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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14:22-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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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부겸 목사 |
참고 : | 수도원교회 |
2012년 5월 20일 주일설교
성경말씀 : 마태복음 14장 22절~33절
설교제목 : “작지도 않고, 크지도 않는 ‘믿음’”
【예수께서는 곧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에 태워, 자기보다 먼저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그 동안에 무리를 헤쳐 보내셨다. 무리를 헤쳐 보내신 뒤에, 예수께서는 따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올라가셨다. 날이 이미 저물었을 때에, 예수께서는 홀로 거기에 계셨다. 제자들이 탄 배는, 그 사이에 이미 육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풍랑에 몹시 시달리고 있었다. 바람이 거슬러서 불어왔기 때문이다. 이른 새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로 가셨다. 제자들이,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서 "유령이다!" 하였다. 그들은 무서워서 소리를 질렀다.
예수께서 곧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안심하여라.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하셨다. 베드로가 예수께 대답하여 말하기를 "주님, 주님이시면, 나더러 물 위로 걸어서, 주님께로 오라고 명령하십시오" 하니, 예수께서 "오너라" 하셨다.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갔다. 그러나 베드로는 거센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보자, 무서움에 사로잡혀서, 물에 빠져 들어가게 되었다. 그 때에 그는 "주님, 살려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예수께서 곧 손을 내밀어서, 그를 붙잡고 "믿음이 적은 사람아, 왜 의심하였느냐?" 하셨다. 그리고 그들이 함께 배에 오르니, 바람이 그쳤다.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은 그에게 무릎을 꿇어서 경배드리고 "선생님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였다.(마태 14:22~33)】
<성서해석 이야기>
예수께서 바다 위를 걸으셨다는 이야기는 솔직히 황당한 것입니다. 당연히 믿기 어렵지요! 그래서 성서학자들이 이야기하는 이론이 “성경을 문자 그대로 읽지 말고, 신앙고백의 언어로 읽자”는 것이었습니다. 예수에 대해서 그렇게 황당하게까지 표현하게 한 그 무엇, 그 신앙고백의 강렬한 언어, 이성과 논리를 뛰어넘는 몰아적 표현의 뿌리에 있는 그 무엇을 생각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저 역시 “성경을 신앙고백의 언어로 읽자”는 제안에 동의합니다. 그리고 이와 아울러서 저는 “성경을 논리의 언어로 읽지 말고, 상상력의 언어로 읽자”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아주 쉽게 말씀드리면, 성경을 그냥 동화처럼 읽자는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이것저것 따지는 ‘촘촘한 읽지’ 말고, 상상력의 날개를 맘껏 펴서 자유롭고 널널하게 읽자는 것입니다.
중국의 사상적 계보 속에서 말씀드리면, 인간적 법도를 하나하나 따져가면서 생각하는 ‘공자와 맹자’ 식으로 생각하지 말고, 인간적인 법도 따위를 초탈해서 그냥 거대한 하늘과 바다를 유영(遊泳)하는 ‘노자와 장자’ 식으로 생각하자는 제안입니다.
<동화(童話) 식의 성서해석>
예수께서 바다 위를 걸으셨습니다. 좋습니다. 우리는 이를 인정합시다. 동화의 한 장면처럼. 그런데 베드로가 예수처럼 바다위를 걷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예수에게 부탁합니다. "주님, 주님이시면, 나더러 물 위로 걸어서, 주님께로 오라고 명령하십시오." 예수는 당연히 이를 허락합니다. 베드로가 바다 위에 첫발을 내디뎠고, 놀랍게도 베드로 역시 바다위를 걸었습니다. 그러나 잠시 후, 베드로는 바다 속에 빠지고 말았고, 그이를 구해주면서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적은 사람아, 왜 의심하였느냐?"
여기서 중요한 초점은, 왜 예수는 괜찮았는데 베드로는 바다에 빠졌는가 하는 점입니다. 오늘 이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미리 이야기하는 결론>
제가 생각해본 결론은, “진리의 길을 걷는 일은 대단히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아차 하는 순간 깊이를 알 수 없는 무서운 바다속에 빠지는 것, 바로 그런 것입니다.
최근 불가의 수행자들이 호텔방에서 술과 담배를 하면서 놀음을 하는 동영상이 공개 되어서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또 일부 불가 수행자들이 몰래 아내와 자식들을 숨겨놓은 채, 천연덕스럽게 은처승(隱妻僧)으로 살고 있다는 폭로도 있습니다. 물론 이런 삶은 잘못된 것이지만, 그러나 한편으로 충분히 이해는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성이 결코 고상하고 아름답기만 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파괴적 본성을 갖고 있기도 하고, 또 특히 성적인 쾌락본능을 갖고 있습니다. 종교는 계율로서 이를 금지하고 있습니다만, 그것은 그야말로 ‘물 위에 떠 있는 계율’일 뿐입니다. 언제든지 깨트려질 수 있는 위험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좀 다른 차원의 이야기입니다만, 우리네 일상적 삶에서 ‘진보적 가치’ 혹은 ‘생태적 가치’, ‘철학적 가치’, ‘문학적 가치’ ……… 그러니까 진리의 원칙들을 지키면서 사는 것이 굉장히 어렵고 또 위험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생활이 안정된 사람들은 이 고상한 가치들을 일상적 삶에서 어느 정도 지키면서 살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이 많다든가, 안정된 직장을 갖고 있다든가, 잘 돌아가는 사업체를 갖고 있다든가, 아니면 부양할 가족이 없이 그냥 독신으로 산다든가 ……….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경우의 사람들’이 하루하루의 전쟁 같은 삶터에서 ‘진보적 가치’ 혹은 ‘생태적 가치’, ‘철학적 가치’, ‘문학적 가치’ ……… 그러니까 진리의 원칙들을 지키면서 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이 세상 자체가 ‘반(反) 진보적, 반 생태적, 반 문학적, 반 진리적 가치들’로 촘촘히 짜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이 ‘그렇지 못한 경우의 사람들’이 이런 저런 가치와 원칙들을 포기한 채, 그냥 평범한 생활인으로 살아가는 경우가 허다한 것입니다. 이런 포기의 삶은 차라리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분들은 죄는 짓지 않고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불가의 수행자가 술과 담배, 놀음과 성적 쾌락에의 유혹을 이길 수 없어서 승적으로 버리고, 그냥 일반인으로 살아간다면, 이는 아무런 죄도 되지 않는 경우와 같습니다.
<어부 베드로, 제자 베드로>
제자 베드로가 어부 베드로로 돌아간다면, 그가 바다에 빠질 일은 아예 없습니다. 우리가 진보적 가치, 생태적 가치, 철학적 가치, 진리의 가치를 포기한 채 살아간다면, 우리 역시 큰 죄는 짓지 않고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의 수행자임을 결심한 이상 그럴 수는 없지요! 그렇다면 “앞으로 나아갈 수도, 뒤로 물러설 수도 없는” 이 상황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글쎄요. 저라고 뾰족한 수는 없습니다만, 예수의 말씀 속에서 작은 힌트를 찾고자 합니다. 바다에 빠져 있는 베드로를 구해주면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적은 사람아, 왜 의심하였느냐?" 제가 주목하는 구절은 “믿음이 적은 사람아!”입니다.
‘적은 것’, ‘작은 것’이 문제입니다. 또 동일한 맥락에서 말씀드리면, ‘많은 것’ ‘큰 것’이 문제입니다. 적거나 많으면, 작거나 크면 ‘바다에 빠지는 것’입니다. 불가의 수행자들이 타락하는 이유는, 진리에의 열정이 작거나 크기 때문입니다. 또 오늘날 우리 기독교의 성도들이 갖고 있는 중대한 문제는, 그 믿음의 분량이 너무 작거나 크기 때문입니다. 너무 작으면 바다에 발을 디디지도 못하는 것이며, 너무 크면 바다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의 길을 걷는 삶은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중용의 도(道)>
그래서 나온 이야기가 중용(中庸)의 도(道)입니다. 여기서 말씀드리는 중용은,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은 어중띤 중간이 아니고요, 한 마디로 말씀드리면 적절함입니다. 나의 열정, 나의 수준, 나의 한계, 나의 힘, 나의 능력, 나의 개성, 나의 본능 …… 그것에 적절한 정도, 그것이 중용의 도입니다. 그리고 그런 중용의 도라야, 바다에 빠지지 않고 반대로 하늘의 정중앙을 찌를 수 있는 것입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이제 설교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말씀의 제목을 “작지도 않고, 크지도 않는 ‘믿음’”이라고 잡아보았습니다. 오늘 이 설교말씀의 제목을 잘 묵상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축도
하늘의 님이여. 땅의 예수여. 바람의 성령이여!
이제는 우리 생명의 근원 되시는 하느님의 신비로운 사랑과
이 땅에서 진리의 세계로 진입한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와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아름다운 곳으로 인도해 주시는 성령님의 은총이
우리 수도교회 교우들 머리 위에 영원토록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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