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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4:38-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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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신윤식 목사 |
참고 : | 은석교회(대구시 국우동) http://www.onlycross.net/ |
제목 : (18강) 열병과 귀신
본문 : 눅4:38-44
2012-07-08
<본문>
38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을 앓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예수께 구하니
39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40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온갖 병자들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
41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으사 그들이 말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를 그리스도인 줄 앎이러라
42 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시니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하려 하매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하시고
44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더라
<설교>
정상적인 인간은 없다
예수님의 사역은 말씀을 가르치는 것과 함께 귀신을 다스리시는 것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에 의해서 귀신이 다스림을 받으며 신자는 자유를 얻고 은혜의 길을 가게 됨을 증거하고자 하는 것이 누가의 의도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는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라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의 말을 전하면서 그 말이 응하였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의 말이 예수님에게서 성취된 사실을 예수님이 귀신을 다스리는 것으로 증거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중요한 것은 귀신에 대한 이해가 우리의 전통적인 문화적 사고에 머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귀신은 악한 영입니다. 따라서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악한 영에게 미혹을 받으며 악한 영이 의도한 대로 살아가는 것이 곧 귀신 들린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대개의 사람들은 이 같은 사실을 부인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지극히 정상적인 상태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거듭 강조 드릴 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인간은 결코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을 바라보십시오. 과연 정상적인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창조하신 정상적인 인간의 모습은 선악과를 먹으면서 이미 깨어져 버렸습니다. 자신의 성취를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조차도 무시하고 짓밟아 버리는 인간의 모습은 말 그대로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을 보면서도 정상적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정말로 정상적인 인간으로 살아간다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서 하나님이 이루시고 주신 것으로 감사하는 것만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피조물다운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열병을 꾸짖으심
저는 현대인의 실상을 본문에 등장하는 베드로 장모의 열병으로 표현해 보고 싶습니다. 그 이유는 누가가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단순한 병으로 취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귀신과 연결하여 얘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38절에 보면 회당에서 귀신을 나가게 하신 후에 시몬의 집으로 가셨는데 시몬의 집에는 그의 장모가 중한 열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중한 열병이라고 한 것을 보면 심한 고열이 있는 병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장티푸스일 수도 있고 말라리아일 수도 있습니다.
성경학자 가운데는 요단강과 갈릴리 호수 주변에 숲 지대가 많았는데 거기에 학질모기가 많이 번식하고 있었다고 하면서 베드로 장모의 열병이 말라리아였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열병이 어떤 병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질병으로 다루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시몬, 즉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시자 사람들이 베드로 장모를 위해 예수님께 구합니다. 병을 고쳐달라고 구했겠지요.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질병이나 육신이 장애를 고치실 때는 경우에 따라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기도 하셨고, 진흙을 침으로 이겨서 눈에 바르기도 하셨고, 침상을 들고 가라고 명령하시기도 하 했습니다. 아니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베드로 장모의 경우에는 기도도 없었고 최소한 ‘네가 구원을 받았다’는 말씀도 없었습니다.
마가복음 1장에도 베드로 장모를 고치신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데 마가는 예수님이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났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누가는 특이하게도 예수님이 열병을 꾸짖으심으로 병이 떠났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열병을 꾸짖었다고 말하는 것은 열병을 단지 질병의 의미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인격체로 여기고 언급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5절에 보면 예수님은 귀신을 꾸짖어 잠잠하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은 열병 또한 귀신 들린 상태로 여기시고 다스리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40절에 보면 사람들이 온갖 병자들을 데리고 나아왔을 때 예수님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셨다고 하고, 이어서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이 나간 것으로 말합니다. 이 역시 온갖 질병을 귀신 들린 상태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지금도 속칭 귀신파라고 하는 무리들은 질병을 귀신 들린 것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이들은 질병은 물론이고 사업이 실패한 것까지도 귀신의 작용이라고 말합니다. 때문에 귀신만 쫓아내면 모든 병은 자연히 낫게 되고 사업도 성공하게 된다고 주장하면서 사람들을 미혹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누가가 질병을 실제로 귀신 들린 상태로 여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가는 예수님이 누구시고 무엇을 위해 오셨는가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대로 포로 되고 눈멀고 눌린 자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해방과 자유를 주기 위한 분으로 오셨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말씀으로 귀신을 다스리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의 능력이 아니라 말씀의 권위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열병이나 질병을 어떤 악한 세력에 눌려 있는 상태로 여기시면서 그처럼 눌리고 포로 된 상태인 우리를 해방과 자유의 세계로 이끌어 가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의 권위임을 증거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열병에 걸린 교회
앞서 말한 대로 현대인의 실상은 마치 열병에 걸린 것과 같습니다. 중한 열병은 사람을 혼수상태에 빠뜨리고 헛소리를 하게 합니다. 그처럼 세상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헛소리만 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만 생각하고 오로지 자신의 성취를 위해서만 달려갑니다.
세상과 똑같이 교회도 열병을 앓고 있습니다. 어떤 열병일까요? 부흥을 향한 열병입니다. 부흥을 위해서라면 진리의 말씀도 복음도 외면해 버립니다. 오로지 부흥에 도움이 되는 것만 끌어들이면서 강단은 말 그대로 헛소리로만 일관될 뿐입니다. 교회가 부흥하지 못하면 목사는 스스로를 자책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목사의 목사다움을 교회부흥으로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42절에 보면 무리들이 예수님이 자기들에게서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합니다. 예수님을 추종하는 무리가 생긴 것입니다. 귀신을 나가게 하시며 병을 고치시는 예수님의 능력이 좋았겠지요. 우리의 시각으로 보면 이것은 교회를 부흥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습니다.
더 많은 기적을 베풀어서 더 많은 사람이 나에게로 몰려드는 것이야 말로 꿈에서라도 바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여야 한다고 하시면서 그곳을 떠나십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예수님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제자 된 길은 무엇일까요?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오직 복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신자고 교회인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정신을 차린 것입니다. 즉 귀신이 나가고 열병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은 상태라고 설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정신을 차려서 무엇이 교회이며, 무엇이 선교이고, 무엇이 구원인지를 바르게 이해하고 바르게 전하는 일에 힘을 써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예수님이 가신 그 길로 걸어가는 주의 백성이라면 반드시 예수님의 일에 마음을 두고 그 일이 오늘 우리들의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에 복종하며 말씀으로 다스림을 받으며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열병에서 벗어났을 때
우리가 신자로서 복음을 듣고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안다고도 합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으로 인해서 여러분의 삶에 어떤 영향을 받고 있습니까?
39절에 보면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드니라”고 말합니다. 대개 보면 열병이 나았다는 것에 초점을 둠으로써 열병이 나은 여자가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 들었다는 내용은 소홀히 생각하지만 저의 생각은 다릅니다.
우선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열병에서 나은 여인은 먼저 자신의 병을 낫게 하신 예수님께 감사하면서 예수님을 수종들었어야 합니다. 그런데 누가는 여인이 그들, 즉 베드로의 집에 함께 있었으며 예수님께 여인의 열병을 낫게 해달라고 구했던 사람들을 수종들었다고 말합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그들이라는 말에는 예수님도 포함되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열병에서 나은 여인이 사람들에게 수종들었다고 하는 내용입니다. 수종들었다는 것은 섬김과 봉사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말한 대로 누가는 열병에서 나은 것을 예수님에 의해서 귀신이 나간 것으로 말합니다. 그렇다면 열병이 나은 것 역시 말씀 권위 아래 있는 상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말씀의 권위 아래 있는 자의 삶은 섬김과 봉사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교회의 본질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직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세상에서 섬김과 봉사는 교회가 말씀의 권위 아래 있는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섬김과 봉사는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겠지만 가장 중점이 되는 정신은 예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섬김과 봉사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의 권위 아래 있는 신자의 본분임이 분명합니다.
말씀은 우리를 섬김과 봉사로 나아가게 하다면, 교회에서는 그 어떤 권위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목사를 포함한 모든 신자가 말씀의 다스림을 받으며 섬김과 봉사의 길로 나아가는 관계에 있는 것이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열병에서 치유되어 자유를 누리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41절에 보면 귀신들이 나가며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소리 지르자 예수님께서 꾸짖으시며 그들이 말함을 허락하시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귀신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인줄 알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귀신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았고 또 소리 질러 그 같은 사실을 말했다면 오히려 더 크게 말하도록 하는 것이 좋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히려 말함을 허락하지 않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오해 때문입니다.
귀신들이 나가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라고 소리 지른다면, 사람들은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을 귀신도 알아보고 복종하고 쫓겨 가게 하는 예수님 능력에 둘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일을 자신들에게 해방과 자유를 안겨주시는 것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질병에서 낫게 하는 것처럼 육신의 일을 해결해주시는 것으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귀신들의 말함을 허락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가 예수님의 일을 육신의 문제의 해결로 말하는 것도 예수님이 허락하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마치 열병에 걸린 자처럼 정신 차리지 못하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자신을 성찰하시기 바랍니다. 자기 육신의 문제에 매임으로 인해서 예수님의 제자로 보냄 받은 우리의 일을 잊은 채 살아가는 것이 정신 차리지 못한 것입니다.
이런 우리가 정신을 차리고 신자 된 자의 일이 무엇인가 살피고 열병을 고침 받은 여인처럼 사람들을 수종드는 길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이 우리를 정신 차리게 하고 헛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말하면서 주의 일을 하는 자로 살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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