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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7:13-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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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부겸 목사 |
참고 : | 수도원교회 http://blog.naver.com/malsoom/142433044 |
2011년 11월 6일 주일설교
성경말씀 : 마태복음 7장 13절~14절
설교제목 : 좁은 문의 길
【"좁은 문으로 들어가거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그 길이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너무나도 좁고, 그 길이 험해서, 그 곳을 찾아오는 사람이 별로 없다."(마태 7:13~14)】
<니체의 이야기>
요즘 짬짬이 시간을 내서 니체의 전집을 읽고 있습니다. 최근 읽은 책은 니체의 『안티크리스트』(책세상)인데 거기 이런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진짜 역사에 대해 말해보겠다. - ‘그리스도교’라는 말자체가 벌써 오해이며 -, 근본적으로 오직 한 사람의 그리스도교인이 존재했었고, 그는 십자가에서 죽었다. ‘복음’이 십자가에서 죽어버렸다. 그 순간부터 ‘복음’이라고 불리는 것은 이미 그 유일한 그리스도교인이 체험했던 것과는 정반대였다. ‘나쁜 소식’, 즉 화음(禍音)이었다. ‘신앙’에서 말하자면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대한 믿음에서 그리스도교인의 표지를 찾는 일은 터무니 없을 정도로 잘못된 것이다 : 오로지 그리스도교적 실천만이, 즉 십자가에서 죽었던 그가 살았던 것처럼 사는 것만이 그리스도교적이다.”
정말 빛나는 어록입니다. 그 한마디 한마디를 소중하게 곱씹게 됩니다. 예수는 그 스스로 좁은 길을 힘겹게 걷다가 그 좁은 길에서 좁게 죽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따른다는 이들이 - 12제자와 특히 바울이 - 좁은 길을 넓은 길로 뒤바꿔버렸습니다. 그리고 2000년대를 살아가는 요즘의 교회란, 아예 길자체가 없습니다. 문을 하도 넓게 벌려놓아서, 길을 너무 넓게 만들다보니, 아예 길 자체가 없이 이도 저도 다 길이 되는 터무니 없는 세상이 된 것이지요. 즉 요즘 현대교회에는 아예 구원의 길 자체가 없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게 니체가 밝혀낸 빛나는 예언의 메시지입니다.
<전도의 무의미성>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는 예수의 말씀을 실행하려는 ‘교회주의자들’ 덕분에 지구촌 곳곳에 ‘예수’라는 이름은 전파되었지만, 그 현장들에서 예수의 정신은 아예 없는 기이한 현상, 이걸 니체가 고발하고 있습니다.
사실 말이 나왔으니 한 마디 하겠는데,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는 말씀을 예수께서 진짜 하신 것인지 의문이 갑니다. 만약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셨다면, 그것은 실언(失言)일 겁니다. 왜냐하면 진리의 사람은 그런 터무니 없는 발언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땅끝까지 …” 이야기의 허구성을 두 가지 고발하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땅끝’이라는 말의 발상이 문제입니다. 세상에 땅끝이 어디 있습니까? ‘땅끝’이라는 말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땅의 발원지’, 즉 땅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온 말입니다. 그것은 마치 중국 사람들이 그들이 살고 있는 땅을 중원(中原)이라고 하고, 그 근방의 땅을 변방(邊方)이라고 하는 이치와 같은 것입니다. 세상에 중원도 없고 변방도 없습니다. 그냥 다 땅일 뿐입니다. 평등하게. 둘째, 복음은 전파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되는 것입니다. 니체 어록의 일부를 다시 한번 명상합시다. “‘신앙’에서 말하자면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대한 믿음에서 그리스도교인의 표지를 찾는 일은 터무니 없을 정도로 잘못된 것이다 : 오로지 그리스도교적 실천만이, 즉 십자가에서 죽었던 그가 살았던 것처럼 사는 것만이 그리스도교적이다.”(니체). 그렇습니다. 예수를 믿으므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으면 천당가는 게 아니지요. 예수를 믿고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 받는 게 아닙니다. 다 터무니 없는 이야기지요. 우리에게는 오직 하나, “다만 예수처럼 사는 삶”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할 것이 아니라, 그대가 서 있는 삶의 자리에서 예수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구원의 좁은 길입니다.
<설교의 결론>
제가 그 책을 읽어보지는 않았습니다만, 제목은 많이 들어본 책이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입니다. 그 책에서 주인공 여자 아이 ‘알리사’가 이렇게 말했다는군요. "주여, 당신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길은 좁은 길입니다. 둘이서 나란히 걸어가기에는 너무도 좁은 길입니다." 그래요. 맞습니다.
예수의 정신은 좁은 문에 있습니다. 좁디좁은 길, 너무 좁아서 둘이 나란히 걸을 수도 없는 길. 둘이서 혹은 셋이서 아니면 여럿이서 손잡고 낄낄 거리면서 왁자지껄하게 걸으면 좋으련만,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이란 홀로 겨우 통과할 수 있는 좁고 또 좁은 길입니다. 고독한 것이죠. 외로운 길입니다. 무서운 길이고, 비통한 길입니다. 그 좁은 문의 길을 예수를 생각하면서 걷고 또 걷는다면, 반드시 - 가까스로 구원의 빛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니체가 일깨워준 빛나는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이제 설교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말씀의 제목을 ‘좁은 문의 길’이라고 잡아보았습니다. 오늘 이 설교말씀의 제목을 잘 묵상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축도
이제는 진리의 세계로 진입한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와 우리 생명의 근원 되시는 하느님의 신비로운 사랑과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아름다운 곳으로 인도해 주시는 성령님의 은총이 우리 수도교회 교우들 머리 위에 영원토록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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