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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12:38-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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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6.3.29 wndlf http://sungamch.net 춘천성암교회 |
부활 그 이후, 인식의 역전
마12:38-42
간단히 말해서 ‘부활’은 인간들의 오래된 인식과 생존의 관성을 뒤바꿔 놓은 일입니다. 사람은 한 번 죽으면 그만입니다. 그게 오래된 인식이고 관성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뒤바뀐 거죠. 기독교는 바로 이런 인식의 전환에서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그 오래된 생각, 삶의 관성도 지난 부활절을 기점으로 바꾸시길 바랍니다. 그게 부활을 사는 바른 자세 아니겠어요?
그래서 오늘은 성서 속에서 그 인식의 전환이 일어나는, 인식의 역전을 요구하는 말씀 한 구절을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야기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등장하여 예수께 표적을 보여 달라고 합니다. 아시다시피 이들은 오늘의 주제에 근거하면 아주 견고한 인식으로 사는 이들입니다. 그들이 예수에게 표적을 보여 달라고 했다는 겁니다. 표적(semeion)이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보여주는 놀라운 기적을 말하는 겁니다. 그런 그들의 요구에 예수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비판합니다. 그리고는 너희들에게 보여줄 것이라고는 예언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제 요나의 표적이 뭔지 알아야겠죠? 예수님이 말하는 요나의 표적이라는 것은,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전도하여 그들을 회개하게 한 것이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복음을 전하신 것을 미리 보여주는 표적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건 무슨 말입니까? 씨도 먹히지 않을 것 같았던 이들에게 먹힌 씨와 같다는 거죠. 즉 안 될 거라고 생각했던 일이 일어나는 그게 바로 니느웨의 표적이라는 겁니다. 이 말에는 씨도 먹히지 않을 거 같았던 니느웨 사람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고 구원받았듯이, 너희들, 바리새인들과 율법선생들이 나, 예수의 말을 듣고 회개하고 구원을 받으면 그게 너희들에게 보여 줄 표적인데, 그게 어디 되겠느냐는 비판이 담겨 있는 말씀입니다. 의 선포를 듣고도 회개하지 않고 거부한 것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다. 그렇게 될 수 없는 일을 되게 한 이가 요나인데, 나(예수)는 요나보다 더 큰 사람이라는 겁니다. 결국 너희들(바리새인, 율법 선생)은 니느웨 사람들보다 못하고 남방의 이방 여인이었던 이사벨 보다 못한 작자들이라는 겁니다.
왜 그 천하의 부랑자 같은 집단이었던 니느웨 사람들보다 바리새인이 못하며, 이방 여인인 이사벨 보다 율법선생들이 못났다는 겁니까? 인식의 전환과 삶의 변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랜 인식과 관성을 역전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니느웨 사람들의 인식과 관성을 바꾼 요나, 이방 여인 이사벨의 생각과 태도를 바꾼 솔로몬보다 예수는 [더 크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보아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41c)
“그러나 보아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42c)
율법의 매달려 있고, 율법의 관성을 주식으로 하는 율법선생들에게 예수의 이 말은 폭탄선언과도 같았을 겁니다. 그들은 이 말에서 신성모독과 감정을 느껴 격동했을 것입니다. 시골 출신의 청년에 불과한 예수가 어떻게 감히 예언자 요나나 솔로몬과 비교할 수 있겠어요. 아니 비교는 고사하고 그들 보다 더 크다고 하니 이게 어디 가능한 선언이겠어요. 이미 예수는 그 스스로 이스라엘 역사와 그 대중들에게 큰 인식의 전환을 내 보이고 있는 겁니다. 사람이 인식을 바꾸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다음 이야기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요4:12에 수가성 우물가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의 대화가 나옵니다. 예수께서 그 여인에게 생수를 주겠다고 했을 때 그 여인은 하는 말이 뭔지 아세요?
“선생님이 우리 조상 야곱보다 더 위대한 분이라는 말입니까?”
그 여인은 피곤에 지친 모습으로 물 좀 달라고 하는 예수가 야곱보다 더 위대한 분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겁니다. 인식을 바꾼다는 것은 이리 어렵습니다. 더군다나 종교인식 혹은 자기가 믿는 바를 수정하는 일은 정말 어렵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그들에게 율법을 준 모세와, 요나와 같은 예언자들, 그리고 다윗과 솔로몬 같은 훌륭한 왕들을 존경했습니다. 철썩 같이 믿고 신뢰했습니다. 그게 흔들리면 큰일이라도 나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권위의 상징인 성전을 가장 높이 떠받들었습니다. 이런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누구나 당연히 여기는 상식과 같아서 초대교회에서도 이런 전통을 일부 수용하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의 처음에 예수의 족보가 나오는 것은 예수님이 다윗과 솔로몬의 후손이라는 점을 드러내려는 것이었어요. 사람들은 다윗의 후손 가운데서 메시아가 오리라고 믿었는데, 이 인식을 그대로 복음서에 적용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를 자주“다윗의 자손”으로 부르는 겁니다. 그리고 마태복음에는 예수를 모세와 비슷하게 그리려는 구절들이 많습니다. 이걸 예수의 모세 유형론이라고 합니다. 예수도 모세처럼 왕의 유아 살해 분위기에서 살아났고, 모세처럼 이집트로 들어갔다가 탈출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리고 산에서 십계명을 받은 모세처럼 예수도 산 위에서 가르치시며 새로운 계명을 선포하시는 걸로 그려놓고 있죠.
만약 초대교회가 여기에서 멈추었다면 그들은 유대교의 아류로 전락하고 기독교는 탄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에 잘 나타나듯이, 초대 기독교는 거기에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요나가 위대하다 하여도,“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다!” 아무리 솔로몬이 위대하다 하여도,“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다!”는 대 전환의 역사 앞에 그들의 견고한 인식을 전환한 것입니다.
아무리 모세가 위대해도 예수는 모세보다 더 큰 분이라고 받아들인 겁니다. 그 대표적 존재가 바로 바울이죠. 산상수훈에 나오는 6개의 반제(反題 Antithese)들을 보면,“옛사람들에게 말하기를 ... 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하는 말씀으로 모세가 말한 율법을 새로운 권위로 재해석합니다. 여기서 기독교는 유대교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더 큰 존재의 면모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전환에 격동하는 이들이 있고 순응하는 이들이 생긴 겁니다.
오늘 본문 12장 맨 앞에 보면 예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먹은 일로 바리새파 사람들과 논쟁이 벌어지죠. 그 때 예수는 다윗과 일행이 굶주렸을 때 성전에 들어가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빵을 먹지 않았느냐는 이야기를 하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마 12:6)
이 말은“다윗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는 뜻도 함축하는 것입니다. 나는 성전보다, 다윗보다 더 크다는 겁니다. 여기서 ‘크다’는 말은 ‘옳은 가치’라는 뜻이고 그러니 성전보다 다윗보다 ‘더 옳은 진리’라는 말입니다. 그동안 성전이, 다윗이, 솔로몬이 가장 완벽한 진리인줄 알았는데 이제 와서 어떤 촌뜨기 청년이 지가 그들보다 더 옳은 가치요 진리라는 겁니다. 어마어마한 인식과 신앙의 대 전환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라면 이럴 때 어떻게 했겠습니까? 대부분은 바리새인처럼 굴었을 거고 율법선생들같이 처신했을 겁니다.
바로 이런 새로운 인시, 의식, 신뢰 체계의 대 전환이 바로 복음의 시작입니다. 당대의 기득권 세력들인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의 이 대전환의 요구를 거부하고 있었을 때, 예루살렘 사람도 아니고 많이 배운 사람도 아니고 갈릴리의 보잘 것 없는 작은 사람들이 새로운 역사의식을 갖게 된 것입니다. 다들 모세와 예언자, 다윗과 솔로몬만을 높이고, 성전만을 떠받들면서 살아가는데, 그 성전 지배 체제의 주인이나 다름없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떠받들면서 그들 앞에 납작 엎드리고 살아가는데, 시골 출신의 작은 무리들이,“모세보다 큰 이”,“요나보다 큰 이”,“솔로몬보다 큰 이”,“다윗보다 큰 이”,“성전보다 큰 이가 여기 있다!”새로운 인식을 갖게 된 것입니다.
바리새파와 율법학자가 표적만을 구하면서 다윗과 솔로몬의 영광만을 바라보듯이, 오늘날 크리스천들도 말은 주님을 높이지만 생각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출세하고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늘 솔로몬 같은 지혜를 달라고 하고, 다윗과 같은 믿음을 달라고 하지만, 그 이면에는 그런 왕과 같은 권력과 부귀를 누리게 해 달라고 하는 것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러는 한, 아무리 입으로 주님을 외쳐도, 절대로 예수는 다윗보다 큰 이가 되지 못하고 솔로몬보다 큰 이가 되지 못합니다. 들에 핀 백합화 하나를 보고 솔로몬의 화려함은 저 들꽃 하나만도 못하다고 크게 외치신 예수님은 우리와 상관없는 분으로 저만치 떨어져 있게 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저마다 다윗과 솔로몬이 되려고 하고, 자기가 더 큰 사람이라고 주장하려고 한다. 그러나 마태복음에서는 이와는 정반대로 신자들이 자신들을“작은 사람들”또는“지극히 작은 사람들”이라고 전문용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18:1 이하에서, 제자들은 예수께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인지 묻습니다. 예수께서는 어린아이 하나를 세우시고서 그 어린아이와 같이 되는 사람이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큰 사람이며 또 그런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것이 곧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어린아이는 지극히 작은 사람을 대표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그런 존재와 자신을 일치시키고 있습니다. 또 마25장 <최후의 심판> 이야기에서도 인자는 지극히 작은 사람들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곧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요, 지극히 작은 사람들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준 것이라고 하면서, 지극히 작은 사람들과 자신을 일치시킵니다. 이것이 복음이요, 이것이 가장 크신 이가 하시는 일입니다.
바리새파와 율법학자들에게서 가장 큰 사람은 모세나 다윗이나 솔로몬처럼 뭔가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에게서는 이 기준이 역전됩니다. 이런 보편 인식이 역전 되어야 진리인식도 역전시킬 수 있는 법입니다.
바리새파와 율법학자들은 늘 솔로몬과 다윗왕의 영광을 내세우면서 작은 사람들을 무시하고 정죄하였습니다. 로마의 외국 군대와 황제의 부하들 앞에서는 굽실거리고 온갖 아부를 하고 협력을 하면서도, 약한 백성들에게는 군림을 하려고 하고, 입만 열면 다윗과 솔로몬의 영광을 말하였습니다. 초대교회는 그들에게서 어떠한 희망도 찾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봐도 그들은 절대로 가장 큰 이도 아니었고 본받을 자들도 아니었다는 인식 전환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
어느 날 그들은 알았습니다, 가장 큰 이는 뜻밖에도 가까이 있었다는 것을. 갈릴리 출신이라고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하던 사람, 늘 그들과 함께하신 예수가 바로 솔로몬보다 크고, 다윗보다 크고, 성전보다 큰 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크신 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들과 자신을 일치시키시고, 가장 작은 사람들이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큰 사람이라고 추켜세워 주시고 기를 살려주시고 십자가를 지기까지 끝까지 사랑해 주신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예수 신앙의 비밀입니다. 가장 크신 분에게 돌아와 그를 따라 살 때 어느새 내가 가장 귀한 존재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솔로몬보다 크고 성전보다 크신 예수를 따라 살다보니 어느새 지극히 보잘 것 없는 내가“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라는 칭찬을 받고 있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의 부활사건은 이제 우리에게 인식의 대 전환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바꾸면 갈릴리 사람들이 되는 거고, 바꾸지 않으면 이방 여자에게 욕을 보게 될 바리새인 율법선생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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