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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창2: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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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조용기 목사 |
참고 : | 2016.4.17 여의도순복음교회 |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위대한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바알의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을 갈멜산으로 불러 낸 선지자 엘리야는 850명의 우상을 섬기는 선지자들과 더불어 누가 섬기는 신이 참 하나님인지 대결하자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하셨는데,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많은 우상을 섬겼던지 바알신을 섬기는 제사장들이 450명, 아세라신을 섬기는 선지자가 400명이나 됐습니다. 850명 대 엘리야 한 사람의 대결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인 앞에서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갈멜산에 모인 그들은 각각 자기들의 신을 향해 제단을 만들고, 그 제단에 장작을 쌓아놓고, 짐승을 잡아 그 위에 얹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불은 피우지 말고 기도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들은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 제물을 태우시는 신, 즉 불로 응답하는 신을 하나님으로 모시자고 한 것입니다. 바알신과 아세라신을 섬기는 제사장들은 큰 제단을 만들고 장작을 쌓아놓고 짐승을 잡아 각을 떠서 얹었습니다. 반면에 엘리야는 겸허히 제단을 쌓아놓고 자기 혼자 제물을 제단에 얹어 놓았습니다. 아무도 엘리야를 도와 주지 않았습니다. 엘리야는 “너희는 숫자가 많으니, 먼저 불을 내려오도록 기도를 하라”고 말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신을 섬기는 이들은 “불을 주소서. 이 나라는 당신의 것입니다. 불을 주소서”라고 기도했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엘리야는 “너희들 신은 잠이 와서 아마도 잠을 자는가보다. 못 들으니까 불을 안내려주지 않냐? 깨워 일으켜라”며 조롱했습니다. 그러자 바알과 아세라신 제사장들은 더 뛰고 구르며 칼로 자신들의 몸을 그어 피를 흘리면서 불을 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응답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에 엘리야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바알과 아세라의 제사장들을 향하여 “너희 신은 잠들었나보다”라고 하며 그들을 조롱했습니다. 그리고 야훼를 향한 단 위에 장작을 펼쳐놓고 “물을 갖다 부어라”고 한 후 “살아계신 야훼 하나님이여, 불을 내려서 이 제물을 태우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벼락같은 소리가 나더니, 하늘로부터 불이 그 제물에 떨어져 순식간에 다 타버렸고, 부은 물도 다 말라버렸고, 도랑에 있는 물까지 다 말라버린 것입니다. 이 장면을 본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야훼가 참 하나님이다. 야훼가 참 하나님이다”라고 외쳤습니다. 연이어 엘리야는 칼을 뽑아 모든 바알과 아세라의 제사장들을 잡아서 목을 쳐버렸습니다. 엘리야는 야훼를 향한 예배를 회복시키고, 이스라엘을 회복시키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 후 엘리야에게 아합왕의 아내 이세벨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이세벨은 이스라엘로 시집올 때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이방신을 섬기는 제사장들을 데리와 이스라엘에 우상이 가득하게 만든 장본인이었습니다. 그러니 자신의 제사장들을 다 죽인 엘리야에게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내일 이맘때까지 내가 너의 목을 치지 않으면 신들이 내게 벌을 내리리라”고 협박한 것입니다. 이세벨의 협박에 엘리야는 혼비백산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용감하게 온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기도해서 불이 내려오게 하고, 850명의 목을 쳤던 엘리야가 이세벨의 협박을 듣고 너무나 무기력하게 되고 만 것입니다. 겁쟁이가 된 엘리야는 그대로 일어나서 도망을 쳤습니다. 종을 데리고 유대 브엘세바까지 도망치다가, 종은 혼자 있으라고 한 후에 홀로 광야를 향해 있는 힘을 다해서 달렸습니다. 그러나 지쳐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자 로뎀나무 그늘에 드러누워 “하나님 좋습니다. 이제는 내 목숨 거두어 가시옵소서”라고 탄식하며 고백했습니다. 이처럼 사람이란 탁월하게 용감한 면도 있지만, 형편없이 맥을 추지 못할 만큼 겁쟁이의 마음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1.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실 때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사람을 지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와 같은 육체를 가지고 있지 않고, 영이시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영적인 형상과 모양을 닮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체적인 존재가 아니고 영적인 존재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사람의 모양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사람처럼 보여야 사람과 교통이 되므로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오신 것입니다. 창세기 1장 27절에 보면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하시고 남자를 먼저 창조하시고 난 다음에 여자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창세기 2장 20절로 23절에 보면 아담과 하와 즉, 우리 사람들이 이 지구상에서 하나님 다음으로 다스리는 권세를 가졌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야훼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야훼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이 옆구리 뼈라는 것은 가슴을 말하는데, 아내와 남편과의 관계를 남자의 가슴뼈로 지은 것은 사랑을 가지고 서로 대화하라는 것입니다. 폭력을 가지고 대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사랑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서로 대화를 나누고 사랑을 하면 행복한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장 25절에도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아내를 사랑하라고 말했지 아내를 부려먹으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요, 요새요, 의지하는 하나님이 됩니다. 남자는 부인의 피난처요, 요새요, 의지하는 남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자는 이 험한 세상에 살면서 남자에게 도움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통해서 성도를 사랑한 것 같이 하나님 아버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사랑해서 피난처가 되어 주시기를 원하고, 요새가 되어 주시기를 원하고, 의지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부부가 함께 살아가려면 무엇보다도 대화가 잘 통해야 합니다. 가정문화원 두상달 장로님은 부부가 대화할 때, “∼구나”를 많이 사용해야 된다고 말합니다. “‘구나’가 굉장한 효과를 발생한다. 아내가 무슨 말을 하면, 남편은 ‘못나서 그랬구나. 무능력하니 그랬구나’라고 꾸짖지 말고, ‘아이고∼그랬구나. 많이 속상했겠네’라며 무엇이든 ‘구나’로 결론 지어보자”라고 했습니다. “많이 아팠겠구나. 많이 섭섭했겠구나”라고 공감하면서 맞장구를 쳐주면 부부는 물론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큰 위로의 힘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인정을 받을 때 위로를 받기 때문입니다.
전도서 4장 9절로 12절에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두 사람 이상이 되면 굉장한 힘과 위로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2. 혼자 살아가는 삶의 고독
왜 고독이 나쁘냐고 하면 마음을 터놓을 이웃과 친구가 없고, 도와 줄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도와줄 사람이 없을 때 외롭습니다. 혼자 사는 사람만이 외로움을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외로움을 가장 절실히 느낄 때는 살다가 어려움을 당했을 때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입니다. 그 때가 정말 뼈저리게 외로운 때입니다. 저는 짧지는 않지만 80년을 살면서 외로움이 무엇인가를 체험했습니다. 초대 국회의원 선거에 저희 아버님이 나갔다가 떨어진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빨치산이 굉장히 심했던 시절인데, 부산 근처를 뒤흔들던 빨치산이 우리 집 근처까지 아지트를 만들어 들어왔습니다. 지방의 우익단체 지도자들을 잡아 죽이는 일이 생겨났습니다. 우리 아버님은 교동리 우익단체 고문으로 있었기 때문에 하루는 빨치산이 찾아 왔습니다. 우리 아버님이 위채에 계셨고 할아버지 할머니가 아래채에 있는데, 빨치산이 들어와서 우리 아버지를 찾았습니다. “이 놈 어디 있냐? 도대체 이놈 민주주의를 한다고 이승만이 따라다니는 이놈 죽여야 된다” 순간 아버지가 할아버지 곁으로 뛰어내려오자 할아버지는 우리 아버님을 눕혀 놓고 그 위에 드러누웠어요. 그 다음에는 할머니가 또 아버지 머리 맡에 주저앉아 계셨던 것입니다. 빨치산들이 라이터 불을 딱 켜서 아버지를 찾았는데,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가 나이가 많으신 분들이니 “아이고 눈부셔, 아이고 눈부셔, 아이고 그거 켜지마”라면서 노인들이 눈이 부신다고 하니 그들도 그 말을 믿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놈 참 걸음 빠르다. 벌써 알고 숨었구나”라며 빈손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때 내가 부모가 자식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알았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후에 우리 아버지, 어머님이 “안 되겠다. 시골에서는 살 수가 없다”고 하셨는데, 하루는 학교를 갔다 오니까 형제들이 많아 시끌시끌한 집안이 조용했습니다. 그런데 집에 가보니까 나 없는 사이에 짐 다 꾸려서 부산으로 이사를 가버렸던 것입니다. 우리 형제가 아홉인데, 전부 다 데리고 이사가고 저만 시골집에 남겨 놓았던 것이었습니다. 저보고는 이사를 간단 말도 없었습니다. 제가 안방에 들어가 보고, 부엌에 가보고 하면서 결국 아무도 없는 마당에 섰는데, 그 어린 나이에도 부모에게 버림받았다는 마음에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 때의 고독과 괴로움 때문에 저는 지금도 시골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외롭게 사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많은 사람들을 여의도순복음교회에 보내주셨나 봅니다.
고독이 좋지 않은 이유에 대해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시편 102편 6절로 7절에 “나는 광야의 올빼미 같고 황폐한 곳의 부엉이 같이 되었사오며 내가 밤을 새우니 지붕 위의 외로운 참새 같으니이다”라고 했습니다. 고난을 당해 마음이 너무 답답해서 올빼미나 부엉이처럼 밤에도 잠을 이룰 수 없고, 지붕 위에 외로운 참새와 같다고 한 것입니다.
요즘은 혼자 밥 먹고, 혼자 차 마시고, 혼자 취미생활을 하고, 혼자 자고, 혼자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수가 점점 많아져서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 1인 가구가 500만명이 넘었다는 것입니다. 4가구 중 한 가구가 혼자 산다는 것입니다. 왜 혼자 사냐? 결혼을 안 하고 혼자 사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요사이는 ‘뭐 꼭 결혼해야 하는가? 혼자 살아도 좋다’고 해서 그래서 혼자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진짜로 혼자 살 마음이 없는데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조심해야 됩니다.
또 직업 때문에 가족들과 떨어져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이가 많이 들어 배우자와 이별해 혼자 사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 혼자 사는 삶은 외롭습니다. 하나님도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될 수 있으면 혼자 살지 말고 함께 살아야 됩니다. 성격이 다른 사람들이 모여 사니 마음에 상처도 오고, 쥐어박고 싶은 생각도 있습니다. 결혼을 하면 입을 딱 다물고 살면 됩니다. 남편들이여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한 것 같이 하라. 그러니 남편은 아내의 말을 그대로 다 받아들여야 됩니다. 똑같이 주고받으면 함께 살기 힘듭니다. 아내가 행복하게 살도록 만들어주면 아내가 행복하면, 남편이 따라서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외로움은 건강에 좋지 않습니다. 외로움에 몸부림치는 사람은 만성적인 고독으로 심장과 위장 같은 내장 기능에 장애를 주고, 면역력도 약하게 합니다. 외로움이 많으면 몸이 질병과 바이러스에 대항할 힘이 약해지는 것입니다. 잠언 17장 22절에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마음의 즐거움을 억지로라도 가지시기 바랍니다. 마음에 우울한 심정으로 부정적인 말을 하지 마시고, 오늘부터 집에 들어가거든 “여보 나 왔어요. 하하하”라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참 마음이 편안해지고 좋습니다. 웃고 지내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잠언 18장 14절에 “ 사람의 심령은 그의 병을 능히 이기려니와 심령이 상하면 그것을 누가 일으키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할 때 육체가 튼튼해지는 것입니다.
3.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는 예수님도 함께 있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여기에 만 여명이 왔지 않습니까? 이 자리에 예수님이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서로 기도해주고, 서로 격려해주면 주님께서 굉장히 기뻐하시고, 주님께서 이 자리에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16절로 22절에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인생은 혼자 살기로 되어 있는 인생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를 서로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의 손을 잡고 하나님 아버지와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화목이란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화목하기 위해서는 용서해야 되는 것입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화목할 수 없습니다. ‘너 두고 보자’는 마음으로는 화목이 절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내가 실수가 많은 것처럼 다른 사람의 실수도 용서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하루에 죄를 짓고 난 다음에 잘못했다고 오면 일곱 번 용서해도 됩니까?”하고 제자가 물으니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줘라”고 대답하셨습니다. 490번이라도 용서를 해주고 서로 손잡고 인생을 걸어가는 것이지 원수가 되어서 밀고 당기면 절대로 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8장 20절은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두세 사람 모였으면 무슨 일을 해도 기도하고 일을 하는 것이 주님을 인정하는 것이고, 감사하고 지내는 것이 주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큰 사역을 했던 엘리야가 그처럼 낙심하여 절망하게 된 배경은 외로움 때문이었습니다. 엘리야가 유대 광야로 도망을 쳐서 로뎀나무 밑에서 “이제 나를 죽여주십시오”라며 절망적인 말을 한 것은 친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위기에 처할 때 위로를 받고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친구가 있었다면 그렇게 절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엘리야는 자기만 홀로 남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생각 때문에 삶의 의욕을 잃고 죽기를 소원했던 것입니다. 엘리야처럼 위대한 선지자도 혼자 살면 외로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혼자 두지 않으셨습니다. 열왕기상 19장 18절에 보니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엘리야야! 너는 혼자가 아니다. 7000명이 하나님을 믿고 따르고 너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므로 그들을 찾아서 형제가 되라”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혼자라고 느낄 때,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이 같이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요, 요새요, 의뢰하는 하나님이십니다. 저가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극한 염병에서 너희를 건지실 것입니다. 그가 날개 밑에 우리를 피하게 해주십니다. 밤에 놀람과 낮게 흐르는 살과 흑암 중에 행하는 염병과 백주에 황폐케 하는 파멸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십니다. 천인이 네 곁에서 만인이 네 우편에서 엎드러지나니 재앙이 네가 가까이 오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눈에는 안보이지만 믿음으로 나가서 하나님과 대화하면, 우리를 돌봐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외롭지 않고 고독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기 전에 제자들 앞에서 어디론가 멀리 간다고 말씀하시니 제자들이 “있는 것 다 던져버리고 주님을 3년 동안 따랐는데 이제 우리를 두고 가면 어떻게 합니까?”라고 하자, 주님은 “내가 가지만 곧 다시 올 것이다. 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다른 보혜사를 주사 항상 너와 함께 하게 할 것이다”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보혜사, 성령을 보혜사라고 말한 것은 보혜사는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너를 돕기 위해서 항상 너와 같이 계시는 분’을 말합니다. 보혜사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성령님과 함께 의논하고 나가면 성령님은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돌보아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온갖 인공지능 로봇이 넘쳐나서 이웃이 없어도 혼자 지낼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많은 전자기기로는 인간의 인생과 마음이 통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고독은 인간만이 메워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도 인간의 고독을 메워주기 위해서 사람의 몸을 쓰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지금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께서 우리와 같이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우리를 창조하심에 고독한 인간이 아닌 함께하는 배필과 이웃을 통해 마음에 위로를 받고, 기쁨을 얻게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고독한 인생으로 살지 않고 성령을 통해 함께 하시고, 동행하심에 고독을 이기고 승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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