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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고전15: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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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주일예배 http://sungamch.net 춘천성암교회 |
삶에도 on off가 필요합니다.
고전15:31
2016. 2월7일10시 예배 원고입니다.
요즘 유행가 중에 ‘백 살에 날 부르러 오거든 알아서 간다고 전해라’이런 게 유행이라면서요? 누구나 웬만하면 백 살까지 산다는 거죠. 그래서 사회적으로 이걸 ‘호모 헌드레드 Home Hundred’라고 합니다. 그러나 목숨이나 부지하면서 그때까지 살아서는 안 됩니다. 말년의 양식 late style이 있어야 합니다. 오래 산다고 존엄한 인생의 후반기가 되는 건 아니죠. 말년의 양식이 있어야 청춘으로부터의 해방과 몸으로부터의 자유를 향유하며 어른으로 늙어갈 용기를 갖게 되는 건데요, 그래서 저는 여러분에게 늦었지만 고전을 한 번 읽어 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오늘 권해 드리는 고전은 도스토옙스키가 쓴 [죄와 벌], [백치]같은 고전입니다. 그냥 늙어가지 마시고 말년의 양식이 되는 것들을 드셔야 하는데 이게 양식이 됩니다. 어떻게 양식이 되느냐?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을 읽다 보면 글이 갖는 묘미를 느낄 뿐만 아니라 인생의 도로가 훤히 보입니다.
이 소설가는 여러 주인공들에 대한 여러 개의 파일들을 갖고 있는 사람 같습니다. 그리고 한 파일을 열어서 재미난 얘기를 하다가 좀 지루할 즈음엔 어느 새 다른 파일을 열어서 딴 이야기를 이끌고 갑니다. 그리고 또 그 이야기가 지루할 즈음엔 또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죠. 그래서 서너 사람의 이야기로 흘러가다 보면 이제 처음에 하던 이야기를 잊어버릴 때쯤에 “아 참 아까 그 처음 주인공 어떻게 되었더라”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든 것처럼 그렇게 다시 처음 이야기로 돌아가는 겁니다. 그러면 나도 참 아까 그 이야기가 거기서 멈추었었지, 어떻게 되었을까 하면서 다시 처음 이야기에 흥미를 갖고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여러 개의 파일을 펼쳐 보이는 소설의 방식이 무슨 방식이라고 이름이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런데 이런 방식이 인생의 방식과 많이 닮아 있어요. 때로 사람들은 인생은 따분하다 하면서 소설이나 영화나 드라마는 재미있다고 하죠? 왜 삶은 지루한데 영화나 드라마는 재미있는 걸까요? 이야기와 장면이 ‘꺼졌다 켜졌다’하기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그러다가 엄청난 반전이 일어나죠. 예상을 뛰어넘는 일이 결말이 생기는 겁니다. 재미있는 소설, 드라마, 영화가 모두 그렇죠?
우리의 생도 그렇게 살면 더 재미있지 않을까요? 고전적이고 낭만적인 사랑이나 삶은 오직 하나의 진실한 이야기 또는 하나의 스토리만을 추켜세우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굳은 절개를 말하고, 여자에게는 정절을 지키라고 했죠. 백성과 신하에게는 충성으로 강요되던 시대 말입니다. 이게 옛날이야기만은 아니어서 오늘도 많은 사람들에게 오직 어떤 한 가지 성실한 길 또는 모범적인 길을 제시함으로써 삶은 단순화 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오직’ ‘절대로’ 이런 말들을 좋아합니다. 오직 한 개의 파일만 있기 때문에 그거 아니면 절대로 안 된다는 식입니다. 교회에서도 그렇습니다. ‘오직 예수’라는 말을 좋아하고 교회 앞에 큰 돌에다가 새겨놓은 교회도 있습니다. 그래서 타 종교에 대해서 적대적이고 어느 정도는 신경증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지나치게 집착하고 어떤 가르침에 몰두하고 자기네의 하나의 파일만 절대 유일하게 옳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어떤 타협의 여지도 없습니다. 이게 오늘날 세계 각지에서 종교분쟁을 만들어 내는 원인입니다.
프로이트를 비롯해서 정신분석학자들은 이런 태도에서 신경증이 유래했음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오직 하나의 파일만 갖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 하나의 파일에 온 힘이 쏟아지기 때문에 거기에 엄청난 에너지가 실리고 혹 그것이 거절되기라도 하면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수호하기 위해서 비정상적인 충성심과 에너지를 쏟게 되고 그것은 금제가 되고 터부가 되어서 신경증을 유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온] 같은 심리학자는 우리는 그렇게 하나의 파일로만 살 수 없다고 보는 겁니다. 그는 ‘꺼짐과 켜짐’을 동시에 즐기는 삶을 권합니다. 죽었다가 살아나고 다시 죽었다가 살아나는 순환과 반복의 사이클 또는 리듬을 즐기라고 합니다. [아이건] 같은 심리학자는 예수는 죽음에서 살아났다고 절대적으로 믿으라고 강요하기보다는 그것을 조금씩 맛보는 식으로 우리 삶에서 죽음과 삶을 경험하면서 결국 죽지 않고 살아남는 것이 더 좋다고 합니다.
융도 그렇습니다. 그는 선과 악의 양단간에 선의 편에 서라고 결단을 요구하는 어떤 식의 삶이, 사람에게 콤플렉스를 만들고 무의식을 억압해서 병을 만든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기 보다는 무의식을 의식화하는 균형잡힌 의식을 통해서 그리고 반대의 일치 또는 역설을 통해서 사람들은 전인성을 획득하고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 적용해 본다면, 우리는 하나의 파일만을 갖고 사는 단조로운 존재들이 아닙니다. 오직 한 길만 파는 그런 사람이 칭찬받던 시대는 더 이상 아닙니다. 이것저것 해보면서 삶의 경험을 많이 쌓고 내게 가장 행복한 길을 찾는 것이 좋습니다. 한 개의 파일에 집착하기 보다는 여러 개의 파일을 펼쳐 놓고 이것이 지루하다 싶으면 잠시 덮어놓고 또 다른 파일을 열고 또 그것이 지루하면 또 다른 파일을 열어서 새로운 삶들을 향유하고 즐기는 것이 필요합니다.(책을 읽는 법도 그렇습니다.) 그러다가 아까 보다 놔둔 파일로 돌아왔을 때 좀 전의 지루함은 사라지고 훨씬 더 성숙한 내가 새롭게 또 새로운 재미를 느끼면서 이전 파일을 대하고 있는 걸 보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소설로는 도스토옙스키고, 영화나 드라마일 것입니다. 또한 컴퓨터로 나타난 것이 이른바 윈도우라는 것입니다. 여러 개의 파일을 펼치는 것처럼, 오늘날 사람들은 여러 개의 윈도우를 열어놓고 글에서 작업하다가 페이스북으로 또 그러다가 바이블웍스로 또 그러다가 트위터로 또 그러다가 다음으로 네이버로 구글로 유투브로... 수십 개의 창을 열고 닫으면서 하루를 행복하게 보내는 것입니다. 전에는 이렇게 하면 너무 정신이 없었습니다, 집중이 안 된다 하면서 부정적으로 보았지만, 이젠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신적으로 이전보다 훨씬 더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전에는 오직 한 길만 파다가 그게 안 되면 거기서 포기하거나 자살해버리는 것이 크나큰 부작용이었습니다.
이젠 그런 세상이 아닙니다. 그렇게 살면 큰 일 납니다. 하나 만이 유일한 길이 아닙니다. 거기서 안 되면 돌아가고 다른 길을 찾고, 조금씩 맛보면서, 때로 죽음을 경험하지만 그래도 다시 거듭 살아나면서 새로운 파일을 펼치는 기쁨으로 살아야 합니다. 인생을 오직 하나의 파일만을 위해서 수십 년 수 천 수 만 날을 살아가는 지루한 대출상환으로 살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 인생은 짧지 않습니다. 일 년만 해도 열두 개의 파일이 있고 열 두 개 파일 안에는 또 서른 개의 작은 파일들이 있습니다. 그 하나하나의 파일들이 저마다 흥미진진하고 아름답고 사랑스런 것들이 들어 있죠. 매일 그런 파일을 하나씩 펼쳐 보는 재미로 사는 삶은 시간을 깨어 있게 하고 황홀하게 할 것입니다.
모처럼 17일짜리 유럽 여행을 갔다고 해보세요. 하루 하루가 새로운 경험이고 신나고 즐거울 게 아닙니까? 오늘은 런던 내일은 레이크디스트릭트 모레는 에딘버러. 그 다음은 파리 루브르 오르세, 칸느, 고호가 그림 그리던 아를 지방. 그 다음은 베네치아, 피렌체. 이런 곳들을 하루 하루 다르게 본다고 생각해보세요. 어느 하루인들 설레지 않고 흥미진진하지 않은 날들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날은 그 여행만큼 가치가 없는 날들이 아닙니까? 내가 그렇게 살기만 하면 오늘 하루의 삶도 유럽 여행 못지않은 설레는 날이고 흥미진진하고 재미있는 날들이 될 겁니다.
너무 큰 단위로 파일을 접었다 펴지 마세요. 꼭 맨 마지막에 한번 죽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매일 작은 파일들 펼치고 지루하면 다른 파일을 펼치세요. 늘 정리하면서 결론짓고 나가려고 하지 말고 파일들을 좀 늘어놓고 사세요. 결론이 없을 수도 있겠죠. 그냥 파일을 펼치는 것 자체가 즐거운 일이 아닙니까? 하나의 파일을 접을 때마다 우리는 죽음을 경험하는 거예요. 하루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 때도 우리는 잠깐 죽는 것입니다. 그렇게 죽음을 매일 경험하면서 매일 또한 살아남을 기대를 갖는 거죠. 생일날 단 한번 태어나서 미래에 단 한번 죽는 그런 지루한 삶은 어쩌면 허상입니다.
바울도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 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임당한 예수께서 내가 너희 안에 있다고 하신 것도 예수는 한번 죽고 부활하고 끝난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서 죽고 다시 살아나는 것을 반복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니 그리스도와 함께 살 것을 믿는다고 했습니다. 죽고 살고, 끄고 켜고를 반복하면서 생을 산다는 뜻입니다. 예수는 우리에게 ‘오직 예수’를 외치면서 외길을 가라고 하지 않았어요. 수많은 파일들을 펼치면서 순간들을 행복하게 살고 예수께서 매순간 우리 속에서 살아나는 것을 경험하라고 가르쳐어요.
이렇게 껐다가는 켜고, 켰다가는 끄고 하는 인생을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아름답겠으며, 청춘으로부터의 해방과 몸으로부터의 자유를 향유하는 ‘호모 헌드레드’가 되지 않겠어요? 그런 의미에서 추석이니 구정이니 하는 건 자발적으로 끄고 켜고 할 수 없으니까 제도적으로 on off를 만들어 놓고 시간을 끄고 켜 보게 하는 거 아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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