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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6: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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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부겸 목사 |
참고 : | 수도원교회 |
2011년 5월 29일 주일설교
성경말씀 : 마태복음 6장 34절 / 로마서 8장 18절
설교제목 : ‘오늘’의 영성
<영성 시>
민어나 숭어처럼
* 김상현 시인
숭어가 가장 어렸을 때는 모치라고 부르고
좀 더 자라면 참동어라고 부르고
그보다 더 자라면 홀떡백이라고 부른다
민어의 어렸을 적 다른 이름은 감부리,
좀 더 자라면 통치라고 한다
나는 한 번도 내 이름을 버린 적이 없이
날마다 허락해 주신 새 날을
그저 그 날이 그 날이거니 하며 살면서도
부끄럼을 몰랐다
더 넓은 곳을 향해
더 깊은 곳을 향해
나아가지 못하고
제 자리에서 맴돌면서도
게으름인 줄 몰랐다
이제라도
누가 나를 다른 이름으로 불러다오
전혀 다른 삶에 도전할 수 있도록
제발 나의 이름을 다르게 불러다오
숭어나 민어처럼.
【그러므로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맡아서 할 것이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다." (마태 6:34)】/ 【나는, 현재 우리가 겪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견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로마 8:18)】
<책 이야기>
최근 『이상문학상 작품집(2004년도)』을 읽었는데, 그 책에서 소설가 김훈 씨는 이런 이야기를 했더군요.
【나는 또 그 무렵에 <난중일기>를 읽었다. 이것은 내 생애의 사건이었다. 도서관에서 우연히 그 책이 눈에 띄어 가져다 읽었다. 문학도 역사도 아니었고 다만 진중일기였다. 나는 경악했다. 아, 낭만주의는 그야말로 낭만일 뿐이로구나 …… <참고 : 낭만주의를 한 마디로 줄여서 말하자면, 인간은 아름답고 세계는 조화롭다는 것이었다. 인간의 앞날에는 자유와 이성이 꽃피고 산천은 본래 그 스스로 아름다운 것이며 시간은 늘 새롭다는 얘기였다.>
내 경악은 절망에 가까웠다. 그 무미건조한 책 속에는, 이 희망 없는 세계의 참상이 아무런 수사도 없이 알몸뚱이로 피를 흘리고 있었고, 이순신이라는, 거대하고 암울한 내면을 가진 사내가 그 희망 없는 세상을 희망 없이 통과하고 있었다. 그의 문장은 세상을 가차 없이 내리치는 단문이었다. 칼은 한번 긋고 지나가면 그뿐이어서 칼은 돌이킬 수 없고 칼은 빌려줄 수 없고 칼은 머뭇거릴 수 없는 일회성(一回性)의 운명으로 차가웠다. 나는 그 책을 읽으면서, 벌벌 떨었고 때때로 울기도 했다. 희망 없는 세상에서, 기어이 희망을 말한다는 것은 타락이며 비굴이라고 생각했다.】
인생에서 중요한, 아주 여러 가지 차원을 생각하게 하는 훌륭한 글입니다. 하나 하나 곱씹을 필요가 있는 이야기들입니다.
<성경 이야기>
이제 성경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바울이 썼다는, 로마서입니다. 【나는, 현재 우리가 겪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견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로마 8:18)】바울 선생은 로마교회의 교우들에게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현재 여러분들이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염려하지 마십시오. 조금만 더 참고 견디십시오. 희망이 있습니다. 꿈은 이루어 집니다. 조금만 더 참고 견디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고난은 아무 것도 아닐 만큼의 어마어마한 영광스러운 축복이 하늘에서 떨어질 것입니다.” 뭐 그런 식으로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맡아서 할 것이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다." (마태 6:34)】예수님에게 있어서 ‘오늘’은 내일을 위해서 참고 견뎌야할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예수의 ‘오늘’은 무엇을 얻기 위한 수단이나 방법으로서의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예수의 ‘오늘’은 하루하루 별개의 독립적인 의미와 가치를 담고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예수의 ‘오늘’은 그 자체로서 이미 놀라운 하늘의 뜻을 갖고 있는 영성적 실체였습니다.
<인생의 두 길>
삶의 철학에 있어서 인생에는 두 가지 길이 놓여져 있습니다. 하나는 바울 식의 삶, 즉 내일을 위해서 오늘은 견디는 삶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예수 식의 삶, 즉 오늘은 오늘대로 촘촘히 살고, 내일은 내일대로 또 촘촘히 사는 삶입니다. 우리는 어느 방식으로 살아야 할까요?
글쎄요. 많이 어렵지요. 두 길의 ‘짬뽕식’으로 사는 것이 정답에 가까울 것입니다. 내일을 위해서 오늘을 견디는 삶과 오늘은 오늘로서 완성되는 삶을 병행해서 사는 길이지요. 물론 이게 모순되는 이야기인줄 잘 압니다만, 그 모순의 길이 지혜로운 인생길인 것이지요. 즉 바울의 인생길과 예수의 인생길을 잘 조화롭게 병행해서 사는 길이 바람직하겠지요!
굳이 몇 가지 병행의 길을 말해보자면, “형식적으로는 바울의 길을 따르지만, 내용적으로는 예수의 길을 따르는 삶” “하루는 바울식으로 살고, 또 하루는 예수 식으로 사는 삶” “일주일 중 6일은 바울 식으로 살고, 1일은 예수 식으로 사는 삶” “젊어서는 바울 식으로 살고, 늙어서는 예수 식으로 사는 삶” “낮에는 바울 식으로 살고, 밤에는 예수 식으로 사는 삶”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면 바울 식으로 살되, 그 속에서 예수 식으로 살 수 있게 찾는 삶” 등등을 말할 수 있겠지요!
제 입장의 소견을 말씀드리자면, “예수의 길이 정답인데, 그 정답에 이르는 길은 바울에게 있다”는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이제 설교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말씀의 제목을 ‘오늘의 영성’이라고 잡아보았습니다. 오늘 이 설교말씀의 제목을 잘 묵상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잠깐 기도하겠습니다.
* 축도
이제는 진리의 세계로 진입한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와 우리 생명의 근원 되시는 하느님의 신비로운 사랑과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아름다운 곳으로 인도해 주시는 성령님의 은총이 우리 수도교회 교우들 머리 위에 영원토록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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