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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롬7:21-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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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최현섭 형제 |
참고 : | http://www.saegilchurch.or.kr/sermon/421393 |
마음 내키는 대로
(로마서 7:21-24, 야고보서 3:2)
2014년 6월 22일 평화통일주일 예배
최현섭 형제
[여기에서 나는 법칙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곧 나는 선을 행하려고 하는데, 그러한 나에게 악이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내 지체에는 다른 법이 있어서 내 마음의 법과 맞서서 싸우며, 내 지체에 있는 죄의 법에 나를 포로로 만드는 것을 봅니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 로마서 7:21-24
[우리는 다 실수를 많이 저지릅니다. 누구든지,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은 온 몸을 다스릴 수 있는온전한 사람입니다.] - 야고보서 3:2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우리 공동체가 평화통일을 기원하는 예배로 드리는 날입니다. 그래서 말씀증거의 서두를 어떻게 꺼내야 하나 고민하다가, 격에 어울리지 않을 수 있다 싶지만, 먼저 6.25 노래를 한번 듣고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1절만 들어 보겠습니다.
· 6.25 노래(박두진 작사, 김동진 작곡)
1절: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맨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의분에 떤 날을.
후렴: 이제야 갚으리 그날의 원수를, 쫓기는 적의 무리 쫓고 또 쫓아,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 겨레
2절, 3절 가사 기억하는 분계신가요? 너무 오래되어 기억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습니다.
2절: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불의의 역도들을 멧도적 오랑캐를.
하늘의 힘을 빌어 모조리 쳐부수어, 흘려온 갚진 피의 원한을 풀으리.
3절: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정의는 이기는 것 이기고야 마는 것.
자유를 위하여서 싸우고 또 싸워, 다시는 이런 날이 오지 않게 하리.
어떻게 느껴지는가요? 조국의 원수를 맨주먹 붉은 피로 막아내고, 적의 무리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야겠다는 마음이 생기는가요? 혹 너무 선동적이라든가, 섬뜩하다는 생각이 드는 분도 계시지요?
60여년 전에는 어땠지요? 발을 굴러 땅을 치고 의분에 떨었나요?
초등학교 시절, 저는 그랬습니다. 이 노랫말 그대로 생각하고 마음을 다졌었습니다. 공산당에 대한 원한과 적개심에 사무쳤고, 군인이 되어 멧도적 오랑캐를 모조리 쳐부수어야겠다고 다짐하는 나날이었습니다.
제게는 그럴만한 개인적인 사유가 있습니다. 저의 아버지께서 서울이 회복 된 1950년 9월28일 밤에 공산당에 의해 학살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근처 산에 피신하고 계셨다가 수도 탈환 소식을 듣고 상황을 살피려 밤늦게 집에 오시다가 그만 보안서에 잡혀가 토굴 감방에 갇히시게 되었답니다. 그리고 그날 밤, 보안서원들은 철수를 하기 직전에 토굴 감방에 무차별 총격을 가하고 굴을 무너뜨렸다고 합니다. 아버지께서는 그렇게 유명을 달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면에서는 음력 8월 16일이 제삿날인 집이 30여 가구가 됩니다. 그런데 보안서에는 아버지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었다고 합니다. 공식적인 체포 기록도 없고, 죄목도 없이 그냥 총살을 당한 것입니다. 기록도, 이유도 없는 처형이고 학살이니 참 기가 막힐 노릇이 아닙니까?
이때부터 우리 집안에는 엄청난 시련과 고통이 시작되었습니다. 어머니는 갓 30대에 과부라는 한과 홀로 가계를 꾸리고 자식들을 키워야 하는 멍에를 떠안게 되었습니다. 형과 누나들도 가족의 생계와 막내 동생의 학업을 위해, 자신들의 학업까지 포기해야 하는 견디기 힘든 좌절과 고난을 겪어야 했습니다. 우리 집은 보통의 자작농 수준이었으니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소지주도 아니고 단지 학식만 좀 높았을 뿐이데, 왜 아버지께서 공산당의 표적이 되었고 학살까지 당해야 했는지 지금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 때, 저는 아무 것도 모르는 네 살 박이 철부지였습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든가, 우리 집안에 갑작스런 슬픔과 고난이 닥쳤다는 것도 알지 못했었습니다. 물론 공산당이 무엇인지도 몰랐고, 원수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도 거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제게 큰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공산당은 우리 가족과 나라의 철천지원수요, 쳐부수어야만 하는 불의의 도당이라는 생각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6.25 노래를 부를 때는 두 주먹 불끈 쥐고 불렀으며, 반공웅변대회에 나가서 책상을 치며 울분을 쏟아내기도 하였습니다. 몇 번 상을 타기도 하고, 시도 대회에 출전하기도 했었습니다.
당시의 학교 교육과 시대적 분위기는 제게 아버지께서 공산당에 학살당한 일이 무슨 벼슬이나 되는 것처럼 거들먹거리도록 만들었던 같습니다. 그리고 저는 어느덧 부모현제가 공산당에 부역을 했거나 월북한 집 아이들을 못살게 구는 데 앞장서는 악동이 되어갔습니다. 특히 같은 동네에 사는 같은 반 친구 하나를 집중적으로 괴롭혔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의 귀가 사실을 보안서에 신고를 하였고, 그날 밤으로 보안서원들과 함께 월북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 친구를 ‘빨갱이 아들’이라고 놀렸으며, 기회만 있으면 그의 머리를 쥐어박았고 발을 걸어 넘어뜨리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는 그렇게 해도 그냥 당하고만 있었습니다. 때리면 맞고 구박하면 울기만 하였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얼마나 안타깝고 불쌍한 광경입니까? 그런데 제게는 그런 마음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가축이나 곤충을 괴롭히다가도 불쌍한 생각이 드는 법인데, 오히려 그것을 즐겼고, ‘빨갱이 아들’이니 그렇게 당해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안 그랬을 것 같은가요? 아닙니다. 적어도 초등학교를 마치기까지는 그러했습니다.
이렇게 6.25 전쟁은 평온한 시골 마을의 한 가정을 한과 역경으로 내몰았습니다. 그리고 철부지 소년을 극렬한 반공소년으로 만들었으며, 어린 두 소년에게 참 슬프고 기구한 관계에 빠지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6.25 전쟁과 그 전후 과정을 보면, 이러한 한과 역경, 슬프고 기구한 관계는 아무 것도 아니다 할 정도로 그 피해와 희생이 엄청났습니다. 6.25 전쟁으로 인한 한국군 희생자는 60만 9천여 명이고 북한군은 총 80만 명 희생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유엔군은 총 54만 6천여 명, 중공군은 도합 97만 3천여 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고 합니다. 민간인 희생자도 남한과 북한 각각 100만 명 이상이었다고 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남한은 일반 공업 시설의 40%, 북한은 7,80%가 피해를 입었습니다. 아래 사진들은 전쟁의 절박한 순간, 처참한 학살과 처형의 현장, 고난의 피난길, 그리고 폐허로 변한 서울과 평양의 광경 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냥 통계 수치나 자료가 아닙니다. 나와 나의 친구 그리고 우리 이웃들과 그 부모와 형제들의 앗겨 나간 목숨이고 재산이며, 참기 어려운 상처와 고통 그 자체입니다. 거기에는 비 오듯 쏟아지는 총탄,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야 하는 전쟁터, 견디기 힘든 추위와 굶주림,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서 땅굴 속에 숨어 지내고, 천리만리 피난을 가야 했던 고난과 공포의 나날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한 적에 동조할 가능성이 있거나 실제 동조했던 사람을 산채로 땅속에 묻고 몰살을 시켰던 포악성, 위장한 적군일 거라면서 피난민에게 무차별 포격을 가했던 과오와 죄악도 숨어 있습니다. 또한 거기에는 이념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정의와 역사 발전이라는 말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을 악독한 자본가나 지독한 빨갱이로 몰아 처형하고 학살을 했던 무모함도 담겨 있습니다.
6.25 전쟁은 이렇게 참혹했고 처절했습니다. 시대적 광기라 해도 될 정도로 포악, 과오, 죄악, 무모함이 컸었습니다. 그만큼 우리 가족보다도 더 원통하고 억울한 사람도 많았을 것입니다. 물론 저와 그 친구의 슬프고 기구한 관계보다도 더 슬프고 기구한 사례 또한 수도 없을 것입니다.
제가 이러한 전쟁의 실상과 시대적 광기를 알아차리기 시작한 것은, 제대 후 복학을 한 뒤부터였습니다. 그 때부터 전쟁은 본말이 전도된 이념 대결과 강대국들의 패권 경쟁의 산물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전쟁은 필연적으로 가해자와 피해자를 양산하고, 참혹하고 억울한 피해와 슬픈 희생도 키운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용과 질에는 차이가 있겠지만, 그 친구와 그의 가족도 결국은 저와 우리 가족이나 마찬가지로 이념과 전쟁이 만든 슬픈 희생이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개인적인 원한과 시대적 상황에 갇혀, 친구를 괴롭히고 못살게 굴었던 지난날이 너무나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비록 철부지 시절의 일이지만, 그 친구에게 어떻게든 사과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시골에 가는 길에 그 친구 집에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입을 열어 사과를 하고 용서를 빌기가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술잔을 주고받으며 싱거운 이야기만 하다가 돌아왔습니다. 어쩌면 그 친구는 ‘얘가 갑자기 왜 이러는가?’ 하고 의아해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로서는 그렇게라도 해서 마음의 짐을 덜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그렇게 한 것도 한두 해 정도에 불과하였습니다. 따라서 어디 가서 이렇다 하고 이야기를 꺼낼 일도 못 됩니다.
그런데, 지난해 11월 한완상 형제님의 “한반도는 아프다” 북 토크 말미에, 이 별것도 아닌 이야기를 꺼내고 말았습니다. 그랬더니 정경일 예배위원장께서 내년에 “평화 통일예배”를 드릴 계획이니, 그 말을 좀 더해 달라고 부탁을 하였습니다. 별로 더 보탤 것이 없다고 버티다가, ‘하라고 하면 해야 한다.’는 우리 공동체의 철칙에 밀려, 제가 이 자리에 서게 되었고 어쩔 수 없이 그 이야기를 다시 꺼내게 되었습니다. 어쨌든 저는 그때부터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렸습니다. 말 한번 잘못 꺼냈다가 장장 8개월 동안을 끙끙 앓았으니, 아마도 그동안 제 적은 머리카락이 수백 개는 더 빠졌을 것이고, 흰 머리가 더 희어졌을 것입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저는 이런 물음을 계속 던졌습니다. 도대체 그렇게 끔직하고 괴로운 전쟁은 왜들 하는 것일까? 그렇게 참혹하고 처절한 전쟁을 온 몸으로 느꼈고, 엄청난 피해와 희생을 주고받았으면서도, 어째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여전히 전쟁을 부르짖고, 적의 일망타진의 꿈을 굳게 지키고 있는 것일까? 실제로 인터넷에서 보면, “전국계엄 전군비상, 대대숙정, 종북척결, 반국처단, 북진선격, 평양폭격으로분단사 끝장” 등과 같은 글을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이 모든 것을 극복하는 길은 상생과 평화, 그리고 교류와 협력 밖에 해법이 없어 보이는데, 그것을 경계하고 제압하려는 목소리들에 힘이 실리기도 하고, 남남 갈등으로까지 확산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질문도 해보았습니다.
이에 대한 대답을 찾다가, 제 마음에 꽂힌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의 중요성입니다. 즉, 전쟁이냐 평화냐 하는 것도 결국은 사람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고, 개인과 공동체의 행과 불행도 사람의 마음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철부지 시골 소년이 적개심에 불타는 반공소년이 되는 것도, 사람의 인격을 무시하고 친구를 괴롭혔던 어린 시절을 뒤 늦게라도 후회하고 부끄러워하는 것도 결국은 마음의 문제라는 것이었습니다.
마음이란, 모든 대상과 그 작용에 대해 느끼고 판단하며 대하는 방법을 선택하는 지적, 정서적 정신 작용 일체를 일컫는 말입니다. 따라서 마음에는 무엇인가에 대한 좋고 나쁨, 옳고 그름, 분노와 기쁨, 높고 낮음, 뛰어나고 모자람, 무시와 존중, 무책임과 책임 등 사람의 언행과 삶의 모든 단서와 준거 기준 그리고 제반 인상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정형화되고 습성화된 마음의 준거틀이 되고 그의 말과 행동을 이끌고 추동하는 동력으로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친구간의 만남이나 회의에서, 자기에게 말할 기회를 안주거나 제 의견이 관철되지 않았다고 화를 내는 사람을 만납니다. 토론도 거치고 표결까지 해서 결정되었는데도 자존심 상해하고 분해서 참지 못하는 사람도 봅니다.
그 역사의 질곡을 넘어서기 위해서 그렇게 많은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고 고초를 겪었건만, 아직도 유신과 군부 독재를 찬양하고 그리워하는 이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습니다. 그 무자비하고 끔찍했던 일제 식민지와 6.25 전쟁이 하나님의 은혜라 생각하고, 생각만 해도 눈물이 절로 나고 분노까지 생기게 하는 세월호 참사를 하나님께서 뜻하신 바가 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보다도 잘 알고 있으니, 하나님께서 불러서 과외를 받으려 할 것이라는 농담이 그냥 들리지 않잖습니까?
어쨌든 그러한 언행들과 삶은 모두 그의 마음이 이끈 것입니다. 덜 배우거나 모자라서가 아니라, 그렇게 느끼고 판단하며 대응하는 방법을 선택하도록 하는 정형화되고 습성화된 마음의 준거틀이 그렇게 작용을 한 것입니다. 정형화되고 습성화된 마음의 준거틀 말입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항상 자기 마음과 언행과 삶이 정상적이고 당연하게 여기며 존중받기를 바라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자신의 정체감이나 인격과도 동일시하기도 합니다. 자신의 마음과 언행과 삶을 부끄러워하거나 편협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그에 동조를 않는 사람들을 모자라거나 이상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자신의 마음과 언행과 삶을 부정적으로 말하거나 무슨 충고라도 하면, 화를 내거나 반격을 가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의 속성을 더 깊이 들여다보면, 마음은 그렇게 믿을만하고 당당할 게 못 됩니다. 자기는 당연하고 정상적이지만, 남이 보면 이상하고 비정상일 수 있으며, 자신에게는 자존심이고 정체성이지만, 남에게는 편견이고 독선이 될 수 있는 것이 마음입니다. 세상에게는 편견과 왜곡 나아가 참혹한 피해까지 안겨주는 단초가 되기도 합니다.
그 첫째 이유로, 마음은 내용과 질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주지하다시피, 마음은 사람의 수만큼 다양하고 천차만별입니다. 같은 것을 두고도 어떤 이는 너무나 아름답다 하고, 다른 이들은 조악하기 짝이 없다고 여깁니다. 같은 대통령의 대북 정책에 대해서도, 국가 민족의 난제를 푸는 영단이라 생각하는 이도 있지만, 민족 통일의 훼방이고 역사의 후퇴라고 인식하는 이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다양한 마음들은 자세히 보면, 고려하는 폭이 다르고 파고드는 깊이에도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즉 제 식구나 가까운 사람만의 건강과 행복을 고려하는 마음도 있고, 자기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먼 나라 사람, 대대손손 이어갈 생태계와 공동체의 건강과 행복까지 파고드는 마음도 있다는 것입니다. 한쪽만 바라보고, 짧고 좁은 소견에 갇힌 마음도 있고, 모든 측면을 고려하고 객관적이고 균형 있는 시각을 가진 마음도 있습니다. 어찌 이러한 마음들을 같은 마음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이보다 더 중요하게 보아야 할 마음의 속성이 또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에서는 천사성과 악마성이 끊임없이 경쟁을 벌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선과 악으로 이분화하거나 누군가를 천사나 악마로 분류하는 것은 위험하기도 하고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의 천사성과 악마성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좋고 그름, 옳고 나쁨, 정직과 거짓, 평등과 불평등, 정의와 불의, 평화와 전쟁, 그리고 하나님의 뜻과 인간적 죄라고 하는 상반된 두 행동 특성을 단순화하여 표현한 것이라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양극단의 행동 특성이 마음속에서 싸우고 있다는 것을 명시적으로 고백을 한 바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 안윤경 자매가 읽은 로마서 7장 21절부터 24절까지의 본문 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여기에서 나는 법칙을 하나 발견하였습니다. 곧 나는 선을 행하려고 하는데 그러한 나에게 악이 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내 지체에는 다른 법이 있어서 내 마음의 법과 맞서서 싸우며, 내 지체에 있는 죄의 법에 나를 포로로 만드는 것을 봅니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주겠습니까?”
마태복음 13장 15절부터 23절 말씀에 있는 베드로의 예는 아주 극적입니다.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복된 존재이고, 그 위에 교회를 세우겠으며, 하늘나라의 열쇠를 맡기겠다는 무한한 신뢰와 극찬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는 엄청난 불신과 호통을 받았습니다. 베드로라는 하나의 인격체가 천사성과 악마성이라는 완전히 상반된 특성을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다르게 드러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마음은 천사성과 악마성중 어느 것이 경쟁에서 이기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언행과 삶을 보이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혹 악마성이 마음을 차지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고유하고 존엄하게 여기고, 그걸 지적 받으면 불쾌하고 자존심 상해하며 반격도 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은 무조건 믿거나 당당해 할 것이 못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 우리가 결코 놓쳐서는 안 되는 마음의 속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은 전략적으로 이용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마음은 필요에 따라 속마음을 감추고 무릎을 꿇거나 눈물을 흘리게도 하며, 다른 사람의 약점과 마음의 상처를 교묘하게 이용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가운데 사람의 약점을 이용하여 제 잇속을 챙기는 마음을 가장 혐오합니다. 아시다시피, 사람가운데에는 기질적으로 분통을 잘 터트리고, 해괴한 논리에도 잘 속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한 6.25 경험 세대나 월남전 용사들 가운데에는 아직도 적에 대한 적개심과 전쟁의 공포에 시달리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기질과 마음의 상처를 편당화하여 권력을 강화하려는 모습들이 곳곳에서 포착되고 있지 않습니까? 선거철이면 등장하는 “우리가 남이가?” 라는 말이 그게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의 남남갈등도 그 편당화의 산물이 아니겠습니까?
편당화는 자기편이 하는 일은 무조건 찬성하고, 다른 편이 하는 일은 무조건 반대하게 만듭니다. 그리하여 마음의 질적 격차를 줄이지 못하게 하며, 천사성과 악마성을 구분하고 제어하지 못하게 가로막고, 자신의 위선과 사술을 깨닫지 못하게 방해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그토록 경계하고 지탄을 했던 위선과 사술이며, 겉은 아름답지만 그 안에는 죽은 뼈와 온갖 더러운 것이 가득한 회칠한 무덤일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편당화는, 박대통령의 표현을 빌리면, 켜켜이 쌓인 적폐라 아니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저는 학교 퇴임후 자주 오바마를 좋아한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오라는 대로’, ‘바람 부는 대로’, ‘마음 내키는 대로’ 살겠다는 의미로 말입니다. 오바마! 어떻습니까? 참 자유롭고 여유로운 삶이겠지요?
그런데, 지금까지의 분석과 이해로 보면, “마음 내키는 대로”는 억제되고 경계되어야 할 아주 위험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칫 나로 하여금 지극히 작고 좁은 소견이나 악마성에 마음을 내맡기고, 위선과 사술의 노예가 될 수 있으며, 무절제하고 무책임한 언행과 삶에 빠지게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대로”라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자주 “내 마음대로도 못하느냐?”, “내 마음대로 좀 해보자.”는 말을 듣습니다. 누군가 모처럼 무엇인가를 해보려 하고, 선거에 당선 된 분이 제 뜻을 펼쳐보려 하는데, 옆에서 자꾸 잔소리를 하고 이러쿵저러쿵 딴지를 걸면 얼마나 화가 나고 힘이 들겠습니까? 그러나 생각해보면 “마음대로”하는 것은 위험하기도 하지만 건방진 일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마음에 대한 과잉 신뢰이고, 마음의 속성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무지의 소치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마음의 한계를 극복하고 마음의 존엄성을 극대화할 수 있을까요? 그 대답은 생각보다 간단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마음이 한계가 있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되는 것입니다. 즉, 나의 마음은 완벽하지 않으며, 질적으로 낮을 수 있고, 착각도 할 수 있으며, 위선과 술수에도 빠질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철저하고 확실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그 단초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자존심과 존엄성은 자신의 한계를 끝까지 부여잡고 늘어지는 것이 아니잖습니까?
오늘의 본문 말씀인 야고보서 3장 2절에 따르면, 우리는 다 실수를 많이 저지른다고 합니다. 나는 빼고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잘 다스려야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나와 우리는 완벽하고 거룩하며 정의롭고 온후한데, 너와 너희들은 모자라고 불순하며 비천하고 불의하며 강팍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만의 극치입니다. 마음의 시력이 좋지 않은 것이고, 마음의 건강이 나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가 자신의 마음과 다른 사람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정확하게 보고 고칠 것은 고쳐서 마음 높이를 맞추어 가는 것이 마음의 시력입니다. 그리고 마음의 시력도 나쁘고 마음을 흔들어 혼란에 빠뜨리는 각종 바이러스를 이겨내지 못하는 것이 곧 마음의 질병인 것입니다.
참으로 슬프고 안타까운 세월호 참사 이후 국가 개조니 국정 쇄신이니 하는 말들이 무성합니다. 그러나 걱정이 많이 됩니다. 우리 모두의 마음의 시력과 마음의 건강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특히 높은 사람,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가진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 대한 냉혹한 성찰과 한계 자각이 부족해 보이니 마음이 무겁습니다. 자칫 호통과 책임 추궁만 난무하다가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이 끝나지 않을까 심히 염려됩니다. 물론 호통과 책임추궁은 국민의 감정을 시원하게 할 수 있고 권력과 인기에도 도움이 되긴 할 것입니다. 그러나 후손과 나라의 미래에 대한 국민의 염려를 충분하게 덜어주고, 국민 모두가 뿌듯하고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신나게 일상에 임할 수 있도록 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하지 않겠습니까?
“마음 내키는 대로”나 “내 마음대로”는 안 됩니다. 마음의 시력을 회복해야 하고 건강의 건강을 증진시켜야 합니다. 그래야 적으로 보는 눈이 사람으로 보는 눈으로 바뀌며, 승자 독식주의와 정복 쾌감 그리고 시늉과 핑계로부터 해방될 수 있습니다. 거기에서부터 협동심이 생기고 공동체에 활력이 증가하며 평화가 자라게 됩니다. 그것이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드는 기적도 가능케 할 것입니다.
그것은 높은 사람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따르미를 다짐하는 우리에게도 절실합니다. “마음 내키는 대로”나 “마음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에서 만족과 보람을 찾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마음의 시력을 되찾고 높이며, 마음의 건강을 증진하면서 만족과 보람을 키워나가야 합니다. 새길만이 아니라 온 세상과 미래의 정의와 평화와 사람을 위해 말입니다. 그것이 새길다움이고 긍지가 아니겠습니까?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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