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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왕상2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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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구미정 교수 |
참고 : | http://www.saegilchurch.or.kr/sermon/421377 |
끼어들기, 상관하기
(열왕기상 22:1, 마가복음 1:23-26)
2014년 6월 15일 주일예배
구미정 교수(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
[시리아와 이스라엘 사이에는 세 해 동안이나 전쟁이 없었다.] - 열왕기상 22:1
[그 때에 회당에 악한 귀신 들린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그가 큰소리로 이렇게 말하였다. "나사렛 사람 예수님, 왜 우리를 간섭하려 하십니까? 우리를 없애려고 오셨습니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압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입니다." 예수께서 그를 꾸짖어 말씀하셨다. "입을 다물고 이 사람에게서 나가라." 그러자 악한 귀신은 그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서 큰 소리를 지르며 떠나갔다.] - 마가복음 1:23-26
내겐 너무 불친절한 세상
영화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2010)을 보셨는지요? 서울 모 은행의 비정규직 노동자인 ‘해원’(지성원 역)이 휴가차, 어릴 때 잠시 살았던 섬마을 ‘무도’로 향하면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전개됩니다. 그 섬에는 친구 ‘복남’(서영희 역)이 살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찾아온,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친 해원을 복남은 살뜰하게 챙겨줍니다. 그렇게 복남의 살가운 보살핌 덕에 차츰 안정을 찾은 해원은 본의 아니게 복남의 일상을 엿보게 되지요.
한때 이 섬은 고기잡이를 나간 남자들이 큰 풍랑을 만나 거의 몰살당한 이후로, 남자의 몸값이 엄청 높아졌습니다. 여자들이 벌꿀재배, 감자캐기 등 온갖 궂은일들을 도맡아 하는 동안, 남자들은 빤질빤질 놀다가 어쩌다 지붕 철판에 못질 한 번만 해도 대단한 찬사를 받지요. 배를 타고 자유롭게 뭍으로 나가는 일도, 섬에서 난 특산물을 뭍에 내다팔아 돈뭉치를 챙기는 일도, 모두 남자들만 누리는 특권입니다.
그렇게 고립된 섬에 갇힌 채, 복남은 끔찍한 가정폭력, 성폭력, 노동착취의 희생양이 되어 하루하루 고통스런 삶을 연명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서울생활에 지친 해원이 잠시 쉬러 온 이 섬은, 사람 사는 곳이 전부 그렇듯, 결코 낭만적인 파라다이스가 아니었던 겁니다. 해원은 복남이 당하는 불의한 폭력의 실체를 알고 난 이후, 섬사람들의 태도도 관찰하게 됩니다. 기이한 것은 모두가 복남이 처한 상황을 버젓이 보고 또 알고 있으면서도 약속이나 한 듯이 철저하게 외면하고 있다는 점이었지요. 해원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자기와 딸을 이 섬에서 빼내 서울로 데려가 달라고 애원하는 복남의 간곡한 청을 해원은 냉정하게 거절합니다. 이제 아무도 그 생지옥에서 복남을 구원해줄 사람은 없습니다. 게다가 모진 삶의 유일한 낙이었던 외동딸마저 불의의 사고로 죽자, 복남은 마침내 복수의 칼을 집어 듭니다.
복수를 주제로 한 영화는 참 많습니다. 복수는 영화가 즐겨 다루는 ‘메인 아이템’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새롭습니다. 단지 복수의 주체가 여성이어서가 아닙니다. 제가 보기에 이 영화의 새로움은 무엇보다도 순수하고 무력한 한 인간이 어쩌다 복수의 화신이 되었는가를 조명하는 관점 자체에 있는 것 같습니다.
다시 영화의 첫 장면으로 거슬러 올라가 볼까요? 서울의 밤거리, 자동차 안에서 해원이 라디오를 들으며 운전을 합니다. 생방송 라디오가 아니라 녹음된 파일로 ‘컬투쇼’를 듣고 있습니다. 들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컬투쇼는 재미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머릿속의 잡념을 비우고 따라 웃기에 그만입니다. 그런데 해원은 웃지 않습니다. 진행자들이 아무리 ‘레전드급’ 재담을 펼치며 웃고 떠들어도 그녀의 표정은 변함없이 무뚝뚝합니다. 하루 종일 은행에서 이 사람 저 사람 상대하며 하도 감정노동에 이골에 난 터라 그런 모양이지요.
이때 차창 밖으로 일군의 남자들이 한 여성을 둘러싸고 폭행하는 장면이 눈에 들어옵니다. 본능적으로 해원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차 문의 ‘닫힘’ 버튼을 누르지요. 매 맞던 여성이 그녀의 차를 발견하고 달려와 ‘도와주세요, 살려주세요’ 소리쳤지만, 해원은 못 본 체 악셀레이터를 밟습니다. 이 작은 행동이 바로 앞으로 펼쳐질 영화의 주요 복선인데, 어쩐지 낯설기는커녕 너무나 익숙한 행동이어서 섬뜩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니까 영화는 괜스레 귀찮게 남의 일에 끼어들지 않으려는, 그러기에는 자기 삶조차 너무 복잡한 우리네 인생을 고발한다고나 할까요?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마가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맨 처음 일으키신 기적이 가버나움 회당에서 귀신들린 사람을 고쳐주신 일로 소개됩니다. 가버나움은 갈릴리 호수 서북쪽에 위치한 소읍입니다. 안식일을 맞아 예수 일행이 유대인 회당에 들어가셨는데, 거기에 귀신들린 사람이 있더라는 거지요. 1장 24절에 보니까 그가 소리를 지릅니다. 아니, 그 사람 안에 든 귀신이 지르는 소리입니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귀신들린 사람은 한 명, 곧 단수인데, 그 사람 안에 있는 귀신은 ‘우리’, 곧 복수로 말합니다.
마가는 공평하게도 예수님이 이방 땅에서 한 첫 번째 기적 역시 귀신들린 사람을 고쳐주신 일이라고 보도합니다. 마가복음 5장에 나오는 ‘갈릴리 호수 건너편 거라사’ 지방이 바로 문제의 사건이 일어난 공간 배경입니다. 거라사 지역은 요단 강 동쪽 제방에 자리 잡은 ‘데가볼리’(deca polis) 중 하나로, 로마가 식민 지배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헬레니즘 문화의 전초기지로 건설한 10개의 계획도시 가운데 핵이었습니다. 거기서 무덤 같은 인생을 살던 귀신들린 사람도 예수님을 보자 큰소리로 부르짖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5:7) 그런데 예수님이 “당신의 이름이 뭔가요?” 물으셨을 때, 그가 대답하기를, “내 이름은 군대입니다. 우리가 많기 때문입니다.”(5:9)라고 대답한 것으로 보아, 그 사람 안에 든 귀신도 역시 복수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인데, 사람 안에 든 귀신은 여럿이라는 게 무슨 뜻일까요? 복음서에 표현된 귀신이란 ‘더러운 영’, ‘사악한 영’의 우리말 번역이라는 걸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깨끗한/거룩한 영(靈, 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고, 더러운/사악한 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데, 마가는 사람 안에 둥지를 틀고,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못하도록 파멸로 이끄는 모든 것을 ‘더러운 얼’로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7:20-23 참고) 이를테면 탐욕이나 교만, 시기심, 거짓 속임, 거짓 비방 따위도 더러운 얼에 사로잡힌 표현입니다. 사사건건 예수님의 정체를 부인하고, 그분의 행동에서 트집만 잡으려는 유대 종교지도자들도 더러운 영에 사로잡혀서 그런 거고요. 한마디로 ‘나’라고 하는 한 인격 안에 ‘더러운 영들’은 다양한 형태로 숨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복수로 표현되는 게 당연하지요.
우리가 주목할 점은 바로 이 대목입니다. 귀신은 유대인 속에 둥지를 튼 귀신이든, 이방인 속에 둥지를 튼 귀신이든, 하나같이 똑같은 말을 합니다.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그런데 가만 보니, 살면서 참 많이 듣고 또 많이 내뱉는 소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지하철에서 시끄럽게 통화하거나 볼륨 높여 디지털모바일방송(dmb)을 시청하는 사람에게 ‘소리를 좀 낮춰 달라’고 하면 당장에 날라들 말이 바로 이것 아니겠습니까? 아, 이 경우는 진짜 ‘남’이니까 그렇다 치고, 자식은 어떻습니까? 게임 좀 작작 해라, 잔소리하면 당장에 “내 일에 상관 마” 그러지 않겠습니까?
마가는 예수가 기필코 맞서 싸워야할 악한 영의 특징을 ‘타인과 상관없음’이라고 폭로합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존재의 뿌리를 하나님으로부터 탈각한 존재의 고유 언어가 바로 ‘타인과 상관없음’이라는 것이지요. 이런 생각, 이런 언어에 맞서 예수님은 부득불 상관하십니다. 예수님에게는 한 생명이 귀하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온전히 회복되어 하나님과의 관계 안으로 들어오고, 세상에서 자기 몫의 생을 활기차게 살아가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기에 그냥 못 본 체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지금 예수님의 행동은 단순한 치유라는 말로는 불충분하지요. 더러운 영들과 투쟁하신다고 표현하는 게 맞습니다. ‘정의’의 성서적 의미가 관계의 회복이라면, 하나님께 대해 또 이웃과 세상에 대해, 그리고 자연에 대해 뒤틀린 관계로 말미암아 고통당하는 모든 사람들을 회복시키기 위해, 그들을 그렇게 몰아넣은 악한 세력에 맞서 싸우는 것이 거룩한 영/성령의 활동입니다.
남의 일이 아니다
짧은 본문을 하나 더 보지요. 구약성서 열왕기상 22장 1절은 “아람(시리아)과 이스라엘 사이에 전쟁이 없이 삼년을 지냈다”는 말로 시작됩니다. 전쟁이 없었다니 평화로웠겠다, 언뜻 짐작하게 됩니다. 신약시대의 평화 개념은 그랬습니다. 평화를 뜻하는 희랍어 ‘에이레네’(eirene)는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다스리던 시기, 그러니까 정복전쟁이 마무리되어 로마제국이 명실공이 지중해 세계를 평정함으로 더 이상의 전쟁이 중지된 상태에서 오는 평온감을 의미했습니다.
이 ‘에이레네’라는 용어가 복음서에도 여러 번 등장합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신약성서 저자들은 이 용어를 단순한 전쟁 중지의 의미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이해한 평화는 ‘에이레네’가 아니라 ‘샬롬’(shalom)이었는데, 구약신학자 게르하르트 폰 라드에 따르면, ‘샬롬’은 어떤 심리상태, 곧 마음의 평화를 의미하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유한 인사말인 히브리어 샬롬은 조건이나 상태를 가리키는 용어가 아니라 관계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 사람과 사람의 관계, 사람과 세상/자연의 관계가 온전해지는 것, 깨어진 상태에서 회복되는 것이 평화의 참 뜻이었습니다.
다시 구약성서 열왕기상 22장 1절로 돌아가 보지요. 아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전쟁이 없는 시간들이 과연 평화로운 시절이었을까요? 주전 8세기는 고대 이스라엘 역사의 황금기였습니다. 최근 발견된 고고학적 연구에 의하면, 이스라엘에 최초로 대형 창고들이 만들어진 시기가 바로 이 무렵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경제적 풍요를 구가하던 시절이었다는 뜻이지요. 어느 정도 풍요로웠는지를 짐작해볼 수 있는 텍스트가 『아모스』입니다. 한 보기로 『아모스』 3장 15절에 보면, 당시 사마리아의 부유층이 ‘겨울 별장’과 ‘여름 별장’을 거느리고 ‘상아로 꾸민 집’에서 호화로운 사치생활을 누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바로 이 시기, 곧 이스라엘 역사상 처음으로 대형 창고가 지어지고 국가의 부가 절정에 달한 그 풍요의 시기가 동시에 ‘가난한 사람’, ‘빈민’이라는 단어가 최초로 등장한 시기와 겹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열왕기상 22장 1절이 말하는 ‘외부의 전쟁이 없던’ 평온한 시기란 사실상 내부의 폭력이 심화된 불의한 시기였던 셈입니다.
그 증거가 한 장 앞에 나오는 ‘나봇의 포도원’ 사건입니다. 전쟁도 없었고, 그래서 겉보기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 같은 풍요롭고 평화로운 시절에 성서 기자는 실로 엄청난 일이 일어났다고 보도합니다. 사건의 전말은 이러합니다. 이스르엘 사람 나봇이라는 이에게 포도원이 있었는데, 그 위치가 하필이면 사마리아에 있는 아합 왕의 왕궁에서 가까웠답니다. 그 땅에 눈독을 들인 아합은 나봇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지요. “네 포도원이 내 왕궁 곁에 가까이 있으니 내게 주어 채소밭을 삼게 하라. 내가 그 대신에 그보다 더 아름다운 포도원을 네게 줄 것이요, 만일 네가 좋게 여기면 그 값을 돈으로 네게 주리라.”(왕상 21:2)
듣기로는 매우 합리적인 제안입니다. 요즘 같으면 국가가 국유지로 몰수하거나 징발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 여기고, 냉큼 거액에 넘기는 사람이 많을 테지요.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에게 땅은 그런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재산목록이나 투기의 대상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땅이 있다는 것은 이집트제국에서 노예살이하던 하비루들이 자유인이 되었다는 것, 그래서 땅이 있는 한 다시는 누군가의 노예로 전락하지 않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미했습니다. 그렇기에 누구도 땅을 더 가질 수 없었고, 또 남의 땅을 탐내서도 안 되었습니다.
나봇은 이러한 땅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제아무리 왕이라 해도 자유농민의 땅을 돈으로 매매하는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자 신앙이었습니다. 그래서 왕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 조상의 유산을 왕에게 주기를 여호와께서 금하실지로다.”(왕상 21:3) 지극히 옳은 말입니다. 그런데 아합은 “근심하고 답답하여 왕궁으로 돌아와 침상에 누워 얼굴을 돌리고 식사를 아니하”였다고 합니다.(왕상 21:4b) 속이 뒤틀린 게지요. 이에 이세벨이 계략을 꾸밉니다. 거짓 증언으로 나봇에게 이른바 ‘역모죄’와 ‘신성모독죄’를 뒤집어씌워 청부살인을 합니다. 그리고는 아합에게 이제 나봇이 죽었으니 마음대로 그의 포도원을 차지하시라고 권하지요. 아합은 의기양양 나봇의 포도원으로 향합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이는 야훼예언자 엘리야였습니다. 엘리야가 입을 엽니다. “네가 죽이고 또 빼앗았느냐? ……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피, 곧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왕상 21:19)
야훼의 분노는 무엇 때문입니까? 이제 나봇의 포도원 사건은 확대재생산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합니다. 왕에 의해 땅에 대한 금기가 봉인해제되었으니, 그 다음 수순은 왕족과 귀족을 비롯한 사회 기득권층이 너도나도 땅을 탐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모스는 당시 사회가 ‘미투리 한 켤레 값에’ 사람이 팔고 팔리는 사회라고 통탄합니다. 빚 때문에 속수무책 땅을 빼앗긴 사람들이 소작농으로, 노예로 전락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최고 황금기였다는 주전 8세기, 사마리아는 그렇게 속으로 망해가고 있었습니다. 양적으로는 부가 가장 팽창했다고 하나, 질적으로는 가난한 사람들만 늘어났습니다. 분배 정의는 온데간데없고, 빈익빈부익부 현상이 농후해졌습니다. 그러니까 나봇의 포도원 사건은 한 개인의 불행이나 비극이 아니었던 거지요. 온 나라가 멸망하게 된 최초의 단초를 제공한 사건이지요. 그래서 가만히 있으면 안 되었던 거지요. 엘리야로 하여금 소리쳐 외치라고 한 것은 ‘살 길’을 열어주시려는 뜻이었지요. 그러나 들어야 할 대상이 귀 기울여 듣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북이스라엘은 BC 722년 드디어 앗수르제국에 의해 멸망당하게 되지요. 나봇의 불행을 ‘나와 아무 상관도 없다’고 흘려버린 다수의 사람들과 제2, 제3의 나봇을 줄줄이 양산한 기득권층의 ‘침묵의 카르텔’이 빚은 자업자득입니다.
6·15 심성의 회복
오늘은 공교롭게도 6월 15일입니다. 이른바 6·15지요. 달력을 넘기다 보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역사적인 날짜들이 더러 있습니다. 적어도 한 달에 한 번꼴로 꼭 있는 것 같아요. 3·1, 4·19, 5·18, 7·29, 8·15 이런 식이지요. 그 중에서도 6월에는 우리 겨레사에 의미심장한 역사적인 날이 두 개나 들어 있습니다. 하나가 6·25고, 다른 하나가 6·15입니다.
저는 1960년대 후반에 태어났으니 6·25 전쟁을 직접 겪지는 않은 세대입니다. 그런데 가만 돌이켜보면, 6·25는 늘 제 곁에 있었습니다. 아주 어릴 때는 잘 몰랐어도, 초등학교 들어간 이후부터는 분명합니다. 우리나라 공교육은 저에게 6월을 ‘전쟁의 달’로 각인시키느라 바빴습니다. 6월 어간에는 어김없이 ‘6·25 전쟁’을 소재로 한 포스터나 표어대회가 열렸던 기억이 납니다. 이른바 ‘반공교육’을 철저히 받고 자랐습니다. 그러고 보니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로 시작되는 <6·25 노래>도 자동반사적으로 튀어나오네요. 교육의 힘은 실로 막강한 것 같습니다.
문화비평가 강준만 교수는 『한국인 코드』를 책에서 한국인을 이해하는 여러 문화 코드의 하나로 ‘6·25 심성’을 꼽습니다. 당장 내가 죽게 생겼는데, 남을 챙길 여유가 어디 있냐는 마음보지요. 박경리 선생님이 쓰신 『토지』에도 이런 말이 나오는 게 기억납니다. 인간에게는 두 가지 본능이 있다는 겁니다. 하나는 생존본능이고, 또 하나는 연민본능입니다. 그 중 무의식적으로 강한 건 물론 생존본능입니다. “생존본능으로 말하면 사실 모든 생명의 본능이나, 사람의 생존본능은 그 중에서도 생명치고는 더럽고 구걸하고…… 추악하고 치사하고 음탕하고 탐욕스럽고 사악하고 ……, 만물의 영장이라. 흥, 만물의 영장이라 죄없는 사람은 깔리고 악이 승리하는데 만물의 영장이라고? 영장이기는커녕 만물의 악령이다.” 그러나 때로 그보다 더 강한 게 연민본능이라는 거지요. 가령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지려다가 함께 죽는 경우나 기차가 달려오는 철길에서 뛰어노는 아이를 구하려고 뛰어들었다가 치어죽는 경우, 흔한 일은 아니지만 그건 생명에 대한 연민이 생존본능을 앞지른 보기라는 거지요.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쟁기를 만들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않는다”는 이사야의 평화 그림에 덧붙여 저는 이 민족의 숙제가 6·25 심성을 갈아엎어 6·15 심성으로 전환되는 일이라 믿습니다. 6·25 심성은 자기 안전과 국가 안보를 빌미로 이웃의 고통에 무감각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6·15 심성은 너의 고통이 곧 나의 고통이라고, 우리는 대자대비하신 하나님의 한 핏줄로 엮여 있다고 깨닫게 합니다.
저와 여러분의 ‘6월’이 평화로 수놓아졌으면 좋겠습니다. ‘6월’ 하면 6·25보다도 6·15가 먼저 떠올랐으면 좋겠습니다. 평화로 가는 길은 오직 정의를 통하는 길밖에 없다는, 그리고 정의를 이루는 일은 무엇보다도 ‘나만 아니면 그만’이라는 보신주의/생존본능에서 벗어나 ‘네가 아프니 나도 아프다’, 해서 ‘너의 고통에 상관 좀 하여야 하겠다’는 연민본능을 회복하는 길밖에 없다는 깨달음에 이르면 참으로 좋겠습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정의와 평화의 하나님,
당신은 부지런히 그 길을 닦으시는데
우리는 엉뚱하게 딴 길로만 갑니다.
우리 삶에 정의가 없고 평화가 없고 친절이 없고 연민이 없다는 것,
있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생존에의 집착과 맹목적인 경쟁심,
나의 안위와 직접 연관되지 않으면 철저한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냉정함뿐이라는 것,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을 떠난 실존의 표징입니다.
주님,
상하고 망가진 삶에 끊임없이 상관하고자 하시는 당신의 사랑법을
어느 때야 우리도 배울 수 있을까요?
우리가 지극한 사회적 고통과 재난에 연대할 때
우리 가운데 당신이 계시다는 믿음을 회복시켜 주십시오.
평화의 왕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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