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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15:1-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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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부겸 목사 |
참고 : | 수도원교회 http://blog.naver.com/malsoom/159074684 |
2012년 6월 3일 주일설교
성경말씀 : 마태복음 15장 1절~20절
설교제목 : 예수의 <생각의 길>
<영성 시>
순수의 전조(前兆)
- 윌리엄 블레이크
한 알의 모래 속에 세계를 보며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
그대 손바닥 안에 무한을 쥐고
한 순간 속에 영원을 보라.
새장에 갇힌 한 마리 로빈새는
천국을 온통 분토케 하며,
주인집 문 앞에 굶주림으로 쓰러진 개는
한 나라의 멸망을 예고한다.
쫓기는 토끼의 울음 소리는
우리의 머리를 찢는다.
종달새가 날개에 상처를 입으면
아기 천사는 노래를 멈추고.....
모든 늑대와 사자의 울부짖음은
인간의 영혼을 지옥으로부터 건져 올린다.
여기저기를 헤매는 들사슴은
근심으로부터 인간의 영혼을 해방시켜 준다.
학대받는 양은 전쟁을 낳지만,
그러나 그는 백정의 칼을 용서한다-
그렇게 되는 것은 올바른 일이다.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는데, 그것들이 사람을 더럽힌다. 마음에서 악한 생각들이 나오는데, 곧 살인과 간음과 음행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다.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힌다. 그러나 손을 씻지 않고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마태 15:1~20)】
<성경 이야기>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와 그 친구들에게 찾아와 비판하였습니다. “어찌하여 그대들은 식사를 할 때 손을 씻지 않는가? 이 거룩한 정결예식을 왜 거부하는가?” 이에 대한 예수의 답변은 어떤 것이었나요? 예수는 역설적 논리로서 그들의 힐난을 반박하였습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인간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입으로 나오는 것이 인간을 더럽힌다.”
<성경 해석 이야기>
오늘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즉 그의 말씀에 담겨져 있는 직접적 의미를 잘 되새기는 것입니다. 즉 “마음에서 나오는 악한 생각들, 곧 살인과 간음과 음행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 사람을 더럽힌다”는 진실을 직시하면서, 그 악한 생각들을 물리칠 수 있는 도덕적 용기를 다짐하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에서 악한 생각들이 나온다고 했을 때, 그것들에 대하여 성찰해서 회개하는 것, 그래서 그 악한 생각들을 뿌리채 뽑아버리는 것, 그 악한 생각들을 물리치는 것, 더 나아가서 마음속에서 선한 생각들만 나오도록 생각들을 잘 다스리는 일. 그게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말씀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또 하나의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생각하신 그 길을 잘 분해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이야기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생각하신 ‘생각의 길’을 잘 관찰해 보는 것입니다. 오늘 그 이야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예수의 ‘생각의 길’>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였습니다. “당신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장로들이 전하여 준 관습을 어깁니까? 그들은 빵을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그대들은 어찌하여 그대들의 관습 때문에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것이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하시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욕하는 자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대들은 말하기를 누구든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내게서 받으실 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 되었습니다' 하고 말만 하면 제 부모를 공경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렇게 그대들은 관습을 빌미로 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헛되게 하고 있습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의 일행에게 문제 삼은 것은 ‘정결함’이었습니다. “깨끗하지 않다, 더럽다.” 이에 대한 예수의 답변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곧 ‘깨끗하고 더러운 것의 본질, 정결함의 본질’이었습니다. 예수가 생각하는 방식은 바로 그런 식이었습니다. 즉 ‘본질을 묻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차원에서 예수는 본질을 물었습니다.
여러 가지 사례가 있지요. 가장 대표적인 것이 헌금 문제였을 것입니다. 예수는 가난한 과부의 몇푼 되지 않는 헌금을 ‘가장 많이 한 헌금’이라고 높게 평가하셨습니다. 헌금의 본질적 가치를 물으신 것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름다운 성전에 와서 현란하게 기도하는 율법학자들의 기도보다는 어눌해서 뭔 소린지 알아들을 수 없는 ‘죄인의 기도’를 더 높게 평가하셨습니다. 즉 기도의 본질을 물으신 것입니다. ‘용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베드로가 일곱 번 용서하겠다고 자랑삼아 이야기 했을 때,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 번을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용서의 본질은 ‘무한대의 용서’임을 일깨워주셨습니다.
예수의 ‘생각의 길’은 항상 근원적인 차원을 묻는 것이었습니다. 본질을 구하는 것이었고, 핵심을 질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아주 중요한 차원이 있는데, 예수는 항상 역설의 길을 제시하셨다는 점입니다. 보편적인 사람들의 ‘생각의 길’과는 정반대의 길, 역설의 길을 항상 말씀하셨습니다. 왜 일까요? 예수께서 항상 튀고 싶어서 그랬을까요? 아니면 생각이 모가 나서 심보가 고약해서 그랬을까요? 당연히 아니죠. 그렇다면 왜 그랬을까요?
<책 이야기>
최근 『낱말의 우주』(우석영 지음, 궁리출판사)를 잘 읽었는데, 거기 이런 내용이 나오더군요. 【철학자 사르트르는 삶의 진정성에 대조되는 것으로 삶의 상투성을 이야기한다. 그에 따르면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진정성이 아니라 상투성이다. 우리는 스스로에 대해서든, 타인들에 대해서든 바깥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안에 있으려는 경향이 있다. 이는 일종의 중간지대인데, 그 공간은 상투성이 지배하는 영역이다. 그곳은 흔해 빠진 말과 흔해 빠진 생각만이 지배적인 영역이며 동시에 공동체의 만남의 장소이다. 그곳에서는 오직 상투어들만이 오가고 진정한 말들은 물밑대화로서 감추어진다. 이러한 영역이 바로 우리가 사는 삶의 세계라고 사르트르는 말한다.】
그래요. 정말 공감이 되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은 상투성의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즉 진정성의 세계를 거부합니다. 인간은 그 위선의 공간, 거짓의 나라, 껍질의 세계에서 스스로를 속이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다르죠. 하느님의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진리를 구하는 구도자는 그럴 수 없습니다. 진리의 인간은 항상 진정성의 세계를 묻습니다. 상투성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진리의 사람은 ‘역설의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처럼.
<설교를 마치면서>
이제 설교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말씀의 제목을 “예수의 ‘생각의 길’”이라고 잡아보았습니다. 오늘 이 설교말씀의 제목을 깊이 묵상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축도
하늘의 님이여. 땅의 예수여. 바람의 성령이여!
이제는 우리 생명의 근원 되시는 하느님의 신비로운 사랑과
이 땅에서 진리의 세계로 진입한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와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아름다운 곳으로 인도해 주시는 성령님의 은총이
우리 수도교회 교우들 머리 위에 영원토록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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