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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11:1-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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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11장 1절-10절: 저희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리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거기 섰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가로되 나귀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 제자들이 예수의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나귀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걸쳐두매 예수께서 타시니 많은 사람은 자기 겉옷과 다른 이들은 밭에서 벤 나무 가지를 길에 펴며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예루살렘의 뜻은 ‘평화의 터전’이다. 살렘의 뜻은 ‘평화로운’이다. 하나님과의 평화는 하나님과 의사단일성이라야, 하나님과 대립이 없어야 평화가 성립이 된다. 이질로 나가면 진노와 형벌이 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의 왕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통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인간창조의 목적에 맞는 통치라야 되고, 또 하나님께서 왕을 세워주셔야 되는 것이고, 영적 이스라엘 모든 백성은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왕을 통해 진리생명의 말씀통치를 받아야 한다.
‘영적 이스라엘’ 하게 되면 세계 어느 곳에 살건 말씀의 이치대로 이룰구원으로 예수 믿는 자 전체를 말한다. 크게 말하면 교회는 전부가 영적 이스라엘인데, 세상 육적으로 나가며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이들과 구분해서 이룰구원으로 나가는 백성을 영적 이스라엘이라고 보기도 한다.
이질 된 세상에 속한 통치를 받으면 심판의 형벌을 받게 된다. 이 심판은 물론 역사적인 심판도 되지만 그 이전에 자기의 몸은 주님께서 피로 사신 거룩한 몸이다. 그러니까 성령님이 계시는 전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 믿는 자기는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 전이다. 그래서 자기 몸을 더럽히면 안 된다.
그리고 자기의 모든 정신 사상 소원 목적을 세상에 대한 이해타산적으로 가지면 안 된다. 자기 몸은 주님의 피로 사신 주님의 전인데,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것인데 자기 몸을 함부로 세상적으로 쓰게 되면, 소원 목적을 그렇게 가지면 하나님께서 자기 몸을 치신다. 자기 몸이 자기 것이라고 함부로 쓰면 그게 바로 자기에게 고통이 오고 병이 오고, 오느니만큼 그게 하나님의 간섭이다. 그러지 않고 성경대로 들어가면 자유롭고 기쁘고 즐겁고 행복한 거다. 그런데 그걸 모르니까 자기 몸을 정신을 함부로 쓰니 피곤하고 고통스럽고 짜증나고 하는 거다.
자기 몸은 주님의 것인데 자기가 선악과 따먹은 생각을 가지고 자기 마음대로 했다가는 하나님의 징벌의 형벌이 온다. 다른 말로 하면 책임추궁이 온다. 그래서 우리의 이해타산 사고방식은 말씀에 의해서 자타의 이룰구원으로 나가야 한다. 이렇게 살라고 하는 것은 알고 보면 자기를 영원히 존귀 영광자로 만들어 주려는 것이다.
창14:18에 아브라함이 4대 연합군에게 잡혀간 조카 롯을 찾아오기 위해 훈련된 가군 318명을 데리고 가서 롯을 찾아왔을 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 멜기세댁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왔는데 아브라함이 그 받은 것의 십분의 일을 다시 멜기세덱에게 줬다.
히:7:1-2에 보면 이때의 그 왕을 살렘 왕 멜기세댁이라고 했다. 이를 번역하면 첫째는 의의 왕, 살렘 왕, 평강의 왕,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이었다고 했다. 인간 세상에 이런 사람이 있느냐? 없다. 이건 뭘 말하는 거냐?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예루살렘 왕은 이스라엘의 시조되는 사상이다. 우리는 그렇게 보면 된다. ‘살렘 왕 멜기세댁, 평강의 왕, 의의 왕, 시작도 끝도 없고 항상 영원히.’ 그러니까 예루살렘의 시조가 되는 사상이다.
수10:5에 보면 여호수아가 예루살렘 왕을 죽이는데, 이 왕은 노아홍수 이후 아버지 노아로부터 저주받은 함이 있고, 함의 아들인 가나안 후손들을 가나안 족속, 또는 아모리 족속이라고 했는데 그들은 우상숭배자들이요 신체적으로 장대하고 성적으로 문란한 자들이었다. 이스라엘은 이런 그들과는 동맹이나 혼인이나 그들의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나 그들의 풍속을 따르는 것 등 모두 금지사항이다. 여호수아가 그 왕을 죽인 것은 말하자면 예루살렘에서는 그런 정신 사상을 가진 자는 왕이 될 수 없다는 뜻에서 죽인 것이다.
예루살렘에서의 왕은 군말을 타고 살인하고 명령하고 억압하고 강압하고 착복하는 왕도 아니고, 이방나라를 배경하여 등에 업은 예수님 당시의 에서의 후손 헤롯왕도 아닌 하나님 앞에 겸손하여 어린 나귀를 탄 평화의 왕이다. 이 평화의 왕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100% 순종을 한 겸손한 왕의 징표로써 사람이 한 번도 타지 않은 어린 나귀를 타셨다.
이 왕이 타신 어린 나귀 또한 남의 당근 밭에 들어가서 당근을 파먹다가 들켜서 돌멩이로 얻어맞고 쫓겨 다니는 나귀가 아니었다. 이 어린 나귀를 볼 적마다 사람들이 ‘저놈의 나귀새끼’ 하며 돌멩이를 던지는 그런 나귀가 아니었고, 주인의 손과 정성에 잘 길림을 받은 깨끗하고 순종을 잘하는 새끼나귀였다. 만일 이 나귀가 성질이 더러워서 주님이 타셨는데 펄떡 뛰어서 주님이 땅에 떨어지면 무슨 꼴이 되겠느냐? 이게 무슨 뜻이냐? 오늘날 예수 믿는 자기가 탄다면 나귀가 가만히 있을까?
이 나귀새끼가 어디 있느냐? 예루살렘 가까이 하고도 감람산 근방 벧바게 고을과 베다니 고을 근방의 길 가 입구에 매여 있었다. 예수님께서 들어오면서 보기 쉽게 해서 타시라는 뜻으로 그렇게 돼 있다. 주님이 보시는 눈도 생각을 해서 거기에 매어놓은 것이다. 만일 나귀를 집 뒤뜰에 감췄다면 어떻게 되겠느냐?
예수님께서 제자 둘을 보내시며 ‘맞은 편 마을로 가라. 마을로 들어가면 나귀새끼가 매여 있다’ 라고 했다. 보냄을 받은 두 제자는 눈이 밝아야 한다. 관찰력이 있어야 한다. 말씀에 순종을 하려면 관찰력도 있어야 하고 눈도 밝아야 한다. 영적으로 말하면 신분도 정신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앞 절에서 보면 눈이 열려서 길에서 예수님을 좇은 자가 있다. 말하자면 눈이 밝아야 심부름을 할 수 있다. 이렇게 연결이 되는 거다. 영의 눈이 밝아야 주님의 일을 할 수가 있다. 영의 눈이 안 밝으면 못한다.
‘주가 쓰시겠다 하라.’ 잘 듣고 그대로 전해야 한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예수님께서 나귀의 주인과 잘 아는 사이인지 마치 미리 약속이나 한 것처럼 느껴진다. 이방인이란다면 예수님께서 전하는 그 말을 듣고 선뜻 자기 나귀를 내어줄 리가 없고, 또 같은 백성이라도 믿음이 없는 자라면 내어주지 않을 것이고, 예수님께서도 예루살렘을 그냥 걸아가면 걸어갔지 그렇게 말씀하시지도 않았을 것이다.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러면 줄 것이다.’ 예수님은 그가 믿음 있는 사람이고 자원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안 보고도 아신다. 지금 이 시간도 예수님께서 우리의 마음도 다 아시느냐? 예수 믿는 사람에게 이렇게 물으면 다 아신다고 말은 하겠지만 사실은 자기의 현실에서 그렇게 생각을 못하고 사는 것 같다. 주님이 자기의 마음을 아신다는 걸 의식을 못하니 서로가 말할 때도 뭘 숨겨놓고 말을 하고 하는 게 있다.
9절-10절에 보면 스가랴9:9의 내용과 비슷하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성육신으로 오시기 500년 전 선재적 그리스도로 계실 때 스가랴 선지자에게 예언을 하도록 하게 해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주신 말씀이었다. 그런데 새끼나귀의 주인이 어떻게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대로 때를 맞춰서 새끼나귀를 준비할 수가 있었을까? 그게 참 신비롭다. 어떻게 신약시대의 성도가 500년 전의 예언대로 때를 맞춰서 준비할 수 있었을까가 신비롭다.
신약시대의 이 성도가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한 그 말씀을 읽었을까? 읽었더라도 무턱대로 준비할 수는 없는 거다. 예수님과 미리 약속을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제 때에 준비를 할 수가 있겠느냐? 그런데 “‘왜 가져가느냐? 무엇에 쓰려고 하느냐?’ 묻거든” 이라고 하신 것을 보면 미리 약속을 한 것 같지는 않다. ‘내가 몇 월 며칠 몇 시에 올라갈 테니 길목에 미리 나귀새끼를 매어 놔라’ 그런 약속을 한 것은 안 보인다. 그러니 사전에 약속한 것이 아니란다라면 나귀새끼를 준비한 성도는 성령님의 영감의 감화로 주시는 지혜로 준비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신의 감동으로 준비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려면 먼저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신앙정신 그 사상의 흐름을 시대적으로 정확히 파악해야 할 것이다. ‘내가 주님의 말씀을 응하게 나귀새끼를 타고 가시도록 해야지’ 한다면 그 시대의 신앙의 흐름을 보고 파악을 할 줄 아는 눈이 밝은 성도여야 하고, 또한 예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해 내는 메시아 되심을 정확히 아는 자가 나귀새끼를 준비할 수가 있다. 모르면 안 된다. 그래야 예수님의 구원역사와 신앙사상적으로 매칭이 되는 거다.
여기서 또 생각을 해 보자면 미래의 영감성을 가진 무명의 이 성도가 공 드려 정성 것 조심조심 나귀를 키워서 주님께서 쓰시라고 쉽게 눈에 보이도록 길 가에 매어 놓았는데 주님께서 그 나귀를 풀어서 타고 가지 않고 그냥 예루살렘으로 걸어가셨다면 무명의 나귀 주인의 마음도 마음이지만, 그렇게 되면 스가랴 선지자에게 주신 주님의 예언은 거짓말이 되고 만다. 미리 예언을 해 놓은 것은 준비를 해 놓으라는 것이다. 그래서 무명의 성도가 시대의 흐름과 교회의 신앙정신을 보고 메시아가 오실 것을 알고 준비를 딱 해 놨는데 주님이 안 타고 갔다면 주님은 거짓말쟁이가 된다. 성령님의 감화 감동으로 사는 자는 구원운동에 미리 준비가 되어 들어간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예언을 일점일획도 거짓이 없이 다 이루는 분이시다. 시대적으로도 개인적으로 그렇다. 왜냐하면 우리 영원 궁극적 창조의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에게는 인간의 생각처럼 돌발적이거나 우연의 일은 있을 수 없다. 다 아시고 가고 안 가고 하는 거다. 다 아심에서 하는 거다.
‘섰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가로되 나귀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 ‘그까짓 하찮은 나귀를 무엇에 쓰려느냐’ 라고 하는 말이지만 그러나 겸손하신 왕으로서의 주님은 우리의 구원이라면 남이 하찮게 여기는 것이라도 귀하게 쓰신다 함도 거기에 들어있다.
이것을 볼 때 자기 자신이 가난하고 못 배우고 못 났고 세상은 안 알아줘도 자신을 자타의 구원운동에 쓰임이 되도록 잘 단속하고 있으면 왕 되신 주님은 그 사람을 찾아서 기꺼이 존귀자가 되도록 해 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님은 이 무명의 성도의 마음을 잘 알고 계신다. 그리고 그가 당신을 위해 미리 준비한 것도 아신다. 성경에 보면 말씀의 지시대로 선지자의 예언대로 이사를 가기도 하고 어디로 올라가기도 한다. 오늘날 자기도 이사 가고 안 가고 하는 것도 선지자의 말씀을 이루려고, 주님의 예언된 말씀을 이루기 위해 산다면 얼마나 존귀하게 될까?
왕 되신 주님을 태운 나귀새끼가 몇 마리냐? 한 마리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타락된 세상에게 잘 보이기 위해 온갖 힘을 쏟고 있지만 자기를 창조의 목적대로 주님의 구원운동에 쓰임이 되기 위해 정결하고 거룩하게 단속하는 무명의 성도가 몇이나 될까?
‘이 몸을 원하시면 이 몸을 드리고, 이 목숨을 원하시면 이 목숨을 드리고, 모든 성도의 구원이 된다면 이 몸이 부서져서 가루가 된다고 해도 창조의 구원목적에 맞는 삶이 된다면 내가 그렇게 살겠나이다’ 그런 기도를 해 봤느냐? 그런 기도는 성령님의 즉, 하나님의 신에 감화 감동된 자가 아니면 안 된다.
나귀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안장대용으로 나귀 등에 걸치니 예수님께서 그 나귀를 타셨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겉옷과 밭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다 양탄자처럼 깔고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며 소리 질러 ‘호산나 호산나’ 하고 외쳤다. 호산나란 ‘구하소서’ 라는 뜻이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무명의 성도는 나귀새끼를 구원운동에 제공하고, 어떤 자는 자기의 겉옷을 제공하고, 어떤 자는 자기 밭에서 자라는 나뭇가지를 꺾어다 죄에서 포로 된 자들을 자유케 하는 왕 되신 주님의 그 운동에 쓰임이 되게 하지만 이것을 가만히 보고 있는 자들이 있었다. 누구였을까?
무리들의 찬송소리를 들으면 이들은 모세와 같은 역할을 하는 메시아를 기다린 것이 분명하다. 예수님께서 병 낫게 하시지, 귀신 쫓아내 주시지, 소경 눈 띄워주시지, 중풍병자 일으키시지, 앉은뱅이 일으키시지, 죽은 자 살려주시지, 벳새다 광야에서 배고픈 자에게 이적으로 배부르게 떡을 먹여주시지, 풍랑파도를 잔잔케 해 주시지, 바닷물에 빠진 자를 건져주시지,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지. 이만하면 모세가 바로를 항복을 시켰듯이 이 예수님도 모세와 같은 역할을 능히 하고도 남을 수 있는 예수님이시다.
당시의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얼마든지 로마 강대국의 세력을 물리치고 유대가 독립하여 다윗시대처럼 예루살렘에서 통치를 할 것이라고 봤다. 그래서 ‘호산나 호산나. 구하소서 구하소서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하고 찬송한 것이 아닐까?
사실은 모세를 통해서 영적 이면적으로 계시로 보여주심인데 즉, 양의 피는 예수님의 피로 죄에서 탈출 또는 해방시켜주시는 것을 계시로 보여주심이었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죽으심도 죄에 매인 당신의 백성을 죄에서 해방시켜 주심을 영적으로 깨달으라고 보여주심인데 이들은 모세가 한 일의 표면만 보고 예수님도 그런 일을 하실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표면만 보고 찬송을 하면 상황이 달라지면 실망을 하게 돼 있다. 찬송을 부르는 사람들이 그게 약점이라면 약점이다. 표면만 보고 찬송을 하면 상황이 달라질 테니까 여기에는 반드시 실망이 따라온다. 그러나 그 표면 속의 영적 이면적인 뜻을 깨닫게 되면 표면적으로 상황이 달라져도 영적 중심에서 나오는 찬송은 끊어지지 않고 언제나 감사 찬송이 연속된다.
10절: ‘지극히 높은 곳에서.’ 이 말씀 속에는 예수님의 사역과 역사는 영적인 역사라는 의미가 들어있다. 가장 높은 곳에서의 찬송은 죄 아래, 사망 아래 놓여있는 인간이 자유자가 되게 죄를 사하고 죄와 관계없이 살도록 해방되게 만드는 최고의 왕이라는 의미가 들어있다. 영적으로 보면 예수님은 그 왕으로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것이다.
예루살렘에서 왕 된 자를 누가 죽였느냐? 함의 후손이 예루살렘에서 왕을 하고 있을 때 여호수아가 죽였다. 이걸 사상적으로 보면 ‘너 같은 하나님도 모르고 우상을 섬기고 자는 예루살렘에서 왕 될 자가 아니다’ 하고 죽인 것이다. 그러니까 그런 자는 예루살렘에서 왕이 안 된다. 진리통치가 안 된다.
시대적으로 교회 안에서도 그걸 봐라. 하나님의 백성들은 영의 말씀을 가지고 길림을 받으며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통치를 받고 그 사람으로 만들어져야 한다. 이게 영적 참 이스라엘이다. 아브라함의 참 옳은 진리신앙이다. 그런데 오늘날 거짓된 교회는 구약성경에서 죽임을 받은 왕들이 많이 있듯이 죽는 거다. 저주고 사망이고 형벌이고 하나님의 진노다 그 말이다.
무리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왕으로 모시기를 원했지만 그러나 예수님은 먼저 어디를 둘러 보셨는지가 11절에서 나온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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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가 인격자이신 하나님의 가장 깊은 심원인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부터 발로된 인간구원의 의사를 좇아서 신앙을 해야만이 기독교 본질에서 이탈하지 않고 가장 효율적 적중적으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덧입을 수 있고, 성도 각자가 이 땅에서 이렇게 덧입은 하나님의 성품의 양에 따라 장차 천국에서의 누림에 차등이 생기게 됨을 성경을 통해 알 수가 있습니다.
김경형목사님께서 교역자 및 신학생을 대상으로 20여년 동안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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