다.


김경형목사님께서 교역자 및 신학생을 대상으로 20여년 동안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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