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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시53: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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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부겸 목사 |
참고 : | 수도원교회 http://blog.naver.com/malsoom/131239922 |
011년 6월 26일 주일설교
성경말씀 : 시편 53편 1절~2절
설교제목 :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며
<영성 시>
고난기에 사는 친구들에게
* 헤르만 헤세
사랑하는 벗들이여, 암담한 시기이지만
나의 말을 들어 주어라
인생이 기쁘든 슬프든, 나는
인생을 탓하지 않을 것이다.
햇빛과 폭풍우는
같은 하늘의 다른 표정에 불과한 것
운명은, 즐겁든 괴롭든
훌륭한 나의 식량으로 쓰여져야 한다.
구비진 오솔길을 영혼은 걷는다.
그의 말을 읽는 것을 배우라!
오늘 괴로움인 것을, 그는
내일이면 은총이라고 찬양한다.
어설픈 것만이 죽어간다.
다른 것들에게는 신성(神性)을 가르쳐야지.
낮은 곳에서나 높은 곳에서나
영혼이 깃든 마음을 기르는
그 최후의 단계에 다다르면, 비로소
우리들은 자신에게 휴식을 줄 수 있으리.
거기서 우리들은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으며
하늘을 우러러 볼 수 있을 것이리라.
【어리석은 사람은 마음 속으로 "하나님이 없다" 하는구나. 모두가 하나같이 썩어서 더러우니, 착한 일 하는 사람 아무도 없구나.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사람을 굽어보시면서, 지혜로운 사람이 있는지,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있는지를 살펴보신다.(시편 53:1~2)】
<엔도 슈사쿠 이야기>
『침묵』이라는 소설로 유명한, 일본인 소설가 엔도 슈사쿠(1923~1996)를 아시지요. 최근 그의 소설 『깊은 강』을 읽었는데, 그 작품에 엔도 슈사쿠의 문학세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소개되어 있더군요.
엔도 슈사큐는 열 살 무렵 독실한 가톨릭신자였던 어머니의 권유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신(神)의 의미도 잘 모른 채 자발적인 의지와는 무관한 세례였다는 이유에서, 이를 가리켜 ‘몸에 맞지 않는 양복’이라고 표현해 왔습니다. 엔도는 자신의 몸에 맞지 않고 게다가 타인이 입혀준 헐렁헐렁한 양복에 대해서 거리감을 느꼈고, 이 위화감에 대한 고뇌로 인해 그는 차라리 ‘몸에 맞지 않는 양복’을 벗어버리려는 생각도 해 보았지만, 결국 단념하고 그 대신 새로운 과제를 스스로 떠 맡게 됩니다. 즉 자신의 키에 맞지 않는 기독교라는 양복을 스스로의 키에 잘 맞는 일본 옷으로 다시 재단하는 일입니다.
이러한 엔도의 새로운 사명은 프랑스에서 신학공부를 한 이노우에 요지 신부와의 만남을 통해 한결 견고하게 다져질 수 있었습니다. “8년에 가까운 유럽에서의 수도원 생활의 결과, 나는 유럽인 자신들이 애써 노력을 기울인 사색과 땀으로 얻어낸 기독교를- 그게 바로 노력과 사색의 결정인 만큼 더욱 더- 그대로의 형태로 일본의 정신 풍토에 뿌리내리게 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느꼈습니다. 어떡하든지 일본인의 심정으로 일본인의 마음의 금선(琴線)을 울릴 수 있는 - 이는 그대로 나 자신의 마음의 금선을 울리는 것이기도 하지만 - 형태로 예수의 가르침을 재인식하지 않으면 일본에서 기독교는 자랄 수 없다는 점을 나는 엔도 씨에게 열심히 호소했습니다. 그때 엔도 씨 또한 나와 똑 같은 생각을 하고 똑 같은 과제를 짊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정말로 기뻤습니다.”
그렇다면 엔도가 제시한 그리스도 상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엔도의 기독교 해석은 엄격하고 벌하는 부성적 그리스도가 아니라, 조건 없이 무한한 사랑을 베풀고 용서하는 모성적 그리스도를 강조합니다. 대표작 『침묵』에서 엔도는 배교하는 비참하고 나약한 인간마저 너그러이 포용하는 모성의 그리스도 상을 극적으로 묘사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얼굴 상을 밟고 지나가면 살려주겠다는 핍박자의 잔혹한 제안 앞에서 고뇌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엔도가 바라본 예수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밟으라. 네 발의 아픔을 내가 가장 잘 안다. 밟으라.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왔고, 너희와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졌도다.” 모성적 하느님의 전형을 엔도가 발견했던 것입니다.
<엔도 슈사쿠와 나>
저는 엔도 슈사쿠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3가지 차원에서 깊은 동질감을 느낍니다. 어머니와의 관계성, 그리고 서양신학에 대한 절망감, 그리고 동양적 기독교 영성에의 희망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고 특히 엔도 슈사쿠가 제안한 대안적 기독교 영성에 깊이 공감하게 됩니다. 엔도가 제안한 대안적 기독교 영성이란 무엇일까요? 엔도는 그의 작품 『깊은 강』에서 주인공 청년 오쓰의 입을 통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은 존재라기보다 손길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을 베푸는 덩어리입니다. 신(神)이란 인간 밖에 있어 우러러 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 안에 있으며, 인간을 감싸고 수목을 감싸고 화초도 감싸는, 저 거대한 생명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특히 동양적 영성의 하느님은 ‘존재’가 아닙니다. ‘있다 없다’ ‘존재 한다, 존재하지 않는다’를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그런 실체가 아닙니다. 하느님은, 동양적 영성의 하느님은 ‘손길’입니다. 그 존재의 양식이 ‘손길’로서 존재합니다. 인간과 나무와 화초와 온 하늘과 땅을 감싸안고, 언제나 어디서나 언제까지나 무한한 사랑을 베푸는 ‘손길’인 것입니다.
저는 엔도 슈사큐의 제안에 깊이 동의합니다.
<성경 이야기>
이제 성경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마음 속으로 "하나님이 없다" 하는구나. 모두가 하나같이 썩어서 더러우니, 착한 일 하는 사람 아무도 없구나.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사람을 굽어보시면서, 지혜로운 사람이 있는지,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있는지를 살펴보신다.(시편 53:1~2)】
“하느님이 없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존재로서 존재하는 분이 아니라, 손길로서 존재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또 비슷한 맥락에서 “하느님은 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 역시 어리석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존재로서 존재하는 분이 아니라, 손길로서 존재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명시적으로 눈에 보이게 존재하는 분이 아니시며, 또 동시에 하느님은 명시적으로 눈에 보이게 존재하지 않는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향기처럼, 손길처럼, 안개처럼, 바람처럼, 호흡처럼, 음악처럼, 사랑처럼 존재하는 분이십니다. 그걸 밝혀낸 이가 엔도 슈사쿠였고, 시편의 기자였습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이제 설교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말씀의 제목을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며”라고 잡아보았습니다. 오늘 이 설교말씀의 제목을 깊이 묵상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축도
이제는 진리의 세계로 진입한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와 우리 생명의 근원 되시는 하느님의 신비로운 사랑과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아름다운 곳으로 인도해 주시는 성령님의 은총이 우리 수도교회 교우들 머리 위에 영원토록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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