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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5:44-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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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추응식 형제 |
참고 : | 2014년 5월 25일 http://www.saegilchurch.or.kr/sermon/412192 |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마태복음 5:44-48)
2014년 5월 25일
추응식 형제
저희 처가는 딸이 많습니다. 제가 다섯 번째 사위이고, 제 아래 동서가 또 한명 있습니다. 다들 참 순박하신데, 제 아랫동서는 더 순박합니다. 그 사람은 시골(경북 성주)에서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일 년에 한두 번 명절 같은 날 만나면 교회는 어떠냐고 의례적으로 묻습니다. 그러면 그는 늘 “별일 없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처음 몇 번은 그냥 들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이 말이 제 속에 남았습니다. 그것은 '교회란 무엇인가?', '너는 왜 교회 가는가?'라는 제 자신에게 늘 묻는 질문과 관계있는 것이었습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린 것과 같이 저는 텅 빈 느낌의 교회를 다니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87년, 신촌 퀘이커 교회에 가려다가 제가 강남 YMCA 가까운 곳에 살았기 때문에 여기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 때는 교회등록, 세례 등 교인의 형식조차 버리고 나그네처럼 새롭게 교회생활을 하고 싶었습니다. 오래 전 새길교회가 문정동에 있을 때, 토요일마다 교회에 가서 오랫동안 혼자 앉아 있었습니다. 교회생활하면 그 때가 많이 떠오릅니다. 근래 누가 왜 교회 가는가 묻기에 저도 모르게 '가서 좀 앉아있어 본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교회는 그렇지 않습니다만 요즘 교회는 시장바닥처럼 말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교회 안과 밖으로 알릴 것이 얼마나 많은지 현수막을 주문하러 사이트에 들어가면 교회현수막 전문이라는 곳이 참 많습니다. 전도, 성전, 예배동원, 직분, 조직 등 교회의 일들이 마치 경쟁하듯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교회에서 필요할 수도 있겠지만 교회의 본질은 아닐 것입니다. 저는 교회에 다니면서 우리가 그릇의 빈 공간을 사용하는 것처럼 교회운영을 위한 여러 수단들이 교회의 중심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교회가 사람에게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으로 시작되었다면, 교회는 스스로를 비우고 하나님의 영이 채워지기를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근래 우리교회의 렉시오디비나 예배나 퀘이커의 침묵예배는 이를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물리적 요소나 사람이 만든 교회제도 같은 것들은 단지 공부를 하기 위한 책상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목표가 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은 것입니다. 모든 것은 성령의 임재를 위한 공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인간적 활동도 우리의 삶의 일부이기 때문에 그것은 목적이 됩니다. 이것은 마치 양파 껍질을 벗겨도 알맹이가 안 나오고 그 껍데기가 알맹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처럼 수단이 바로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독인의 삶은 과정과 결과가 따로 있지 않으며, 수단과 과정 자체가 예배여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새길을 간다는 우리는 예배당의 모든 행위가 말씀에 정합되는지를 늘 물어야 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우리 삶의 길을 배우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가르쳐 주신 그 길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 위에서 우리는 그 길을 걷고 언젠가는 그 길 위에서 죽기를 원합니다. 새길은 우리가 새로 만든 길이 아니라 본래의 길로 걸어가고자 하는 우리들의 마음(노력, 의지)입니다. 그것은 그동안 사람들이 본래의 길을 흉내 내어 곁길을 많이 만들었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새길교회는 근본을 지향합니다. 근본은 때로 파격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근본은 우리에게 익숙한 현재의 경험체계를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창의적 발상은 근본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이것은 보이지 않는 뿌리에서부터 꽃이 피는 것과 같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들의 생일도 근본을 생각한다면 스스로가 축하받는 날이 아니라 그를 있게 한 부모님께 감사하는 날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생일날은 부모님께 선물을 드리는 날이 되겠지요. 새길교회도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흔히들 교회하면 떠올리는 교회를 대표하는 목회자, 교회건물, 교파, 사도신경 등이 없는 기존교회와 다른 형태가 되었습니다.
2000년 전, 예수님이 걸으셨고, 보여주셨던 길도 당시 사람들은 곁길이라 비웃었습니다. 그 길은 사람들이 처음 보는 길이고, 초라하고, 좁고, 거친 길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예수님은 그 스스로 길이 되어 그 길을 가셨고, 끝내 죽으심으로 그 길이 대도이고, 정도임을 보여주셨습니다.
지금 우리는 그 길을 다시 마음에 새기기 위해 여기 왔습니다. 2000년 전 예수님이 보여주셨던 그 오래된 길을 우리는 새길이라 하며 걸어가고자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다짐이고 신앙고백입니다. 근본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다짐입니다.
저는 앞에서 저의 동서가 교회 어떠냐는 말에 ‘별일 없습니다’라고 답한 것도 근본에 바탕을 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대답 속에는 ‘교회성장이나 교회발전이라는 것이 가시적이거나 물리적인 요소로 나타나는 것도 아닐뿐더러 그렇게 쉽게 사람이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겠습니까?’ 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주인이신 교회에서 별일이 있을 게 뭐 그리 있겠습니까?'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언젠가 제가 동서에게 목회자로서 교회에서 교인들을 위해 힘 써는 것이 무엇인가를 물은 적이 있었는데 그 때도 그는 시골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노인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설에 만났을 때, 동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저는 유동인구가 적은 시골교회에서 새벽기도, 주일예배, 수요예배, 금요예배 등을 합쳐서 1년에 600번 이상 설교를 해왔습니다. 같은 신도에게 20년 가까이 설교를 해 왔는데 사람들은 변한 것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제가 저 사람들에게 무엇을 넣어 주려고 그동안 용 써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제가 가르치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도록 제 자신을 비워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도 비슷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이 교회를 27년간 다녔는데, 별로 나아진 것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사람들이 흔히 선한 세상 만들겠다는 교회가 이렇게 많은데 세상은 왜 더 악해지는가라는 말에 저의 신앙도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의 동서목사는 새길교회 측면에서 보면, 보수적인 장로교단의 목사로서 보수적인 경상도 시골에서 보수적인 노인들을 대상으로 목회를 하고 있지만, 근본에 충실하려는 그의 노력이 서로를 이해하는 다리가 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 우리교회에는 ‘별일’이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교회에서 함께 했던 분들이 교회를 떠났습니다. 제 옆에서 늘 손을 잡아주시던 송 권사님. 어느 평일 여름날 오후 내내 대형 에어컨을 분해해서 청소를 같이 했던 진솔하신 임동권 형제님. 그리고 송영숙 자매님, 따님 다희, 온 가족이 친했던 손대현 형제님 같은 분들은 오랫동안 교회에서 함께 했던 분들인데 생각이 달라 교회를 떠나셨습니다.
‘소가 없으면 구유는 깨끗하지만, 소가 힘을 쓰면 소출이 많아진다(잠언14장 4절).’는 잠언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서로 생각이 다른 교인이 없어지면, 교회는 조용해지지만, 다양한 지체들이 교유하는 교회의 풍요로움은 줄어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얼마 전, 떠나신 분과 놀기도 하고, 어떤 분은 통화도 했는데. 모두들 다른 곳에서 편히 교회생활을 하고 있다고 해서 저도 마음이 편했습니다. 이 일은 다시금 저에게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가 무엇을 위해 있는가 하는 근본적인 생각을 하도록 해 주었습니다.
오늘 읽은 마태복음 5장 44-48절에서도 근본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운행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는 것입니다. 생명의 근원이 되는 빛과 물을 차별 안하고 주신다고 합니다. 절에도 주시고, 교회에도 주십니다. 예수님이 사형당하시던 그날도(낮에 어둡긴 했지만,) 예수님과 빌라도에게 똑같이 햇빛이 비춰졌을 것입니다. 이것이 완전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도 이처럼 사람가려서 좋아하지 말고, 너를 괴롭히는 사람까지도 좋아해야 한다는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빛을 비추고, 비를 내려주시는 분이지만 우리는 햇빛나면 선크림을 바르고, 비 오면 처마 밑으로 피하는 피조물인데 어떻게 같이 완전할 수가 있겠습니까?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아이가 어찌 똑같이 할 수 있겠습니까?
47절에서도 아이에게 타이르듯 말씀하십니다. ‘또 너희가 너희 형제자매들에게만 인사를 하면서 지내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이방 사람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끼리끼리만 놀지 말라는 말씀 같습니다. 해병대끼리만 인사하지 말고, 공익요원하고도 인사하고 지내라고 하십니다. 순복음 교인은 순복음 교인끼리만 놀지 말고, 새길 교인은 새길 교인끼리만 좋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같은 고등학교, 같은 지역끼리만 좋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교제법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교제나 사교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근본적인 문제라고 말씀하십니다. 48절에서는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사람 가리지 않고 두루 잘 지내는 것이 하나님의 완전함과 같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사랑하는가하는 사랑의 대상문제가 완전함의 조건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공생애에서 가장 명료하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법에서 사랑의 대상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예수님은 죄인과 병자, 가난한자, 미친 사람, 문둥이, 창녀 등 그동안 사람들이 천박하고 더러워서 가까이 하지 않았던 그 사람을 먼저 찾으심으로 명료히 하셨습니다. 대체로 사람들이 사랑해주지 않는 사람을 사랑했습니다. 우리로서는 전혀 사랑스럽지 않은 사람을 사랑했습니다. 가까이 오면 귀찮을 것 같은 사람을 사랑하셨습니다. 세상에 오신 목적이 바로 그 사람들을 사랑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장 높은 분이 가장 낮은 곳으로 오셨습니다. 이 엄청난 간극을 오늘 성서에서 하나님은 또 말씀하십니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 박해하는 사람을 사랑하라,’ 우리가 가장 멀리 하고 싶은 사람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장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좋다는 것이 아니라 사랑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건 정말 어렵습니다.
원수를 사랑하기 이전에 우리와 좀 다른 부류의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어렵습니다. 사랑이 아니라 어쩌면 함께하는 것도 어렵습니다. 여기에는 구조의 문제까지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우리는 학력, 경제력, 종교, 사회적 신분 등으로 나뉘어져 살고 있습니다. 사는 곳도 다르고, 일하는 곳도 다르고, 노는 곳도 다릅니다. 나뉘어져 비슷한 사람끼리 사는 것이 편하고 자연스럽습니다. 그런 것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남북한만 해도 따로따로 다른 삶으로 나뉘어져 사는 것이 고착화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이 불완전한 상태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하신 것처럼 너희들도 두루 사랑해서 완전해지라고 하십니다. 작은 이룸, 작은 완전함들을 만들어나가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똑같이 비를 내려주시지만, 비가 오면 반가운 우산장수도 있고, 비 때문에 농작물을 못 말려 애태우는 농부도 있습니다. 우산장수와 농부의 희비가 엇갈리고 갈등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농부는 비가 와서 좋아하는 우산장수가 미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비가 그치고 해가 또 똑같이 떠오를 것입니다. 그러면 그 때는 우산장수가 농작물을 말리고 있는 농부를 미워해야 하겠습니까? 당장 눈앞의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을 바라보면 똑같이 내려주심을 알게 됩니다. 비올 때, 우산장수가 농부를 안됐다고 생각하고, 해 떠오를 때 농부가 우산장수를 생각하는 것, 그래서 비가 오면 우산장수가 농작물을 덮어주고 햇빛나면 농부가 말린 먹거리를 우산장수에게 좀 갖다 주는 것. 이것이 사랑이고 완전함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랑과 완전함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있습니다. 우산장수와 농부가 서로 안됐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불쌍히 여기셨던 예수님 마음입니다. 눈앞의 아집을 버리고, 자기를 비울 때, 그 자리에 하나님이 오십니다. 사랑으로 오십니다. 그리고 상대방이 안됐으면 되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의 실천으로 완전함이 이루어집니다. 그곳은 사랑으로 갈등이 사라진 평화의 세상입니다. 하나님의 근본이 일상이 되어있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근본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나라입니다.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오늘은 우리교회의 주보 앞 그림을 간략히 설명하는 것으로 제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이 기회에 그림의 의미를 함께 나누었으면 합니다.
먼저 맨 위에 공중에 사는 새가 있습니다. 이 새는 높은 곳에 앉아있는 것이 편안합니다. 먹이를 위해 땅으로 내려오면 오히려 불안합니다. 그리고 그 아래 땅에 사는 것이 있습니다. 땅에 사는 것은 높이 올라가는 것이 불안합니다. 또한 물속에 빠지는 것도 두렵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로 땅 위에서 생활합니다. 그러나 아래 물속에 사는 물고기는 물 밖이 두렵습니다. 물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습니다.
만약 땅에 사는 것이 물고기를 보고 물에 빠졌다고 건져주려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높은 곳에 있는 새를 보고 위험하게 높은 곳에 올라갔다고 내려오라 기도하면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하늘과 땅과 물속에 그들의 살 길을 만들어주셨습니다. 각각은 전혀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길로 연결된 하나의 세상입니다. 인간의 욕심으로 각각을 나눌 때, 하나님의 완전함은 파괴됩니다.
서로 다른 것들이 함께 어울리는 것, 그곳에 진정한 하나님의 평화가 있습니다. 서로 다른 것 속에는 원수까지 포함되어야 한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주님, 우리가 가장 멀리하고 싶은 사람을 사랑하라고 하시니 어렵습니다. 우리가 익숙하지 않은 사람과 함께 하라고 하시니 어렵습니다. 저희들의 굳은 가슴에 주께서 임하셔서 사랑을 가르쳐 주시옵소서. 저희 교회가 주님처럼 완전할 수 있도록 늘 함께하며 일깨워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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