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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가족의 탄생, 21세기 구원론의 재구성

마가복음 허태수 목사............... 조회 수 299 추천 수 0 2016.06.20 23:5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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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막3:31-35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2016.5.19 주일예배 http://sungamch.net 춘천성암교회 

 새로운 가족의 탄생, 21세기 구원론의 재구성
막3:31-35

얼마 전에 신학교 동기를 만났습니다. 이 여자 동기는 일찍 혼자가 되어서 남매를 키우면서 병원 원목실에 근무하다가 정년 은퇴를 했습니다. 아들과 딸은 결혼해서 미국과 타지에 살고 있고 혼자 분당에서 살고 있답니다. 그녀는 퇴직하고 나서 김주한 목사가 헌신하는 기아대책에 1억 원을 헌금했다고 합니다. 기사가 신문에 실렸기에 김목사에게 전화를 해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기아대책에서 봉사 하면서 개 한 마리와 같이 산답니다. 그런데 그분의 유서에 그 개 몫으로 500만원의 재산을 주라고 적혀 있답니다. 자기가 먼저 죽으면 누군가 개를 버리지 말고 잘 길러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 그가 유서에 개의 몫으로 500만원을 쓴 까닭이랍니다. 이쯤 되면 그 개는 그녀에게 가족입니다. 가족의 개념이 혈연중심의 과거와는 달리 지금 함께 살고 있는 특정되는 대상들로 바뀌고 있다는 것으로 봐도 될 겁니다.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를 찾아와서 바깥에 서서 사람을 들여보내서 예수를 불러내려고 하였습니다. 그 말을 들은 예수는 즉시 맞이하러 나오기는커녕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고 하였다는 겁니다. 이 말만 보면, 예수는 밖에서 기다리는 부모와 가족을 자기와 상관없다고 부인하고 있는 것처럼 들리죠? 예수는 왜 그렇게 말한 것일까요?

먼저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를 찾아왔으면 바로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밖에서 사람을 시켜서 불러내려고 한 것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런 의문은 앞의 21절을 보면 어느 정도 풀리는데, 거기에는 예수의 가족이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서 그를 붙잡으러 나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즉 그들은 좋은 마음으로 예수를 지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예수가 위험하거나 불순한 운동을 하고 다닌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말리러 온 것입니다. 마치 대학교 가서 데모에 참여하는 아들을 찾아온 부모가 데모 현장에는 들어가지 않고 교문 밖에서 아들만 불러내서 데리고 가려고 하는 것과 비슷하다 하겠습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한다면, 예수가 “누가 내 어머니며 형제들이냐”고 말한 것은 다소 냉정하게 들리기는 해도, 가족을 부끄러워하거나 부인하는 말은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거기에는 보다 깊은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다음 구절들에서 좀 더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주위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말씀하셨다. ‘보아라,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34-35절, 표준새번역).

이 구절을 개역성경에서는 좀 달리 번역하였습니다.

“둘러앉은 자들을 둘러보시며 가라사대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34-35절, 개역).

두 개의 번역을 비교해 보면 미묘하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어요. 개역을 보면, 마치 둘러앉은 사람들은 그저 청중들일 뿐이고, 예수는 그들에게 이러저러한 조건을 갖춘 사람들이 자기의 모친이요 동생들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표준새번역을 보면, 예수는 둘러앉은 사람들을 가리켜서 “보아라, 내 어머니와 내 형제자매들이다” 하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헬라어 성경을 보면, 개역보다 표준 새번역이 훨씬 더 정확한 번역인데요, 예수는 막연한 대상이 아니라 바로 거기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자신의 가족이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둘러앉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헬라어 단어는 흔히 ‘무리’로 번역이 되는 오클로스(ochlos)입니다. 그들은 가난하거나 굶주린 사람들이며 일정한 거처나 직업이 없는 사람들이죠. 예수가 그들을 자신의 가족과 동일시한 것은, 혈연을 넘어설 뿐 아니라, 권위 중심, 재산 중심이던 당시의 가부장적 가족 구조를 단숨에 깨뜨려버리는 매우 파격적인 선언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파격적이었는지는 마태 기자가 이 구절을 변경시킨 데서 알 수 있습니다. 마태 기자는 예수가 이 선언을 무리를 가리켜서 한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가리켜서 한 것처럼 고쳤습니다. 그것으로도 안심이 안 되었는지 예수가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키면서” 그 말을 했다고 하였습니다(12:49). 누가 기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둘러앉은 자들을 둘러보시며”라는 구절을 아예 삭제해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예수가 무리를 가족과 동일시했다는 논란 자체가 일어날 수 없게 하였던 거죠(8:21). 물론, 이처럼 파격적인 요소를 그대로 담고 있는 마가의 본문이 가장 역사의 예수에게 가까운 것은 물론입니다.

학자들은 맨 끝에 나오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는 구절(35절)과 그 앞에 나오는 전체 이야기(31-34절) 사이의 관계에 대해 논란을 벌였습니다. 요약하자면, 말씀을 중시하는 불트만 같은 학자는 끝 구절만이 예수의 말씀이고 앞의 이야기는 그 말씀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후대 사람들이 지어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를 따르면, 어떤 조건을 제시하는 듯한 끝 구절만 중요하고 무리들을 자신의 가족과 동일시한 파격적인 내용은 지어낸 말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말씀보다 일을 중시하는 디벨리우스 같은 학자는 앞의 이야기가 실제로 일어난 일을 묘사하는, 중요한 것이고 끝 구절은 그것을 설명하거나 정리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봅니다. 그를 따르면, 예수의 파격적인 선언과 실천이 중요한 것이고, 끝 구절은 부연 설명에 불과한 것이 되죠. 헬라어 성경을 보면 끝 구절(35절)은 ‘가르’(gar=왜냐하면)라는 접속사로 시작합니다. 이는 그것이 앞에 나온 선언의 이유를 설명하는 맥락에서 나온 것임을 의미하며, 이런 점에서 디벨리우스의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다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위의 구절들이 의미하는 바는 이제 어느 정도 분명해지죠? 그것은 찾아온 어머니와 동생들을 부정하는 냉정한 말도, 어떤 조건을 갖춘 막연한 대상을 가정하여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을 자신의 가족과 동일시하는 말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목자 없는 양 같이 떠도는 무리들을 자신의 가족과 동일시함으로써 전혀 새로운 의미의 가족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흔히 세상 사람들은 자기 부모라도 초라한 모습이면 모른 척하려고 하는데, 예수는 자기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초라한 무리들을 자신의 가족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죠. 바로 여기에서 새로운 가족이 탄생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당시의 로마법에서 가부장의 권위는 매우 강화되어 있었습니다. 로마 사회에서 가장은 흔히 세 가지 권위를 가졌습니다. 첫째는 자녀와 손자들 그리고 종들에 대한 권위요, 둘째는 그의 재산에 대한 권위요, 셋째는 그의 부인과 며느리들에 대한 권위입니다. 그들은 철저히 가부장적 구조 속에 있었고 그 정점에는 황제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넓은 의미에서는 황제를 “주인”(kyrios) 즉 가장으로 모시는 “황제의 가족들”이었습니다. 가장은 생물학적 아버지를 의미하기보다는 가족의 권위자를 의미했습니다. 가족은 친족관계에 의해서가 아니라 의존과 종속의 관계에 의해 규정되었습니다. 예수는 이런 종속적 가부장제를 넘어서는 새로운 가족을 선언하는 겁니다. 로마사회의 제도를 거부하는 거죠. 그것은 사회에서 소외되고 약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부모로 받아들이고 형제자매로 받아들이는 전혀 새로운 의미의 가족입니다.

바울은 예수의 이런 새로운 가족을 그대로 계승하여 새로운 가부장주의로 발전시킵니다. 아마도 그는 초대교회가 현실적으로 당시의 가부장제를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는 초대교회가 일반적 가부장주의에 머물지 않고 예수의 파격적 가족의 의미를 살리는 하나님의 가족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황제를 가장으로 하는 “황제의 가족”이 아니라, 사랑의 하나님을 아버지로 하는 “하나님의 가족”을 제시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목적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기 위함이며,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고 하였죠(갈 4:6). 이런 관계는 바울과 교회 사이에서도 적용이 됩니다. 바울은 신도들에게 “내가 여러분을 낳았다”고 하며,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이” 그들을 대한다고 했습니다(고전 4:15; 살전 2:11). 오네시모나 동역자 디모데를 자기의 아들이라고 말하며, 또 동역자의 어머니를 자신의 어머니도 된다고 한다(몬 10; 빌 2:22; 롬 16:13).

바울은 가부장제라는 틀은 유지하면서도 다만 가장을 황제 대신 하나님으로 바꾸었던 겁니다. 그래서 트뢸취라는 학자는 이것을 “사랑의 가부장주의”라고 부릅니다. 예수가 선포한 가족의 파격성은 가부장제라는 틀 속으로 들어와서 다소 완화되긴 했지만 그래도 그 핵심은 살아 있다 하겠습니다. 오늘날의 교회에게 바울의 교회는 하나의 모델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근원적인 모델은 역시 예수의 파격적인 사랑의 가족이라 할 것입니다. 교회는 이런 사랑의 가족을 늘 새로운 상황에서 이룩해가는 모임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2015년 현재 우리나라 전체 가구 수는 1592만 가구입니다. 그 중에 한 집에 한 사람 이 사는 집이 506만 가구로 전체 대비 27%입니다. 전통적인 혈연집합으로의 가족이 완전히 해체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새로운 가족개념과 그 생존지도가 그려져야 하는 겁니다. 혼자 산다는 말도 solo or cocoon, single, self-Reliance, Neo single, cyber single, office single 등으로 불려 집니다.

우리가 따뜻함이나 고마움, 행복함을 느끼는 것은 언제인가요? 가족이 아닌 사람이 가족처럼 대해줄 때가 아닌가요. 이제는 “내 새끼만!” 하는 혈연적 가족 이기주의에서 벗어나서, 나와 아무 상관없는 내 주위의 사람들을 형제자매로 대하고 내 부모 같이 대하고, 내 자식 같이 대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사회적 임계점에 도달한 겁니다. 21세기에 교회가 세상과 세상 사람에게 구원이 되려면 바로 이런 구원관의 재형성이어야 합니다. 교회는 그것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새로운 가족을 통한 사랑의 경험과 삶을 연습하고 훈련하는 곳이 교회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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