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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6:28-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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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6.6.3 주일 http://sungamch.net 춘천성암교회 |
진부’하게 살지 말고 ‘참신’한 인간이 되라.
마6:28-30
지금은 고기가 지천에 널려서 차에 치여 죽은 고라니를 거들떠보지도 않는 세상이지만, 멀지않은 옛날에는 육 고기를 맛보는 일이란 희귀하고 드문 일이었습니다. 오죽하면 도시락에 깔아온 달걀 후라이를 두고 그 숱한 에피소드가 생겼겠습니까. 달걀 후라이만 먹어도 그 집은 부잣집이었으니 만약 육고기를 먹는 집이면 더 말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런 시대에 어떤 노랭이 부자가 다른 사람에게 자기가 부자라는 걸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돼지다리 한 쟁기를 잘라다 걸어놓고 오는 사람마다 자랑을 했습니다. 냉장고나 냉동고가 없으니 광에 걸어 두었다간 손님이 오면 내다가 보여주고는 다시 걸어놓고 하는 것이었지요. 그걸 보는 사람들이 얼마나 침을 삼켰겠으며 부러워했겠습니까?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고기는 썩기 시작했고 악취가 났습니다. 그런데도 노랭이 부자는 냄새나는 고기를 습관적으로 손님들에게 내 보이곤 하는 거였습니다. 그는 썩은 고기에 익숙해져서 악취가 나는지를 몰랐던 겁니다. 그는 그 이후로도 계속 썩은 고기를 손님들에게 내 놓고 자랑을 하는 거였습니다.
이렇게 악취가 나는 줄도 모르고 썩은 고기를 자꾸 내 놓는 행위를 뭐라고 하는가 하면 ‘진부陳腐’라고 합니다. “그 사람 참 꽉 막혔네. 진부한 사람이야!”할 때 그 진부 말입니다. 그래서 일도 사람도, 생각도 행동도 진부해지면 악취가 나는 겁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설교도 그렇습니다. 교회 생활도 같은 짓을 계속 해대면 진부한 겁니다. 자기는 모르지만 악취가 나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 ‘진부’의 반대는 뭡니까? 진부한 사람, 진부한 신앙의 반대는 ‘참신’입니다. 참신한 사람, 참신한 신앙, 참신한 생각, 참신한 행동, 참신한 아이디어 할 때 그 ‘참신’말입니다. 이 ‘참신 斬新’이란 고대에 죄인을 죽이던 극형 틀인 수레와 도끼입니다. 참신이란 자신의 지난 생각이나 경험을 도끼로 치듯, 완벽하게 단절하고 새롭게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한다는 뜻입니다. 이게 참신한 인물, 참신한 아이디어, 참신한 신앙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인물, 신앙, 행동, 의식을 갖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세상은 참신하지 못하고 그냥 진부한 것입니다.
그러면 참신한 인물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참신한 아이디어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요? 참신한 신앙과 신앙인은 어떻게 생길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그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그냥 꽃을 보라고 하지 않고 “들의 백합꽃”을 보라고 합니다. 바로 뒤 30절에서는 이것을 “들풀”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것은 꽃집에서 파는 화려한 백합꽃이라기보다는 누가 보살펴 주지 않아도 혼자서 피는 들꽃을 가리키는 것이죠. 예수는 들꽃을 한번 생각해보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라”고 합니다. 여기서 ‘살펴보라’는 단어는 ‘눈여겨 관찰하라’는 뜻입니다. 직접 들에 나가서 들꽃을 눈여겨보고 그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관찰 하라는 것입니다.
진부한 인간, 진부한 삶, 진부한 의식을 넘어서는 참신한 세계와 인간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그런 세계를 경험하려고 에베레스트를 가고 백두산엘 갑니다. 나이아가라 폭포에도 가고 바다로도 나갑니다. 요즘에는 북극의 오로라나 사하라의 사막을 여행하는 이들도 많아졌고, 남극의 빙하를 가기도 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경험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압도적인 자연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탄성과 까닭 없이 흐르는 눈물을 경험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상의 내가 아닌, 장엄한 자연이 그것을 응시하는 내 눈과 몸으로 들어와 새로운 나를 만드는 것입니다. 특별한 여행을 왜 하는가 하면, 일상을 벗어나 특별한 존재로서의 내가 되어보려는 것입니다. 이런 숭고한 경험을 하려고 그런 먼데를 가고 높은 데를 오르고 에너지와 돈과 시간을 쓰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일상으로 사물을 보는 것과 뭐가 다르기에 이리 멀리 높이 가서 보려는 것일까요? 보는 행위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보는 것은 ‘그냥 보는’것입니다. 그저 보는 것입니다. 그저 본다는 건 자기의 습관과 편견대로, 자기 기준대로 사물과 상대방을 본다는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커튼을 열어젖히면 날아다니는 새와 푸른 느티나무가 눈에 저절로 들어옵니다. 내가 이것을 보려고 노력하지 않았는데 그냥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이때 그 대상을 판단하는 기준은 내 안목의 수준입니다. 우리들은 이런 내 안목을 옳다고 착각하고 외부에서 눈으로 들어오는 정보를 그 매개를 통해서 해석합니다. 이런 자기의 무의식적 수준이 고착이 되는 걸 무식이라고 합니다. 이 무식은 두 가지 특징이 있는데 하나는 화를 잘 낸다는 거고, 또 하나는 폭력을 행사한다는 것입니다.
‘그냥 보는’차원을 넘어서면 ‘살펴보는’게 있습니다. 살펴보는 건 눈에 보이는 대로 보는 게 아니라 그 대상을 보려고 의도하는 겁니다. 아침에 신물을 보는 건 그냥 보는 게 아니라 살펴보는 거죠. 그저 보는 것과는 달리 보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보는 공부도 필요합니다. 보는 방법도 있어야 하는 게 ‘살펴보는’것입니다. 공부를 하는 것도 그냥 보는 게 아니라 ‘살펴보는’것입니다. 그러나 그런다고 해서 내가 완전히 변화하지는 않습니다. 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설교를 그냥 듣는 사람이 있고, 살펴서 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살펴본다고 해서 자신의 삶이 적극적으로 변화하지는 않습니다. 그냥 듣는 사람과 조금 다를 뿐입니다.
그냥 보는 것과 살펴보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게 보는 것이 있습니다. 이걸 ‘관찰 觀察’이라고 합니다. 이 관찰은 나를 완전히 버린 상태에서, 다시 말씀드리자면 내 편견이나 의견이나 상황이나 지식 같은 걸 모두 버리고 보는 것입니다. 이걸 무아성이라고 합니다. 과학자가 현미경으로 박테리아를 볼 때 그걸 ‘관찰’이라고 하지 살핀다고 하지 않습니다. 가끔 공연장이나 영화관엘 가면 몰입하고 그 화면이나 동작 속으로 빨려 들어가죠. 나를 완전히 사로잡는 그걸 ‘관찰’이라고 합니다. 내가 관찰을 시작하면 그 대상이 나를 빨아들입니다. 그러면 나는 없어지고 내 관찰 대상의 표정과 움직임 하나하나에 내가 반응하게 됩니다.
왜 우리가 교회를 수년 다니고, 연수가 차서 죽게 되었는데도 참신은커녕 냄새나는 진부한 영혼으로 머물러 있는 것일까요? 왜 유대인들이 완전한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아놓고도 격렬한 욕망의 세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일까요? 바로 그런 세대에 던진 한 마디가 ‘생각하여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걱정하지 말고 그냥 살라는 낙관주의가 아닙니다. 될 대 로 되라고 인생을 내던지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근심걱정하지 말라는 윤리적 선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너희들은 왜 참신하지 못한가?”라는 물음입니다. 왜 맨날 썩은 고기만 인생의 밥상에 올려놓아 자신과 타인을 지치게 만드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요구하는 믿음은 참신입니다. 참신하기 위해 매사에 몰입하여 관찰하라는 것입니다. 우선 그냥 보던 꽃이라도 보는 태도를 바꿔 그 속으로 몰입하여 꽃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그가 가는 길이 어떤 것인지 알라는 것입니다. 이런 태도로 자신의 이야기, 즉 예수의 가르침에 몰입하면 진부했던 너희들은 참신해 진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1973년 노벨의학상을 탄 카를 폰 프리슈라는 과학자가 있습니다. 프리슈는 인간만이 언어를 가졌다는 편견을 깨뜨린 사람입니다. 프리슈는 어떻게 이 편견을 깨고 참신에 이르렀을까요? “바위틈에서 수 시간 동안 움직이지 않고 꿀벌의 움직임을 관찰했습니다. 내가 참을 성 있는 관찰자였기에 그저 보는 과학자들이 보지 못한 것을 발견할 수 있 있었습니다.” 프리슈는 이렇게 관찰함으로 꿀벌이 춤추는 모습에서 이 동물이 지닌 언어와 문법을 판독해 냅니다. 꿀을 발견한 벌이 돌아와 다른 벌에게 벌집의 위치와 방향, 꿀의 질과 양까지 전달한다는 걸 증명한 겁니다.
들의 꽃과 하늘의 새를 ‘관찰’하라는 것은, 걱정근심 따윈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이 아니라 보이는 대로 살아서 진부해지지 말고 깊이 몰입하여 관찰함으로 참신한 인간이 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낚아채고 있는 겁니다. “나(예수)에게 집중하고 나를 관찰하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해야 당시대의 사람들이 진부를 떨치고 참신해지는 길, 구원의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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