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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12: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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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부겸 목사 |
참고 : | 수도원교회 http://blog.naver.com/malsoom/132346064 |
2011년 7월 10일 주일설교
성경말씀 : 마가복음 12장 25절
설교제목 : “죽음은 천사들의 삶이다”
<아름다운 기도> * 이해인
당신 앞엔
많은 말이 필요없겠지요, 하느님
그래도
기쁠 때엔
말이 좀더 많아지고
슬플 때엔
말이 적어집니다
어쩌다 한 번씩
마음의 문 크게 열고
큰 소리로
웃어보는 것
가슴 밑바닥까지
강물이 넘치도록
울어보는 것
이 또한
아름다운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믿어도
괜찮겠지요?
*********
【사람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가지 않고 시집도 가지 않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다.(마가 12:25)】
<책 이야기>
최근 『오랑캐로 사는 즐거움-이상수의 철학 이야기』(이상수 지음, 길출판사)를 의미 있게 잘 읽었습니다. 거기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미국에서 건너온 ‘말일교회 성도’라는 분 두 사람이 전도를 하기 위해 우리 집으로 찾아왔다. 둘 중 한 사람이 내게 말을 건냈다.
“영원한 생명을 얻고 싶지 않으십니까?” “…………” 나는 진심으로, ‘나’라는 존재가 영원히 존재해야만 한다면, 그건 매우 끔찍한 사태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분들에게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 저는 전혀 영원히 살길 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매우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저는 언젠가 하늘이 내게 준 수명이 다했을 때, 몸이 잘 썩어들어 땅속 벌레들의 밥이 되고, 더러는 거름이 되어 들풀과 나무들이 향기로운 꽃을 피워내는 데 보탬이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행복할 겁니다. 내 주검에서 자양분을 얻어갈 생명이 패랭이꽃이든 쑥부쟁이든 땅강아지든 그 무엇이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만약 ‘나’라는 존재가 영원히 존재해야 한다면 그건 제게 재앙과도 같은 일일 겁니다.”
죽음의 문제는 결국 삶의 문제다.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삶의 모습도 달라질 수 있다. 나는 여러 종교로부터 죽음에 관한 다양한 설명을 들어보았지만, 내 마음을 가장 편안하게 해준 설명 모델은 생명체의 죽음을 기(氣)의 모임과 흩어짐으로 설명하는 모델이었다. 사람이든 버들강아지든 기가 모임으로서 존재할 수 있고, 숨이 다하면 이 기 덩어리들은 다시 우주의 기로 흩어진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난 이런 설명 모델이 나를 평안하게 만들었으므로, 삶과 죽음에 관해선 이렇게 여기기로 했다.】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하는 글입니다. 특히 이 글은 우리 한국 기독교가 죽음에 대해서 갖고 있는 ‘생각과 입장’을 돌이켜 성찰해 보게 하는 글입니다.
<기독교의 죽음관>
그동안 우리 기독교가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 갖고 있는 ‘생각과 입장’은 무엇이었나요? 그것은 한 마디로, “예수를 믿으면 죽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전제로 한 신앙이론, 그 무화(無化)에의 공포를 이겨낼 수 있는 힘으로서의 부활 이야기 … 우리 기독교는 지난 2천여년간 공포적 신앙정치 체제 위에 화려한 성전을 세워왔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놀랍게도 현대인들은 그들 스스로의 힘(생각)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를 걷어내고 있습니다. 철학자 이상수 씨의 이 글은 동양적 감수성의 철학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를 몰아내는 상황을 아주 명료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위기입니다. 기독교 입장에서는 엄청난 위기상황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현대인의 사유(思惟)가 기독교가 그 터전으로 삼고 있는 ‘공포적 신앙 체제’를 모래성으로 만들어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죽음에 대한 진실된 이해란 무엇일까요? ……… 그런 물음에 대한 답은 예수에게 있습니다. 오늘 그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성경 이야기>
이제 성경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람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가지 않고 시집도 가지 않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다.(마가 12:25)】 이 말은 예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죽음 뒤의 세계란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은 것’입니다. 장가를 다시 간다든가, 시집을 다시 간다든가 하는 … 현재 우리네 목숨붙이들의 인생살이와는 차원이 전혀 다른 세계입니다.
우리는 흔히 현세적 삶의 양태와 죽음 이후의 양태가 동일한 차원일 것으로 상정합니다. 시집가고, 장가가고, 밥 먹고 잠자고, 돈 벌고 출세하고, 책도 쓰고 사랑도 나누는 현세적 삶의 연장으로서 하늘나라의 삶을 상상합니다. 그러나 예수의 말씀에 따르면 그것은 아닙니다. 죽음이후의 삶이란 죽음 이전의 삶과는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예수께서는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서 표현하기를 ‘천사들과 같은 상태’라고 했습니다. 아주 적절한 표현입니다.
철학자 이상수 씨는 ‘기(氣)의 모임과 흩어짐’으로 삶과 죽음을 이해하고자 했는데, 이런 생각이 예수의 말씀과 상반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주 잘 어울립니다. 기(氣)가 모이면 인간이 되는 것이며, 기(氣)가 흩어지면 하늘의 천사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의 메시지와 이상수 씨의 생각에 갈등이 없습니다. 오히려 이 두 생각은 아주 오래된 친구처럼 너무나도 잘 어울립니다. 서로 기분이 좋지요!
<동양적 기독교, 서양적 기독교>
아주 여러 번 말씀드렸습니다만, 우리 기독교가 동양에서 출발해서 서양으로 이동하면서 그 영성적 정체성에 커다란 혼란이 왔습니다. 죽음에 대한 이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래 기독교의 죽음관이란, 특히 예수의 죽음관이란 죽음에 대한 어마어마한 공포를 전제로 한 천국과 지옥의 구분이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 생각하신 죽음의 이해는 대단히 동양적인 것이었습니다. 즉 천국과 지옥의 구분이 없는, ‘악인에게조차도 은혜의 비를 내리시는’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품에 안기는 죽음, 모든 지옥들을 해체시키시고 그 모든 자리를 천국으로 만들어주시는 하느님의 따뜻한 심판, 뭐 그런 차원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예수의 죽음이해는 곧 진리자의 죽음이해였습니다. 진리의 세계에 진입한 자가 그 마음 가운데 깨닫게 되는 생각, 그것이 예수의 죽음관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진리라면, 그것은 예수의 생각과 갈등이 없습니다. 오히려 서로 기분이 좋지요! 왜냐하면 진리와 진리의 만남이니까요.
<설교를 마치면서>
이제 설교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말씀의 제목을 “죽음은 천사들의 삶이다”라고 잡아보았습니다. 오늘 이 설교말씀의 제목을 잘 묵상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축도
이제는 진리의 세계로 진입한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와 우리 생명의 근원 되시는 하느님의 신비로운 사랑과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아름다운 곳으로 인도해 주시는 성령님의 은총이 우리 수도교회 교우들 머리 위에 영원토록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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