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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9:41-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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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권진관 형제 |
참고 : | http://www.saegilchurch.or.kr/sermon/417235 |
예견하지 못한 예정된 일
(누가복음 19:41-44)
2014년 6월 8일 성령강림주일 예배
권진관 형제 (새길교회 신학위원)
[예수께서 예루살렘 가까이에 오셔서, 그 도성을 보시고 우시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늘 너도 평화에 이르게 하는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터인데! 그러나 지금 너는 그 일을 보지 못하는구나. 그 날들이 너에게 닥치리니, 너의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에워싸고, 너를 사면에서 죄어들어서, 너와 네 안에 있는 네 자녀들을 짓밟고, 네 안에 돌 한 개도 다른 돌 위에 얹혀 있지 못하게 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 누가복음 19:41-44
오늘 우리는 성령강림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로마서 8장 5절과 6절에 아주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그야말로 기독교의 가르침을 요약한 가장 핵심적인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를 위해서 가장 필요한 귀한 말씀이라고 생각하며, 특히 세월호 사건을 겪고 있는 우리에게 특별한 계시적인 말씀이 됩니다. 5절의 말씀입니다.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은 육신에 속한 것을 생각하나,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6절에 아주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육신에 속한 생각은 죽음입니다. 그러나 성령에 속한 생각은 생명과 평화입니다.” <phronema tes sarkos>, 즉 육의 생각이 한편에 있고, 다른 한편에 <phronema tou pneumatos>가 있는데 이것은 영의 생각입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에게 두 갈래의 길이 있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프로네마, 즉 생각은 오늘날의 담론과 같은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잇는데, 하나는 육의 담론이 이끄는 길이요, 다른 하나는 영의 담론이 이끄는 길이라는 말입니다. 육의 생각과 담론의 끝은 죽음(thanatos)인데, 영의 생각과 담론의 결과는 생명(zoe)과 평화(eirene)라는 것입니다.
육의 생각, 육의 담론은 오늘날 무엇이겠습니까? 세월호 참변 이후에 자주 입에 오르내리는 말이 있는데, 그건 “돈이 매뉴얼이 된 나라”라는 말입니다. 우리나라는 이미 돈이 매뉴얼이 되어서 돈이 하라는 대로 움직이는 사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 사회는 죽음의 사회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OECD 회원국 중, 자살률 1위, 특히 노인 자살률 1위, 행복지수 최하위를 차지한 나라가 바로 우리 대한민국입니다.
세월호 참사는 우리가 그 참사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이 참사는 예정되어 있었던 참사였습니다. 우리가 미리 알지 못하였을 뿐입니다. 세월호 사태는 예정된 일이었다고 말하면 아마 여러분 중에는 이런 오해를 하실 수도 있겠다 생각합니다. 세월호는 하나님이 예정해 놓으신 일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예정하여 놓은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잘못이, 우리 사회의 구조가 그것을 예정해 놓았었다고 말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세월호 사건을 통해서 아파하시고, 고통당하신 분입니다. 이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은 이 사회의 잘못된 구조이고 그 권력자들인 것입니다.
세월호 사태의 책임을 선장에게만 돌린다면 그건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일일 것입니다. 회사 측에서는 은퇴 후에 아파트 경비로 일하고 있는 사람을 불러들여서, 선장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정식 선장이 아니라, 200여만원 월급을 받는 비정규직이며, 임시직으로 허울만 좋은 선장이었습니다. 이러한 사람에게 왜 배와 함께 가라앉아 죽지 않았냐고 몰아칠 수 있겠습니까? 이 사람에게 다른 선진국의 버젓한 선장의 잣대를 들이댈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사람이기 때문에 승객들을 구조하는 일은 하지 않고, 허둥대다가 자기만 살자고 속옷 차림으로 빠져 나온 것입니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 모든 책임을 묻고 있는 것이 우리 사회의 실상이요, 민낯입니다. 우리 사회는 돈의 담론, 맘몬의 담론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맘몬의 구조는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희생양들을 마녀 사냥하듯이 찾아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희생양에게 모든 책임을 덮어씌우고, 그 뒤에 자신의 더러운 모습을 숨기고 있습니다.
가장 큰 주범은 우리 사회의 구조요, 특히 이러한 담론을 통용시키는 이 사회의 권력자들이요, 그들과 발을 맞추는 언론들을 비롯한 담론의 생산자들이요, 이러한 담론 구조를 활용하는 맘몬의 자식들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맘몬이 매뉴얼이 되었고, 육신의 욕망에 의해 지배된 사회, 윤리적 책임을 저버리고 오직 자기 입신출세와 물질적인 축복만을 추구하는 사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여기에 교회가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교회가 이러한 사회를 만들어놓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회와 교회에서는 죽음밖에 기다리는 것이 없습니다.
일부 철학자들은 일상의 세계에 경고를 주는 실재계가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실재계는 숨어 있다가 갑자기 나타나는 사건에 의해서 자신의 존재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실재계를 잊고 지냅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걷고 있는데 갑자기 내 머리 위로 기왓장이 떨어진다고 합시다. 실재계는 이와 같은 것입니다. 실재계는 일상의 세계, 정상의 세계가 실재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영화 벤허를 보면 예루살렘에 로마 총독이 부임해 오는데 벤허의 가족들이 지붕위에서 지나가는 행렬들을 보다가 잘못해서 기왓장들이 떨어집니다. 그 기왓장에 총독이 맞고 낙마하는데, 이것이 벤허의 가족의 운명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습니다.
일상의 정상성에서 보면, 이러한 일은 예견치 못하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육의 담론과 맘몬의 담론, 그리고 맘몬의 정상성에서 보면 실재계의 일은 불가능한 일(the impossible)입니다. 그러나 다른 담론인 영의 눈으로 보면, 그것은 예견될 수 있는 가능한 일일 뿐입니다. 일상의 정상성에서 보면 실재계는 가혹한 일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사건으로 터져 나오기 때문입니다. 무방비한 상태에서 맞이하는 사태가 바로 실재계의 모습입니다. 실재계는 예외가 있겠지만, 대체로 가혹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이러한 가혹한 예측치 못하였지만, 예정되어 있는 실재계의 사태들에 대비하기 위해서 우리는 육의 생각이 아니라, 영의 생각으로 굳건히 우리의 신앙을 다져야 합니다. 제가 여기에서 신앙을 생각으로, 즉 담론적인 것으로 말씀드리는 이유는 이런 것입니다. 즉, 신앙은 추상적이거나, 신비적인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담론적인 것이어야 하며, 특히 영의 담론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추상적인 것이거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적인 것이 아니라, 말로 분명하게 표현되는 담론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말씀했듯이, “사람은 마음으로 믿어서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해서 구원에 이르기 때문입니다.”(롬 10:10) 우리가 마음으로만 믿는 것으로 끝나면,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입으로 분명히 말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바울 사도는 우리의 신앙과 믿음을 담론적으로 분명하게 밝힐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구성된 생각들을 표현하여 “성령의 생각”이나 “성령의 담론”이라는 말씀으로 표현하고자 합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에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보시며 눈물을 흘리셨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이 돈이 지배하는 사회, 돈이 매뉴얼이 된 사회였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본 것은 예루살렘이 육의 담론에 의해서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육의 담론이란 돈의 담론, 경쟁의 담론, 힘의 담론을 가리킵니다. 육의 담론이 지배하는 곳에 정의가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의 본문 바로 다음에는 유명한 성전 정화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누가복음 19:45 이하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시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될 것이다 하였다. 그런데 너희는 그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강도들의 소굴인 예루살렘은 돈에 정신 팔려서 미래에 닥칠 실재계의 침입을 알 수 없었고 대비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예루살렘을 보고 예수는 우셨던 것입니다. 예수 당시의 예루살렘의 모습은 오늘의 우리의 모습과 여러 면에서 같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의 말씀에서 살펴보면, 예수께서 앞으로 닥쳐올 일을 미리 예측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냐 하면, 기원후 70년을 전후에서 유대-로마 전쟁이 일어나서, 예루살렘이 돌 위에 돌 하나 얹혀 있지 못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는 처참한 멸망이 왔습니다. 예수께서 이것을 미리 예언하시면서, “그날들이 너에게 닥칠 것이니, 너의 원수들이 흙 언덕을 쌓고, 너를 에워싸고, 사면으로부터 너를 공격하여서” 너희를 짓밟을 것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기원후 70년 로마군대의 예루살렘의 함락으로 백만 명 이상의 유대인이 죽어갔습니다. 유대인들의 마사다의 최후의 항전(73년)으로 이어지지만, 결국 모두가 자결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이 본문의 기자는 70년의 예루살렘 멸망의 사건을 보고 그것을 예수의 입으로 말하게 하는 방식으로 이 본문을 썼는데, 거기에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70년의 예루살렘 멸망을 보고 들은 본문의 기자는 예수 당시의 예루살렘의 모습이 그러한 멸망의 죽음으로 갈 수밖에 없는 구조에 놓여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70년의 실재적인 사건을 보고, 40년 전의 예루살렘의 실태를 이해했던 것으로 이해됩니다. 기자는 예수의 말씀과 행위, 즉, 예수가 예루살렘을 보고 눈물 흘리셨고, 성전 정화하였던 것은 바로 이러한 유대의 비극을 예측했고, 이를 미연에 막기 위한 행동이었다고 해석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본문에서 우리에게 경고를 주고 있습니다. 이제 육의 생각을 버리라고. 돈이 매뉴얼이 되고 담론이 되어 있는 이 세상은 죽음이라고. 사실, 육의 생각의 귀결은 세월호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계속 반복될 것입니다.
원전 사고가 터지면 세월호보다 몇 천배, 몇 만배의 죽음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일본의 후쿠시마에서 이런 것을 이미 보았습니다. 한국은 세계에서 단위면적당 원전이 가장 많은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것도 2위와 엄청난 차이가 있는 선두 1위입니다. 그리고 남북한의 적대적 관계, 군사적 대치는 세계 유래가 없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생각하면, 원전폭발, 남북의 군사적 충돌, 그리고 이러한 것들로 인한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 이러한 가혹한 실재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 사회는 이러한 예측을 하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아니, 우리 사회는 이러한 예측을 의도적으로 억제하고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예측을 하는 사람들을 종북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에서 실재계는 냉혹하게 진입해 들어오고 말 것입니다.
저는 한 사회가 좋은 사회가 되려면 좋은 지식보다 좋은 소통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소통이 원활하다 보면 좋은 생각이나 지식이 떠오르게 됩니다. 소통이 필요하고, 협력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소통과 협력은 공간에서 일어납니다. 성령의 생각, 성령의 담론은 소통과 협력의 공간에서 일어난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의 생각은 소통의 공간에서 생깁니다. 원래 성령은 열린 공간 속에서 창조적인 일을 하시는 영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태초에 하나님의 창조의 영은 수면 위에서 움직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에스겔 골자기의 열려있는 공간 속으로 불어 들어오는 생명의 영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남북으로 나뉘어져 가로막혀 있습니다. 남북한 사이에 소통이 없습니다. 소통의 영이 넘나들지 못하는 이러한 한반도의 공간에 찬송가 192장에 나온 것처럼 에스겔의 골짜기에 불어 닥친 생명의 바람이 다시 불어와 주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바람은 마주하는 창문이 모두 열려야 들이칩니다. 한쪽만 열려 있으면 바람이 불지 않습니다. 양쪽 모두 열려 있어야 소통의 바람이 불어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도 모두 열려 있어야 소통의 영이 불어오는 것입니다. 최초의 교회는 소통의 영이 불어올 수 있도록 모든 사람들이 언어의 장벽을 넘어 서로 마음 문을 열었기 때문에 성령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최초의 성령은 이처럼 소통의 사건이었습니다.
성령은 공적 소통의 공간, 생명의 공간을 여는 하느님입니다. 우리들 사이에 있는 공간 속에서 사이의 공간에서 활동하셔서, 우리들 사이에 화해와 소통, 그리고 협동이 일어나도록 해 주시는 바람과 같은 분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바람은 바람이 소통할 수 있는 공간에서만 일어납니다. 막혀있는 공간에서는 공간이 흐르지 못하고 멈추고 맙니다. 성령의 원리가 이런 것입니다. 우리들 사이의 열린 공간이 있을 때 진리의 성령은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협동의 공간, 소통의 공간을 만드는 분은 성령입니다. 첫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불어온 세찬 바람은 바로 성령이었습니다. 오늘날 남한 사회에서 소통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이러한 소통의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서 기도 중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처럼 영이 움직일 수 있고 불어올 수 있는 그러한 열린 공간, 우리가 만나서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을 우리가 마련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상상을 해 봅니다. 준비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들 사이에 공간, 소통의 공간을 우선적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소통은 무엇보다도 원수들과의 소통이 진정한 것입니다.
저는 예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얼마나 진리인지를 요즘 더욱 절실하게 깨닫고 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가진 자가 원수입니다. 그 원수는 나와 다른 생각, 뜻, 의지,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완전한 타자입니다. 이러한 타자로부터 새로운 것을 찾을 수 있습니다. 내가 없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타자를 제거해 버리고 나면 내가 설 수도 없고, 내가 발전할 수 없습니다. 그 타자로부터 배울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남북한의 서로 원수로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원수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도 발전할 수 있고 함께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원수가 되어 싸운다면 함께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이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한다는 말씀은 원수를 사랑하고, 원수와 협력 협동하지 못하는 생각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말씀은 남북이 서로 살상 무기를 겨누고 있는 우리 상황에서 가장 잘 들어맞는 말씀입니다.
평화의 길은 원수를 사랑하는 길이며, 그것은 성령이 안내해 주는 길이며, 그것은 또한 협력적인 공간이 확장되는 길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협력이라는 가르침의 원형을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믿음, 소망, 사랑은 항상 함께 있을 텐데, 이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는 사도 바울의 말씀은 예수의 가르침을 바울이 가장 잘 표현한 것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사랑이란 협력, 협동이라는 단어로 표현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협동조합이 오늘날의 경쟁적인 자본주의 사회를 대신할 대안적 살길입니다. 협동은 우리를 구원으로 안내합니다. 구원론에서 가장 적합한 것은 협력적인 구원론입니다. 자력적 구원, 타력적 구원론도 아닌 (신과 인간 사이의) 협력설이 진정한 구원론입니다. 협동, 협력이 살길입니다. 북한과의 협력, 원수와의 협력이 평화의 길입니다. 의견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협동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통이 필요합니다. 소통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이들의 협력으로 우리는 성령이 허락하시는 구원의 공간을 넓혀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같이 갑시다”라는 구호나,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이라는 김남주의 시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협동과 협력과 연대의 정신이 보입니다. 이 길이 바로 영의 길입니다. 이 길이 바로 그리스도가 가르쳐준 길입니다. 협동만큼 좋은 삶의 길은 없습니다. 여기에서는 나만 잘 살아보겠다는 남한의 자본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개인주의의 육의 생각도 없습니다. 여기에는 북한식의 전체주의적 집단주의도 없습니다. 영의 생각은 제3의 길이요 통합의 길입니다. 그것은 협동의 길입니다. 그것은 곧 사랑의 길입니다. 사랑의 기술(art of love)이라는 말이 있듯이, “협동의 기술”(art of cooperation)이 있을 수 있을 텐데, 우리는 이 협동의 기술만이 우리를 실재계의 가혹함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령의 생각은 생명이요, 평화이지만, 지금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육의 생각은 죽음일 뿐입니다. 우리 사회의 전체적인 각성이 더욱 가열차게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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