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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창25:27-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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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조항목 목사 |
참고 : | 2011.5.22 주일 아이다호비전교회 http://idvc.org/708 |
성령의 열매 시리즈 11 절제의 열매
11 절제의 열매 - 주신 복을 소중히 지킬 줄 아는 성품
창세기 25:27-34
I. 질주하는 인생자동차의 브레이크
돼지들이 모여 인간들을 하나님께 고발했습니다. 인간들이 먹는 것을 절제하지 못하고 과식할 때 "돼지처럼 먹는다"고 하는데 실상 돼지들은 위에 7-80%가 차면 아무리 맛난 것이 있어도 더 먹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고소의 내용인즉 "돼지처럼 먹는다"는 말은 "미련한 인간처럼 먹는다"로 고쳐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돼지들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앞으로 여러분은 억척스럽게 먹는 사람을 보고 "돼지처럼 먹는다"고 해서는 안됩니다. "미련한 인간처럼 먹는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러고 보니 돼지들이 과식을 해서 배탈이 났다는 얘기를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먹는 것이든, 일하는 것이든, 말하는 것이든 절제하지 못하는 동물은 인간 밖에 없습니다. 술에 취하여 비틀거리는 소를 본 적도 없고 과로로 쓰러지는 개미를 본 적도 없습니다.
절제는 질주하는 자동차의 브레이크와도 같습니다. 인생의 과욕을 조절하여 인생이 안전하게 달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성품이 절제입니다. 여러분, 끝도 없이 달려가는 인생의 욕망을 조절해 주는 절제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II. 성령의 마지막 열매 - 절제
오늘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가운데 마지막 아홉 번째 열매 - 절제를 배우는 시간입니다.
절제란 헬라어로 "엥크라테이아"라고 하는데 우리말 모든 성경은 이것을 "절제"라고 번역했습니다. 영어로는 self-control(NIV) 혹은 temperance(KJV)라고 합니다. "자기 스스로를 알맞게 잘 조절한다"라는 뜻입니다.
왜 절제의 열매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에 맨 마지막에 등장하고 있을까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가운데 제일 작은 열매이기 때문에, 혹은 다른 열매에 비해 그 비중이 무겁지 않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다른 여덟 가지 열매는 신구약 성경에 자주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절제는 복음서에 한 번도 나타나지 않고 있으며 구약 성경에서도 아주 드물게 나타납니다.
그렇다고 해서 절제의 열매가 성령의 열매 가운데 덜 중요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절제의 열매가 마지막에 언급된 것은 절제야말로 다른 열매를 완성시키는 열매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홉 가지 열매의 매듭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절제는 다른 열매들을 담는 바구니와 같습니다. 다른 열매가 꽃이라면 절제는 그 꽃들을 받치고 있는 받침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성령의 열매가 맺혀도 담을 그릇이 있어야 합니다. 절제가 없다면 모든 열매가 쏟아 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자녀를 사랑하는 것도 절제가 없다면 아이를 망치고 말 것입니다.
·절제가 없는 기쁨은 너무 가볍습니다.
·절제가 없는 화평은 태만이 될 것입니다.
·절제없는 인내는 무감각 인생이 되게 합니다.
·절제없는 자비나 양선은 의존적 거지 근성을 만들 것입니다.
·절제가 없는 충성은 과로를 가져올 것입니다.
·절제가 없는 온유는 부드러움이 아니라 유약한 인간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절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을 잘 지키는 지혜입니다. 절제는 이미 우리에게 부어주신 열매들을 소중히 간직하는 성품입니다. 그래서 절제는 주신 복을 소중히 지킬 줄 아는 성품 입니다.
III. 인류 최초의 계명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이 살 수 있는 가장 좋은 환경 에덴동산을 주셨습니다. 에덴 동산에는 모든 좋은 것이 다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동산의 복을 지키는 한 가지 계명을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절제의 계명"입니다.
"여기 있는 모든 좋은 것은 다 먹으라. 그러나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는 먹지 말라" 창세기에 나타난 최초의 행복원칙, 에덴의 계명은 절제의 계명이었습니다. 절제는 에덴의 행복을 지키는 유일한 계명이었습니다.
인간에게 먹고 싶은 본능을 주셔서 인간을 행복하게 하셨지만 절제를 통하여 피조물의 본분을 지키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인간은 에덴의 행복을 지키는 절제의 계명에 실패하고 만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행복을 지킬 자격이 있느냐 하는 절제의 시험을 치루며 살아야 합니다. 사탄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우리의 행복을 빼앗아가려 합니다. 반면 성령님은 절제의 열매를 부어 주시므로 행복을 지키는 시험에서 승리하도록 도우십니다. 고전 9:25에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한다고했습니다.
예수님도 절제의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은 40일 금식하신 후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마4:4)하셨습니다. 사탄은 인간을 본능에 따라 살도록 유혹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을 따라 이 모든 유혹을 이기셨습니다. (육신의 정욕)
또 예수님을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 많은 사람들이 보는 데서 뛰어 내리라 그러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여 너를 받들어 돌에 부딪히지 않도록 할 것이라"고 유혹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주 너희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마4:7)하셨습니다. 사탄은 인간의 본능에 따라 하나님을 이용하도록 유혹합니다. 인기를 탐하는 영웅이 되라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웅이 되는 유혹을 절제하셨습니다. (이생의 자랑)
또 마귀가 예수님을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천하만국의 영광을 보여주며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유혹합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세상적인 안일과 영화를 사모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적을 달성하고 살라고 유혹합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승리합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주 너희 하나님을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마4:10) 하였습니다. (안목의 정욕)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간의 본능적 유혹을 절제합니다. 절제는 하나님 말씀으로 자신을 이기는 승리의 길입니다. 최초의 사람 아담은 이 본능적 유혹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결국은 본능의 노예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먹을 수 있는 본능은 주셨으나 선악과는 먹지 말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낼 수 있는 본능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죄는 짓지 말라 하셨습니다(엡4:26). 뭐든지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도적질은 안 됩니다. 말할 수는 있지만 더러운 말은 안됩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구별하는 지혜가 절제입니다.
IV. 주신 복을 소중히 지킬 줄 모르는 사람
오늘 창세기 본문을 살펴보십시다. 이삭이 40에 결혼하여 20년 동안 아이가 없다가 나이 60에 쌍둥이 아들을 얻습니다. 먼저 나온 아들은 얼굴이 붉고 털이 많아 "붉다"는 뜻으로 에서라 불렀고 나중에 나온 아들은 형의 발뒷꿈치를 붙들고 나와 "야곱"이라 이름했습니다. 자라면서 형 에서는 사냥꾼이 되었고 야곱은 집안을 돕는 살림꾼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에서는 사냥터에서 지친 몸으로 집에 들어옵니다. 마침 야곱이 팥죽을 쑤고 있었습니다. 배가 너무 고파 자신에게 먼저 그 팥죽 한 그릇을 달라고 합니다. 이때 야곱은 늘 마음 속에 품고 있던 비장의 카드를 끄집어냅니다. 팥죽 한 그릇 줄테니 장자의 명분을 팔라고 합니다. 눈앞에 팥죽 한 그릇과 미래의 약속인 장자의 명분이라는 두 카드가 던져졌을 때 에서는 주저하지 않고 먹는 쪽을 선택합니다. (32절)"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식욕이라는 욕망 앞에 절제를 배우지 못한 에서 - 그는 주어진 엄청난 축복을 상실하고 맙니다. (34절)"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이것이 에서에 대한 성경의 평가입니다. 이 한 번의 사건으로 에서는 영원한 하나님의 약속에서 제외되고 맙니다.
이것이 절제의 열매를 가진 사람과 가지지 못한 사람의 갈림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겐 누구에게나 엄청난 축복들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축복들은 가만히 기다리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축복의 그릇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그래서 절제는 주어진 복을 지키는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먹을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먹을 수 없는 한계도 있습니다. 이것을 지키는 것이 절제입니다.
·우리는 누릴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가치 있고 소중한 것을 위해 절제를 할 수 있어야 복을 지킬 수가 있습니다.
·우리 인생 앞에는 언제나 두 장의 카드가 던져집니다. 미래의 약속과 현재의 욕망이라는 카드입니다. 여기서 지금 내가 할 수 있고 먹을 수 있고 가질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있지만 그것들을 누르고 미래의 약속을 선택하는 것이 절제입니다.
에서는 도시에서 소문난 영웅이었을 것입니다. 남성다운 골격과 근육질, 사냥한 짐승을 어깨에 걸머지고 위풍당당하게 마을로 들어오는 온 몸에 털이 난 멋쟁이, 그리고 그 고기로 마을 친구들을 모아 파티를 벌이며 인심을 쓰는 호남아, 얼마나 멋이 있어 보입니까? 그러나 현실주의 자, 향락주의 자 에서에겐 영적인 것, 미래적인 것, 신앙적인 가치는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이 되지 못했습니다. 현실을 얻기 위해 신앙을 팔고 미래를 팔아 버릴 수 있는 사람이 에서입니다. 이것이 현대인의 비극입니다. 미래의 축복을 지키는 성품이 모자라고 절제의 훈련이 되어 있지 않은 현대인의 비극이 에서의 비극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히12:16-17)
에서에게 주어졌던 장자권이라는 게 무엇이었습니까?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장자가 갖는 특권이 있습니다. 장자는 아비의 뒤를 이어 한 가정의 우두머리가 되어 집안의 대소사를 처리할 수 있는 통솔권이 있습니다. 부모 유산을 다른 아들보다 두 배나 더 받을 수 있는 자격(신21:15-17)이 있습니다. 장자는 한 가정의 제사장 직분을 수행함과 동시에 언약에 있어서 영적 축복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가문의 복을 이어갈 권세, 유산권 그리고 제사권이 있었습니다.
가문을 잇는 사람이 장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보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그런데 에서가 들어갈 자리에 야곱이 들어갔습니다. 에서는 먹고 사는 문제가 더 중요하지 예수 그리스도는 필요치 않다는 망령된 생각을 한 것입니다.
에서가 이렇게 하나님의 축복을 소홀하게 생각한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에게는 미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과 칭찬을 받는 것에 만족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미래의 축복을 믿지 않았습니다. 지금 당장 배가 고픈데 장자권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지금 당장 죽게 생겼는데 미래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아무 미련 없이 하나님의 축복을 차 버리고 만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는 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겐 반드시 보장된 미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도 오늘 모든 힘을 탕진하고, 오늘 모든 돈을 다 써 버리고, 삶의 자원을 다 허비하고, 오늘 모든 것을 다 즐겨 버리는 사람은 내일 하나님 앞에서 얻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가만히 살펴보면 에서가 얼마나 순간적인 것에 집착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당장 달라고 합니다. 원문에 보면 '먼저'라는 말이 두 번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천천히 기다렸다가 아버지 먼저 드리고 온 집안 식구가 둘러앉아 함께 먹어도 됩니다. 식구라고 해야 많기나 합니까? 그런데 참지 못하고 배고프니 당장 내놓으라고 합니다.
에서는 스스로 현재를 위기라고 간주하고 있습니다. 본문 32절에 보면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말합니다. 그가 정말로 죽게 되었습니까? 배고픈 것으로는 쉽게 죽지 않습니다. 좀 더 있다가 먹어도 됩니다. 내가 지금 당한 사건을 과장하는 것, 스스로 위기를 만드는 것 - 이것이 절제를 모르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하나의 소원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죽겠노라 합니다. 절제하지 못하고 인내하지 못합니다.
그러고도 창세기 27장 36절이나 41절의 말씀을 보면 모든 책임을 야곱에게 미룹니다. 야곱이 간사하고 나쁘다고 증오하며 죽이겠노라고 합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자입니까? 나한테 주어진 축복을 간직하지 못하면 축복은 나와 무관해 집니다. 사기를 당하고 빼앗길 수밖에 없습니다. 절제는 이미 주어진 축복을 간직하는 성품입니다. 절제의 그릇을 순간순간 찢지 마세요. 복을 담을 수가 없습니다. 축복의 그릇을 찢는 자에겐 미래가 없습니다.
V. 복 담은 절제의 그릇을 찢는 칼
절제가 복을 담는 그릇이라면 절제의 그릇을 찢는 칼이 있습니다. 사탄은 오늘도 그 칼을 들고 절제의 그릇을 찢으며 덤벼듭니다. 그 칼이 무엇일까요?
첫째는 생각이라는 칼입니다.
마귀는 사람의 생각을 통하여 역사합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요한13:2)
가롯 유다는 마귀가 넣어 주는 생각을 단절하지 못했습니다. 잘못된 생각을 절제하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 생각에 이끌려 예수님을 팔게 됩니다.
두 번째 마귀는 감정과 욕망이라는 칼로 절제의 그릇을 찢습니다.
감정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감정 지수가 풍부할수록 인간은 행복할 수가 있고 성공적인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감정이 그만큼 소중하기에 절제된 감정과 절제된 감정 표현이 중요한 것입니다.
야고보는 "성내기를 더디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 의의를 이루지 못한다"고 했습니다(약1:20)
감정이 끓는 물처럼 밖으로 넘치면 욕심이 되고 욕망이 되는 것입니다. 감정이 절제되지 못하여 욕망이 되면 행복의 그릇을 찢게 됩니다. 때문에 욕심은 수시로 잘라 주어야 할 손톱과 같은 것입니다.
이런 시가 있습니다.
손톱이 길면 때가 끼듯이 욕심이 자라나 때가 끼네.
손톱을 깎고 나면 개운하듯이 욕심을 잘라내니 개운하네.
한동안 잊고 지내다 보면 어느새 자라있는 손톱
한동안 잊고 지내다 보면 어느새 또 자라있는 욕심
수시로 들여다보고 잘라야겠네
그렇습니다. 우리가 욕망을 절제해야 합니다.
셋째 우리의 말과 일상적인 삶을 절제하지 않으면 행복의 그릇이 찢어집니다.
한 젊은이가 수사학을 배우기 위해 소크라테스를 찾아갔습니다. 그는 선생에게 자신을 소개하는 자리에서 너무나 장황하게 이야기를 늘어놓았습니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이 젊은이에게 두 배의 수업료를 요구했습니다. "선생님, 왜 저에게만 그렇게 많은 수업료를 내라고 하십니까?" "나는 자네에게 두 가지 학문을 가르쳐야 하기 때문일세. 그 하나는 하고 싶은 말을 어떻게 자제하느냐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어떻게 말을 하느냐 하는 것일세"라고 했습니다.
야고보서 3:6에서 "혀는 불이요 이것은 생의 바퀴를 불사른다"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3:10에서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라"고 했습니다.
하고 싶은 말 다하고 중요하지 않은 말을 많이 하다보면 자신의 인격이 찢어집니다. 더구나 남에게 아픔을 주고 상처를 내는 말은 철저히 절제되어야 합니다.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책이 있습니다. 상처는 좋은 말로도 건드리지 말라는 것이지요.
이에 더하여 성령의 사람은 물질 사용도 절제해야 합니다. 사치는 죄악입니다. 사치를 자랑하는 것은 푼수입니다. 카드 사용도 절제해야 합니다. 나아가 일하는 것도 절제해야 합니다. 휴식도 절제해야 합니다. 만사가 적절하고 합당해야 합니다.
VI. 절제 훈련
어떻게 우리가 절제의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요? 절제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절제의 계명에 실패하여 망가뜨린 에덴의 행복을 회복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도 절제의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승리하셨습니다.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성경에 보면 금식하시기 전에 세례를 받으실 때 이미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그리고 시험받으실 때 성령이 그분을 인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에 이끌리어 승리하셨다면 하물며 우리야 어떠하겠습니까? 성령님이 도와 주셔야 합니다. 그래서 절제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이제 성령님이 임하셨으면 이미 내 안에 절제의 권세가 있는 것입니다. 절제의 씨가 뿌려진 것입니다. 그대로 살면 됩니다. 그것이 절제의 훈련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전서 4:7에서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9:25에서는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라고 했습니다.
제네바 개혁 때 칼뱅의 목회방침은 절제를 가르치는 일이었습니다.. 60세 이상의 남자와 30세 이하의 여자가 결혼하면 간음으로 취급했습니다. 또 40세 이상의 여성이 25세 이하의 남성과 결혼하는 것도 모두 간음으로 규정했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귀부인이라고 해도 귀금속이나 보석을 소유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비단옷을 입지 못하게 했으며 결혼 반지 이외에는 반지를 끼지 못하게 했습니다. 머리의 모양과 옷, 그리고 음식의 수까지 제한했습니다. 그리고 교인들은 부자요, 고관대작이라 할지라도 죽은 후에 무덤을 치장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신실한 신앙생활을 위하여 절제를 강조했던 것입니다. 지금 그대로 따를 수는 없겠지만 절제의 정신만은 배워야 합니다.
일제 강점기 때 한국민을 정신적으로까지 완전 식민지화하기 위해 큰 기차역마다 공창을 만들고 술과 담배 심지어 마약을 퍼뜨렸습니다. 이때 한국 교회는 "조선 기독교 여자 절제회"등을 통해 금주, 금연 운동, 공창 폐지운동, 마약 퇴치운동을 펼쳤습니다. 이 절제운동이 한국교회 금주, 금연 전통을 뿌리내리는 계기를 이룬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절제의 열매는 한 개인의 복을 담는 그릇이 될 뿐 아니라 기독교 공동체 나아가 민족 공동체의 복을 담고 그 복을 지키는 능력이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당신에게 많은 복을 주셨습니다. 미래에 더 많은 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당신이 지금 누리는 많은 권세가 있습니다. 내일은 더 큰 권세와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 복과 권능을 지키는 그릇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절제입니다. 무엇보다 주신 복을 소중히 지킬 줄 아는 성품 절제가 지금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합니다. 모든 일에 절제하심으로 성령의 열매를 풍성하게 담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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