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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10: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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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부겸 목사 |
참고 : | 수도원교회 http://blog.naver.com/malsoom/147129698 |
2012년 1월 1일 주일설교
성경말씀 : 마태복음 10장 7절~8절
설교제목 : 하느님의 나라
【그대들은 다니면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여라. 앓는 사람을 고쳐 주며, 죽은 사람을 살리며, 한센병 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내쫓아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7~8)】
<성서를 해석하기 전에>
우리 기독교인들이 흔히 하는 말 중에 ‘성경 대로 살기’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성경말씀에 기록되어 있는 본뜻에 맞게 살아가자는 취지의 이야기입니다. 물론 그 이야기의 의도는 충분히 이해는 하지만, 저는 그런 발상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고자 합니다. 그러니까 ‘성경 대로 살기’라는 말은 인생과 역사에 있어서 어떤 표준(cannon)이 있는데, 그 표준이 성경이라는 이야기이고, 우리가 그 표준대로 살면 된다는 발상입니다. 글쎄요. 저는 생각을 좀 달리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어떤 표준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아주 중요하게 참고할만한 이야기(hint)만 있을 뿐입니다. 성경은 어떤 표준을 제시해주는 책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아주 소중하게 참고해야하는 초점들(point)이 있는 것이지요.
조선시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 당시 우리 양반들은 중국의 성리학을 무슨 신주(神主)단지처럼 모셨습니다. 즉 단 한 구절이라도 틀리게 해석하거나 다르게 이해하면 큰 일나는 것처럼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 간혹 중국 성리학 전통과 다르게 해석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이단으로 처단했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이 한심한 전통에 반기를 들고 있어난 이들이 바로 ‘실학자들’이었습니다. 중국의 성리학을 우리네 실제적 삶에 있어서 유용하게 써먹으면 될 것이지, 뭐 자구(字句) 하나하나 따져가면서 맞느니 틀리느니 되지도 않는 논쟁을 일삼아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다시 성경 이야기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성경은 어떤 표준을 제시해 주는 책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방향성을 제시해 주는 책일 뿐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하나’를 제시해 주는 책이고 그 나머지 ‘아홉’은 우리가 직접 그려 넣어야 하는 책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이 무가치하거나 덜 위대하거나 그런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가 없다면 나머지 ‘아홉’을 그려내기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이런 전제(前提) 속에서 제 이야기를 시작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 이야기>
이제 오늘 성경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대들은 다니면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여라. 앓는 사람을 고쳐 주며, 죽은 사람을 살리며, 한센병 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내쫓아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7~8)】
오늘 성경은 쉽게 말해서 하느님의 나라를 추구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 어떤 일깨움으로 주시는 말씀입니다. 여기 로마의 식민지배를 받으면서 하루하루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용기를 잃은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로마 군인들의 칼과 창이 무서워서 그럴 수도 있고,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무지(無知)해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예수님 당시에 다수의 민중들은 ‘자유와 평등, 평화와 사랑’이 이 땅에 실현되는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서 꿈을 버린 채 살고 있었습니다. 불쌍한 삶이죠. 비참한 것입니다. 슬픈 일이고 비통한 삶입니다. 그래서는 안 되지요.
그렇게 용기를 잃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해서 커다란 일깨움으로 주신 말씀이 오늘 성경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의 불쌍한 민중들이여! 일어서라. 용기를 내라. 그대가 발을 딛고 선 땅을 박차라. 분노의 칼을 들로 있어서라. 나가자 싸우자 이기자.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봐라. 하느님의 기적이 일어나고 있다. 하느님의 능력으로 병자가 치유되고 있고, 죽은 사람까지 살아나고 있다. 불쌍한 민중들이여. 일어서라. 용기를 내라. 승리가 가까이 와 있다. 그대들이 하늘로부터 이 놀라운 능력들을 공짜로 얻었으니, 더불어 살아가는 그대의 이웃들에게 공짜로 하늘의 능력을 나눠주라. 그러면 된다. 그대들은 할 수 있다.】뭐 이런 내용입니다.
그래요. 우리는 용기를 내야합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또 앞으로도 영원히 우리의 눈 앞을 가로 막고 있는 저 ‘비(非) 진리의 장막들’을 거둬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용기를 내야하고, 지혜를 발휘해야 합니다.
<하나 그리고 아홉>
그러나 이런 권면은 예수께서 제시해 주신 메시지의 ‘하나’일 뿐입니다. 나머지 아홉은 우리들의 몫입니다. 제가 이해하는 바, 예수께서는 완전한 숫자인 ‘열(10)의 메시지’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아니 누구도 그런 ‘열(10)의 메시지’를 줄 수 없습니다. 어떤 맥락에서는 그런 ‘열(10)의 메시지’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삶의 방정식이란 수천 가지 수만 지로 풀어낼 수 있는 ‘복수 정답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차원의 이야기>
조금 전에는 ‘하느님의 나라를 추구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그렇다면 하느님의 나라를 열렬히 추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어떨까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바대로, 예수님 당시에 ‘하느님의 나라’를 열렬히 추구하는 집단이 있었습니다. 소위 열심당이라는 명칭을 얻은 사람들이죠. 일부 학자들은 예수를 팔아먹은 가룟유다가 바로 그 혁명가 집단의 일원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혁명가 집단과 길을 달리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웠다”는 선동의 메시지를 전했던 예수는 왜 정작 혁명가 집단과는 길을 달리한 채, 그만의 길을 갔을까요? 어쩌면 유다의 배신은 처음에 혁명에의 길을 주창하던 예수가 나중에 혁명에의 길에서 이탈한 것에 대한 보복이 아니었을까요? 제 나름의 상상입니다. 어찌됐건 분명 예수는 왜 혁명에의 길에서 이탈한 채 ‘그만의 길’로 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또 그가 가려고 했던 ‘그만의 길’이란 무엇이었을까요?
<도스토예프스키 이야기>
혁명가 집단과 궤를 달리한 예수의 족적에 대해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만, 최근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그 이유를 어렴풋이나마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누구보다도 러시아 민중을 사랑했던 도스토예프스키는 정작 혁명에는 반대했습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하느님의 나라’ 건설을 위해 일어난 혁명의 피바람이 거꾸로 ‘하느님의 나라’를 파괴하는 괴물이 될 것임을 예측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작품 ‘까마라조프가의 형제들’에 등장하는 인물 중 ‘이반과 스메르자꼬프’가 있습니다. 여기서 이반은 혁명에의 이론가이며, 그 자양분을 받으면서 자란 이반의 제자가 스메르자꼬프였습니다. 그런데 훗날 스메르자꼬프는 인간의 마지막 양심마저 내팽긴 채 그들의 아버지를 천연덕스럽게 살해해버립니다. 물론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었지요. 불세출의 혁명 이론가 레닌이 이반쯤 된다면 그의 뒤를 이은 철권통치의 독재자 스탈린이 스메르자꼬프쯤 되겠지요. 그것은 단순히 한 인물에 대한 평가라기보다는 그 인물을 만들어낸 그 시대의 광기에 대한 평론이 되겠지요.
이에 대한 예수의 유명한 어록이 있지요. 【그 때에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칼을 쓰는 사람은 모두 칼로 망한다.(마태 26:52)】 이것이 제가 생각해본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두 번째 생각입니다.
<하느님의 나라, 세 번째 이야기>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서 성경을 읽으면서 제가 생각해본 세 번째 생각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나라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생각입니다. 조금 전 첫 부분에 말씀드린 이스라엘 백성들 이야기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죠. 용기가 없어서, 혹은 잘 몰라서 하느님의 나라를 추구하지 못하는 사람들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런 부류의 사람들과는 달리 하느님의 나라 이야기가 뭔지 정확하게 알고 있으면서도 그 하느님의 나라를 추구 하지 않는 - 추구하지 못하는 것이 아님 -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른바 소위 현실천국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분들은 소위 “우리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이 현실이 천국임을 알게 될 것”이라는 메시지를 주시는 분들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런 분들의 메시지에 반대합니다. 무슨 대단한 도사(道士)인양 처신하는 분들을 보면, 조금 화가 납니다. 왜냐하면 이분들은 삶의 처절한 진실을 왜곡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삶은 진흙탕이며 처절한 전쟁터인데, 이분들은 그 비참한 삶의 현실을 아름답게 왜곡(?)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 아무리 삶을 아름답게 왜곡한다한들, 비참한 삶은 비참한 삶으로 남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예수의 어록은 이것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가 회칠한 무덤과 같기 때문이다. 그것은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지만,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이 가득하다.(마태 23:27).】
<설교를 마치면서>
저는 오늘 설교말씀의 제목을 ‘하느님의 나라’라고 잡았습니다. 이 설교말씀의 제목을 잘 묵상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축도
하늘의 님이여. 땅의 예수여. 바람의 성령이여!
이제는 우리 생명의 근원 되시는 하느님의 신비로운 사랑과
이 땅에서 진리의 세계로 진입한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와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아름다운 곳으로 인도해 주시는 성령님의 은총이
우리 수도교회 교우들 머리 위에 영원토록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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